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진호전기 1권(6화)
제2장 회상(回想)(4)
쾅! 쾅! 쾅!
진호는 태극권 칠십이 식을 펼치며 손발에 수강을 실어 보았다.
“이야호!”
갑자기 진호가 괴성을 지르며 연못으로 뛰어들었다. 진호는 정말 기분이 좋아졌다. 답답하던 현실도 잊어버렸다. 진호는 이제 갓 열다섯이 된 아이일 뿐이었다.
찌지직!
진호가 사라지고 난 뒤 수중 동굴의 벽에 미세하게 금들이 가기 시작했다.
***
“그런데 어떻게 하냐? 출언필행의 신념이 깨어졌으니…….”
장오가 잠시의 상념에서 깨어난 진호를 쳐다보며 고소하다는 듯이 웃으며 말을 건넸다.
“뭔 쉰 소리냐?”
“케케, 기억 안 나냐? 나중에 좀 더 커서 어른이 되면 귀도에 데려가 주겠다고 한 말. 여상이도 들었고 두철이도 들었으니 발뺌할 생각은 하지 마라.”
장오가 득의의 미소를 흘리며 말을 하고 있었다.
“아, 그거…….”
“크크크, 천하의 소하귀동이 뱉은 말을 지키지 못할 때도 있구나.”
출언필행(出言必行).
어렸을 때 무심코 입에 담았다가 버릇처럼 되어 버린 말이었다.
진호가 귀도에서 거북이 알을 가져오자 아이들은 난리가 났다. 아이들의 칭찬에 우쭐해진 진호가 무심코 뱉은 말이 출언필행이었다. 사내라면 당연히 자신이 뱉은 말은 지켜야 한다고 하면서. 어쩌면 실제 어린 시절 진호의 성정을 그대로 대변하는 말인지도 모르겠다.
양교방의 파락호 오십여 명이 진호에게 박살난 것도 이 말 때문에 일어난 일이었다. 진호가 모처럼 아이들과 소하강변에서 고기를 잡고 있을 때였다. 양교방의 파락호들이 상춘회를 한답시고 소하강변에 와서는 왁자지껄 떠들고 난리가 나자 여상이 시끄러워서 고기들이 다 도망간다고 투덜거렸다.
여상의 말을 들은 진호가 아무 생각 없이 ‘조용히 시켜 줄까’라고 물었다. 여상이 피식거리면서 저 아저씨들이 얼마나 무서운 사람들인데 말도 안 된다고 했다. 그러자 진호가 한 말이 출언필행이었다. 그러곤 양교방도들이 있는 곳으로 가서는 조용히 하라고 했다.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양교방도들 중 한 명이 진호의 이마에 꿀밤을 먹이려고 손을 내밀다가 바로 팔이 부서졌다. 그게 시작이었다. 일다경이 지난 후에 입을 열고 있는 양교방도는 아무도 없었다. 모조리 뻗어서는 신음 소리마저 삼키고 있어야 했다. 너무 아파서 신음이라도 내면 귀신같이 진호가 나타나서는 주둥이를 밟아 버렸다. 물론 놀람에 가득 차서 아이들마저 다 도망가는 바람에 고기잡이가 안 된다는 걸 알고 진호가 재미없다며 사라지기 전까지였지만 말이다.
“깨지긴 뭐가 깨져? 지금이라도 그 말 지켜 주지. 당장 갈까?”
진호가 눈가에 약간의 장난기를 머금고 말했다.
“귀도가 없어졌는데 어쩌려고?”
“없어지긴! 물 밑에 그냥 있는 거지, 발도 없는 섬이 어디 가겠냐? 지금이라도 물속에 잠긴 귀도에 데려다 줄 수 있는데……. 뭐 지금은 거북이도 없고 알도 없겠지만 말이야…….”
“컥! 됐다, 사양하련다. 독한 놈! 크크크, 더 어둡기 전에 빨리 내려가기나 하자.”
제3장 풍운대회(風雲大會)(1)
진호가 장오와 같이 옛집이 있던 곳으로 와 보니 집은 그대로인데 못 보던 현판이 하나 달려 있었다.
소하무관(小河武館)
나직이 되뇐 진호가 장오를 쳐다보았다.
“아, 성이 형님이 무관을 차렸다.”
“형이?”
“그래. 너 떠나고 혼인도 하시고 한 오 년 무당산에서 수련하고 오시더니 무관을 여시더구나.”
“그랬냐?”
진호는 십이 년 만에 찾아온 집이 낯선지 여기저기 살펴보았다.
“뭐 하냐? 들어가자!”
장오가 오히려 들어가기를 재촉하며 현판을 지나 마당으로 들어섰다.
“얏! 이 악적! 감히 어디를 침입하는 게냐! 받아랏!”
어린 꼬마 아이 하나가 득달같이 달려와서는 장오를 향해 주먹을 내밀며 외쳐 댔다.
“앗! 소, 소마녀닷!”
장오가 아이의 주먹을 가볍게 막아 쥐고는 호들갑스럽게 너스레를 떨었다.
“이이씨…… 우왕!”
아이는 미간을 찌푸리며 장오의 손을 벗어나려고 했지만 꼼짝도 하지 않자 마침내 울음을 터뜨렸다.
“이런, 이런! 소희야, 아저씨가 잘못했다.”
장오는 아이를 끌어안으며 다급하게 수습하려고 했지만 허사였다.
“놔! 놔! 이 곰탱이야!”
아이는 장오의 품에서 발버둥을 치며 고함을 질러 댔다.
“어허, 소희 이놈! 숙부한테 그게 무슨 말버릇이냐?”
약간은 장난기를 머금고 타이르는 듯한 말을 하며 이젠 제법 중년의 모습이 보이는 진성이 나타났다.
“우앙! 곰탱이 숙부가 나보고 마녀라고 놀렸단 말이에요!”
“어허, 이 녀석이 그래도!”
“에구 형님, 그만 하시구려, 누가 왔는지나 보십시오.”
장오가 그 말을 할 때 이미 진성의 눈은 장오의 뒤에서 서 있는 진호에게 향해 있었다.
“호, 호야!”
진성은 신음처럼 동생의 이름을 불렀다.
“형, 잘 있었어? 이젠 영감이 다 되었네. 배고프다, 밥이나 줘.”
진호는 어색한 상황이 싫다는 표정으로 한 발 들어서며 손사래를 쳤다.
진호가 집에 돌아오자 어머니 한씨는 작은아들의 손을 붙들고는 한동안 말없이 눈물만 흘렸다. 부친은 형이 무당산에 수련을 떠나자 다시금 활력을 찾는 듯했으나 그동안 너무 지나친 과음을 했던 게 병이 되어 재작년에 돌아가셨다고 했다. 선친의 묘소를 다녀온 진호는 무관의 아이들이 수련하는 것을 보거나, 조카인 소희와 장난을 치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숙부!”
“엉?”
진호는 졸린 눈을 비비며 소매를 잡고 흔들고 있는 소희를 보았다.
“또 자고 있었지? 잠탱이…….”
소희는 입을 삐죽거리고 있었다.
“헤…… 요 귀여운 것.”
진호는 귀여워 죽겠다는 표정으로 소희의 볼을 잡고 흔들었다.
“아! 놔! 아프단 말야. 아빠가 빨리 오래!”
본채로 들어서자 진성이 심각한 표정으로 뭔가를 생각하고 있다가 진호를 맞았다.
“왔냐? 앉아라.”
“어…… 무슨 일이야?”
“그래, 이제 어떻게 할 거냐?”
“뭘 어떻게 해?”
진호가 뚱한 표정으로 진성을 보았다.
“앞으로 어떤 계획이 있냐 하는 말이다.”
“글쎄…… 달리 생각해 본 적이 없어서…….”
“미안하지만 내가 부탁이 하나 있다.”
말을 하는 진성의 표정은 약간 굳어 있었다.
“뭔 부탁? 뭔데?”
“조금 있으면 정의맹에서 풍운대회(風雲大會)를 개최한다.”
“풍운대회? 아, 그거. 정의맹에서 위사들 뽑는 대회 말이지?”
진호가 어렸을 때 들어 본 적이 있는 풍운대회를 떠올리며 말했다.
“그래. 바로 그 풍운대회에 네가 나가 줬으면 해서…….”
“엉? 나보고 정의맹 위사를 하라고?”
“그게…… 물론 내가 아는 너의 실력이라면 풍운대가 아니라 사신단의 무사라도 가능하겠지만, 너도 알다시피 대문파의 제자가 아닌 이상 풍운대를 거치지 않고는 사신단이 될 수 없으니…….”
“알았어. 하지, 뭐. 딱히 할 일도 없었는데……. 그나저나 그거 하면 녹봉은 많이 주려나…….”
진성이 동생인 진호에게 풍운대회에 참가하여 위사가 되기를 권한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진호가 군역을 떠난 그 다음 해 무당의 명진도장이 다시금 찾아왔다. 희망을 잃고 오열하던 사제의 안타까운 모습이 못내 마음에 걸렸던 것이다.
사제인 진가섭이 속가제자여서 그 아들들인 두 형제도 속가제자라 할 수는 있지만, 입산하여 도명을 도적에 올린 것과는 또 차이가 많이 났다. 그것이 세상의 인심이었다. 비록 진산제자는 아닐지라도 입산하여 진산제자들과 같이 수련을 했다는 것은 그 의미가 큰 것이었다. 그래서 명진도장은 두 형제 중 한 아이를 입산제자로 받아 주길 청원했고 사제인 운허도장을 아꼈던 장문인 운혜진인이 이를 허락하였던 것이다. 혼인을 한 몸이지만 진성 역시 부친의 낙담에 갑갑해 하던 차에 좋은 기회가 오자 선뜻 명진도장을 따라나섰다.
비록 동생인 진호에게는 못 미쳤지만 진성 역시 뛰어난 무재를 지녔다. 또한 어린 시절부터 부친의 엄격한 지도하에 기본을 착실히 수련했기에 무당산에서 수련을 통하여 뛰어난 성취를 보였다. 진성의 성취는 무당의 후기지수 중에서 단연 두각을 나타낼 정도였다.
그런데 진성은 육 년 전의 신룡대회에 참가한 이후로 갑자기 낙향하여 고향인 소하촌으로 돌아와 무당 속가로서 이름을 걸고 무관을 세웠다. 비록 진성이 신룡대회에서 유운일검이라는 별호까지 얻었지만, 오랜 세월 전통을 쌓으며 기반을 다져 왔던 항주의 다른 무관주들을 압도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런데다가 특별한 연줄도 없으니 무관의 제자들이라고 해 봐야 어린아이들 이십 명 남짓 정도였다. 더욱이 정의맹이 있는 항주에서 무관들을 평가하는 기준은 정의맹의 무사를 얼마나 많이 배출하였는가 하는 것이었다.
정의맹의 무력 부대는 크게 청룡, 백호, 주작, 현무의 사신단과 내성의 경비를 담당하는 용호대와 외성과 분초의 경비를 담당하는 풍운대의 세 부대로 나눌 수 있다. 사신단은 대부분이 천하 각 대문파의 제자들이나 세가의 자제들이 입관하는 등룡관 출신의 무사들로 구성된다. 물론 예외적으로 풍운대나 용호대 출신의 무사가 사신단원으로 발탁되는 경우도 있다.
항주의 무관들과 같은 일반 무관이나 중소 문파의 제자들로서는 사신단원을 배출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현실적으로는 용호대와 풍운대의 위사가 되는 것이 중소 문파나 무관 제자들의 꿈이었다. 용호대는 풍운대 위사로 경력을 쌓아야만 될 수 있으므로 실제로 풍운대회야말로 중소 문파나 무관 제자들에게 있어서는 유일한 등용문인 것이다.
비록 풍운대의 위사가 맹 내에서는 말단이지만, 보수도 괜찮고 무엇보다도 정의맹 초대 맹주였던 도제 팽천립이 직접 창안했다는 풍운도법 칠 초식을 배울 수 있다는 점이 가장 큰 매력이었다. 말단 위사들이 익히는 무공이라고는 하나 당시 천하제일인이었던 도제가 직접 창안한 무공이었다. 일반 중소 문파나 무관의 제자들로서는 접하기 어려운 상승의 비결이 담겨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그래서 풍운대회가 열리면 천하 각지의 무관들과 중소 문파의 제자들이 대거 항주로 모여드는 것이다.
이곳 항주의 오십여 곳 무관들 가운데 풍운대회에 참가하여 풍운대 위사를 배출한 곳은 채 열 곳이 되지 않았다. 그러므로 풍운대 위사가 배출된 무관은 크게 성하게 되는 것이다.
진성의 입장에서는 그 자신이 직접 정의맹에 참가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정의맹 무사 배출을 중시하는 항주 무관들의 풍조를 무시할 수도 없었다. 하나, 풍운대회에 내보내려니 제자들이 아직 어리고 미숙하였다. 그러한 이유로 그동안 풍운대회에 관심을 두지 않았으나, 마침 좋은 시기에 동생인 진호가 돌아온 것이다. 진호가 풍운대 위사가 된다면 항주에서 소하무관을 알릴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는 것이다.
군역을 통해서 동생인 호가 얼마나 변했을지는 모르지만, 진성이 알고 있던 어린 시절 진호의 실력만으로도 차고 넘치는 게 풍운대회였다. 또다시 동생에게 짐을 지우는 게 미안했지만, 진성은 가문을 책임져야 하는 가장이었다. 결국 현실을 따를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
항주성을 벗어나 관도를 따라 북서쪽으로 조금 가다 보면 병풍처럼 둘러싼 청산(靑山)에 기댄 채 서호(西湖)를 내려다보고 자리한 거대 전각 군을 만나게 된다. 그곳에 바로 정의맹이 자리하고 있다.
풍운대회가 한창인 지금 정의맹의 외성 연무장에는 수많은 인파가 운집하여 있었다. 풍운대회가 형식적으로 대회라는 이름을 달고 있으나 목적은 정의맹의 위사들을 뽑는 것이므로 다른 비무대회와는 다른 방법을 취하고 있었다.
지원자들을 어느 정도 추려 내기 위해 일차 관문에서는 간단한 무력 시험을 한다.
일차 관문을 통과하기 위해서는 일 장의 거리를 뛰어넘어야 하고 백 근의 바위를 들어서 옮겨야 했다. 두 가지 시험을 통과한 지원자들은 시험관들이 보는 앞에서 자신이 익힌 무공의 형(形)을 시연(試演)해 보여야 한다.
일차 관문에서는 충당 인원의 세 배수가 뽑혀서 이차 관문으로 보내진다. 이차 관문은 현직에 있는 풍운대 위사들과 비무를 하게 된다. 풍운대 위사들을 이기거나 오십 초를 버티면 합격이 된다. 간혹 특출 난 자들이 있어 지원자가 풍운대 위사를 이긴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 오십 초를 버티기도 힘든 사정이어서 비무를 관찰한 세 명의 심사관의 평가에 따라 당락 여부를 결정한다.
진호는 일차 관문에서 정확하게 일 장 거리를 뛰어넘고, 백 근의 바위를 들었다 놓고는 태극권 칠십이 식을 시연해 간단하게 통과하여 이차 관문으로 왔다.
한참을 기다린 후에 호명을 받고 심사관 앞으로 나갔다.
풍운대 이십사조 위사 황노칠은 풍운대회 비무자 차출 명령을 받고 무척 기분이 좋았다. 맹 내에서는 말단의 하급 무사이지만 풍운대회에서만큼은 존경과 부러움의 시선을 한껏 받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황노칠은 조장인 장오와 삼십삼조 소속의 풍운대 위사 한 명과 같이 제삼 심사석의 뒤에 서 있었다. 역시나 심사관의 뒤에 서 있는 자신을 향해 쏟아지는 부러움과 질시의 눈빛들은 자신의 기대를 배반하지 않았다. 그때 노칠의 자아도취 즐거움을 산산이 깨부수는 한마디가 들렸다.
“젓 됐다!”
옆에 서 있던 조장 장오의 입에서 나온 육두문자였다.
노칠이 뭔 소리냐는 표정으로 멀뚱히 장오를 쳐다보니 장오는 낯빛이 흙빛이 되어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황노칠과 눈이 마주친 장오가 심사관 쪽을 향해 눈짓을 했다.
황노칠이 얼른 쳐다보니 허리에 장도(長刀)를 찬 지원자 한 명이 심사관 앞으로 나와 서는 게 보였다.
“헉! 소하귀동!”
황노칠은 너무 놀라 말을 뱉고는 얼른 손으로 입을 가렸지만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에 시선들이 날아와 꽂히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