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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호전기 1권(14화)
제6장 풍운무적(風雲無敵)(3)


“허, 천하의 화산고학이 어린 여아를 탐하였단 말인가?”
“그 집안도 핏줄이 강하군.”
진호는 혼자서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렸다.
“허, 이거 참 간단한 문제가 아니구나. 화산의 인간들은 명예라면 물불을 안 가릴 터인데…….”
제갈진의 눈빛엔 고민이 역력했다. 현 정의맹의 대립 구도로 봤을 때 이번 사건은 엄청난 후폭풍을 가져올 사건이 될 수 있었다. 현재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청룡의 힘이 위축될 수밖에 없는 일이 발생한 것이다. 타 세력들이 이 기회에 가만히 있지는 않을 것이다.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 오는 제갈진이었다.
“…….”
“자네도 수향전에 가 볼 텐가?”
제갈진이 안색을 풀고 진호에게 물었다.
“굳이 저까지 가 봐야 할 것 같진 않습니다.”
진호는 별로 내키지 않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런가? 아마도 곧 살수들에 대한 추적이 있을 걸세! 연유야 어찌 되었든 그들로 인해 맹의 원로가 죽었으니 손 놓고 있을 수만은 없겠지. 아마 자네도 추적조에 들어가게 될 걸세. 남궁단주와 총순찰이 이구동성으로 자네를 꼭 넣어야 한다고 주장하니…….”
“뭐, 명이라면 가야죠.”
진호는 그저 담담하게 말하였다.
“그 참……. 명진 그 친구한테 자네 이야기를 익히 들은 바가 있어 출신을 모르는 바는 아니네만, 솔직히 의구심이 드는군. 자네 도대체 누구인가?”
진호를 한참 보던 제갈진이 정색을 하고 물었다.
“쩝, 명진 사백이 말씀하신 친우 분이 부전주님이셨군요. 일전에 가형이 얼핏 말을 하였지만 흘려들었더니……. 저야 진호입니다. 소하귀동 진호. 아니, 이젠 풍운무적 진호라고 해야 하나…….”
진호는 풍운무적이라는 새로운 별호가 꽤나 마음에 드는 모양이었다. 진호는 제갈진에게 간단히 읍을 하고는 등을 돌려 방을 나갔다.
“허! 이 사람 명진, 저 아이는 이제 더 이상 자네가 말하던 유룡(幼龍)이 아닐세. 성룡출세(成龍出世)라!”



제7장 추적조(追跡組)(1)


‘거참, 이상하단 말이야. 저 엉덩이에 뿔난 망아지같이 천방지축인 계집애가 오늘은 왜 저러지?’
만리개 궁연은 면사를 쓰고 말없이 앞만 보고 걸어가고 있는 독서시 당묘화를 쳐다보며 연신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었다. 소집된 추적조에 당묘화가 끼어 있는 것을 보고 농을 건네며 반갑게 인사를 했지만, 평소와는 달리 당묘화는 그저 예의상 형식적으로 읍을 하였을 뿐 멍하니 서 있을 뿐이었다.
만리개 궁연이 아는 당묘화는 자신이 나타나면 냄새난다고 떨어지라고 호들갑을 떨든지, 혈갈독을 뿌려 머리털의 이들을 다 잡아 드리겠다고 난리를 쳐야 정상이었다. 더구나 오늘은 평소에 안 하던 면사까지 하고 나타났다. ‘여자의 미모는 강력한 암기다’라는 괴상한 주장을 펼치며 고개를 빳빳이 세우던 아이가 오늘은 전혀 딴사람이 되어 나타난 것이다.
궁연은 다시금 당묘화를 슬쩍 쳐다보았다. 얼굴을 가린 면사 위로 드러난 당묘화의 눈은 앞서 가는 추적조 일행 중의 한 명을 향해 고정되어 있었다.
궁연의 호기심 어린 눈길을 받는 당묘화의 내심은 지금 복잡하게 꼬여 있었다.
사촌 오라비인 묘진으로부터 음양고에 관한 이야기를 듣는 순간 치료고 뭐고 다 때려치우고 백부인 흑수신의 당현수를 찾아가 추적조와 같이 떠날 수 있게 해 달라고 졸랐다. 물론 백부의 입장에서도 바라던 바일 것이다. 당가에서 음양고를 제일 잘 아는 사람이 자신과 친동생인 묘정이었다.
묘정은 어렸을 때부터 심약한 아이였다. 흔히 당가를 말할 때 결코 빠지지 않는 바로 그 독심이란 게 없는 아이였다. 더구나 얼마 전 소가주가 된 친오라비 묘형과 어렸을 때부터 늘 비교를 당하면서 더욱더 위축되어 갔다. 묘정이 유일하게 속을 터놓고 이야기하고 기대는 사람은 누이인 묘화 자신이었다.
그런데 등룡관에서 수련을 하고 있던 묘정이 일 년 전에 갑자기 사라진 것이었다. 사라질 때 묘정은 한 쌍의 음양고를 지니고 있었다. 우연하게 음양고의 배양액을 발견한 그들 남매가 비밀스럽게 간직하고 있었던 것이다. 동생의 실종 소식을 들은 묘화가 맹에 와서 난리를 쳐 보았지만 동생 묘정의 흔적은 찾을 수가 없었다. 급기야는 묘화가 가문의 어른들에게 묘정이 음양고를 지닌 사실을 실토했고 가문이 전력을 다해 찾아봤지만 찾을 수 없었다.
그런데 그 흔적이 엉뚱한 곳에서 나타난 것이다. 그래서 붓기가 빠지지 않은 얼굴을 면사로 가리면서까지 추적조에 합류하기 위해 달려왔다. 그런데 자신의 눈앞에 그놈이 서 있었다. 예의 그 풍운대 위사 복장을 하고선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말이다. 놈은 자신을 보고도 눈빛 한번 흐트러지지 않았다. 마치 자신과 아무런 관계가 없는, 처음 보는 사람을 대하는 듯한 눈빛이었다. 그 무표정한 얼굴을 보는 순간 묘화는 살심이 치솟았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아무런 행동도 취할 수 없었다. 그것은 그녀가 살아오면서 단 한 번도 겪어 보지 못했던 수치심과 공포라는 괴물이 가슴 저 밑바닥에서 스멀거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개자식! 조만간 죽여 버리고 만다! 독암대만 합류하면…….’
당묘화는 약해지는 마음을 속으로 다잡았다. 동생인 당묘정과는 달리 당묘화는 당가의 핏줄을 제대로 물려받은 것 같았다.
추적조 일행의 선두에 서서 달려가던 남궁전과 진호가 갑자기 멈추어 섰다.
“음, 진 위사. 역시 저곳부터 살펴봐야겠지?”
남궁전이 최초 매복으로부터 습격을 받았던 백사장에 서서 강 건너편을 살펴보며 진호에게 물었다.
“아마도…….”
대답을 하는 진호 역시도 강 건너편을 보고 있었다.
“감히!”
차앙!
청룡단에서 추적조에 파견된 청룡단 제삼조 조장인 종남일영 관재효가 노성을 터뜨리며 검을 뽑아 진호의 가슴을 겨누었다. 백호단주인 남궁전의 물음에 답을 하는 진호의 태도가 눈에 거슬렸던 것이다. 일개 풍운대 위사 따위가 백호단주를 대하며 취할 수 있는 태도가 아니었다.
“무슨 뜻이오?”
진호가 자신의 오른쪽 가슴에 겨누어진 검을 보곤 눈초리를 슬쩍 치켜 올리며 물었다.
“보자 보자 하니 네놈 말버릇이 너무 고약하구나! 감히 풍운대 위사 주제에 백호단주님께 그따위 망발을 하다니!”
사실 관재효는 추적조가 집결하여 움직일 때부터 진호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겨우 풍운대 위사 주제에 자신과 같이 사신단의 조장 급으로 구성된 추적조에 가담한 것으로 보아 추종술에 나름 조예가 있는 모양이지만, 그래 봤자 풍운대 위사 나부랭이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 놈은 사신단의 단주와 순찰부주가 함께한 자리에서도 전혀 위축됨이 없었다. 더욱이 독서시 당묘화가 놈의 뒤만 쳐다본다는 것도 정말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서 한번 혼내 줄 기회를 엿보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검을 뽑은 뜻을 물었소. 무사가 의미 없이 검을 뽑진 않았을 테지.”
“뭐라! 이놈이! 네 목을 쳐서 일벌백계로 삼을 것이다.”
“훗! 겨우 그따위 알량한 솜씨로 말이오?”
“이놈!”
관재효가 분기를 참지 못하고 진호의 가슴에 겨누어진 검을 그대로 찔러 갔다.
순간 진호의 몸이 팽이처럼 핑그르르 돌며 관재효의 검을 우측으로 흘린 뒤 오른 손날로 관재효의 목을 쳐 갔다.
“그만!”
남궁전의 입에서 고성이 터져 나왔다.
진호의 손날이 관재효의 목 한 치 앞에서 멈추었다.
그때 흥미진진하게 상황을 지켜보던 만리개 궁연은 진호의 손날에 아지랑이 기운이 어렸다가 사라지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호! 저놈 봐라? 떠도는 이야기가 헛소문이 아니군.’
“관 조장! 뭐 하는 짓인가? 적전분열이라도 하자는 뜻인가? 지금이 자중지란을 일으킬 상황인가?”
남궁전이 관재효를 심하게 다그쳤다.
“우악! 전이 너 이 자식, 내 앞에서는 그따위 고상한 말투 쓰지 말라고 했지?”
궁연이 신경질을 내며 앞으로 나섰다.
“흠흠, 순찰부주님, 그게…….”
남궁전은 딱히 할 말이 없어 머뭇거렸다.
“쓰바, 뭐? 적전분열(敵前分裂)? 자중지란(自中之亂)? 니미럴, 골이 빠개질 것 같네……. 쓰…….”
궁연은 고뇌에 찬 표정으로 머리를 벅벅 긁기 시작했다.
“궁 숙부!”
남궁전은 거의 비명에 가까운 외침을 뱉으며 황급히 뒤로 물러섰다.
만리개 궁연이 자타가 공인하는 생체 암기인 이로써 소란을 평정하고 있을 때 순찰대원 하나가 급히 달려왔다.
“부주님! 개방에서 전언이 왔는데 그 자식이 항주에서 덕청으로 가는 관도에 꼬라지를 드러냈다고 합니다.”
“어라? 너, 그 고상한 놈 아니냐?”
궁연이 순찰대원을 아래위로 훑어보면서 물었다.
“마, 맞는데요.”
순찰대원은 양손으로 황급히 뺨을 가리며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이보게. 전서를 보내 우리가 갈 때까지 충돌하지 말고 따라붙기만 하라고 하게. 자, 우리도 가지!”
남궁전이 순찰대원에게 지시를 하고는 창궁비를 펼치며 앞장서서 나아갔다.
‘크크, 동천이 이 자식이 애새끼 교육은 잘 시켰나 보군.’
궁연이 입가에 흐뭇한 미소를 띠고는 신법을 펼치며 일행을 따르기 시작했다.

***

“음, 이게 사실인가?”
감찰전주 진천도 팽위산이 보고서를 내려놓고 의자에 깊숙하게 몸을 묻으며 제갈진에게 물었다.
“가영이라는 시비 아이의 시체에 살수들의 매복 현장에서 발견한 것과 동일한 재질의 비도가 꽂혀 있었습니다. 등운각의 시비인 영령이라는 아이의 증언도 확고하고 말입니다.”
제갈진의 눈은 이미 확신을 담고 있었다.
“허 참. 천하의 화산고학이 그런 위선자일 줄이야! 그런데 말이야…… 이거 뭔가 좀 이상하지 않은가?”
팽위산이 고개를 갸웃하고 있었다.
“물론 석연치 않은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예를 들자면?”
“살수가 파산비를 쓸 정도면 특급 살수라고 봐야 하는데, 특급 살수가 살행을 하고 비도를 남긴 점이나 매복조가 맹의 무사들을 공격한 것으로 봤을 때에는 마치 맹에서 어떤 움직임이 있기를 바라고 조직적으로 움직인 듯합니다.”
“음, 화산고학의 치부를 이용한 점을 봐서는 움직임의 대상이 청룡인가?”
“그럴지도 모르겠습니다.”
차를 한 모금 들이켠 제갈진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역시 마교인가?”
“아무래도 유력하겠지요.”
“마교가 청룡을 움직이려 한다는 것은 섬서로 밀고 내려오겠다는 뜻으로 봐야겠군.”
“정해진 수순이 되겠지요. 허나 거기에도 몇 가지 의문이 남습니다.”
“흠, 어떤 것들 말인가?”
“먼저, 최근 화산, 종남, 공동을 주축으로 하는 청룡이 크게 성세를 이루었다고 하나, 소림, 무당, 개방이 중심인 현무에는 아직 미치지 못합니다. 즉, 마교가 청룡을 움직여 섬서를 차지한다 해도 나머지 삼신단의 반격을 버텨 내기 힘들다는 게 정설입니다. 그리고 과연 살수 집단이 청룡의 힘을 소진케 할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결국 마교의 의도는 특별한 변수가 작용하지 않는 한 실익이 없습니다.”
제갈진은 차분하게 천하 정세를 분석하며 설명을 하였다.
“특별한 변수라?”
“최근 몇 가지 움직임들이 포착되고 있습니다. 먼저, 얼마 전 장강의 주인이 바뀌었습니다.”
“장강수왕 하원백이 밀려났다는 말인가?”
팽위산은 약간 의외라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형식적으로는 자의로 양자인 장강교룡 하진강에 자리를 물려주고 이선으로 물러났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강제로 밀려났다고 합니다.”
“흠, 장강의 수적들이 변수가 될 수 있을까?”
“현재로써는 판단하기 힘듭니다. 그리고 당가의 움직임도 수상합니다.”
“당가가?”
팽위산이 약간 놀란 듯이 물었다.
“이번 사건에 너무 예민하게 반응하고 있습니다. 독서시 당묘화가 자원하여 추적조에 든 것도 그렇고, 맹 내에 거하던 독암대가 일부 이동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럼 다른 나머지 삼신단도 용의선상에 있는 것인가?”
말을 하는 팽위산의 목소리가 급격하게 낮아져 있었다.
“현무가 청룡의 성세를 견제할 수도 있고, 주작이나 백호가 청룡의 성장을 시기할 수도 있겠지요. 결론적으로 삼신단의 개입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겠지요.”
“청성, 아미, 점창이 중심인 주작이야 그렇다 쳐도 세가연맹인 백호가 자네와 나를 배제하고 일을 벌였을 수도 있다는 말인가?”
“글쎄요. 뭐, 형님이나 저나 백호의 핵심에서는 떨어져 있으니 알 수가 없지요. 제가 왜 군사부가 아닌 감찰전에 있는지 형님이 잘 아시잖습니까?”
말을 하는 제갈진의 눈에 씁쓸한 빛이 감돌았다.
“후…… 하긴. 그나저나 자네 말대로라면 굳이 추적조를 보내지 않아도 놈들이 스스로 먼저 드러낼 것이 아닌가?”
“그렇겠지요. 그러나 때론 상대의 의도대로 끌려가 주는 것도 좋은 전략 중의 하나입니다.”
“거참…….”
팽위산이 입맛을 다셨다.
“이미 추적조가 살수의 흔적을 따라 쫓고 있으니 조만간 소기의 결과가 나오겠지요.”
“그야 그렇겠지만, 궁가 그 인간을 믿을 수가 없으니…….”
팽위산은 불안한 기색을 감추지 않았다.
“그러고 보면 이번에 편성된 추적조는 정말 특이하군요.”
“좀 많이 특이하지. 백호단주와 조장들이나 그 위사 같지 않은 풍운대 위사 녀석은 처음부터 살수들을 쫓았으니 그렇다 해도 천하의 단순 무식 궁가와 당가의 천방지축까지 끼었으니……. 흠, 그러고 보니 추진양 그 인간은 왜 끼어 있는 거지?”
팽위산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아마도 팽위산은 이야기를 하는 도중에 용호대 부대주인 일권붕산 추진양이 추적조에 끼었다는 사실이 생각난 모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