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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왕전서 1권 (2화)
1장. 적리세가(赤狸世家) (2)
파파파팟!
어둠에 가려져 있는 산자락을 빠르게 내려오는 사람이 있었다.
허름한 옷차림을 한 이는 요 근래 한양으로 판을 벌리기 위해 상경해 있던 사당패의 꼭두쇠인 삼쇠라는 자였다.
‘또 다시 놈들이 나타나다니. 분명 사 년 전 놈들이 분명하다.’
판윤대감의 집에서 판을 끝내고 성 밖으로 나와 사당패가 자리 잡은 산막 근처에서 머물고 있었다.
언제나 그렇듯이 주변을 살펴보던 삼쇠가 암중인들을 발견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사당패가 자리 잡은 산막 인근은 한양성 안이 가장 잘 보이는 곳에 위치한 곳인 까닭이다.
지난날 회한으로 남은 일로 인해 일부러 한양에 올 때마다 자리 잡던 곳이기에 이곳의 지리는 훤한 삼쇠는 암중인들의 수상한 기척을 발견한 후 그들을 쫓았다.
성내를 살피며 무엇인가 의논을 하는 것 같기에 무슨 대화를 나누 지 들으려 했지만 말소리가 잘 들리지 않았다.
조금 더 다가간 것 때문에 암중인의 이목에 잡혀 버렸다. 자신의 실력을 과신한 것이 실수였다.
들키는 순간 도주를 선택했다. 자신의 기척을 잡은 암중인의 실력도 실력이었거니와, 혼자서는 열둘이나 되는 자들 상대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었기 때문이다.
‘내 이번에는 기필코 네놈들을 도륙 낼 것이다.’
삐이익!
산막과 가까워지자 삼쇠는 휘파람을 불었다.
파팟!
사당패가 있는 산막 근처에 다가서자 숲에서 누군가 튀어나오며 삼쇠의 앞을 막아섰다.
“꼭두쇠!! 무슨 일이오?”
산에서부터 부리나케 달려 내려오는 삼쇠를 보며 버나를 다루는 덕팔이 물었다.
“사 년 전에 혈겁을 저지르고 도주했던 놈들이 다시 나타난 것 같다. 아이들을 피신시키고 무기를 찾아 들어라.”
“그 씹어 먹을 개자식들이 다시 나타났다는 말입니까?”
느물거리던 평소의 모습과는 달리 목소리조차 심각해지는 덕팔이었다.
“그렇다. 놈들의 수는 모두 열두 명. 그 정도면 우리만으로도 충분히 그날의 복수를 할 수 있을 것 같으니 준비해라.”
“이런 날이 올 줄이야.”
“어서 알려라. 난 길목을 지키고 있을 테니.”
“예.”
덕팔은 빠르게 산막으로 돌아가 사람들에게 삼쇠에게 들은 말을 전했다.
‘이럴 때 어르신이 계시면 도움이 되련만 아쉽구나. 그렇지만 우리만으로도 충분할 것이다.’
놈들의 비명에 가신 선왕의 죽음에 관여 된 자들이었다. 선왕의 죽음이 세상 누구보다 비통했던 삼쇠의 눈이 불타올랐다.
‘마음을 가라앉히자. 흥분하면 파탄이 날 수 있다.’
길목을 막아선 후 호흡을 정돈하자 심화로 인해 끓어오르던 마음이 천천히 가라앉았다.
‘선왕께옵서 그렇게 비명에 승하하시지만 않았다면 그때 놈들을 도륙 낼 수 있었을 텐데, 이제야 빚을 갚을 수 있겠군.’
지난날의 선왕의 승하로 인해 놈들을 쫓지 못했던 것이 늘 아쉬웠다. 지금 자신들의 무맥을 잇고 있는 아이들이 다 크고 나면 어차피 흉수들을 찾으러 중원으로 들어갈 작정을 했었다.
그런데 제발로 원수들이 찾아와 주다니 고마울 따름이었다.
사사삭!
“전부 준비되었습니다.”
어느새 명을 수행한 덕팔은 사당패의 가열들과 함께 삼쇠에게 다가왔다. 놀이패들 답지 않게 그들의 손에는 모두들 한 자루의 장도가 들려져 있었다.
“아이들은 다 피신시켰나?”
“이미 안전한 곳으로 보냈습니다.”
“그럼 됐군. 내 검을 다오.”
한 자루의 장도가 삼쇠에게 건네졌다.
검집은 평범한 나무로 되어 있었지만 군영에서나 쓸법한 환도를 닮은 장검이었다.
그렇게 검을 잡는 순간 삼쇠의 모습이 일변했다.
“모두들 잘 들어라. 사 년 전, 무엄하게 범궐(犯闕)한 자들이 또다시 이 땅에 나타났다. 이 땅의 무인으로서 지난날의 치욕을 갚을 기회가 온 것이다. 어차피 머지않아 중원으로 들어가야 되는 우리지만 이 땅을 다시 찾아온 놈들을 그냥 둘 수는 없는 일이다. 이 땅을 침범한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지 이번에 뼈저리게 느끼게 해 주어야 할 것이다.”
“알겠습니다.”
장검을 쥔 이들이 조용하지만 결의 찬 어조로 대답했다. 그들도 지난날의 치욕을 잊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이번만으로 놈들에 대한 응징이 끝나는 것이 아니다. 본격적인 응징은 아이들에 대한 무예의 전수가 끝나면 시작할 것이다. 놈들의 본거지를 찾아가 자신들이 한 짓이 얼마나 어리석은 짓이었는지 뼈저리게 알려 주도록 할 것이다. 오늘은 그저 놈들에 대한 전초전일 뿐이다. 그러니 모두들 놈들이 어떤 전력을 가지고 있는지 잘 살펴야 할 것이다.”
“예!”
나직하지만 결의가 담긴 대답이 들려왔다.
장검을 쥔 채 비장한 각오로 다가오는 적들을 기다리는 삼쇠 일행이지만, 누군가가 자신들을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피신을 시켰던 아이들 중 하나가 몰래 따라와 몸을 숨긴 채 일행을 지켜보고 있었던 것이다.
놀라운 것은 삼쇠 일행이 알아주는 무인임에도 불구하고 누구하나 어린 소년의 기척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아저씨들이 어째서 저러고 있는 거지?’
하나같이 날카로운 기세를 흘리는 것이 몇 년을 같이 보냈지만 서린으로서도 처음 보는 모습이었다.
‘이상하단 말이야.’
서린의 기감에 삼쇠 일행의 특별한 점이 걸렸다. 단전에서 시작해 전신으로 번져 나가는 미지의 기운이 느껴진 것이다.
‘꼭두쇠도 그렇고, 아저씨들도 나처럼 아랫배에 따뜻한 기운이 뭉쳐 있는 것을 보면 할아버지에게서 나랑 같은 것을 배운 것 같구나.’
의문도 잠시 멀리서 기척이 느껴졌다.
‘아주 거친 기운을 가진 자들이다. 전에 봤던 늑대만큼이나 거친 기세를 가지고 있는 것을 보면 좋은 사람들은 아닌 것 같은데…….’
이년 전 미친개처럼 침을 질질 흘리며 꼭두쇠에게 달려들다가 몽둥이로 맞아 죽은 늑대만큼 거친 기운을 흘리는 자들임을 느끼며 서린은 더욱 몸을 움츠렸다.
‘아저씨들도 느꼈나 보구나.’
꼭두쇠를 비롯해 가열들의 눈빛이 한곳으로 쏠리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거친 기운을 흘리는 자들의 기척을 느낀 것이 분명했다.
사사삭!
삼쇠를 쫓아온 적인대원들이 일제히 멈추었다.
남루한 옷차림에 검을 한 자루씩 들고 있는 모습은 비적의 무리나 다름없었기에 적리소의 눈에는 의외의 빛이 번득였다.
‘호오, 이것 봐라. 이곳에서 활동하는 산적들인가 보군. 산적이 있다니 이상하기는 하지만 어차피 제거해야 할 자들이다.’
이번 일의 책임지고 있는 적리소는 산적 무리가 도성 근처에 있다는 사실이 의아했지만 어차피 자신들을 본 이상 지워야 한다는 사실을 익히 알고 있었다.
―여기서 활동하는 산적들인가 본데. 고통 없이 목줄을 끊어 줘라. 우리의 행적이 아직까지 알려져서는 곤란하다.
적리소는 자신들의 행적이 들키면 안 되기에 전음으로 삼쇠 일행을 제거할 것을 명령했다.
―예, 주군!
파파팟!
명령이 하달되자 적인대의 혈랑들은 빠르게 늘어서며 삼쇠 일행을 공격할 준비를 했다.
“남의 나라 땅에 들어와 천둥벌거숭이처럼 설치는 놈들에게 매운맛을 보여 주어라!”
“뭣이!”
관어(官語 : 北京語)로 외치는 삼쇠의 목소리에 적리소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일개 산적으로 보이는 자들. 관어에 능통한 것은 둘째 치고 자신들의 목적을 알고 있는 것이 분명했던 것이다.
“너희들은 누구냐?”
“오히려 묻고 싶은 말이다. 네놈들은 누구냐? 어찌하여 중원 놈들이 떼거지로 넘어와 이런 일을 꾸미는 것이냐? 사 년 전에는 어쩔 수 없이 네놈들을 놓쳤다만, 오늘은 빠져나갈 생각을 포기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무엇이? 그럼……!”
적리소는 방금 전 자신의 수하로부터 들은 말이 생각이 났다. 놀라운 무예로 자신을 막아선 자들이 있었다는 말이 생각난 것이다.
“으드득, 네놈들이로군.”
스르르릉!
적리소의 반응에도 아랑곳없이 삼쇠와 남사당패들은 검을 꺼내 들었다.
“너희들의 오만방자함을 오늘 피로 씻어 주마!”
살기 짙은 목소리가 삼쇠의 입에서 흘러나오자, 덕팔을 비롯한 가열들의 전신에서 날 서린 검처럼 예기가 흘렀다.
지금 그들은 조선에서 천하게 여기는 남사당패의 모습이 아니었다.
‘기세가 장난이 아니구나. 섣불리 상대할 자들이 아니다. 지난날에도 이들 때문에 실패한 것 같은데 재수가 없군.’
삼쇠 일행이 내뿜는 기운은 중원의 무인들에게서는 느끼기 힘든 기운이었다.
‘군기라니, 보아하니 군문의 고수들이다.’
적리소는 삼쇠 일행이 뿜어내는 기운을 느끼며 오늘의 일이 쉽지만은 않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은 일종의 군기(軍氣)였다. 혹독한 수련을 거친 듯 거세게 내뿜는 기운에 병영(兵營)에서 볼 수 있는 군진을 갖춘 모습은 이들이 한낱 산적떼가 아니라는 것을 반증하고 있었다.
“우리의 일을 방해했던 놈들이다. 이 기회에 모조리 쓸어버려라. 이곳에서 적리가의 수치를 씻는다.”
파파팟!
적리소가 데리고 온 적인대가 빠르게 사당패를 에워쌌다.
흑의에 복면을 하고 있는 자들이지만 그들이 뿜어내는 기세 또한 삼쇠 일행이 뿜어내는 기세와 비견해 전혀 뒤지지 않았다.
삼쇠 일행은 자신들을 포위한 자들을 향해 한 점 두려움 없이 빠르게 원진을 이루었다.
한결 같이 칼자루를 왼쪽 어깨에 의지하고 바로선 지검대적세(持劒對賊勢)를 취하고 있었다.
섣불리 접근할 수 없는 기세에 적인대는 틈을 살폈고, 삼쇠 일행 또한 엄중한 눈으로 적의 기세를 읽기 위해 노력했다.
팽팽한 살기가 장내를 휘감았다.
쉽사리 삼쇠 일행을 향해 공격을 할 수 없었다.
마치 붉은 이리[血狼]떼들처럼 포위하고는 있지만, 검인(劍刃)을 하늘로 향하고 검첨(劍尖)을 자신들의 머리로 향한 예도(銳刀) 끝에서 뿜어지는 살기가 가공스러웠다.
―주군, 심상치 않은 기세입니다.
―일고 있다. 어쩌면 피를 볼지도 모른다. 신중을 기해서 공격하라.
적리소 또한 수하들의 심정을 누구 못지않게 느끼고 있었다. 삼쇠의 검끝에서 날아오는 예기가 자신을 향해 있었기 때문이었다.
자신을 옭아매는 예기로 인해 적리소는 자신감을 잃고 있었다.
가문에 장담하며 나선 길에 처음부터 강적을 만났다는 것이 불길한 징조로 보였다.
‘검첨에서 나오는 기운이 나를 옭아매고 있다니, 이자들이 누구란 말이냐? 이건 상승의 고수가 아니면 풍길 수 없는 기운이다. 군문에 있는 자들인가 싶었는데 그것도 아니었던가? 으음, 이대로 있다간 당하고 만다. 저들의 기세가 완성되기 전에 쳐야 한다.’
적리소는 검진이 완성되기 전에 치지 않는다면 자신의 생사조차 장담하지 못할지도 모른 생각이 들었다.
‘적리소야! 넌 적리세가의 사람이다. 이미 화경에 이른 내가 겁을 먹다니. 더군다나 적인대의 일급 고수들과 함께하는 일이다.’
적리소는 자신이 데리고 온 적인대를 믿었다.
그리고 자신을 있게 한 가문의 절기를 믿었다.
조선이라는 조그만 변방소국의 이름 모를 자들은 절대 자신들을 감당할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으로 자신감을 키웠다.
“비기를 허락한다, 쳐랏!”
찰칵!
명령과 동시에 적인대의 손에서 무엇인가 튀어나왔다.
적인대가 자랑하는 혈랑조였다.
손목에 감추어져 있다가 내력을 돋우는 순간 튀어나와 적을 살상하는 기병이었다.
상당한 내력을 쌓은 듯 그들의 손에서 튀어나온 혈랑조에서는 은은한 붉은색의 기운이 흐르고 있었다.
삼쇠 일행은 긴장된 눈으로 적인대의 혈랑들을 바라보았다. 그렇게 긴장한 것은 삼쇠 일행만은 아니었다.
숨어서 격전을 지켜보고 있던 서린 또한 마른침을 삼킬 정도로 긴장하고 있었다.
‘살기가 아주 짙어졌다. 붉은 빛을 흘리는 저것이 문제가 아니다.’
서린이 놀란 것은 살기 짙은 인광을 뿌리는 혈랑조가 아니었다.
내부에 흐르는 거친 기운이 더욱 난폭하게 변하며 기질 자체가 마치 야수처럼 변화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꼭두쇠와 아저씨들도 변하고 있구나.’
내심 걱정을 하던 차에 삼쇠 일행의 기운도 변화하고 있어 안심할 수 있었다.
맑고 청순한 기운들이 더욱 깊어지며 마치 깊은 강물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이 야수처럼 거친 기운들에 밀리지 않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