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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호전기 1권(8화)
제3장 풍운대회(風雲大會)(3)


그러나 그 후로 한참 동안은 노칠과 장오가 끼는 술자리만큼은 그날 사건이 가장 중요한 안주가 되었다.
물론 가장 영향을 받은 곳은 소하무관이었다. 풍운대회를 통해 위사가 된 것만 해도 자랑할 일인데, 매화검수를 비무에서 꺾었으니 그 여파가 없을 리가 없었다.
석 달이 지난 지금까지도 소하무관은 입관 지원자들로 북적거렸다.
원래가 번거로운 것을 싫어하는 진호는 잠시 격한 마음에 쓸데없는 짓을 벌였다고 자책하였다. 한편으로 생각해 보면 자신과 화산파는 질긴 악연이 있는 것도 같았다. 게다가 최소한 한 번의 충돌은 더 남아 있었다.
진호는 전역을 하고 난 뒤 선친의 묘소를 찾았을 때 나직이 물었다.
‘아버지, 제가 나중에 그 사람을 만나서 한번 물어볼까요? 진산제자는 속가제자에게 몰리게 되면 문파 간의 비무에서 사용이 금지된 독랄한 살초를 써도 되냐고, 진실로 그 일을 후회는 하냐고. 그래요. 화산제일검 매화검제 화무진, 그 사람을 만나서 제가 나중에 한번 물어볼게요.’
그 말을 한 사람은 다름 아닌 ‘출언필행(出言必行) 소하귀동’ 진호였다.

***

“오랜만일세.”
화려하게 장식된 대전의 원탁에 앉아 있는 붉은 혈안을 지닌 노인이 맞은편의 중년인을 보며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네, 그동안 강녕하셨습니까?”
허리를 숙여 부복을 하는 청수한 중년인은 입가에 웃음을 머금고 있었지만, 눈빛만은 차갑게 빛나고 있었다.
“나야 늘 그렇지, 클클클. 그래, 그리려 하던 그림은 잘 그려지고 있는가?”
혈안의 노인은 앞에 놓인 차를 한 모금 마시며 물었다.
“예, 어느 정도 밑그림은 다 그려진 것 같습니다.”
“클클, 수고했네. 무지한 것들이라 다루기가 쉽진 않았을 텐데…….”
“물고기들이야 미끼를 보면 달려드는 게 자연의 이치 아니겠습니까?”
“제법 밑밥을 많이 뿌렸나 보군. 고생깨나 했겠어.”
혈안의 노인이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고생은요, 생각보다 장강의 잉어가 욕심이 많더군요.”
청수한 중년인이 살짝 미소를 흘리며 답하였다.
“클클, 제법 씨알이 굵었던 모양이군. 그래, 남쪽은 상황이 어떤가?”
“네, 조만간 식탐이 강한 애완견 한 마리가 상한 고기를 덥석 물고는 죽어 나자빠질 것입니다.”
“개 주인이 난리가 나겠군.”
“옆집의 놈팡이를 의심하겠지요. 그러다가 서로 주먹질을 하면야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놈팡이를 조사한다고 집만 비워도 충분할 것입니다.”
“빈집에 승냥이 떼들을 몰아넣어 남아 있는 개들과 싸우게 한다?”
혈안 노인이 입가에 만족한 미소를 지었다.
“후후후,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그림이 나올 것입니다.”
청수한 중년인이 지은 차가운 미소가 더욱 짙어지고 있었다.
“클클클, 잡종견 한 마리 때문에 동네가 시끄럽겠군. 그래서 개나 사람이나 혈통이 중요하지. 혈통이 좋은 개들은 상한 고기를 탐하지 않는단 말이지. 클클클.”



제4장 위사 진호(衛士陳浩)(1)


“반 조장님, 수고하셨습니다.”
장오가 조원들과 함께 청산 서쪽 기슭에 세워진 풍운대 제십육 분초에 나타났다.
“어이, 장 조장! 일찍 왔네그려.”
정의맹 풍운대 삼십삼조 조장 반가문이 장오와 조원들을 반갑게 맞이하였다.
“하하, 제가 빨리 교대를 해 드려야 어서 가셔서 마나님과 따뜻한 아랫목에서 콩을 까실 것 아닙니까?”
“예끼 이 사람아, 내가 나이가 몇인데…….”
반가문은 주름진 얼굴로도 해맑게 웃으며 말했다.
“오십 줄이면 아직 팔팔하실 때 아닙니까? 하하하!”
장오가 호탕하게 웃음을 터뜨리고 있었다.
“헐헐…… 아니 아니, 요즘 완전 불립(不立)이야.”
“헐! 벌써 불립이면 우짭니까? 크크크.”
“그래서 그런지 요즘 마누라가 방방 뜨는 게 피곤혀. 헐헐.”
“제가 비방이라도 한번 알아봐 드릴까요?”
장오는 제법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비방 같은 소리 하지 말고, 좀 있으면 손자 놈 볼 건데 춘삼이한테 이야기해서 우리 며느리 먹일 미역이나 좋은 걸로 구해 줘.”
“아이고, 벌써 산달이 다 되었네요. 손자 보게 됐다고 자랑하던 게 엊그제 같은데, 암튼 소식 오면 바로 신호전 쏴 주십시오. 미역 꾸러미 들고 득달같이 달려갈 테니, 하하하.”
“그려, 그려. 흠, 근데 저 친구는 얼굴이 낯설군……. 그렇군! 저 친구가 바로 그 유명한 신입인가 보군.”
반가문은 장오의 조원들 가운데 서 있는 진호를 유심히 보고 있었다.
“아, 예. 호야, 인사 드려라. 삼십삼조의 반 조장님이시다.”
장오가 진호를 보고 손짓하였다.
“처음 뵙겠습니다. 진호라고 합니다.”
“하! 눈빛이 좋구먼. 상(相)도 좋고. 위사나 할 사람이 아니구먼.”
반가문은 진호에게서 눈을 떼지 않고 있었다.
“하하하, 이제 관상도 보십니까? 만복루 앞에 자리 하나 깔아 드릴까요? 크크크.”
“헐헐, 우리 나이쯤 되면 많은 게 보여. 반풍수쯤 되지. 자, 그럼 수고들 하게.”
반가문은 한차례 손사래를 치고는 조원들을 데리고 사라져 갔다.
교대조가 사라지기 무섭게 황노칠이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아, 시바! 한밤중에 오가는 놈들이 어디 있다고 야간 번초를 서라고 지랄들이야. 시펄, 지금이 뭐 전시도 아니고 말이야…….”
황노칠은 뭔가 불만이 있는지 혼자 투덜거리고 있었다.
“다 생각이 있으니 시키겠지.”
애써 노칠을 달래는 장오 역시 야간 근무가 맘에 들지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근무지가 바닷가에서 산으로 바뀐 것이다.
“지미 시펄, 지들은 비단 금침에서 야들야들한 것들 끼고 삐꾸삐꾸 하고 있으면서, 혈기 방장한 청춘이 야밤에 근무 서는 이 고통을 알기나 하겠수? 에이 시바, 이놈의 모기 새끼들이 내공이라도 익혔나, 지금 때가 어느 땐데 안 죽고 달려들고 지랄들이야.”
황노칠이 신경질적으로 팔을 휘두르고 있었다.
“노칠이 네놈한테 달려들 정도면 내공이 노화순청에 이른 놈들인가 보네. 네 녀석의 방귀신공 호신강기를 뚫고 들어가야 하니. 크크크.”
부조장인 막형구가 노칠을 보며 말을 했다.
“킁, 그래도 형구 형님의 구취신공만 하겠수?”
황노칠이 입을 삐죽거리고 있었다.
“그만들 해라! 노칠이 이 자식, 오늘따라 왜 이리 투덜거려? 달거리라도 하냐? 크크크.”
장오가 한마디 거들었다.
“에이 쉬……. 내가 뭐 계집애도 아니고, 달거리는 무슨…….”
“크크크, 모르지. 안 벗겨 봤으니. 이놈 이거 진짜 바지 밑에 명주 속곳 입고 있는 거 아냐? 오늘 하는 짓을 보니 화월루 앵춘이 년 달거리할 때보다 더 지랄하구만.”
장오가 입가에 치기 어린 웃음을 한가득 안고서 황노칠을 놀려 댔다.
“에거, 조장님. 저놈 지랄하는 이유야 뻔하지 않습니까. 신입 하나 받아서 막내 신세 면하나 했더니, 진호 형님이 떡하고 나타나니 대놓고 말도 못하고 저 지랄이지요.”
막형구가 슬쩍 진호 쪽을 쳐다보곤 말을 하였다.
“아니, 형구 형님! 뭔 소리요!”
황노칠이 황급히 손사래를 치며 진호의 눈치를 살폈다.
순간 진호의 검미가 꿈틀거렸다.
‘으헉! 젓 됐다!’
황노칠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
‘음. 아무래도 칼 소리 같았는데…….’
진호는 그때 어렴풋이 들려온 미약한 소리가 묘하게 거슬리고 있었다.
“뭐야! 노칠이 이 자식이, 내가 진호를 우리 조에 영입하려고 얼매나 애를 썼는데…….”
장오가 정색을 하며 언성을 올렸다.
“킁, 다른 조장들이 아무도 감당하지 못한다고 우리 조에 들어온 거 아니오? 나는 그렇게 들었는데…….”
황노칠은 시큰둥하게 대답하면서 진호를 살피고 있었다.
“그게…… 호야…….”
장오가 진호를 보며 말을 하려다, 진호가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을 보고 정색을 하고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피잉! 피잉! 피잉!
세 발의 신호전이 맹이 있는 쪽에서 밤하늘로 치솟아 올랐다.
“일급경계! 천라지망! 풍운전개!”
동시에 복창을 한 조원들이 장오를 중심으로 사방으로 전개하며 사주경계에 들어갔다. 세 발의 신호전은 천라지망과 경계 강화를 알리는 신호였다. 자세한 상황은 순찰 전령이 도착해 봐야 알겠지만 뭔가 사단이 난 모양이었다.
사주경계에 들어간 조원들의 표정에서는 조금 전 농지거리를 하며 시시덕거리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거의 반 시진 가까이나 침묵의 시간이 이어졌다. 마침내 침묵을 깨고 먼저 입을 연 것은 역시나 황노칠이었다.
“뭔 일이래, 시바…….”
“노칠!”
장오의 입에서 다급한 고성이 터져 나왔다.
그러나 장오의 외침보다 진호의 행동이 더 빨랐다. 황노칠의 반대편에 서 있던 진호가 갑자기 땅에서 솟아난 듯 황노칠의 앞쪽에 나타났다.
칭! 칭! 칭! 칭! 칭!
쇳소리가 나며 다섯 자루의 비도가 사방으로 비산하였다.
진호의 손에 언제 뽑혔는지 차가운 냉기를 요요하게 뿜어내는 도신(刀身)이 달빛 아래 번뜩이고 있었다.
혈검회의 특급 살수 혈검 구호는 지금 욕설이 치솟아 오름을 느껴야 했다. 뭔가 일이 심하게 꼬여 가는 느낌이었다. 처음 임무를 부여 받았을 땐 정말 코웃음을 쳤다. 자신과 같은 특급 살수의 임무라기엔 너무 쉬운 일이었다. 정의맹의 장로도 아니고 겨우 시비 하나를 처리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항주에서 두 명의 특급 살수가 더 합류하였을 땐 뭔가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다행히 정의맹에 침입하여 기회를 보다가 목표를 제거하고 빠져나올 때까진 아무런 문제도 없었다. 일은 청산의 초입에 다다르면서 꼬이기 시작했다. 청산으로 오르는 길이 시작되는 곳에서 풍운대 위사로 보이는 자들과 마주쳤다. 그들 중 중늙은이의 눈빛이 마음에 걸렸다. 아니나 다를까, 조금 전에 마주친 자들이 자신들을 미행하고 있었다.
조장인 혈검 오호가 갑자기 그들을 제거해 버렸다. 신중하지 못한 행동이었다. 따르는 자들이 다섯 명에서 네 명으로 줄었다는 것은 보고자가 남았다는 것이다. 게다가 한 번에 다 해치우지 못해서 중늙은이가 신호수전을 쏠 기회를 준 것은 정말 어리석은 짓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중늙은이가 신호수전을 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바로 정의맹 쪽에서 천라지망을 명하는 신호전들이 날아올랐다. 덕분에 처음 방향을 잡았던 퇴로를 포기해야 했다. 천라지망이 펼쳐진 이상 항주 외곽으로 가는 모든 길들이 폐쇄되었을 것이다. 각자 흩어져서 퇴로를 모색하여야 했다. 그때부터 일이 꼬이기 시작한 것이다.
이놈들도 그렇다. 사신단의 무사들도 아니고 겨우 풍운대의 위사다. 그런데도 자신이 소리 없이 발출한 비도를 막아 내었다. 그것도 다섯 개를 일 도에 다 쳐 내 버렸다. 더구나 비도를 발출함과 동시에 이동하여 은신하였으나 놈은 정확하게 자신이 있는 곳을 노려보고 있었다.
이미 은신이 발각된 이상 움직여야 했다.
‘헉!’
혈검 구호는 속으로 신음을 삼켜야 했다. 움직이려 했지만 움직일 수가 없었다. 움직이려는 순간 차가운 예기가 목줄기에서 느껴졌다. 실제로 칼날이 닿아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움직이는 순간 자신이 난도질당할 것 같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놈은 상상을 초월하는 고수였다. 그래도 움직여야 한다. 특급 살수의 자존심이었다.
진호가 뿜어내는 기도에 짓눌리고 있는 혈검 구호보다도 더 놀라고 있는 사람은 장오였다. 도를 뽑아 든 진호는 전날 방진헌과의 비무에서 보였던 모습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풍운대회에서의 진호가 기본기를 탄탄히 익힌 잘 수련된 무인의 모습이었다면, 도를 뽑아 든 진호는 한 마리의 거친 맹수의 느낌이었다. 단지 옆에서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숨이 턱턱 막혀 왔다. 만약 옆이 아니라 칼을 마주하고 선다면 상상도 못할 압력을 받을 것이다.
비도를 쳐 낸 후 말없이 살수가 있는 쪽을 노려보던 진호가 한 발 앞으로 나아갔다.
쉭!
진호가 한 발을 내딛는 순간, 마침내 혈검 구호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은신을 풀며 끝이 뾰족한 협봉검으로 진호의 천돌혈을 찔러 들어갔다.
진호는 살수의 검이 천돌혈을 찔러 오자 풍운도법 제삼초 풍림화산의 한 수를 펼쳐 도를 우측으로 비켜 올리며 막아 갔다. 순간 혈검 구호의 협봉검이 갑자기 낭창하게 뒤로 휘어지며 우측으로 비스듬히 내민 진호의 손목을 베어 갔다. 특급 살수답게 눈부신 대응이었다.
쓰걱!
진호는 도를 슬쩍 아래로 떨어뜨리며 좌측으로 반보 물러나 살수의 검을 아래로 흘려버리곤, 다시 반보 앞으로 나가며 살수의 오른 손목을 베어 버렸다. 풍운도법 제사초 운중광휘의 한 수였다.
털썩!
혈검 구호의 손목이 칼을 쥔 채 땅에 떨어져 펄떡이고 있었다.
단지 타인들보다 인내심이 좀 더 강할 뿐 특급 살수라고 해서 인간이 아닌 것이 아니다. 혈검 구호도 손목이 잘려 나가자 비명이나 신음 소리는 지르지 않았지만, 잠시 멈칫거렸다.
그사이 진호가 다가서며 삼음교혈 근처인 발목 윗부분을 나한각으로 찍어 버렸다.
우두둑!
뼈가 부러지는 소리와 함께 혈검 구호는 제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살수가 쓰러졌음에도 불구하고 살수의 피를 머금은 진호의 도는 멈추지 않고 전방을 향해 나아가려 하고 있었다.
“멈춰!”
장오가 진호를 제지하고 나섰다.
“백호현세!”
전방에서 구호가 들렸다.
“용호풍운!”
장오가 급히 호응하여 구호를 외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