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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호전기 1권(12화)
제6장 풍운무적(風雲無敵)(1)
“좋구나!”
유난히 검어 보이는 손을 가진 날카로운 인상의 노인이 찻잔을 내려놓으며 말을 뱉었다.
“할아버님께서 용정이나 백호은침과 같은 좋은 차들을 마다하고 유독 철관음을 좋아하시는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노인의 앞에 열 살 정도 되어 보이는 소동이 고개를 갸웃하고 있었다.
“허허, 차가 너무 맑고 부드러우면 그 맛은 밋밋하지. 철관음처럼 약간 거친 맛이 감도는 게 좋아. 적당히 자극을 주거든.”
“그것도 중용지도(中庸之道)인가요?”
“허허허, 요놈아, 너무 앞서 가지 마라. 그저 자기 취향일 뿐이지, 무슨 중용지도를 다 갖다 붙이느냐? 그래, 내경(內經)은 다 읽었느냐?”
“예. 그런데 소손이 미흡하여 도무지 이해가 잘 안 됩니다.”
소동은 볼을 실룩거리고 있었다.
“유전아, 너무 급하게 결과를 보려 하지 마라. 서두름은 의원이 된 자의 가장 안 좋은 버릇이 된다. 열심히 읽고 배우면 천천히 쌓여 갈 것이다.”
“그래도 고모님은 만날 나보고 석두라고 놀리는걸요. 자기는 다섯 살 때 내경을 다 뗐다고 하면서…….”
“누가? 묘화가? 하하하, 네 고모 성정을 봐라. 어디 책상에 앉아 책을 볼 녀석이더냐?”
“그렇죠?”
소동의 얼굴에 득의의 빛이 감돌았다. 볼 때마다 자신을 구박하는 고모인 당묘화에게 할 말이 생긴 것이다.
“아버님, 묘진입니다.”
“들어오너라.”
말을 마친 노인, 즉 당가의 대표로 맹의 원로원에 머물고 있는 흑수신의 당현수는 방문을 열고 들어온 아들 귀수신편 당묘진을 의아한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무슨 일이냐? 이 시간에 의당에 있질 않고?”
“그게…… 유전아, 좀 나가 있거라.”
“예, 아버님.”
소동이 밖으로 물러가자 귀수신편 당묘진이 입을 열었다.
“등룡관의 화 관주가 어젯밤에 급사(急死)하였습니다.”
“뭐라? 화 관주가 급사를? 사인은?”
“지금 현고 숙부께서 검시(檢屍)를 하시고 계십니다.”
“그렇다면 곧 결과가 나오겠구나.”
“그런데 그것이…….”
말을 하는 당묘진은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무슨 문제가 있느냐?”
“예, 현고 숙부께서 급히 아버님을 청하였습니다. 사인에 문제가 있는 모양입니다.”
“이미 의당에서 물러난 나를 청할 이유가 무어냐?”
“아마도 사인이 고(蠱)에 의한 것 같다고 합니다. 그것도…… 음양고(陰陽蠱)인 것 같다고 합니다.”
“뭣이! 그게 정말이냐? 묘정이 그 못난 놈과 함께 사라진 음양고가 어떻게 화 관주의 몸에 들어가 있었단 말이냐?”
“그것이…….”
“이럴 게 아니라, 당장 내가 가 봐야겠다.”
***
“당주! 그래, 결과가 나왔소이까?”
감찰전주인 진천도 팽위산이 검시를 마친 백수신의 당현고를 보며 물었다.
“몸에 자상(刺傷)이나 타박상(打撲傷)이 없는 것으로 보아 사인은 두 가지로 볼 수 있네. 첫 번째는 역시 독살의 가능성이 크네. 독의 종류나 용독 방법은 형님이 오셔야 정확하게 알 수 있을 것 같네.”
현재 정의맹의 의당을 맡고 있는 당현고는 그의 형 흑수신의 당현수와 더불어 흑백이신의라고 불렸다. 그는 침과 약을 이용한 치료에 뛰어난 반면, 독에 관한 한은 그의 형인 흑수신의 당현수가 훨씬 조예가 깊었다.
“원로원으로 기별은…….”
철심수사 제갈진이 나섰다.
“묘진이를 보냈으니 곧 오실 게야. 그리고…… 다른 가능성 하나는 침투경이네.”
“침투경!”
제갈진이 소스라치게 놀라며 외쳤다.
“그렇다네. 화 관주의 직접적인 사인은 뇌의 심맥이 터진 것인데, 독이 아니더라도 머리에 침투경을 심으면 외상 없이 심맥을 터뜨릴 수 있지.”
당현고가 표정의 변화 없이 냉정한 얼굴로 설명을 하였다.
“니미럴! 명색이 화산오검수의 일 인인 화 관주가 멍하니 앉아서 독을 먹고, 침투경을 머리에 허용한단 말이오? 뭐, 권왕이나 독왕이라도 왔다 갔수?”
만리개 궁연이 걸걸한 목소리로 말을 뱉었다.
“네 이놈, 거지야! 감히 누굴 입에 올리는 거냐!”
흑수신의 당현수가 들어서며 궁연을 보고 호통을 쳤다.
“킁! 아니…… 진짜로 독왕 어르신이 그랬다는 게 아니고, 뭐 그렇다는 거지요. 아니, 그게…….”
궁연은 머리를 벅벅 긁기 시작했다.
“쯧쯧. 네놈은 그놈의 주둥이 때문에 제명대로 못 살 게야.”
팽위산이 멀찌감치 물러서서 궁연을 한심한 듯 쳐다보며 말했다.
당현수는 한 번 더 궁연을 노려보고는 사체가 있는 내전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당현고와 당묘진이 뒤를 따랐다.
“형님, 역시 음양고(陰陽蠱)입니까?”
“음, 뇌호혈(腦戶穴)과 풍부혈(風府穴), 그리고 후정혈(後頂穴), 세 혈의 심맥이 동시에 터졌네.”
“그럼?”
“역시 음양고라고 볼 수밖에 없지.”
“이 사실이 알려지면 본가가 곤란하지 않겠습니까?”
“묘정 그 아이가 연관되었을까?”
“그놈이 아무리 못나도 설마 그럴 리야 있겠습니까?”
“그런데 고를 심으려면 교접 방법뿐인데, 화 관주가 여색을 밝혔나?”
“알려진 바로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오죽하면 화산고학이라고 하였겠습니까?”
“이 사실이 알려지면 본가도 그렇지만 화산도 난리가 나겠군.”
“당분간 매화검제가 얼굴을 못 들겠지요.”
“흠, 어떻게 한다…….”
***
“아, 진짜라니까!”
황노칠이 답답하다는 듯이 인상을 쓰고 있었다.
“노칠이 네놈 말을 우찌 믿냐?”
황노칠의 친구인 여문철은 의심스럽다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시파, 믿고 싶지 않음 말고! 네까짓 놈이 뭐라고 하든 우리 진호 형님이 특급 살수 놈을 단칼에 베어 버린 것도 사실이고, 우리 조가 살수 놈을 잡은 것도 사실이니까! 흐흐흐.”
“형구 형님! 진짜입니까? 노칠이 저놈을 믿을 수가 없어서…….”
“노칠이 말이 맞아. 백호단주님이 공을 상부에 상신한다고 하였으니 포상금도 나올걸.”
“글치! 포상금. 하하하! 형님, 우리 포상금 받음 화월루 한번 가는 겁니까? 앵춘이 년 속곳도 한번 보고! 고년 속곳도 저리 붉을까?”
황노칠은 즐거운 상상이라도 하는 표정으로 이 층 계단 쪽으로 고개를 젖혔다.
퍽! 쿠당탕!
갑자기 황노칠의 머리 위에서 붉은 그림자가 얼렁거리더니 황노칠의 등을 두들겨 차 버렸다. 황노칠은 탁자를 밀어내며 앞으로 나뒹굴었다.
“이런 개잡놈이 감히 어딜 쳐다봐!”
황노칠이 앉아 있던 자리 뒤에 붉은 경장을 차려 입은 미녀 한 명이 눈에 쌍심지를 켜고 쓰러진 황노칠을 노려보고 있었다.
“아니, 이런 썅! 시바, 내가 뭘 봤다고 지랄이야!”
황노칠이 욕을 하며 벌떡 일어섰다.
퍽!
“켁!”
여자는 노칠이 일어서자 다시 무영각으로 노칠의 배를 냅다 차 버렸다.
“풍운대 위사 따위가 감히!”
“이보시오, 소저! 너무 심하지 않소!”
막형구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따져 물었다.
“흥. 꼴에 사내라고 잡놈들이!”
“이익! 말조심하시오!”
막형구가 도파에 손을 가져가며 자세를 낮췄다.
“뭐야, 이 새끼가! 너도 뒈지게 맞고 싶지?”
붉은 경장의 미녀가 막형구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말을 뱉었다.
짜악! 우당탕!
갑자기 미녀의 다리가 기이하게 휘어지며 나타나서는 막형구의 뺨을 때려 버렸다.
“이 씨앙! 개 같은……!”
황노칠이 일어서서 욕을 하며 달려들었다.
“크웩! 헉!”
미녀가 달려드는 황노칠의 목을 왼손으로 틀어쥐고는 번개같이 소검을 뽑아서는 황노칠의 목에 갖다 대었다.
“언니! 그만 해. 그래도 맹의 위사들인데…….”
이 층 계단에서 청의를 입은 여자가 몸을 날려 붉은 경장 미녀의 손을 붙들며 만류하였다.
“놔! 이런 것들은 눈깔을 파 버려야 돼! 이 새끼들이 내가 누군 줄 알고, 내가 당묘화야!”
“헉, 독서시!”
옆에 서 있던 여문철이 놀라서 신음을 흘렸다.
독서시 당묘화. 당금 무림에 알려져 있는 후기지수 중 가장 유명한 이름 중의 하나였다. 독과 암기로 유명한 사천 당문의 자제인 그녀는 빼어난 미모에도 불구하고 성정이 강하고 손속이 거칠기로 유명했다. 당묘화 옆에서 만류를 하는 여자는 창천검가라 불리는 남궁가의 후손인 청의화봉 남궁정이었다.
“이 시바! 그래, 죽여라 죽여, 시바! 독서시고 독사갈이고 젓도 모르겠고, 함 죽여 봐라, 시벌!”
황노칠이 눈이 뒤집혀서는 윗저고리를 양쪽으로 잡아당겨 뜯어 버리곤 새까맣게 털이 난 불룩한 배를 내밀며 악다구니를 해 댔다.
“이 새끼가 뒈지려고!”
당묘화는 입에서 나온 말과는 달리 움직일 수가 없었다. 갑자기 나타난 손 하나가 검을 쥔 그녀의 손목을 잡고 있었던 까닭이었다.
“그만 하지.”
진호였다. 어느새 진호가 나타나서 건곤조로 당묘화의 손목을 틀어쥐고 있었다.
“뭐야! 이이익, 안 놔!”
의외로 당묘화의 입에서 욕설이 나오지는 않았다. 단지 놓으라고만 할 뿐이었다. 그녀도 자신이 알아차리지 못하게 자신의 손목을 잡을 정도면 상대가 고수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직감한 모양이다.
쿵쿵쿵!
진호가 손목을 놓아 버리자 힘을 쓰던 당묘화는 균형을 잠시 잃고 세 걸음을 급하게 물러서서 남궁정에게 기대어서야 바로 설 수 있었다. 그녀는 수치심에 얼굴이 달아올라 붉은 옷과 함께 온몸이 불타는 것 같았다.
당묘화는 말없이 앞에 선 사내를 쳐다보았다. 풍운대 복장을 한 평범한 위사였다. 그녀의 눈초리가 위로 올라가며 서서히 떨리기 시작하였다.
“피햇!”
남궁정이 다급하게 외쳤다.
당묘화와 절친한 그녀는 독서시 당묘화가 최고로 화났을 때의 표정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전날 호남성 악록산 산채의 산적 이십여 명이 지나가던 그녀들을 붙잡고 희롱하다가 떼죽음을 당하기 직전에도 당묘화의 표정이 저러했다.
당묘화의 몸 주위로 열두 마리의 붉은 나비가 날아올랐다.
“철혈접!”
남궁정이 다시 비명처럼 외쳤다.
당묘화는 자신의 손목이 너무나 쉽게 잡혀 버렸을 때 이미 상대가 자신의 윗줄인 고수라는 걸 알았다. 그러나 상대는 풍운대 위사였다. 풍운대 위사 따위에게 물러서기엔 그녀의 자존심이 너무 강했다. 자신의 성명절기인 철혈접을 처음부터 최고 숫자인 열두 개를 모두 펼쳤다. 열두 마리의 혈접이면 놈도 어쩔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나비라…….”
진호는 양 손바닥을 펴고 앞으로 느릿하게 팔을 내밀었다. 마치 태극권의 만련을 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였다. 느릿하게 날아오던 열두 마리의 나비들이 진호의 몸 주위를 에워싸며 빙빙 맴돌았다. 진호는 아랑곳하지 않고 두 팔로 천천히 태극을 그리며 느리게 움직이고 있었다.
순간 열두 마리의 나비들이 급작스럽게 진호의 십이 대혈을 향해 내리꽂혔다. 진호의 몸이 팽이처럼 회전하며 나비들을 잡아 갔다. 진호가 동작을 멈추었을 땐 열두 마리의 나비가 모두 그의 손에 들어가 있었다.
“이익!”
당묘화가 신경질적으로 손을 흔들자 철혈접을 조종하던 천잠사들이 팽팽하게 당겨졌다.
당묘화는 갑자기 팽팽하던 천잠사의 장력이 축 늘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짝!
당묘화의 뺨이 돌아갔다. 진호의 신형이 귀신같이 당묘화 앞에 나타나더니 그녀의 뺨을 때려 버린 것이었다.
“이이……!”
짝!
당묘화가 고개를 홱 돌리며 뭔가 말을 하려는 순간 다시 진호가 그녀의 뺨을 때려 버렸다.
짝! 짝! 짝! 짝!
진호는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저 차가운 표정으로 당묘화가 고개를 돌리면 기계처럼 뺨을 때릴 뿐이었다. 당묘화의 얼굴은 퉁퉁 붓다 못해 뒤틀어져 있었다. 어느 누구도 말 한 마디 없이 여자의 뺨을 때리고 있는 이 광경을 말릴 수가 없었다. 그만큼 차갑게 굳은 진호의 표정은 냉혹하였다.
당묘화는 이미 실신지경에 이르러 있었다.
“그만! 그만 해요! 흑흑흑.”
옆에 서 있던 남궁정이 울면서 진호에게 애원했다.
“감히!”
쉭!
외마디 외침과 함께 날카로운 편두가 진호의 얼굴을 향해 날아들었다.
짝!
진호는 고개를 슬쩍 틀어 편두를 피하고는 다시 당묘화의 뺨을 때려 버렸다.
지나갔던 편두가 허공에 멈추더니 다시 진호의 뒷머리 뇌호혈을 향해 날아들었다.
진호가 고개를 숙여 버리자 편두는 당묘화의 얼굴을 파고들었다.
척!
날아가던 편두가 당묘화의 눈앞에서 멈추어 섰다. 진호가 왼손으로 잡아 버린 것이다.
진호의 오른손이 다시 당묘화의 뺨 앞에서 멈추어 섰다.
“미……아……안……해……요.”
당묘화의 입에서 신음이 흘러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