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진호전기 1권(9화)
제4장 위사 진호(衛士陳浩)(2)
하얀 백포를 입은 네 명의 인물들이 전방에서 나타났다. 그들의 소매에는 백호가 수놓아져 있었다. 백호단주 창궁검협 남궁전과 백호단 단원들이었다.
장오가 읍을 하며 나섰다.
“풍운대 이십사조 조장 장오입니다.”
“남궁전일세.”
백호단주 남궁전은 서른이 좀 넘어 보였다. 키가 크고 마른 체형에 부드러운 눈매를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각이 진 사각 턱이 강인한 인상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백호단주님을 뵙습니다.”
“음, 자네들이 잡았나?”
남궁전이 의외인 듯한 표정을 지으며 손목이 잘리고 발목이 부러진 채 쓰러져 있는 살수를 쳐다보며 물었다.
“넷!”
장오가 대답을 하는 순간.
“헛!”
남궁전이 급하게 살수의 아혈을 짚어 갔으나 이미 살수의 입가에선 선혈이 주르르 흘러내리고 있었다. 갑자기 백호단이 나타나 잠시 혼란한 틈을 타서 독단을 물고 자결을 한 것이다. 이미 늦었다는 사실을 알고는 아쉬운 표정으로 일어서는 남궁전의 눈에 잘려 나간 살수의 손목 부분이 들어왔다.
‘정말 깨끗한 솜씨군.’
“자네인가?”
남궁전이 풍운대를 둘러보고는 진호를 보며 물었다.
“예.”
진호는 무덤덤하게 대답을 했다.
남궁전은 진호가 허리춤에 차고 있는 도를 보았다.
“좋은 도를 가졌군.”
아마도 남궁전은 진호의 도가 예리하여 살수의 손목을 깨끗하게 잘라 내었다고 생각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왜도인가? 아! 그렇군, 바로 자네였군.”
남궁전은 불현듯 풍운대회의 사건이 생각난 모양이었다.
“…….”
“단순히 매풍검 방진헌이 방심하였던 것만은 아닌 것 같군.”
진호를 쳐다보는 남궁전의 부드러운 눈엔 호기심이 어려 있었다.
“전령이 옵니다.”
황노칠이 전방을 보며 외쳤다.
“순찰부 십이호 전령 백두영이 백호단주님을 뵙습니다.”
일행의 앞에 나타난 전령은 남궁전을 보며 읍을 하였다.
순찰부 소속의 전령들은 전언을 하기 전에 자신이 몇 호 전령인지를 밝혀야 했다. 그냥 전령에게 전해 들었다는 것과 몇 호 전령 누구에게 들었다는 것은 책임 소재가 확실하게 달라지는 것이다.
“오랜만이군, 두영. 그래, 무슨 일인가?”
남궁전은 십이호 전령과 익히 아는 사이인지 그의 이름을 반갑게 부르며 상황에 대해 물었다.
“살수로 보이는 자들이 나타났으니 각 분초는 사주경계를 철저히 하고 수상한 자를 발견 즉시 신호전을 올리라는 것이 이곳 분초에 전달된 공식적인 전언입니다.”
“그래, 공식적인 전언은 그렇고, 상황 설명을 해 보게.”
남궁전이 채근하였다.
“그게…….”
전령은 장오와 풍운대 위사들을 쳐다보았다.
“괜찮아. 말해 보게. 그들이 이미 살수 한 명을 잡았으니 상황을 들을 자격이 있네.”
“예. 두 시진 전에 등룡관의 화산고학 화중일 관주께서 죽은 채로 발견되었습니다.”
“뭐? 화 관주님이?”
남궁전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물었다.
등룡관의 관주면 맹 내 서열 이십 위 안에 드는 거물이었다. 더구나 맹에 진출해 있는 화산파 세력의 수장이었다. 이건 보통 사안이 아닌 것이다.
“외상의 흔적은 없는 걸로 보아 독살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독살이라고?”
의문과 함께 복잡한 복선이 얽혀 들고 있는 느낌이었다.
“예. 그래서 감찰전주님이 비상경계를 명하셨고, 총순찰께서 외곽 상황을 직접 탐문하려고 이동 중에 만난 풍운대 위사 하나가 조원들이 복귀 중에 수상한 자들 세 명을 발견하고 조장 등이 추적 중이라고 하였답니다. 그때 그 조장의 것으로 보이는 신호수전이 올랐고, 상황이 급하다 판단한 총순찰께서 일급경계를 명하는 신호전을 직접 쏘아올리곤 그곳으로 가 보았더니 이미 풍운대 위사들이 모두 죽어 있었다고 합니다.”
상황을 듣고 있던 장오와 조원들의 표정이 급변했다. 그 시간에 복귀하던 조원들이면 삼십삼조일 가능성이 있었다.
“혹시 그들이 몇 조라고 합니까?”
장오가 다급하게 물었다.
“삼십삼조라고 하더군요.”
“반 조장님!”
장오를 비롯한 조원들의 표정이 참담하게 일그러졌다.
곧 보게 될 손자 생각에 해맑게 웃던 반가문의 얼굴이 떠올랐다.
오랜 세월 전장에서 늘 죽음과 함께했고 수없이 많은 죽음에 관여한 진호였지만 그 역시도 이놈의 죽음엔 결코 익숙해지지가 않았다. 진호는 독단을 깨문 뒤 입가에 선혈을 흘리고 쓰러져 있는 살수의 시신을 보았다.
‘그의 죽음을 기억하는 이는 있을까?’
흙에서 나서 흙으로 돌아가는 것이 자연의 이치. 조금 빠르고 조금 더 늦다는 차이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라고 늘 생각하고 살지만, 그러나 결코 익숙해지지가 않았다. 어쩌면 죽음을 경외하고 떠나간 자들을 안타까워하는 것은 살아남은 자들의 의무일지도 몰랐다.
피잉!
상념을 깨고 신호전 한 대가 동남쪽으로 향해 날아갔다.
“흔적이 발견된 모양입니다. 동남 방향이면 전당강 방향입니다.”
백두영이 남궁전을 보며 말했다.
“그렇군. 두영, 총순찰에게 상황을 전하게. 장 조장 자네 조의 공은 상부로 바로 상신하겠네. 여기를 수습해 주게. 그리고 지원대가 오면 살수의 시체와 잘려진 부분도 단서가 될 수 있으니 맹으로 옮겨 주게.”
남궁전은 한 부대를 이끄는 수장답게 일사불란하게 지시를 하였다.
“음, 진호라고 하였나? 자네는 우리와 같이 가지. 장 조장, 그래도 되겠지?”
남궁전은 진호에게 강한 호기심을 느끼고 있는 모양이었다.
“예.”
장오는 진호를 보면서 대답을 했다.
진호는 그저 말없이 서 있었다.
“단주님, 그럼 전 먼저 가서 보고를 드리겠습니다.”
십이호 전령 백두영이 물러갔다. 이윽고 백호단과 함께 진호가 전당강이 있는 방향을 향해 경공을 펼치며 떠나갔다.
남아 있는 조원들은 살수의 시체를 이송하기 좋게 갈무리하고는, 긴장을 풀지 않은 채 지원대를 기다리고 있었다.
“시발, 영감탱이! 좀 있으면 손자 볼 인간이 그냥 모른 체하고 지나가지, 쓸데없이 꼬장꼬장해서는 왜 자기가 나서 가지고……. 니미럴…….”
장오는 아저씨처럼 따랐던 반가문의 죽음이 못내 아쉬운지 나직이 흐느끼고 있었다.
어색한 분위기가 계속되는 게 싫었는지 황노칠이 나섰다.
“에이 시발, 우리가 뭐 이런 일 한두 번 당하는 것도 아니고 그만 합시다! 젠장, 나도 조금 전에 저승 문턱까지 갔다 왔다고. 진호 형님 아니었으면, 시펄.”
“노칠이 이 새끼, 입 안 다물어!”
막형구의 인상이 일그러지며 고성이 터져 나왔다.
“그만! 그만 해라. 노칠이 말이 맞다. 우린 풍운대 위사이기 전에 무림인이다. 언제 어디서 칼날에 맺힌 피의 이슬이 되어 사라질지 모르는 무림인 말이다. 미안하다. 그만 하자!”
장오가 막형구를 만류하였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모두들 자신만의 상념에 빠져 있는 듯하였다.
“형구 형님! 근데 아까 진호 형님이 펼친 거, 그거 풍운도법 아니오?”
“그래. 내가 보기에도 풍운도법 같던데, 조금 다른 듯도 하고…….”
황노칠의 물음에 막형구도 진호의 움직임에서 느꼈던 그 무엇인가를 떠올리고 있었다. 풍운도법의 풍림화산과 운중광휘, 두 초식이 맞는 것 같으면서도 뭔가 달랐다.
“풍림화산과 운중광휘, 두 초식이 맞다.”
장오가 둘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근데 그거 좀 이상하지 않아요? 풍림화산 다음에 운중광휘를 펼치면 흐름이 이상하지 않나?”
막형구가 황노칠의 동의를 구하는 듯이 질문을 했다.
“형구야! 네가 그러니 문제다. 풍운도법의 칠 초는 순서와 관계없이 어떤 초식이든 연환이 부드럽게 이루어진다. 끙, 풍운도법을 배운 지 사 년이 된 놈이 이제 갓 배운 놈도 자연스럽게 쓰는 이치를 모르니…….”
장오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장오와 형구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노칠은 딴생각을 하고 있었다.
‘아 스발, 복귀하면 당장 진호 형님한테 들러붙어서 한 수 배워야겠다.’
***
남궁전은 창궁비를 펼치면서 나아가며 진호를 살폈다. 진호는 백호단원들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한 채 묵묵히 따라오고 있었다. 특별히 눈에 띄는 신법이 아니었다. 유운보법의 변형인 유운신법 같았다. 다른 단원들만 아니었다면 속도를 올려 보고 싶었다.
“단장님! 시체입니다.”
백호단원 중 한 명이 외쳤다.
“음, 순찰부 대원들이군.”
남궁전이 낮게 침음을 흘리며 말했다.
쓰러져 있는 세 구의 시체들의 목줄기에는 비도가 꽂혀 있었다. 가운데 쓰러져 있는 대원의 손엔 궁이 하나 들려 있었다. 그가 좀 전의 신호전을 쏘아 올렸던 대원인 모양이었다.
“다른 흔적은 없나?”
남궁전은 말을 던지며 진호를 쳐다보았다.
진호는 남궁전이 자신을 보며 물음을 던지자 이채를 살짝 띠고는 주위를 일별한 후 대답을 하였다.
“적은 한 명. 도주 방향은 여전히 동남쪽입니다.”
진호가 간략하게 대답을 하였다.
남궁전은 다시 백호단원들을 쳐다보았다. 세 명의 백호단원들은 고개를 갸웃하고 있었다.
“세 명 모두 한 방향을 보다가 당했습니다. 세 자루의 비도를 동시에 던졌습니다. 아까 그자와 같은 수법입니다. 그자는 다섯 자루를 동시에 던졌습니다. 여러 자루의 비도가 뭉쳐서 날아오다가 어느 시점에서 갑자기 분산되며 방향이 갈라지는 수법이었습니다.”
“파산비의 수법이군.”
남궁전이 고개를 끄덕였다.
“적의 발자국은 어지러이 여러 방향으로 나 있지만, 밟았던 풀의 방향이 모두 동남쪽을 향하고 있습니다.”
“역시 그렇군. 동남쪽으로 가자!”
남궁전이 앞으로 나섰다.
“아마도 매복이 있을 겁니다.”
진호가 한마디를 덧붙였다.
“매복?”
남궁전은 걸음을 멈추고 진호를 보았다.
“비도를 던진 수법으로 보아 하급 살수가 아닙니다. 그런 자가 눈에 띄게 풀이 눌린 자국을 남겼다면 유인책으로 보아야 합니다. 아마 매복 지점은 전당강변의 모래사장일 것입니다.”
“그렇군. 그래도 가 봐야겠지. 가자!”
남궁전은 진호의 말을 듣고 충분히 그럴 가능성이 있다고 수긍이 갔다. 그러나 자신은 백호단주 창궁검협 남궁전이었다. 살수의 매복 따위가 두려워 망설이는 사람이 아닌 것이다.
진호와 일행이 강변에 이르자 백사장은 쥐 죽은 듯이 고요했다. 물살이 급하기로 유명한 전당강의 급류만이 격한 소리를 내며 달리고 있었다. 남궁전이 진호를 슬쩍 쳐다보았다. 진호가 한 발 나서며 백사장의 모래를 한 움큼 쥐었다 놓았다. 정확하게 열다섯 곳에서 토기(土氣)의 흐름이 끊겨 있었다. 가장 가까운 곳은 이 보 앞, 진호가 두 걸음 앞으로 나아가서 갑자기 진각을 밟았다.
“크윽!”
진호가 밟은 모래 밑에서 쥐어짜는 신음이 터져 나왔다.
“파!”
그 순간 모래 기둥들이 치솟아 오르며 십여 명의 흑의인들이 나타나서 일행들을 향해 검을 찔러 왔다. 남궁전과 백호단원들은 이미 예상하고 있던 터라 별반 놀람 없이 검을 뽑아 들고 마주쳐 갔다.
백호단주인 남궁전의 무위는 과연 발군이었다. 남궁전이 자신을 향해 찔러 오는 살수의 검을 향해 마주 찔러 가다가 한순간 손목을 가볍게 털자 살수의 검이 튕겨 나가면서 목젖이 드러났다. 드러난 목젖에 파르스름한 검기를 품은 남궁전의 검이 번개가 무색할 정도로 빠른 속도로 박혀 들었다.
‘창궁뇌전검!’
남궁전의 검공을 본 진호가 속으로 뇌까렸다.
창궁뇌전검은, 유유히 흔들리다가 갑작스런 움직임으로 상대의 검을 쳐 내고 그로 인해 드러난 상대의 허점을 향해 뇌전처럼 빠르게 검기를 담은 쾌검을 찔러 넣는 모습이 바로 푸른 창궁에서 우레와 함께 갑작스럽게 뇌전이 내리꽂히는 모습과 같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창궁뇌전검은 ‘탄(彈)’과 ‘시완종급(始緩終急)’이 그 요체이다. ‘탄(彈)’이라 함은 검면으로 상대의 검을 갑작스럽게 튕겨 내어 방어를 무너뜨리기 위함이고, ‘시완종급(始緩終急)’은 처음은 느리나 끝이 빠르다는 말로 상대의 속도감에 왜곡을 주는 방법이다.
남궁전은 손목을 조금 위로 들었다가 가볍게 아래로 당겨 적의 목에 박힌 자신의 검을 능숙하게 빼내면서 좌측 하단으로 내려 베어 자신의 왼 허리를 베어 오는 살수의 검을 튕겨 내곤, 손목을 역으로 돌려 검을 상대의 목에 대고는 한 발 나아가며 그대로 그어 버렸다.
살수의 목이 몸통과 분리되며 치솟아 올랐다. 적의 목을 베어 버린 남궁전의 검은 멈추지 않고 나아갔다. 남궁전은 일도양단의 기세로 자신의 머리를 베어 오는 살수의 검을 막고는 머리 위에서 손목을 오른쪽으로 되돌려 검을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길게 내려 베어 버렸다. 남궁전의 머리를 베어 오던 살수는 왼쪽부터 허리가 잘려 무너졌다.
찰나지간에 세 명의 살수를 해치워 버린 남궁전은 새로운 먹잇감을 찾아보았다.
백호단원들은 능숙하게 살수들을 상대하고 있었다. 남궁전의 시야에 진호의 모습이 들어왔다. 진호는 풍운도법을 펼치며 살수들을 상대하고 있었다.
두 명의 살수가 진호의 앞뒤에서 공격을 하고 있었다.
진호가 앞에서 자신의 심장을 찔러 오는 살수의 검을 향해 도를 우측으로 비스듬히 마주 내밀며 좌측으로 반삼재보를 밟아 몸을 피하자, 진호의 등을 찔러 가던 살수의 검은 허공을 찔러 댔고, 앞쪽 살수의 검은 진호의 검에 붙은 듯이 빨려 들어가며 동료 살수의 배를 찔러 버렸다. 그리고 진호의 도가 부드럽게 진호의 등 뒤에서 돌아 나와서는 앞쪽 살수의 정수리를 한 치가량 베고 나왔다. 그때 배를 찔린 뒤쪽의 살수가 이를 악물며 고개를 들자, 앞쪽 살수의 머리 위에 잠시 멈췄던 진호의 도가 오른쪽으로 횡을 그리며 돌아 나가 뒤쪽 살수의 목을 베어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