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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왕전서 1



혈왕전서 1권 (1화)
서장


구름이 저무는 햇빛을 받아 붉게 물드는 하늘 위로 어느새 어둠이 몰려들고 있었다.
심금을 자극하는 핏빛 하늘이 어둠으로 채색되는 시각.
사방이 확 트인 정자 안에 굵은 황초가 어둠을 사르기 시작했다.
스으윽!
벼루 위를 달리며 자신의 몸이 갈리는 진묵(眞墨)의 비명 소리와 함께 검은 심연에 파문이 번졌다.
낙조가 시작되면서부터 시작된 파문만이 잔광을 타고 흐를 뿐, 정자 안은 기이한 침묵에 휩싸여 있었다.
정자 안에는 지금 두 명의 사나이가 앉아 있었다.
고동색 장포를 걸친 선 굵은 인상의 장년인이 먹을 갈고, 반듯한 이목구비와 흑단 같은 흑발을 감싼 문사건이 묘한 조화를 이룬 청년이 황금빛 보료에 비스듬히 앉아 있었다.
장년인은 연신 먹을 갈고 있었고, 청년은 은은한 묵향과는 상관없는 듯 서산을 넘어가는 황혼처럼 눈을 지그시 감은 채 오랜만에 찾아온 휴식의 시간을 즐기는 듯 보였다.
스윽!
끄덕!
먹이 갈리는 소리에 맞추어 사내의 고개가 떨구어졌다.
스윽!
끄덕!
주르륵!
갈리는 먹과 함께 박자를 맞추듯 끄덕여지던 고개와 함께 청년의 입가로 침이 흘렀다.
스읍!
잠시간 세상의 번뇌를 잊은 사나이는 입가로 흐른 침을 혀로 닦은 후 먹을 갈고 있는 장년인을 바라봤다.
“졸았군.”
기이하도록 오래된 침묵은 청년의 목소리로 인해 광양(光陽)에 몸을 드러낸 무연(無煙)처럼 삽시간에 흩어졌다.
“주군, 피곤하셨던 모양입니다.”
“으으으으! 요즘 찌뿌둥하기는 해.”
기지개를 켜자 흐리멍덩하던 청년의 눈에 빛이 돌았다. 별을 가득 담은 밤하늘처럼 청년의 눈은 깊고도 깊었다.
“이제 준비가 됐나?”
청년의 시선이 묵향 속을 파고들었다.
방 안에 흐르던 침묵을 단번에 산산조각 낸 청년의 몸에서는 나약한 글방서생의 모습과는 다른 강한 기운이 흐르고 있었다.
“예, 주군!”
청년의 말문이 터지자 옆에서 먹을 갈고 있던 흑의 장년인이 대답을 했다.
장년인은 한 시진 전부터 평생의 심혈을 기울여 자신의 주군을 위해 먹을 갈고 있던 중이었다.
“고생했어. 팔자에 없이 먹이나 갈고 있었으니 말이야.”
“아, 아닙니다.”
보료 위에 앉아 있는 청년과는 달리, 장대한 체구에 왼쪽 눈에 안대를 한 장년인은 일견하기에도 한가하게 먹이나 갈고 있을 만한 인상은 아니었다.
얼굴을 가득 메운 상처와 몸에 흐르는 패도적인 기운을 살피다 보면 산채에서 거치도를 들고 있기 딱 알맞은 인상이지 이런 분위기와 전혀 맞지가 앉았다.
“다리 저리면 코에 침 발라.”
무릎을 꿇고 있었던 터라 연신 엉덩이를 들썩거리는 장년인을 향해 청년이 말했다.
“아, 아닙니다.”
“아니긴, 어서 다리나 펴.”
“예, 주군.”
청년의 재촉에 장년인은 다리를 펴며 피를 순환시켰다.
“저량, 자네와 내가 인연을 처음 만난 것이 벌써 십오 년 전이던가?”
“예, 주군. 오늘도 정확히 십오 년하고도 두 달 초닷새가 지났습니다.”
“후후, 그러고 보니 자네와 난 참 기이한 인연이야?”
청년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그렇기는 합니다. 참으로 기이한 인연이 아니라고 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저량의 대답과 함께 청년은 지그시 눈을 감았다. 자신과의 인연을 회상하는 것 같아 저량은 고개를 갸우뚱 거렸다.
‘오늘은 다른 날과 달리 이상하시군. 무슨 일이 있으신 건가?’
뜬금없는 소리에 저량(섹亮)은 침묵을 유지한 채 자신의 주군을 쳐다보았다.
‘확실히 이상해.’
저량을 고개를 갸웃 거릴 수밖에 없었다.
냉혈의 승부사 또는 빙염의 마왕이라 불리는 이가 자신의 주군이다. 지금까지 자신의 주군이 이렇게까지 감상적이었던 것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기에 의문이 아닐 수 없었다.
‘주군께서 저런 모습을 보이시다니, 거참.’
눈을 감고 회상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자신과의 인연을 언급한 것을 보면 어린 시절부터가 분명했다.
냉혈의 승부사라 불리는 자신의 주군도 사람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렇긴 하지. 잘못하면 곧장 황천행이 될 뻔했었으니까.’
저량은 자신과 주군인 사나이와의 인연을 생각하며 잠시 상념에 잠겼다. 자신이 생각해 봐도 참으로 기이한 인연으로 만난 주종 간이 아닐 수 없었다.
“후후후, 내가 별 이야기를 다했군. 그래 그간 글은 많이 늘었나?”
눈을 뜬 청년이 상념을 털어 버리려는 듯 조용히 미소를 지으며 저량이 그간에 이룬 성취를 물었다.
“아, 아직은 그냥 그릴 뿐입니다. 주군.”
청년의 분위기가 다르게 변하자 저량은 멋쩍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을 했다.
저량의 목소리는 평범했던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조금 떨리고 있었다. 이제 자신의 주군이 세상 사람들이 알고 있는 모습으로 돌아온 것을 알아차렸기 때문이었다.
“아니야. 그 정도면 서법은 저량에게 맞게 완성을 보았다고 할 수 있어. 살기가 짙기는 하지만 그것도 언젠가는 갈무리될 터, 항시 마음을 가다듬고 정진하도록 해.”
‘주, 주군!’
처음 들어보는 주군의 칭찬에 저량은 몸을 떨었다.
그에게 있어 그것은 죽은 아버지가 살아 돌아오는 것보다 더 기쁜 일이었다.
“예, 주군. 명심하겠습니다. 그러면 이제 받아 적으면 되겠습니까?”
칭찬에 몸 둘 바를 모르던 저량이 청년을 향해 조용히 의중을 물었다.
“그래, 이제 시작하지.”
“예, 주군.”
저량이 자세를 바로하고 붓을 들자 사나이의 입에서 물 흐르듯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그것은 사나이가 지나온 과거사였다.
“내 나이 다섯이 되던 해인가? 난 친형을 떠나보내야 했다. 아무런 이유도 알지 못하고 친형을 떠나보낸 나는 이곳 대륙으로 올 마음을 품었지. 처음 중원으로 오기 전 나는 형의 행방은 알 수가 없었다. 그저 죽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만 알 수 있었을 뿐.”
청년의 말과 함께 하얀 화선지에 검은색의 먹물이 거친 야생마처럼 달리고 있었다. 생긴 인상과는 다르게 저량은 매우 빠르게 글을 써 나가고 있었다.
저량이 말한 것과 같이 그려 내는 그의 서체는 결코 흉내만 내는 서체가 아니었다. 상당히 패도적인 기운을 뿜어내며 나름대로 서법을 완성한 듯 빠르고 조용히 이어지고 있었다.
“그러시면?”
청년이 잠시 멈추자 저량이 추임새를 넣었다.
“내가 대륙으로 온 것은 혹시나 형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원흉들이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형을 죽인 자들에 대한 복수를 하기 위해서 중원에 와야만 했던 것이지. 그것 때문에 난 여기까지 온 것이다.”
“으음.”
‘드디어! 비밀 속에 가려진 주군의 비화를 듣게 되는구나.’
저량은 가슴이 경동했다.
아무도 몰랐던 주군의 비화를 자신이 기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서체가 흔들린다.”
“죄송합니다.”
저량이 심호흡을 하며 마음을 가다듬었다.
“내가 그 사실을 처음 안 때는 약관이 채 되기도 전이었다. 그때의 나는 참으로 허술하기 그지없었지. 그래도 지금 생각하면 좋은 때였기도 했다.”
그동안 그 누구도 몰랐던 청년의 지나온 과거가 화선지에 나타나고 있었다.
조용히 글을 써 내려가고 있으면서도 그 누구보다 먼저 알게 된 사실들은 저량을 흥분케 하기 충분했다. 하나, 조금 전처럼 붓이 흔들리는 일은 없었다.
‘크크!! 주군의 어린 시절을 들을 수 있다니 이건 행운이다. 밖에서 싸우고 있는 놈들도 이걸 알면 아마 환장을 할 거다. 남으라고 하실 때는 진짜 울화가 치밀었는데, 오히려 전회위복이 될 줄이야.’
대륙을 두 발로 디디고 선 위대한 사나이의 생애를 자신이 기록하고 있다는 사실이 저량을 흥분하게 만들고 있었다.
‘자식들! 그까짓 싸움보다는 이것이 백 배 났다.’
자신과 티격태격 하던 놈들이 결전에 임하러 나가고 자신만 남았을 때는 정말 미칠 것 같았다.
먹을 갈라고 했을 때는 더욱 실성하는 줄 알았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실력을 주군이 인정하지 않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한 시진을 먹을 갈면서 마음을 가라앉혀야 했다.
무엇인가 할 일이 있어 전쟁이 아닌 이곳 서방(書房)에 앉도록 한 것은 바로 자신의 주군이다.
평온한 마음으로 준비해 주기를 바라는 뜻을 읽었기에 참으며 먹을 갈았는데 뜻밖에도 주군의 신상에 대한 일을 기록하게 되다니 행운이 아닐 수 없었다.
어디 출신이며 어떤 무예를 익히고 있는지 자신을 포함한 염천(鹽泉)의 사인방 또한 모르고 있었던 차에 오직 혼자서만 알 수 있게 된 것이다.
모든 것이 장막에 가린 존재인 주군의 입에서 나오는 말을 받아 적고 있는 저량은 떨리는 손을 심호흡으로 가라앉히기를 수없이 반복해야 했다.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놀라운 사실들이 주군의 입에서 흘러나왔기 때문이다.
‘젠장! 왜 이렇게 떨리냐?’
혈왕 천서린(天瑞潾)이라 불리는 주군의 일대기이기도 하지만 들으면 들을수록 놀라운 이야기였기에 글을 써 가는 내내 저량은 마음을 가라앉히는 것에 더욱 신경을 써야 했다.



1장. 적리세가(赤狸世家) (1)


한양성이 바라다 보이는 어둠이 묻힌 산자락에서 복면을 한 채 누군가에게 부복한 자들이 있었다. 검붉은 야행복을 입은 자들의 입에서는 조선 땅에서는 들을 수 없는 말들이 흘러나왔다.
“저곳인가?”
“예, 주군!”
“저런 허접스런 곳에서 적인대(狄人隊)를 열둘을 잃다니, 보기 보다는 제법이라는 말이지?”
주군이라 불리는 자의 입에서 의문이 흘러나왔다.
“만만한 자들이 아닙니다, 주군. 아무리 변방의 소국이라고 하나 나라를 이루고 있는 자들입니다. 또한, 가진 바 무예는 고대에 중원을 호령하던 것으로부터 유래된 것들입니다. 지금은 그 맥이 거의 끊어졌다고는 하나, 아직도 숨은 자들 중에는 고대의 무맥을 이은 자들이 있을 겁니다. 전에 적인대를 막은 자들 또한 그러한 무맥을 일부나마 이은 것이 분명합니다. 단 두 명에 의해 적인대 열둘이 당했으니 말입니다.”
“그만! 다 변명에 지나지 않는다. 내응이 있었음에도 실패했다는 것은 변명의 여지가 없는 것이다. 아무리 그런 강자가 있었더라도 말이다. 너희들은 분명 임무에 실패한 것이다. 그리고 지금의 적인대는 그때와는 다르다. 고르고 골라 다시 적인대에 든 자들이다. 이번 임무에는 실패란 없을 것이다.”
실패를 염려하는 것 같은 수하의 말에 주군이라는 복면인이 노성을 터트리며 말을 이었다.
“죄송합니다, 주군!”
주군의 질책에 복면인은 머리를 조아렸다.
“그건 그렇고, 아직도 그에게서는 연락이 없나?”
“지난날의 실패 때문인지 아직 몸을 사리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으음, 약은 놈이라 쉽게 움직이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역시였군. 그럼 우리만으로 일을 진행시켜야 한다는 소리인데. 조금 어려울 수도 있겠어. 몇 년 전의 일로 타초경사의 우를 범하지만 않았다면 일이 쉬었을 텐데…….”
“그렇습니다. 주군께서도 살피셨다시피 군사의 수도 늘었고, 요소요소에 잠복한 자들의 무예 또한 무시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닙니다. 그자의 내응이 없는 한 아무래도 이대로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조용히 잠입해 일을 마치기가 불가능할 테니 말입니다.”
“그럼 이대로 돌아가야 한다는 말이냐? 그 물건은 무슨 일이 있어도 얻어야 하는 것이다. 우리 적리가에서 행한 일 중 실패한 것은 저번 한 번뿐이었다. 그리고 내가 직접 나선 이상, 실패는 없다. 알아들었나?”
“알겠습니다. 주군!”
자신이 모시는 사람이 분노하면 어떤 결과가 벌어지는지 알기에 조용히 다음 말을 기다렸다.
“그럼 일단 그자에게 연락을 취해라. 왕실에 있는 물건의 행방만이라도 전하라고 말이다. 그렇지 않으면 목숨마저 보장받지 못할 것이라는 말도 함께 전하고. 이번에는 무슨 일이 있어도 성공해야 한다.”
“예, 주군!”
“누구냐?”
피슛!
우두머리로 보이는 자가 소리치며 무엇인가를 날렸다. 그것은 그의 품에 감추어져 있던 비검이었다.
자신들을 감시하는 기척을 느꼈기에 지체 없이 숨어 있는 자를 향해 비검을 날린 것이었다.
퍽!
비검이 꽂힌 것은 나뭇등걸이었다.
감시자는 어느새 자리를 피하고 엉뚱하게도 나무가 비검을 대신 맞은 것이다.
“쥐새끼 같은 놈이로군. 그사이 자리를 피하다니. 아직은 우리의 정체가 밝혀져서는 안 된다. 찾아라, 찾는 즉시 놈의 숨통을 끊어라!”
다급한 목소리가 울려 퍼지자 그의 수하들이 숨어 있던 자를 추적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