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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호전기 1권(24화)
제10장 청룡소집령(靑龍召集令)(4)
“어라? 형구랑 노칠이는 표정이 별로 안 좋네.”
장오가 다시 눈치 없이 말을 걸었다. 진호가 고개를 홱 돌려 둘을 쳐다보았다. 황노칠과 막형구는 급하게 안색을 바꾸며 손사래를 쳤다.
“아이고, 장 조장님! 무슨 그런 말씀을! 우리가 호 형님과 함께 가게 되어 얼마나 좋아하고 있는데요!”
두 사람은 목이 터져라 이구동성으로 외쳤다.
“하하하!”
갑자기 좌중이 웃음바다로 변하였다. 황노칠과 막형구 둘은 벌게진 얼굴로 머리만 벅벅 긁을 뿐이었다.
“저, 추 대주님! 저도 운호조에 들면 안 될까요?”
한쪽에서 조용히 술을 먹고 있던 여문철이 갑자기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엉? 자네는…… 아, 조금 전에! 그런데 자네도 우리 풍운대 위사였나?”
추진양이 약간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예! 황기 조장님이 맡고 있는 제팔조 조원입니다!”
여문철이 씩씩하게 대답을 하였다.
“그런가? 근데 왜 취임식 때 못 봤지?”
추진양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 그때 저랑 악수도 하셨는데요!”
“흠흠, 그런가? 기억을 못해서 미안하이!”
“흑! 제가 원래 존재감이 없어요!”
제11장 형제의 강[兄弟之江](1)
어둠이 짙게 내린 소하촌의 한가운데 자리한 소하무관의 안채 마당에서 갈래 머리를 길게 땋은 하얀 무복을 입은 여자 아이 하나가 고사리 같은 손을 흔들며 태극권을 수련하고 있었다. 여자 아이는 바로 소하무관의 관주인 유운일검 진성의 금지옥엽인 진소희였다. 태극권의 동작이 약간은 어설퍼 보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린 소희는 이마에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힐 정도로 열심히 동작을 연습하며 초식을 외치고 있었다.
“옥녀천사(玉女穿梭), 순란주(順鸞?), 과편포(㎩鞭?), 작지룡(雀地龍)…….”
소희가 갑자기 동작을 멈추었다. 밖에서 장오와 진호가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며 들어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갑자기 소희가 날쌔게 몸을 날려 야트막한 담장의 가운데에 세워진 월동문 옆의 문설주에 급히 몸을 숨겼다.
‘하나, 둘, 셋!’
소희는 진호와 장오를 놀래 주려고 속으로 숫자를 세고는 얼굴을 홱 내밀었다.
“왁!”
“엄마얏!”
갑자기 괴성과 함께 장오의 커다란 얼굴이 다가오자 소희가 깜작 놀라 비명을 질렀다.
“헤, 요놈! 놀랬지?”
소희의 눈앞에 장오가 커다란 입을 한껏 벌리고 웃고 서 있었다.
“으앙!”
장오의 얼굴을 본 소희가 울음을 터뜨렸다.
“곰탱이! 왜 또 애를 울리고 그러냐? 소희야, 울지 마라. 이거 봐라! 숙부가 너 주려고 당과 사 왔다!”
진호가 치기 어린 표정으로 장오에게 면박을 주고는 들고 있던 당과를 내밀며 진소희를 달랬다.
“당과?”
“그래. 자, 착하지? 울면 안 준다.”
“응! 헤…… 호 숙부가 최고야!”
소희는 진호가 내민 당과를 받아 들고선 언제 울었냐는 듯 실실거리며 방긋 웃고 있었다.
“흠, 맛있겠다. 나도 당과 좋아하는데. 소희야, 나 하나만 줘라!”
장오가 그 큰 얼굴에 정말 먹고 싶다는 표정을 가득 담고서 두 손을 내밀며 칭얼대고 있었다.
“흥! 곰탱이, 저리 갓! 미워!”
소희가 당과를 쥔 손을 가슴으로 확 당긴 채 장오를 째려보곤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왔느냐?”
진성이 안채의 문을 열고 나오며 진호와 장오를 맞이하였다.
“응.”
진호가 가볍게 손을 들어 보였다.
“아버지, 호 숙부가 당과 사 줬다!”
“그랬니? 숙부한테 잘 먹겠습니다 하고 인사드리고 이제 그만 들어가서 자거라.”
진성이 다정스럽게 말을 건네며 소희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싫어. 나 안 잘 거야! 아직 다 못했단 말이야!”
소희가 고개를 도리도리 흔들고 있었다.
“뭘?”
장오가 멀뚱하게 소희를 쳐다보며 물었다.
“흥! 곰탱이는 몰라도 돼!”
“소희야! 장 숙부한테 그럼 못써!”
진성이 여전히 눈가에 웃음을 띤 채 소희를 가볍게 나무랐다.
“치! 곰탱이는 만날 만날 소희만 놀린단 말이야!”
소희가 입을 삐죽 내밀고 있었다.
“어허, 그만 하고 가서 자거라!”
“잉, 나 아직 삼십오 식밖에 못했는데…….”
“내일 마저 하고 그만 장 숙부랑 가서 자거라. 오야! 소희 좀 데려다 주거라. 호와 이야기를 좀 하여야겠구나.”
진성이 장오를 돌아보며 말을 하였다.
“헤, 꼬마 아가씨, 그만 가실까요? 소인이 모시겠습니다!”
장오가 게슴츠레 눈을 뜨며 입가에 한가득 웃음을 머금고 허리를 굽실거리며 소희에게 손을 내밀었다.
“힝! 곰탱이 싫어! 메롱!”
소희가 홱 몸을 돌려 안채로 뛰어가다가 뒤를 돌아보며 혀를 내밀어 보였다.
“저 녀석은 나보다 널 더 닮았나 보다. 여자 아이가 노는 것보다 무공 수련을 더 좋아하니…….”
소희의 모습을 보고 있던 진성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진호를 보고 말을 하였다.
“원래 우리 집안이 좀 문제가 있는 핏줄이겠지.”
진호가 빙긋이 웃음을 머금고 뛰어가는 소희의 뒷모습을 보며 대답을 하였다.
“호야, 간만에 강변에 나가서 바람 좀 쐴까?”
“그럴까…….”
진호와 진성은 월동문 밖의 옛 마당, 지금은 소하무관의 대연무장이 된 마당을 가로질러 강변으로 걸어갔다.
소하무관의 우측 담을 돌아 송림을 따라 난 길을 백 장 정도 걸어 나오면 소하강이 소하촌을 끼고돌면서 만들어 낸 드넓게 펼쳐진 하얀 모래사장을 만나게 된다. 진호와 진성이 백사장에 나오니 백 명 남짓한 소하무관의 제자들이 여기저기 흩어져서 저녁 수련을 마무리하고 있었다. 백사장에서 수련을 하고 있던 소하무관의 제자들이 진성을 알아보고는 급히 모여들어 예를 갖추었다.
“관주님을 뵙습니다!”
“그래, 다들 수고했다. 이제 그만 돌아가서 조식을 취하거라!”
진성이 인자한 표정으로 제자들을 돌아보며 지시를 하였다.
“네!”
예를 올린 후 제자들이 소하무관으로 물러가는 모습을 한참 동안 보고 있던 진호와 진성은 천천히 소하강 쪽으로 걸어갔다.
“관원들이 꽤 많네?”
진호가 무관 제자들의 뒷모습을 보면서 물었다.
“그래, 숙관제자만 백 명이 넘으니 정말 많지. 집에서 수련을 다니는 제자들까지 합하면 거의 사백 명이 되는구나.”
진성이 미소를 지으며 진호에게 답하였다.
“호! 엄청나네.”
진호가 감탄조로 말을 하였다.
“그래, 이게 다 호야 네 덕분이지 않겠냐. 그래, 맹에서의 생활은 지낼 만하냐?”
진성이 진호를 쳐다보며 물었다.
“뭐…… 그렇지.”
“안 그래도 일전에 제갈 대협께서 다녀가셨다. 네 이야기를 많이 하더구나.”
“그래? 뭐 이야기할 거나 있나?”
“강호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는 말씀을 하시더구나. 그 와중에 네 활약이 대단하다는 말씀도 하시더구나.”
“활약은 무슨…….”
“호야! 나는 말이다, 지금의 평화가 너무 좋다. 말썽꾸러기 딸아이의 천진난만한 웃음소리가 좋고, 제자 아이들의 구슬땀 속에 맺힌 초롱초롱한 눈동자가 좋다. 나의 바람은 그저 우리 가족이 저 소하강처럼 평온하게 살았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말을 하는 진성의 눈은 잔잔하게 흘러가는 소하강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래…….”
진호는 소하강 너머 귀도가 있던 자리를 보고 있었다.
“그러나 세상은 원래 모난 돌이 정을 맞는 법이고, 튀어나온 가지가 모진 풍상을 겪게 되는 법이다.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나는 네가 지금까지 보여 준 것이 너의 본래 능력의 반도 되지 않음을 안다. 그럼에도 걱정이 앞선다. 네가 너무 두드러질까 봐, 그래서…….”
“아버지처럼 될까 봐?”
진호가 고개를 숙이고는 나직이 뇌까렸다.
“호야……!”
진성이 놀라며 진호를 쳐다보았다.
“나는 아버지가 아니야. 그렇게 살지도 않을 거고.”
“아버지는…….”
“너무 순진하셨지. 무인이 칼을 맞댄 상대를 믿는다는 거, 그거 우스운 이야기야.”
진호는 고개를 들어 다시 강 저 너머를 보고 있었다.
“그래, 그 말도 맞겠지.”
진성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칼을 맞댄 이상 적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지.”
“호야! 솔직히 나도 그래. 그래서 나는 무림이라는 곳이 두려워. 언제 어느 순간에 지금의 평온함을 깨어 버릴지도 모르는 그 강호가 지니는 흉포한 잔인함이…….”
백사장에 난 발자국을 발로 쓸면서 진성이 독백처럼 중얼거렸다.
“형! ‘흐르는 강물처럼’이라는 말 기억해?”
“그래, 어릴 때 네가 늘 버릇처럼 하던 말이지.”
“흐르는 강물은 결코 앞으로 나아가기를 두려워하지 않아. 뒤를 돌아보지도 않고, 온갖 오물들이 다 흘러들어도 거부하지 않고, 폭포의 낙수가 될 수도 있고 거대한 단애가 가로막을 수도 있지만 멈추지 않고 앞으로 앞으로 내달려 갈 뿐이야. 대해를 만나기 위해서…….”
“…….”
“흐르지 않고 고여 있는 물은 보기엔 한없이 평온해 보일지 몰라도 그 밑엔 썩어 들어가고 있지. 그러나 흐르는 물은 그것이 전당강의 격류가 되었든, 저 소하강처럼 잔잔한 흐름이 되었든 간에 결코 밑에서 썩어 들어가는 법은 없지.”
“흐르는 강물처럼…….”
진성이 다시 한 번 뇌까려 보았다.
“사람들은 서호를 바라보며 그저 평온함과 그 풍광의 아름다움만을 이야기하지. 그 속에 살아가는 물고기들의 먹고 먹히는 치열한 삶을 생각하지는 않아. 어느 세상에나, 누구의 삶에나 치열함이란 존재하는 법이지. 나는 치열함을 두려워하지 않아. 아니, 즐기고 싶어, 그 치열함을. 그 치열함 속에 부스러져 한낱 강물에 떠도는 부유물이 되어 흩어지더라도……. 어쩌면 그것이 무림에서 칼을 든 자의 운명일지도 모르고…….”
말을 하는 진호의 눈이 더욱 깊어졌다.
“그래. 칼을 든 자가 호미를 쥔 농부의 안온함을 바란다면 과한 욕심일 수도 있겠지. 그러나……. 그래, 그만 하자.”
진성은 진호를 쳐다보며 말을 하려다가 관두었다. 이미 동생의 생각은 확고하리라 싶었던 것이다.
“무당산엔 같이 갈 거야?”
진호 역시 더 이상의 논쟁이 무의미함을 알고 화제를 돌려 물었다.
“아니, 나는 안 가려고 한다. 사부님을 생각하면 마땅히 가 뵈어야 하나, 아직은 강호를, 무림을 받아들일 자신이 없구나.”
말을 하는 진성의 말투엔 약간의 탄식이 섞여 있었다.
“그래…….”
진호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를 대신해 사부님께 죄송하다는 말씀을 전해 다오. 사부님께서도 너를 많이 보고 싶어 하신다더구나. 그리고 운혜 사조님도 네가 찾아오면 무척 좋아하실 거다. 워낙에 사제인 운허 사조를 아끼셨던 분이니만큼.”
진성이 마음을 추스르고 담담하게 말을 하였다.
“도사 할배…….”
진호가 운허도장에 대한 기억을 떠올리며 혼자 중얼거렸다.
“무량전에 운허 사조의 위패를 모셨다고 하더구나. 꼭 찾아 뵙거라.”
“봐야지. 그리고 보여 드릴 것도 있고…….”
“뭘 보여 준다고?”
진성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물었다.
“도사 할배가 아직 내가 못 미더운 모양이네. 좀 더 수련하고 오라고 하시는군.”
“응? 그게 무슨 소리냐?”
진성의 물음에 진호는 말없이 송림 쪽을 쳐다보았다. 잠시 후 송림 쪽에서 일단의 흑의인 무리들이 나타났다. 삼십 명가량 되는 복면을 한 흑의인들은 진호 형제 앞에 이르자 두 명의 장한이 앞으로 나섰다.
“풍운대 위사 진호 맞나?”
앞으로 나선 흑의인들 중 우측에 선 자가 탁한 목소리로 물었다.
“내가 진호인 건 사실인데 초면에 버릇이 없군.”
진호가 한 발 나서며 냉랭하게 대꾸하였다.
“흠, 형제인가? 닮았군. 황천길을 형제가 같이 가는 것도 좋겠지.”
말을 하는 흑의인이 웃음을 짓는지 복면 위로 드러난 째진 눈가에 주름이 접히고 있었다.
“호야, 무슨 일이냐?”
“글쎄…….”
“혹시 무관에도?”
“음, 조용한 걸 보니 이리로 바로 온 것 같은데…….”
“소희!”
“무관에는 장오가 있으니 쉽게 어떻게 되진 않을 거야. 곰탱이가 보기보다 한 수가 있거든.”
“그래도…….”
“아무래도 속전속결이 좋겠지. 형, 사람 죽여 본 적 있어?”
“그게…… 없지.”
“그래? 그럼 내 등에 붙어서 뒤쪽을 방어하기만 해!”
“흐흐흐, 형제간에 마지막으로 오붓한 대화를 나누시나?”
말이 없는 진호 형제를 쳐다보며 좌측의 흑의인이 말을 뱉었다.
“문답무용(問答無用)!”
외침과 함께 진호의 애도가 좌측 허리에서 쏘아진 화살처럼 빠르게 튕겨 나와 반원을 그렸다. 왼손의 엄지가 도를 도갑에서 튕겨 내고,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르게 날아가는 도를 허공에서 오른손이 낚아채 좌에서 우로 반원을 그린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