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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호전기 1권(5화)
제2장 회상(回想)(3)
진호는 운허도장과 지내면서 태식을 수련하였다. 진호는 이미 건곤공이 바탕이 되어 있어 태식을 쉽게 익힐 수 있었다.
태식을 수련한 후에는 물속에서 장시간 있는 것은 그다지 힘든 일이 아니었다. 오래지 않아 진호는 모영이 말한 바위 암초에 도달할 수 있었다. 거기까지 가는 동안은 전혀 소용돌이의 흐름은 느껴지지 않았다.
‘뭐야? 모영이 이 자식, 순 공갈쟁이잖아.’
진호가 바위 암초 위로 올라서 뒤를 돌아보니 멀리서 놀라움이 가득한 눈으로 아이들이 손을 흔들고 있는 것이 보였다. 진호는 다시 눈을 돌려 제법 가까워진 귀도를 살펴보았다. 이윽고 작심한 듯이 다시 물로 들어가 서서히 귀도 쪽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앞으로 조금 전진하자 장오의 말대로 귀도로 가는 물길 곳곳에 급격한 소용돌이의 흐름이 느껴졌다. 아마도 귀도 주변의 수많은 수중 암초들로 인하여 심한 와류가 생겨난 것 같았다. 진호는 가만히 제자리에 머물면서 기감을 높여 와류들을 살피기 시작했다. 묘한 흐름이 느껴졌다.
크게 호기심이 발동한 진호는 건곤태극공을 운기하며 수중으로 잠영해 들어갔다. 수중에서 건곤태극공을 운기하자 묘한 흐름은 더욱 선명하게 느껴졌다. 신기하게도 수많은 와류들 사이로 마치 관도처럼 평온한 물길이 존재하고 있었다. 그와 같은 흐름은 진호처럼 완벽하게 물의 흐름을 느낄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발견하기가 불가능한 길이었다. 진호가 그 길을 따라 조금 더 나아가자 바다거북 몇 마리가 그 평온한 흐름을 따라 유유히 헤엄쳐 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바로 그 고요한 흐름을 따라 거북이들이 귀도로 가서 산란을 하는 것이었다. 진호는 거북이들을 따라 천천히 나아가기 시작했다. 지나가는 길 주변으로 와류의 흐름들이 강하게 느껴졌지만, 진호는 전혀 영향을 받지 않았다. 이윽고 일각 정도가 지나자 진호는 귀도에 다다를 수 있었다.
귀도는 조금 큰 바위가 솟아올라 있었고 작은 백사장이 형성되어 있는 작은 바위섬이었다. 백사장 곳곳에는 산란철이 되었는지 바다거북들이 알을 품고 있었다. 아무도 올 수 없는 곳, 자신만이 올 수 있는 곳이라는 생각이 들자 진호는 괜히 볼품없는 조그만 섬이지만 귀도가 좋아졌다. 귀도는 이제 자신만의 땅인 것이다.
‘흠. 여기까지 왔으니 전리품을 챙겨야지. 헤헤.’
진호는 금색이 진하게 나는 거북이 알 몇 개를 챙겨 들곤 다시 아이들이 있는 곳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진호가 거북이 알을 가지고 돌아오자 아이들은 난리가 났다. 가끔씩 귀도로 들어가지 못한 거북이들이 산란한 알들을 어른들이 발견하곤 했지만, 거북이 알은 대단히 보기 드문 귀한 것이었다.
거북이 알은 ‘금란채’라고 하는 최고급 음식의 주요 재료였기 때문에 여상의 말대로 소향로에 가서 내다 팔면 꽤나 큰돈을 받을 수 있었다. 더구나 귀도에서 나온 거북이 알은 크기도 크지만 진한 금색을 띠고 있어, 진정한 ‘금란채’는 귀도의 거북이 알로 만들어야 한다는 말까지 있을 정도였다.
후일 아이들이 들고 나타난 귀도의 거북이 알들로 인해 소향로는 한때 난리가 났었다.
진호를 말하는 ‘소하귀동’이라는 별명은 이 거북이 알 사건으로 처음 얻게 된 것이다.
귀도로 가는 길을 발견하게 된 진호는 아이들과 잠깐 노는 시간을 제외하면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귀도에서 보냈다. 집에 있으면 너무나도 깊은 좌절에 매일 술에 취하여 지내는 부친의 모습을 봐야 하는 게 너무 싫었다.
진호는 진산제자와 속가제자가 지닌 차이를 이해할 수도 없었고 이해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저 자신은 무공을 수련하고 성취를 이루어 가는 게 너무 재미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귀천한 도사 할배와의 약속을 지키고 싶을 뿐이었다.
주류와 비주류라는 이분법적인 세상을 이해하기엔 너무 어렸는지도 모르겠다. 세상을 인식하는 시점에 진호를 이끌었던 사람이 운허도장이었던 탓으로,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진호는 도교적 사고에 심하게 물들어 있었던 모양인지 은둔자적 생활이 너무 편하고 좋았다.
열다섯 살 되던 해, 그 일이 없었다면 어쩌면 진호는 귀도에서 평생 수행하다 귀천하였을지도 모른다.
그 일은 바로 징집령을 받고 군역을 가게 된 것이었다. 당시에는 일가일역의 원칙에 따라 형제들 중 한 명만이 군역을 받게 되면 나머지 형제들은 면제가 되었다. 원래대로라면 이제 열다섯 된 진호보다는 성인이 된 진성이 가야 하겠지만, 형이 혼담이 오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진호가 스스로 나서서 가기를 원한 것이었다.
아무리 진호라 하더라도 열다섯 어린 나이에 군역을 가려고 하니 심적으로 부담을 많이 느끼게 되었다. 어느 날 유난히 울적한 마음이 들어 진호는 인시 초입의 적막한 새벽에 집을 나와 귀도를 향해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진호가 와류들이 있는 곳에 다다르자, 그날은 유난히 와류들의 흐름이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와류의 흐름이 시시각각 변화를 하고 있는 것이었다. 이제껏 단 한 번도 없던 변화였다. 귀도로 향하는 비밀 길의 흐름이 수시로 변하였기 때문에 진호로서도 앞으로 나아가기가 망설여졌다.
진호가 내심 긴장을 하고 망설이고 있을 때 갑자기 진호의 기감에 거대한 존재감이 느껴지더니 거대한 바다거북이 눈앞에 나타났다. 거대 거북이는 그 크기가 황소만 했다.
진호가 있는 쪽으로 다가온 거북이는 숨죽이고 있는 진호를 보며 마치 비웃는 듯한 표정으로 흘깃 쳐다보고는 서서히 지나갔다. 거대 거북이가 그냥 지나가는 듯하자 다소 안심이 되는 진호였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갑작스런 와류의 흐름이 나타나 진호를 옭아매는 것이 아닌가. 놀란 진호가 급하게 벗어나려고 해 보았지만 꼼짝달싹도 할 수 없었다.
진호를 옭아맨 와류의 원흉은 거대 거북이였다. 놈이 어떻게 했는지 진호는 거북이를 따라 이리저리 끌려 다녀야 했다.
다급한 상황으로 진호의 마음이 흔들리게 되자 태극건곤공의 흐름이 원활하게 이어지지 않게 되어 숨이 콱 막혀 왔다. 태식이 깨어진 것이다. 태식이 흐트러진 이상 물속에서는 진호 역시 여느 아이들과 다를 바 없었다.
호흡이 끊어지자 눈앞이 캄캄해지고 정신이 아득해졌다. 진호는 죽음의 기운을 느꼈다.
‘할배, 나 지금 너무 잠 와요.’
‘요놈! 또 졸고 있는 게냐?’
‘어? 도사 할배! 아니, 아니. 안 자려고 하는데 너무 잠이 와요.’
‘요 녀석! 이 할배가 가르쳐 준 춤 연습도 안 하고 농땡이만 치니까 잠이 오는 게지.’
‘칫, 아닌데. 호야가 얼마나 열심히 연습했는데.’
‘그럼 이 할배와 같이 한번 놀아 볼 테냐?’
氣有太極 是生兩儀 易猶鴻될也. 太極猶混淪也. 乾坤者 太極之變也. 合之爲太極 分之爲乾坤 故合乾坤而言之謂之混淪 分乾坤而言之謂之天地子 太初氣之始也. 太始形之始也…….
기(氣)에는 태극(太極)이 있어 이것이 양의(兩儀)를 생기게 한다. 역은 홍몽과 같으며 태극은 혼륜과 같다. 건곤(乾坤)은 태극이 변화된 것인데 합하면 태극이 되고 갈라지면 건곤이 된다. 때문에 건과 곤이 합한 것을 혼륜이라 하며 건과 곤을 갈라서 말할 때에는 천지(天地)라고 한다. 태초는 기의 시초이고 태시는 형체의 시초라고 하였으니…….
도사 할배가 건곤태극공의 구결을 노래하며 태극혼원무를 추기 시작했다.
진호도 도사 할배의 춤사위에 대응하며 따라 춤을 추기 시작했다.
진호가 무의식의 저편에서 도사 할배가 불러 주는 건곤태극공의 구결을 떠올리며 태극혼원무를 추기 시작하자 끊어졌던 내기의 흐름이 다시 이어지며 하단전에서 부드러우면서 강렬한 진기가 치솟아 올라 전신 대맥을 따라 휘돌기 시작했다.
태식(胎息)을 다시 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무아지경에서 건곤태극공이 끊임없이 운기됨에 따라 진호의 몸 주위로 수많은 와류들이 생겨났다.
진호의 내기가 몸 밖으로 뻗어 나와 와류를 형성한 것이었다. 그렇게 형성된 작은 와류들은 서서히 하나의 커다란 와류를 형성하여 진호를 압박하고 있는 거대 거북이의 와류에 대항하기 시작하였다. 급기야는 진호의 내기가 형성한 와류가 거북이가 일으킨 와류를 급격하게 약화시키며 오히려 거북이를 압박해 들어갔다.
쿠웩!
거대 거북이는 자신이 압박을 받자 괴성을 내며 더욱 거세게 와류를 일으켰다. 점점 더 거세진 와류들은 마치 두 마리의 수룡들처럼 얽혀 들며 다투기 시작했다. 태극혼원무가 절정에 다다르자 진호의 몸 주위로 투명한 아지랑이들이 생겨나고 진호의 손끝에도 투명한 기운이 일렁이며 피어올랐다. 점점 농도 짙게 피어 나온 아지랑이들이 구체와 비슷한 형태를 이루더니 한순간 거대 거북이를 향해 뻗어 나가기 시작했다. 몸 주위와 손끝에 맺힌 투명한 아지랑이 기운은 분명히 강기였다. 열다섯 어린아이의 몸에서 호신강기와 수강이 뿜어져 나온 것이다. 무림인들이 알았다면 경악할 일이었다.
꾸웩!
진호의 손에서 뻗어 나온 강기가 거대 거북이를 강타하자 거북이는 고통에 찬 신음을 내뱉었다. 다급해진 거북이는 전력을 다해 와류를 일으켜 보았지만, 진호가 일으킨 와류가 영성을 지닌 신룡처럼 묘하게 움직이며 거북이의 와류를 옭아매고 빈틈을 만들어 내어 그 틈 사이로 진호의 수강이 쏟아져 나왔다.
꾸웩!
비록 물속인 데다 귀갑 위로 쏟아진 탓에 위력이 많이 줄었지만, 한 번씩 뱃가죽을 스치는 수강에는 거대 거북이도 극심한 고통을 느껴야 했다. 급기야 거대 거북이는 도주를 하기 시작했다. 진호는 무의식의 상태에서도 거북이의 움직임을 따라 가며 수강을 퍼부었다.
진호가 의식을 차리고 깨어나 주위를 살펴보니 자신은 거대한 동굴 한가운데 들어와 있었다. 동굴은 귀도를 이루는 큰 바위 봉우리의 동공(洞空)인 것 같았다. 동굴 천장에는 몇 개의 구멍이 뚫려 있어 그곳으로 햇빛이 비쳐 들어왔다. 시간이 많이 지난 모양이었다. 진호가 쓰러져 있던 자리 옆에 있는 연못을 통하여 수중과 연결되어 있는 것 같았다. 거대 거북이는 진호와 삼 장 정도 떨어진 곳에 납작하게 엎드려 있었다.
‘칫, 이놈이 날 골탕 먹이고 제 놈은 편하게 잠을 퍼질러 자고 있구나.’
진호는 거대 거북이 때문에 자칫 죽을 뻔했던 상황이 생각나자 열이 확 올랐다. 갑자기 진호의 신형이 이형환위를 펼친 것처럼 사라졌다가 거북이 앞에 나타나더니 거북이의 머리를 발로 냅다 차 버렸다.
꾸억…… 꾸, 꾸…….
거북이는 좀 전의 사투에서 당한 부상이 컸는지 별다른 저항을 하지 못하고 귀갑 속으로 머리를 집어넣은 채 신음만 내고 있었다. 진호는 화가 가라앉지 않는지 귀갑 위를 두들기기 시작했다. 말 그대로 구타(龜打)를 하기 시작했다.
사실 거북이를 구타하는 진호의 내심에는 좀 전의 위급한 상황을 만든 원흉에 대한 분노라기보다는 막연하고 답답한 현실에 대한 울분이 담겨 있었다.
그런데 거대 거북이를 구타하는 진호의 손과 발에 투명한 아지랑이 강기들이 맺혀 있었다. 의식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강기가 발현되는 것이다. 그러한 현상은 의가 일면 기가 일고 기가 일면 신이 따르는, 즉, 의, 기, 신의 삼재가 조화롭게 일치하여 내외가 구분 없는 완벽한 태극이 형성되었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미 진호는 건곤태극공을 대성한 것이다.
쩍! 쩍! 쩌억!
아무리 단단한 귀갑이라 하더라도 강기를 동반한 무지막지한 타격이 집중되자 더 이상 버틸 수가 없었는지 서서히 금이 가기 시작하더니 급기야는 깨어지고 말았다.
꾸어억!
귀갑이 깨어져 버린 거대 거북이는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단말마의 신음을 뱉으며 축 늘어져 버렸다. 거북이가 늘어져 아무 반응이 없음을 느낀 진호가 마음을 진정하고 거북이를 쳐다보니 거북이는 내장이 파열된 채 짓이겨져 뻗어 있었다. 그리고 파열된 내장들 사이로 진한 황금빛의 구체가 삐죽이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이놈 알은 좀 특이하네, 배고픈데 잘됐다.’
여느 거북이 알보다 조금 작지만 금빛은 더욱 선명했다. 뱃속에 있어서 그런지 껍질도 말랑말랑했다. 한입에 삼키고 깨물었더니 시큼한 맛이 느껴졌다. 알을 삼키고 나니 뱃속이 따듯해지는 듯하더니 갑자기 열기가 치솟아 올랐다.
‘큭! 뭐……야.’
온몸이 뜨거워졌다. 진호는 뜨거운 몸을 식히기 위해 연못으로 뛰어들었다.
수중으로 뛰어든 진호가 건곤태극공을 운기하자 내부의 뜨거운 열기는 더욱 강해지면서 기경팔맥의 대맥을 따라 휘돌기 시작했다. 아울러 모공이 열리면서 전신세맥을 통해 차가운 수기가 흡입되기 시작했다.
乾之陽 坤之陰 乾坤合之乾坤 追三在之妙 和而太極…….
건은 양이요, 곤은 음이다. 건과 곤이 합하여 건곤이 되고 건곤이 삼재의 묘를 따라 태극으로 화하니…….
진호가 수중에서 전력으로 건곤태극공을 운기하자 내부의 열기와 외부에서 흡입된 수기가 임맥에서 만나 한참을 대치하더니, 마침내 하나로 합하여 다시 독맥을 따라 돌다가 전신 세맥을 샅샅이 훑어 내린 후에 다시 임맥으로 돌아와 단전으로 모여들었다.
들끓던 내기를 안정시키고 모든 기운을 단전에 갈무리한 진호가 다시 수중 동굴에 올라서서 자신의 내부를 관조하자, 예전에 없었던 미증유의 거력이 단전에 꿈틀대고 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
기연을 맞이한 것이었다. 금빛 알은 거북이의 알이 아니라 내단이었다.
쾅! 찌지직.
진호가 호기가 치솟아 손을 내밀어 면장을 펼치자 아지랑이 형태의 수강이 사라지고 무형 무음의 힘이 동굴 벽을 향해 나가더니 폭음을 내며 동굴 벽을 강타하였다.
쾅!
한쪽 구석에 널브러져 있던 귀갑의 조각을 향해 다시 주먹을 말아 쥐고 가볍게 뻗으니 귀갑의 조각은 산산이 부서져 흩어졌다. 내공이 부족한 가운데서도 깨달음만으로 수강을 펼쳤던 진호였다. 강력한 내공이 뒷받침되자 수강의 위력은 상상을 초월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