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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호전기 1권(19화)
제9장 남매지정(男妹之情)(2)
한동안 두 사람은 말이 없었다.
“제가 이야기하겠습니다.”
남궁전이 한참을 생각하더니 입을 열었다. 그도 당묘진으로부터 나름 들은 바가 있었다. 남궁전은 결국 자신이 직접 두 눈으로 본 진호의 머리와 무위를 믿기로 하였다.
“끙! 그래, 나보단 네가 낫겠지.”
세상에 꺼릴 게 없는 궁연이었지만 유난히 진호는 껄끄러웠다. 세상엔 정말로 천적이란 게 존재하는 법인 모양이었다.
남궁전이 진호를 찾았을 때 진호는 객사에 없었다. 순찰대원에게 물어보니 선착장 쪽으로 갔다고 하여 태호변으로 나가 보았다. 남궁전이 진호가 있는 태호변에 다다르니 마침 진호가 물에서 나오고 있었다. 물기에 젖은 진호의 상체는 군살 하나 없이 미세한 근육들이 잘 발달되어 있고 그 위로 지렁이처럼 구불구불한 수많은 검상들이 새겨져 있었다. 진호의 그 끝을 알 수 없는 무위가 그냥 조석에 만들어진 것이 아님을 보여 주고 있는 것 같았다. 진호가 물속에서 나와 옷을 걸치고는 남궁전 쪽으로 다가오며 가볍게 목례를 하였다.
“여기서 뭐 하는 건가? 이 쌀쌀한 날씨에 수욕이라도 하는가?”
남궁전이 입에 가벼운 미소를 띠며 말을 건넸다.
“예. 뭐, 볕이 좋아서 말입니다.”
“원 사람도……. 그러지 말고 좀 걷지.”
말을 하고 난 남궁전은 앞장서서 선착장 쪽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놈들의 소굴이 밝혀졌네.”
“그렇습니까?”
“태호 가운데 있는 화소도라는 작은 섬이라는군.”
“역시 섬이었군요. 용두선을 봤을 때부터 그런 생각이 들더니…….”
“그래서 말이야, 일단 사실 확인을 위해서 당가의 독암대가 가기로 했네.”
남궁전이 선착장에서 떠날 준비를 하고 있는 흑의인들 쪽을 보면서 말을 했다.
“그들이군요.”
진호도 남궁전의 시선을 따라 선착장에서 움직이고 있는 흑의인들을 보았다. 그들 가운데 당묘화도 보였다.
“그렇다네. 궁 숙부께선 저들만 보내기가 꺼림칙한지 자네가 같이 가 줬으면 하시네.”
“그저 사실 확인만이 목적이라면 저리 많은 인원은 필요 없을 것 같은데…… 그냥 저 혼자 갔다 오겠습니다.”
진호가 약간은 귀찮은 듯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음. 그게, 자네 말대로 자네 혼자 갔다 오는 게 더 간단하겠지. 그런데 당가에서 뭔가 확인해야 할 게 있나 보네.”
남궁전이 조심스럽게 말을 하였다.
“그럼 역시…….”
진호도 당가의 독암대라고 하는 무리가 왔을 때부터 짐작은 하고 있었다. 천하의 독은 만독세가 당가로 대변된다. 그런 당가에서 자신도 알아낸 음양고의 존재를 몰랐다는 것부터 말이 안 되었다. 다시 말해 당가에서 알고도 모른 체했다는 것이다. 그 말은 음양고가 당가와 관련이 있다는 것이었다. 독암대가 온 첫 번째 이유는 음양고의 흔적을 찾아 없애는 것일 것이다. 그리고 그중에는 아마도 자신 역시 포함되어 있을 것 같았다.
“아마도 하나는 자네가 생각한 그것이겠지.”
남궁전은 진호가 이미 대부분의 상황을 짐작하고 있으리라 생각하고 있었다.
“…….”
진호는 묵묵부답 말이 없었다.
“나머지 하나는, 내가 듣기로 그 물건이 실종된 묘화의 남동생 묘정이와 깊은 관련이 있는 모양이더군. 어제 이야기한 적이 있을 걸세. 저 아이 묘화는 유달리 실종된 묘정이를 아꼈지. 아마도 동생의 흔적을 확인하고 싶은 모양이네.”
“남매지정이라…….”
진호가 나직이 중얼거렸다.
“사실 내 입으로 자네에게 이런 말을 한다는 것이 참으로 부끄럽네만, 어쩌면 자네이기 때문에 가능할 수도 있는 일이기 때문에 부탁을 하는 걸세.”
말을 하고 난 남궁전은 차마 진호를 볼 수 없어서 멀리 보이는 태호의 수평선으로 고개를 돌렸다. 자신이 백호가 아니라면 자신이 따라가면 될 일이었다. 그러나 자신이 갈 수는 없었다. 자신이 갔을 경우엔 차후에 당가의 결백이 입증되기 힘들 뿐 아니라 백호의 입장이 더 어려워질 가능성이 높았다. 지금으로썬 진호에겐 위험할지 몰라도 진호가 가는 것이 최선의 선택이었다. 엄밀히 말하면, 진호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진호는 현무의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명령입니까, 부탁입니까?”
뒤에서 진호가 뜻밖의 물음을 던졌다.
“…….”
“부탁이라면 들어줄 수가 없고, 명령이라면 들어야 하는데…….”
말을 하는 진호의 입가엔 치기가 어려 있었다.
“그, 그럼 명령이네! 진 위사! 독암대와 같이 화소도로 가서 살수들의 존재를 확인하게!”
“존명!”
진호가 읍을 하고 돌아섰다.
“저들이 실수를 하더라도 한 번은 용서해 주게!”
남궁전이 다급하게 진호를 향해 전음을 날렸다.
진호는 말없이 그저 손을 들어 흔들 뿐이었다.
선착장을 향해 걸어가고 있는 진호의 등을 바라보는 남궁전은 심사가 복잡해졌다. 당묘화와 독암대가 실수를 하지 않기를 바랄 뿐이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가 겪은 진호는 결코 냉혹하지만은 않은 사내였다. 살수들과 전투를 할 때에는 냉혹하다 못해 잔혹하기까지 한 차가운 전사였지만, 권마와의 대결과 같이 비무의 성격을 가진 싸움에서는 전형적인 무인이었다. 그나마 안심이 되는 것은 진호의 무위를 몸소 보고 겪은 당묘화가 섣부른 판단을 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점이었다.
한참을 진호의 등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던 남궁전의 입가에 묘한 미소가 어렸다. 진호가 마지막에 보여 주었던 치기 어린 미소가 생각난 탓이었다. 어쩌면 두 사람은 생각보다 더 많이 가까워진 모양이었다.
***
“같이 가지.”
화소도로 향하기 위해 채비를 점검하고 막 선실 밖으로 나오던 당묘화는 뒤에서 들려오는 중저음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얼어붙은 듯이 멈추어 서고 말았다. 분명히 그의 목소리였다. 여기서는 결코 들어서는 안 될 목소리였다. 당묘화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가 특유의 무표정한 얼굴로 서 있었다. 무언가 말을 해야 하는데 입이 열리지 않았다. 그가 멍하니 선 당묘화의 곁을 지나 배의 앞 갑판 쪽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그는 진호였다. 앞 갑판으로 걸어가고 있는 진호의 넓은 등을 당묘화는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살수들의 본거지가 있다고 알려진 화소도를 향해 나가고 있는 동안 용두선에서는 묘한 침묵의 시간이 이어지고 있었다. 묘한 침묵의 분위기는 뱃머리에 서서 수평선 저 너머를 바라보고 있는 진호와 그런 그의 등을 복잡한 눈빛으로 지켜보고 있는 당묘화, 그리고 두 사람의 모습을 말없이 지켜보고 서 있는 당문기에 의해 만들어지고 있었다.
“저기로군.”
침묵을 깨며 진호가 나직이 중얼거렸다. 진호의 중얼거림을 들은 당묘화와 당문기는 동시에 고개를 들어 전방을 쳐다보았다. 그들의 눈엔 그저 수평선 너머로 까만 점이 보일 듯 말 듯하였다.
“정말…… 화소도가 보이나요?”
당묘화가 진호에게 다가가며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저기가 화소도가 맞는다면 혹시나 동생 묘정을 볼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영영 못 보게 되었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도 같이 밀려왔다.
“세 개의 봉우리가 꽃잎처럼 에워싸며 서 있는 걸 보니 맞는 것 같군.”
진호가 무뚝뚝한 어조로 말을 했다.
당묘화는 다시 한 번 수평선에서 아른거리는 점을 뚫어지게 보았다. 자신의 능력으로썬 도저히 분간할 수 없었다. 고개를 돌려 진호를 보았다. 진호는 여전히 수평선 저 너머를 보고 있었다.
“동생에 대하여 알아낸 것이 있나?”
갑자기 진호가 고개를 돌려 당묘화에게 물었다.
당묘화는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돌렸다. 그러곤 잠시간 뭐라고 해야 할지 정신이 없었다. 갑자기 동생인 묘정에 대해서 진호가 물으니 너무 당혹스러웠다. 이내 정신을 추스른 당묘화는 입술을 한 번 깨물었다가 조심스럽게 대답을 했다.
“그게 저…… 노인 한 명이 같이 다닌다는 말밖엔…….”
“다른 특징은?”
“얼굴에 점이 하나 있어요. 왼쪽 눈 밑에.”
“점박이로군.”
“그렇게 부르지 마세요! 어릴 때 놀림을 많이 당해서 싫어해요.”
당묘화가 살짝 눈을 흘겼다.
“찾기는 쉽겠군.”
“후…… 만일 동생이 백 장 근처에만 있다면 알 수 있는 방법이 있어요.”
한참을 망설이던 당묘화가 말을 꺼냈다.
“…….”
“원래 저희가 갖고 있던 음양고는 두 쌍이었는데, 그중에 동생이 양고 하나와 한 쌍의 음양고를 가지고 있었어요. 그리고 나머지 음고 한 마리가 저한테 있어요. 음고와 양고는 백 장 안에만 있어도 존재를 인식할 수 있어요.”
당묘화가 차근차근 이유를 설명하였다.
“그렇군. 그럼 여기서 어두워질 때까지 기다리기로 하지.”
설명을 다 들은 진호는 별반 표정의 변화 없이 간단히 답하곤 고개를 돌려 버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어둠이 오자, 용두선에서는 작은 소선 한척이 내려진 후 물살을 헤치며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하였다. 소선에는 진호와 당묘화 그리고 여섯 명의 독암대 칠조 조원들이 타고 있었다.
반 시진 정도를 노를 저어 가자 화소도가 눈앞에 다가왔다. 소선의 맨 뒤에서 방향을 잡고 있던 진호가 소선을 동북쪽의 단애가 있는 쪽으로 몰았다. 이십 장 가까이 되어 보이는 깎아지른 단애 밑에 이르자 진호와 당가 일행은 즉시 몸을 날려 근처의 평평한 바위 위로 뛰어올랐다.
소선을 갈무리한 후 진호가 단애를 살펴보니 인공의 흔적들이 여기저기 남아 있었다. 발을 디디기 좋게 파 놓은 곳도 보였고, 고리나 철심이 박혀 있는 곳도 여기저기 눈에 들어왔다. 아마도 살수들이 훈련 장소로 이용하던 곳 같았다.
잠시 방향을 가늠하던 진호가 먼저 단애를 오르기 시작하였다. 진호의 옆으로 당묘화가 따라 오르기 시작하였다. 독암대는 한 명이 밑에 남고 나머지 다섯 명이 횡으로 벌려 서서 진호와 당묘화의 뒤를 따랐다.
단애의 정상 부근에 다다르자 진호가 멈추어 섰다. 모두들 멈추어 섰다. 그러자 곧 단애 위에서 말소리가 들리기 시작하였다.
“혈검 사십삼조, 이상 없습니다.”
“수고했다. 사십사조와 교대하도록!”
“존명!”
이어서 대여섯 명의 인원이 움직이는 소리와 함께 잠시 후 다시 정적이 찾아왔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정적을 깨고 다시 말소리가 들리기 시작하였다.
말소리가 들리는 단애의 정상에는 작은 망루가 설치되어 있었다. 망루에는 두 명의 흑의인이 서 있었다.
“십호 순찰사자님, 갑자기 웬 경계 근무입니까?”
두 흑의인 중 좌측에 선 자가 물었다.
“어제 혈검 십대가 용두선을 탈취당하고 몰살당했다는 소리가 있더군.”
“헛! 그게 정말입니까?”
“그래, 그러니 혹시 섬에 들어오는 놈들이 있을지 모르니 철저히 감시하도록! 특히 이곳 낙영애는 접근이 쉬우니까 말이야.”
우측의 흑의인이 고개를 돌려 망루 밑에서 매복 중인 흑의인들을 쳐다보고는 좌측의 흑의인에게 지시하였다.
“헤헤, 알겠습니…… 컥!”
실실거리며 대답을 하던 좌측의 흑의인이 말을 끝맺지 못하고 외마디 비명과 함께 거꾸러졌다. 쓰러진 흑의인의 미간에는 붉은 나비가 한 마리 내려앉아 있었다.
우측에 선 흑의인이 다급하게 외치며 발검을 하려 했다. 그러나 흑의인은 입을 열 수도, 검을 뽑을 수도 없었다. 갑자기 나타난 진호가 오른손으로 건곤조를 펼쳐 흑의인의 목줄기를 틀어쥐고 왼손으로 흑의인의 검병을 누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와 동시에 진호와 당묘화의 뒤를 이어 허공으로 날아오른 독암대의 손에서 작고 얇은 유엽비도들이 날아와 망루 밑에 매복하고 있던 흑의인들의 미간에 틀어박혔다. 독암대의 암기 솜씨는 당가가 자랑하는 최정예 전투 부대답게 군더더기 하나 없이 깔끔하였다.
“고(蠱)가 움직여요!”
당묘화가 손에 들고 있던 작은 원통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음고(陰蠱)가 반응했다는 건 근처 백 장 안에 양고(陽蠱)가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하였다.
“그럼 이놈은 필요 없겠군!”
진호가 중얼거림과 동시에 건곤조로 상대의 목줄기를 쥔 오른손을 턱으로 옮겨 좌우로 가볍게 흔들어 버렸다. 우두둑 소리와 함께 목이 돌아간 흑의인이 축 늘어졌다.
“서쪽이에요!”
짧게 외친 당묘화가 원통을 받쳐 든 채 서쪽 방향으로 몸을 날렸다. 이어 진호와 독암대가 뒤를 따랐다.
잠시 후 진호와 당가 일행은 낙영애가 있는 동쪽 봉과 서쪽 봉을 줄로 이어 놓은 운교(雲橋) 앞에 멈추어 섰다. 운교 앞에서 내려다보니 세 개의 봉우리들로 둘러싸인 분지 위에 수많은 불빛들이 일렁거리고 있었다. 분지의 규모도 크고 많은 건물들이 있는 것으로 보아 화소도에 자리한 살수 집단의 규모가 생각보다 훨씬 더 큰 모양이었다.
“어느 쪽이지?”
“지금은 서북쪽으로 가려 하고 있어요.”
진호가 방향을 가늠하며 잠시 살펴보았다.
불어오는 강한 북서풍을 이겨 내지 못하고 좌우로 크게 흔들리고 있는 운교(雲橋) 너머 작은 전각이 하나 자리하고 있었다.
“일단 운교를 건너야겠군. 내가 앞장서지.”
진호가 몸을 날려 운교를 건너기 시작하였다. 마치 끊어질 듯 흔들리는 운교 위를 전혀 흐트러짐 없이 건너간 진호가 처음에 살폈던 전각을 향해 바람처럼 달려갔다. 숲에 가려진 전각의 현판이 보일 즈음해서 진호가 멈추어 서서 전각의 현판을 보았다.
구유각(九幽閣)
“저기예요! 고(蠱)가 크게 흥분하고 있어요!”
얼마 후 뒤따라온 당묘화가 전음으로 다급하게 이야기했다. 진호는 서서히 구유각이라 쓰인 전각으로 다가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