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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호전기 1권(11화)
제5장 재회(再會)(2)


선두에 서서 가던 진호가 갑자기 멈추어 섰다.
진호는 손을 내밀어 잔가지가 많은 나뭇가지 하나를 꺾어 들고선 수도(手刀)로 툭툭 치면서 한 뼘 길이의 나뭇가지 대여섯 개를 다듬어 오른손에 쥐었다. 진호가 쥐고 있는 작은 가지들의 잘린 단면은 마치 예리한 보도로 잘라 낸 듯 깨끗하기 그지없었다. 보기엔 그냥 손으로 툭툭 치는 듯했으나 무형의 강기를 손에 머금고 나뭇가지를 잘라 내었던 것이다.
비록 일행들이 모두 진호의 등을 보고 있었기에 아무도 그 사실을 알지는 못했지만…… 그러나 연지하는 볼 수 있었다.
연지하는 선두에 서서 일행을 이끌고 있는 진호라는 풍운대위사의 등이 왠지 낯설지가 않았다. 몇 달 전 주루에서 봤기 때문이겠지 하고 애써 생각해 봤지만, 자신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가슴속에 묻어 두었던 기억의 파편들이 조금씩 꿈틀거리고 있음을 느끼고 있었다. 점점 더 가슴의 두근거림이 심해졌다.
‘혹시 그 사람이 아닐까? 저 사람도 적건대 출신인 것 같았는데, 그 사람을 알고 있지는 않을까?’
연지하의 눈이 진호가 허리춤에 차고 있는 왜도를 향했다. 왜도가 분명한데 잘 보이지 않았다. 연지하는 자신도 모르게 비스듬히 한 발 나아가 고개를 내밀어 보았다. 진호라는 위사는 나뭇가지를 들고 잔가지를 쳐 내고 있었다. 나뭇가지를 치고 있는 진호의 손에서 투명한 아지랑이들이 일렁이고 있었다.
‘검기(劍氣)? 아니 수기(手氣)라고 해야 하나……. 수강(手|)!’
연지하의 맑고 커다란 눈망울엔 놀라움이 가득했다.
일렁이는 투명한 기운이 나뭇가지를 스치는 순간 분명한 형체를 이루었다. 수강이라고밖에는 볼 수 없었다.
손가락 굵기만 하고 길이는 한 뼘쯤 되는 잔가지 다섯 개를 오른손에 쥔 진호가 전방을 보고 아무렇게나 잔가지들을 던졌다. 잔가지들이 뭉쳐서 휙 하니 날아가더니 갑자기 다섯 방향으로 나누어지면서 나무들 사이에 가서 박혀 들었다.
“크억!”
쿵! 쿵! 털썩!
다섯 명의 살수가 목에 나뭇가지가 박힌 채 떨어져 내렸다.
‘흠, 파산비라는 게 이렇게 하는 거군.’
진호는 나무 위에 매복해 있는 상대를 향해 혈검 구호가 죽기 전에 펼쳤던 파산비를 따라해 보았던 것이다.
“파(破)!”
갑자기 어둠 속에서 살수의 예리한 협봉검이 독사의 이빨처럼 진호의 심장을 향해 파고들었다. 진호는 몸을 오른쪽으로 살짝 비틀어 살수의 검을 왼쪽 옆구리에 끼고선 오른손으로 건곤조를 펼쳐 살수의 턱을 잡았다. 너무나 쉽게 턱이 잡혀 버린 것이 놀라웠는지 화등잔만 하게 커진 살수의 동공에 진호의 차가운 얼굴이 비쳤다.
우두둑!
진호가 턱을 잡은 오른손을 좌우로 빠르게 흔들어 버리자, 살수는 목이 부러진 채 축 늘어져 버렸다. 그 순간 진호의 좌측과 뒤쪽에서 두 명의 살수가 나타나 진호의 허리를 향해 전후좌우로 베어 오고 있었다.
진호는 목이 부러진 살수의 어깨를 왼손으로 짚어 좌측으로 돌려세우면서 두 다리를 띄우고 허공에서 몸을 수평으로 눕혀 살수들의 검이 시체를 베게 하였다.
“커억!”
앞쪽에서 베어 오던 살수가 피분수를 뿜으며 나가떨어졌다.
살수의 검이 시체에 박히는 순간 진호는 오른손으로 앞쪽 살수의 관자놀이 태양혈을 찍어 버렸던 것이다.
우드드득!
뒤쪽에서 공격하던 살수는 척추가 박살나며 그대로 주저앉아 버렸다. 앞쪽의 살수를 해치운 후 다시금 진호의 몸이 허공에서 활처럼 휘어지더니, 뒤쪽 살수의 머리를 넘으며 몸을 세운 후 등을 보이고 있는 살수의 허리를 밟아 버린 것이다.
진호는 살수의 허리를 부숴 버린 탄력을 이용하여 비룡번신의 신법을 펼치며 허공에서 몸을 뒤집은 후, 뒤쪽의 나뭇가지에 내려앉아서 주위 상황을 살피기 시작했다.
이미 곳곳에서 살수들이 모습을 드러내며 일행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소림 속가 출신인 만리독행 염자개는 팔괘진을 이루고 있는 순찰대원들 사이를 누비며 자신의 절기인 무상곤법을 사용하여 살수들을 처리하고 있었는데, 강호의 일절이라고 알려진 그의 신법이 빛을 발하고 있었다. 팔괘진에 공격이 막혀 살수들이 멈칫거릴 때마다 마치 이형환위라도 펼친 듯 순간적으로 나타나서 무상곤법으로 살수들을 해치우고 있었다.
원래 살수들이란 암습에는 강하지만 정공은 그리 강한 편이 아니다. 암습을 하지 못하고 모습을 드러낸 상태의 살수들은 팔괘진을 운용하여 방어를 하고 있는 순찰대원들을 크게 위협할 만한 존재들이 아니었다.
반면에 무위가 훨씬 앞서는 백호단은 남궁전을 포함해서 네 명에 불과하지만 오히려 압도적으로 살수들을 몰아붙이고 있었다. 일반적으로 방어적 형태의 사상진은 선두에 선 자가 상대의 공격을 흘리면, 좌우에 선 사람이 상대를 공격하는 형태를 취한다. 그러나 선두에 선 남궁전은 살수들의 공격을 흘리지 않고 자신이 직접 창궁뇌전검법을 펼쳐 검기를 풀풀 날리며 적들을 해치워 버렸다. 그러자 후위에 처져 있던 백호단원까지 앞으로 나서서 살수들을 해치우기 시작했다. 거의 일렬로 늘어서서 네 명이 각자 살수들을 처치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주작단은 꽤나 고전을 하고 있었다. 공격을 하는 살수들의 인원도 훨씬 많은 것 같았고, 또한 축이 되는 연지하가 한 명의 장년인에게 매여 단원들과 연계를 못하고 있었다. 연지하와 맞서고 있는 장년인은 다른 살수들과는 달리 복면을 하지 않고 얼굴을 드러내고 있었는데, 날카로운 눈매와 길게 그어진 검상만 아니면 꽤나 준수해 보이는 인상이었다. 그는 바로 어둠 속에서 ‘기창’이라고 불렸던 자였다.
진호가 보기에 그자는 여러모로 특이하였다. 복면을 하지 않고 얼굴을 드러낸 것도 그렇고, 또한 집단전에서 유용한 쾌검(快劍)이 아닌 일대일 대결에서나 보이는 중검(重劍)을 쓰고 있었다. 그것은 다른 이들은 안중에도 없고 연지하만을 목적으로 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또한 사내가 중검을 쓴다는 것은 검의 조예가 상당한 경지에 올랐다는 것을 의미했다. 중검이 위력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쾌검이 바탕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흔히 중원에서 중검을 쓰는 대표적인 검법으로 남궁가의 제왕검법을 손꼽는다. 남궁가의 무인들은 쾌검인 섬전검을 익힌 다음 쾌검에 중검의 묘리가 가미된 창궁뇌전검을 익힌 후에야 제왕검을 익힌다. 그 이유는 중검이 쾌검보다 앞서는 검리(劍理)이기 때문이 아니라 쾌검이 받쳐 주지 않는 중검은 상대를 압박할 수도 없고, 공방일치의 검리를 담아 낼 수도 없기 때문이다.
연지하는 무해검법을 펼쳐 검기를 흘리며 상대의 압박을 흩어 보려 했지만 상대의 검은 흔들림 없이 그녀를 압박해 들어오고 있었다. 상대가 좀 더 과감하게 공격을 해 온다면 틈이 생겨나겠지만 상대는 그럴 의도가 없는지 검극만을 살짝살짝 놀려 압박을 해 왔다. 연지하는 초조해 하는 자신을 느꼈다. 이상하리만큼 자신과 주작단원들에 집중된 파상적인 공격에 단원들이 수세에 몰리고 있었다.
핏!
사내의 검이 연지하의 앞섶을 한 조각 잘랐다. 연지하가 초조해 하는 마음이 생기자 찰나의 틈이 생긴 것이다. 그것을 놓치지 않고 사내의 쾌검이 연지하를 베어 왔던 것이다. 연지하가 겨우 뒤로 물러서며 피하기는 하였으나 가슴 앞섶의 옷자락이 베여 떨어져 나가 버렸다. 이것이 바로 쾌검이 중검의 바탕이 되는 이유이고 또한 중검의 무서움이었다. 상대를 압박하여 상대의 심신이 흔들리게 되면 그 찰나의 순간에 상대를 베어 버리는 것이다.
“칫!”
사내는 아쉬움을 한 호흡 삼킨 후 다시 연지하를 향해 검을 찔렀다.
챙!
사내의 검이 좌측으로 튕겨 나왔다. 뒤로 물러선 사내는 튕겨 나는 검을 재빠르게 중심으로 되돌려 다음 공격에 대비하였지만 이어진 공격은 없었다.
“이자는 내가 맡겠소!”
진호였다. 연지하가 위험에 처한 순간 가공할 신법을 발휘하여 나타나 발도를 하면서 사내의 검을 쳐 내며 막아선 것이다. 사내의 아쉬운 한 호흡이 그녀를 살리게 되어 버렸다.
“쳇!”
사내는 다시 검을 진호의 미간을 향해 겨누며 중검을 펼치고 압박해 들어왔다.
연지하는 진호의 등을 바라본 채 전혀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녀의 심장이 급격하게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아! 이 사람, 바로 그 사람이었어. 바보같이 두 번이나 보고도 그를 알아보지 못하다니…….’
연지하는 과거와 비슷한 상황이 벌어지자 눈앞의 사내가 과거 자신을 구해 주었던 소년 무장이란 걸 확신하게 되었다.
진호는 상대가 중검을 펼치며 압박해 오자 도를 잡은 왼손을 한 주먹 머리 위로 올리고 오른손으로 받치며 치켜들었다. 풍운도법의 제육초인 풍운호우의 기수식이었다.
사내는 당황하기 시작했다. 진호의 자세에서 감당할 수 없는 기세가 뿜어져 나왔던 것이다.
전혀 움직일 수가 없었다. 조금이라도 움직인다면 진호의 도에서 뿜어져 나오는 예기가 비처럼 쏟아져 내릴 것만 같았다.
연지하는 진호의 머리 위에서 요요하게 예기를 발하는 도를 쳐다보았다. 희미한 달빛만이 흐르는 어둠 속에서도 너무도 선명하게 도신에 새겨진 두 글자를 읽을 수 있었다.
“정종(政宗, 마사무네)…….”
연지하의 입에서 신음처럼 도의 이름이 흘러나왔다.
진호가 슬쩍 오른발을 반보 앞으로 내밀며 사내를 압박하였다. 사내는 주춤주춤 물러서기 시작했다. 사내는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었다. 자신의 검극이 한 치라도 흔들리는 순간엔 진호의 도가 자신의 몸을 양단해 버릴 것이다.
“으으으…….”
애써 이를 악물어 보지만 사내의 입에서 신음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핑!
챙! 챙!
갑자기 날아든 두 자루의 비수가 진호의 면전에서 나뉘며 하나는 진호의 미간을 향하고 하나는 뒤로 돌아 나가며 연지하를 향했다. 극성의 파산비였다. 그러자 진호가 도를 가볍게 흔들어 두 자루의 비도를 모두 쳐 내 버렸다.
물러서던 사내는 그 순간 진호를 공격했어야 했다. 그러나 사내는 공격은커녕 다급하게 뒤로 물러서고 말았다. 비도가 날아드는 순간 진호의 도가 움직이며 자신을 향해 거대한 파도처럼 덮쳐 오는 착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이른바 기세검도(氣勢劍道)라고 하는 중검(重劍)의 진정한 위력을 진호가 한 자루 도(刀)로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놈! 드디어 나타났군.’
분명히 숨어 있는데 기척을 감지하기가 어려웠던 놈이 나타난 것이다. 그놈을 끌어내기 위하여 허초로 눈앞의 사내를 베는 것처럼 하자 놈이 먼저 움직였다. 그로 보아 이 앞의 사내도 꽤나 중요한 인물일 것이다. 진호는 파산비를 쓰는 자를 잡으려는 생각을 버리기로 했다. 포로는 눈앞의 사내면 될 것 같았다.
‘이 사람은 정말 강하구나.’
진호가 비도를 쳐 내자 퍼뜩 상념에서 깨어난 연지하는, 비록 진호의 등 뒤에 서 있었지만 순간적으로 흘러나온 진호의 가공할 기세를 어렴풋이 느꼈던 것이다.
진호가 갑자기 오른쪽 아래로 도를 내려 베어 버렸다. 사내는 다급히 검을 들어 막았다.
챙!
사내의 검은 아무런 충격이 없었다. 진호의 면전으로 날아온 비도가 튕겨 나며 내는 소리였다. 비도를 튕겨 내기 전에 진호의 오른손이 꿈틀거렸다.
펑!
“큭!”
십 장 밖에서 검은 인영 하나가 피분수를 뿜으며 나무에서 굴러 떨어졌다. 그의 가슴은 함몰이 된 채 박살이 나 있었다.
“백보신권!”
“십단금!”
상황이 정리가 되어 가자 여유를 가진 염자개와 남궁전이 진호가 도를 뽑아 든 걸 알고 이쪽을 주시하고 있다가 놀라며 동시에 소리를 친 것이다. 두 사람 모두 진호의 오른손 움직임을 정확히 보지 못하고 격공장만을 보았던 것이다. 소림 속가인 염자개의 눈에는 진호의 격공장이 백보신권으로 보였고, 진호가 무당의 속가제자라는 사실을 생각한 남궁전의 눈에는 십단금으로 보였던 모양이다. 두 사람은 동시에 서로를 쳐다보았다.
그것이 백보신권이든 십단금이든 중요한 게 아니었다. 진호가 십 장 밖의 적을 격살할 만큼 위력적인 격공장을 사용할 수 있는 고수라는 사실이 더 중요했다.
“사부!”
진호 앞에 선 ‘기창’이라고 불렸던 사내가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코흘리개 어린 시절부터 자신을 길러 준 사람이었다. 먹여 주고 재워 주고 무공을 가르쳐 준 사람이었다. 이따금 훗날 자신을 원망하게 될 거라며, 미안하다는 말을 하곤 했으나 자신은 단 한 번도 그를 원망하지 않았다. 자신이 속한 단체가 무엇을 어떻게 하든 상관없었다. 자신은 그저 시키면 할 뿐이었다. 아버지이자 스승이고 상관이었던 그가 원하는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그가 자신의 눈앞에서 가슴이 짓이겨진 채 나뒹굴고 있는 것이다.
“으아!”
사내는 괴성을 지르며 미친 듯이 진호를 찔러 갔다.
우두둑!
이미 납도(納刀)를 한 진호가 몸을 반보 좌측으로 옮기며 사내의 검을 피하곤 왼손으로 검을 쥔 사내의 손목을 잡더니 안쪽에서 바깥쪽으로 돌려 버렸다. 그러자 사내의 손목뼈가 그대로 부서진 것이다.
“크윽!”
이어서 진호가 오른발로 사내의 복부를 나한각으로 밀어 차 버리자 사내는 고통에 찬 외마디 신음과 함께 일 장 밖으로 나가떨어졌다.
퍽!
쓰러진 사내가 고통을 못 이겨 입을 벌리자 진호가 발밑의 돌멩이를 냅다 걷어차 사내의 입에 틀어박아 버렸다. 추호의 흔들림도 없는 냉정한 처리였다.
‘이 사람은 여전히 차갑구나.’
연지하는 진호의 차가운 모습을 보며 과거를 떠올렸다. 전투가 끝나고 전장을 정리하는 가운데 생명의 구함을 받은 데 감사를 드린다고 하자, 소년 무장은 냉막한 표정으로 한마디 말도 없이 돌아섰다. 그러곤 냉정하게 전장 정리와 포로 처리를 명하고 있었다. 포로들은 모두 단칼에 목이 날아갔다.
‘흡!’
연지하가 생각에 잠긴 사이 진호가 뒤돌아서서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너였군.”
진호가 연지하 곁을 스치며 나직이 말하였다.
연지하는 끝내 잡지 못하였다. 다시 들려온 말에 더욱더 얼굴이 빨개진 상태로.
“넌 볼 때마다 가슴이 열려 있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