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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호전기 1권(7화)
제3장 풍운대회(風雲大會)(2)


“어험…… 흠, 출신이 어딘가?”
제삼 심사석의 수석 심사관을 맡은 감찰전 부전주 철심수사 제갈진이 진호에게 물었다.
“항주 소하촌입니다.”
“출신 사문은?”
“무당 속가 소하무관입니다.”
소하무관이라는 말을 듣자 제갈진은 얼른 지원 서류를 살펴보았다.
‘호, 이 녀석이 바로 명진 그 친구가 말한 유운일검의 동생이군. 역시 그런 거였나.’
“개나 소나 무당 속가군. 클클.”
옆자리의 창백한 안색의 심사관이 혼잣말로 빈정대었다. 진호는 그 말을 듣고도 무심히 앞을 보고 있었다. 물론 그자의 소매에 새겨진 매화를 놓치지도 않았다.
“흠…… 그렇군. 내 아까 자네의 태극권 시연을 보았지. 정말 훌륭한 태극권이었어. 진산제자라 해도 그렇게 하기는 어려울 거야.”
제갈진은 일차 관문 때 태극권을 시연하던 진호의 모습을 보고 인상이 깊었는지 심사관으로서는 유례없이 칭찬을 하였다. 덕분에 빈정대던 심사관인 매화검수 매풍검 방진헌은 창백한 안색이 더욱 창백해지고 말았지만 말이다.
“그래, 비무 상대는 누구로 하겠는가?”
제갈진의 말이 떨어지자 장오는 아예 고개를 숙이고 있었고 황노칠은 하늘을 보며 딴청을 피우고 있었다.
“세 분 중 가운데 계신 선배님과 하겠습니다.”
희비가 엇갈린 순간이었다.
장오는 역시 친구란 좋은 것이라고 생각했고 황노칠은 똥 씹어 먹은 표정이 되어 속으로 욕을 해 댔다.
‘지미 시바! 저런 인간이 왜 풍운대회 따윌 나온 겨. 천하의 소하귀동이, 흑수방 서른 놈을 개 잡듯이 잡은 인간이 시바 왜 하필 나냐고! 아, 시바 쪽팔리게 생겼네…….’
속으로 욕을 해 대는 황노칠의 눈에 교활한 눈빛이 돌았다.
“아이고, 호 형님! 진호 형님 맞죠? 긴가민가했더니…… 형님, 저 노칠입니다. 소하촌의 귀염둥이 노칠입니다. 어렸을 때 형님이 저 많이 귀여워해 주셨잖아요.”
‘저, 저, 저 개쉑이가!’
이번엔 장오의 안색이 확 변했다.
“흠, 황 위사와 동향인가?”
제갈진이 물었다.
“아이고, 네! 한마을에서 지낸 형님입니다. 군역을 가셨는데 이번에 전역하셨다더니 풍운대회에 나오셨네요. 헤헤.”
황노칠은 침을 튀기며 떠들어 댔다.
“흠, 그런가? 어찌하나……. 동향 사람끼리는 비무 금지 규정이 있는데…….”
“아, 그렇지요! 부정행위를 막기 위해서라도 금지를 해야 합니다.”
이번엔 장오가 갑자기 거들고 나섰다.
“장 조장, 자넨 또……?”
“아…… 하하! 제가 저 녀석과 불알친구입니다. 노칠이 저놈은 마을 동생이고 말입니다.”
장오는 걱정이 가신 듯 호탕하게 웃으며 말했다.
‘노칠이 이 쉑이, 나중에 보자!’
‘킁. 조장님도 나 덕분에 산 줄 아슈. 케케.’
“흠. 이를 어찌한다? 나머지 한 명은 조금 전에 비무를 치렀고, 지금 비무할 사람은 자네 두 사람밖에 없는데…….”
제갈진이 뒤의 위사를 보며 중얼거렸다.
“반드시 풍운대 위사들하고만 비무를 해야 하는 것입니까?”
진호가 갑자기 의외의 질문을 했다.
“흠, 관례상 그렇게 해 왔지만 반드시 그 대상이 풍운대 위사라는 규정은 없네만……?”
말을 하는 제갈진의 눈에 약간 묘한 빛이 돌았다.
“그럼 저분하고 해도 되겠습니까?”
진호가 가리킨 사람은 청룡단 제팔조 조장 매풍검 방진헌이었다.
“뭣이, 이놈이!”
방진헌은 얼굴이 상기되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개나 소나 하는 무당 속가가 화산의 절학을 견식하고 싶군요.”
진호는 약간은 무표정하게 담담히 말을 뱉었다.
“허! 그게 참…….”
제갈진이 난감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다른 한 명의 심사관인 용호대 부대주 일권붕산 추진양 쪽을 슬며시 보았다.
“규정에 어긋나지 않는다면 굳이 못할 이유도 없겠지요. 부전주께서 그토록 칭찬한 저 친구의 태극권도 보고 싶고…….”
처음엔 도를 차고 있는 진호를 보고 도법을 익혔다고 생각하여 별 관심을 두지 않았던 추진양이지만, 제갈진이 태극권 시연을 칭찬하자 권사(拳師)답게 진호의 태극권이 궁금한 모양이었다.
제갈진에 이어 추진양까지 은근히 비무를 기대하자, 방진헌은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서는 두 심사관들을 쳐다보고는 가볍게 몸을 날려 진호의 앞에 섰다.
“놈! 도를 뽑아라!”
“태극권을 보고 싶어 하는 분이 있어서…….”
진호는 슬쩍 추진양을 보고는, 도를 뽑지 않은 채 방진헌을 향해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이놈이……. 좋다! 오너라! 그 잘난 태극권을 펼쳐 보아라! 선배의 예로써 삼 초를 양보하겠다.”
방진헌은 말을 뱉고는 주먹을 가볍게 말아 쥐고 오른발을 대각으로 살짝 내밀며 무릎을 약간 구부린 자세를 취했다. 화산의 기본권인 육합권의 기수식이었다. 태극권이 무당의 기본권이므로 자신도 화산의 기본권인 육합권으로 상대해 건방진 애송이를 박살 내 주겠다는 의도였다.
진호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슬쩍 앞으로 한 발 나아가며 손을 뻗었다. 진호의 동작에는 전혀 힘이 실려 있지 않아 마치 상대의 양보에 화답하는 뜻으로 손을 내미는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진호의 손이 매풍검 방진헌의 주먹에 닿자 손목이 부드럽게 휘어지며 호선을 그렸다.
펑! 펑! 펑!
갑자기 연달아 세 번의 폭음이 터졌다. 진호는 앞으로 나아가며 똑같은 동작으로 세 번 손을 뻗었고, 방진헌은 처음엔 주먹으로, 두 번째와 세 번째는 다급한 나머지 내기를 실어 팔뚝으로 막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방진헌은 이 장 가까이 물러나야 했다.
“크으!”
방진헌이 벌겋게 된 주먹과 팔을 감싸 쥐고는 거의 비무대의 끝에 서 있었다.
“촌경(寸勁)!”
제갈진은 나직이 탄성을 뱉었다.
촌경은 발경(發勁)의 한 종류를 말한다. 발경은 권기(拳氣)와는 또 다른 의미가 있는 것이다. 권기가 창이라면 발경은 채찍과도 같은 것이다. 두 가지 모두 타격점에 강력한 충격을 주지만 과정이 다른 것이다. 또한 심공의 유무가 달랐다. 권기가 익히고 있는 심공을 운용하여 단전의 내기를 주먹에 실어 뿜어내는 것과는 달리, 발경은 특별한 심공의 운용 없이 육체의 힘만으로도 한곳에 집중하여 폭발시키는 것이 가능하다.
철사장이나 나한권과 같은 강권(剛拳)을 익힌 권사들은 권기에 더 치중하겠지만 무당의 십단금이나 소림의 백보신권과 같은 격공장(隔空掌)을 익히려면 발경을 기본적으로 익혀야 한다. 흔히 무림에서 내가중수법이라고들 말하는 침투경(浸透勁)은 권에 내기를 실어 뻗는 것이 아니다. 이른바 격산타우(隔山打牛)의 묘리를 행하는 것이다. 타격점에 충격을 주지 않고 지나가 그 너머의 어떤 한 점에서 내기를 터뜨리는 것이다. 그래서 금종조나 철포삼과 같은 외문 무공으로도 침투경을 막을 수가 없는 것이다. 촌경이 최소한의 움직임으로 상대를 격하는 것이라면 격공장은 침투경을 발전시켜 거리를 확대한 것이다.
이러한 발경을 하기 위해서는 오랜 시간 완벽한 기본자세를 만련(慢練)하여 침견추주와 함흉발배 등 충실한 기본자세를 바탕으로 송견과 탑요가 완벽하게 이루어져야 하며, 어떠한 상황 변화에도 순응할 수 있는 이른바 ‘공격해도 열리지 않고 파괴해도 산란해지지 않는 혼연일원(渾然一圓)’의 상태를 유지해야 한다. 그래야만 신체의 말단으로 전달된 기가 한꺼번에 폭발되는 것이다.
단지 뛰어난 심공을 익히고 있다고 해서 발경을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단순히 뛰어난 심공만으로 가능하다면, 반야심공이나 태극양의심공을 익힌 소림이나 무당의 제자들이라면 백보신권과 십단금을 쉽게 펼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백보신권이나 십단금을 펼칠 수 있는 제자들은 소림이나 무당에서도 극소수에 불과한 것이 현실이었다.
물론 진호가 촌경을 펼쳤다고 해서 십단금까지 펼칠 수 있을 거라고는 제갈진도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본산의 제자도 아닌 진호가 촌경을 펼쳤다는 것은 놀랍기 그지없는 일이었다.
“이, 이놈! 삼 초가 끝났다.”
생각지도 못한 진호의 촌경에 크게 낭패를 당한 방진헌이 육합만개의 초식으로 강맹한 권기를 담아 순간적으로 여섯 방위를 향해 번개같이 주먹을 내질렀다.
그러나 육합만개의 초식은 채 펼쳐지지 못하였다. 첫 번째 방위를 향해 주먹을 내질렀을 때 이미 진호의 손이 방진헌의 주먹을 가볍게 누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이익!”
방진헌의 얼굴은 더욱 붉어졌다. 화산의 무공이 변화를 핵심으로 삼고 있듯이 육합권 역시 현란한 변화를 주로 펼쳐야 하는데 변화의 시작 단계에서 막혀 버리니 변화를 펼칠 수가 없는 것이다.
다급해진 방진헌이 뻗었던 주먹을 되돌려 검을 뽑으려 하였지만 진호가 유운보를 펼치며 일 보 따라 들어와 거리를 없애 버린 후, 왼발 뒤꿈치와 발목, 허리, 어깨를 약간 회전시키더니 부드럽게 손바닥을 되돌려 방진헌의 오른쪽 가슴에 대었다.
펑!
“크윽!”
외마디 비명과 함께 피를 뿜으며 방진헌이 뒤로 나가떨어졌다. 진호가 전사경을 담아 방진헌의 오른쪽 가슴을 장으로 가볍게 친 것이었다. 방진헌이 검을 뽑으려고 하는 순간 허점은 왼쪽 가슴이 더 있었지만, 왼쪽 가슴엔 심장이 있기에 오른쪽을 공격한 것이다.
제갈진은 물론이고 추진양까지 벌떡 일어섰다.
‘촌경에 이어 전사경까지 쓰다니…….’
두 사람 모두 놀란 것이다.
“크으…… 이놈이!”
비록 내상을 입었지만, 방진헌은 매화검수였다. 어느새 검을 뽑아 들고 삼십육 방을 점하며 한 송이 매화를 피워 내고 있었다.
검파 화산이 자랑하는 이십사수매화검법이 펼쳐진 것이다.
눈부신 은빛 매화 한 송이가 진호의 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헛, 검기!”
제갈진과 추진양이 놀라서 멈칫하는 사이 방진헌의 검이 싸늘한 검기를 뿜어내며 진호의 목 줄기를 관통하고 있었다. 이십사수매화검법 중 매화토염의 일 초였다.
방진헌의 검이 진호의 목을 관통하는 순간, 진호의 몸이 가볍게 일렁거렸다.
팡! 우두둑!
작은 폭음과 함께 방진헌의 검이 날아가고, 어느새 오른쪽 어깨가 탈구된 방진헌이 진호에게 우측 견정혈을 잡힌 채 멍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구경하던 이들은 모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다만, 몇몇 고수들만이 경탄이 가득한 눈으로 진호를 쳐다보고 있었다. 물론 제갈진과 추진양은 상황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방진헌이 검기로 피워 올린 매화 송이를 담은 채 번개같이 검을 찔러 오고, 검이 목젖에 닿는 그 순간까지 미동조차 않던 진호의 신형이 거짓말처럼 흔들리며 방진헌의 검을 흘려버리더니, 손등에 경력을 실어 고권으로 방진헌의 손목을 쳐서 검을 날려 버리곤 건곤조로 방진헌의 곡지혈을 잡으며 우측으로 비틀어 어깨를 탈구시켜 버린 후 견정혈을 잡아 버린 것이다.
“그만! 그만 하시오!”
제갈진이 다급하게 외쳤다.
제갈진의 외침에 진호가 방진헌을 향해 가볍게 목례를 하고는 손을 거두어 물러났다.
방진헌의 눈빛은 진호를 갈기갈기 찢어 버리고 있었지만, 제갈진의 제재를 어길 수는 없었다. 상대는 다른 사람도 아닌 감찰전 부전주였기 때문이다.
“방 조장! 풍운대회 비무에서 검기를 쓰다니, 제정신이오?”
제갈진은 청룡단 제팔조 조장인 방진헌의 직함을 붙여 부르며 엄숙하게 질책하였다.
“그게…….”
방진헌은 뭔가 변명을 하려다 포기한 듯 입을 다물었다.
“이 일은 상부에 보고해서 처리할 테니 일단 의당에 가서 먼저 치료를 받으시오.”
방진헌은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씩씩대며 진호를 노려보다가 제갈진과 추진양을 한 번 쳐다보고는 의당 쪽으로 가 버렸다.
“쯧, 사문의 위세를 믿고 설쳐 대더니…….”
제갈진이 방진헌의 뒷모습을 한심하게 쳐다보았다.
‘금강부동…… 분명히 금강부동신법이었어.’
제갈진이 방진헌을 나무라는 사이 추진양의 눈은 붉게 충혈 되고 있었다. 두 눈엔 투기가 강력하게 발하기 시작했다.
“허! 이 사람, 참으시게. 자네까지 왜 이러나?”
추진양의 기색을 눈치 챈 제갈진이 얼른 만류를 하였다.
“후! 그게……. 그렇죠. 조만간 기회가 오겠지요.”
추진양은 진호에게 도발을 할 상황이 아닌지라 애써 침착함을 찾았다.
“괴물 같은 놈…….”
장오는 진호가 생각보다 더 괴물이 된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저, 저……! 매화검수인 매풍검을 박살 내 버리다니. 시바, 저게 무슨 풍운대 위사 지원자냐고요. 소름이 다 끼치네, 시바.”
황노칠은 잘못했으면 자신이 진호와 비무를 할 뻔했다는 생각에 진저리를 치고 있었다.
“끙, 일단 진호 자넨 합격이네. 그런데 조금 전에 그 도는 왜 뽑지 않았나?”
“제가 도를 뽑았다면 그는 이미 죽었습니다.”
‘헐! 명진, 이 친구. 뭐? 유운일검보다 동생의 자질이 조금 더 나았다고? 저게 조금 더 나은 거냐고! 근데 저놈 진짜 십단금도 펼칠 수 있는 거 아냐?’

***

진호가 풍운대회장을 발칵 뒤집는 사건을 일으키며 정의맹에 입맹한 지도 석 달이 지났다. 그동안 진호는 신입 위사로서 받게 되는 기본 소양 교육과 풍운대의 상징이랄 수 있는 풍운도법 칠 초와 풍운합격진을 수련하였다. 그동안 가끔 타인들의 거북한 시선이 느껴지기도 하였지만, 별다른 마찰 없이 지나갔다.
화산파의 입장에서는 사건이 확대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으므로, 매풍검 방진헌이 방심하여 실수를 한 것으로 치부하였다. 실제로 그렇게 여기는 사람들이 대다수였다. 무림이 인식하는 매화검수는 결코 만만한 이름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한 가지 의외인 것은 진호의 사문이라고 할 수 있고 간접적으로 문파의 위상을 드높인 무당파에서조차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