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진호전기 1권(3화)
제1장 귀향(歸鄕)(3)


“저희 보타암의 오랜 전통 가운데 전십지련과 후이지련이란 게 있습니다. 전십지련이라 함은 십 년의 수련을 쌓지 않은 제자는 문외로 출타하지 못한다는, 다시 말해서 입문 후 십 년 동안은 수련에만 전념하는 것을 말하고, 후이지련은 전십지련을 마친 제자는 의무적으로 이 년 동안 출타하여 남해 일대에서 이 년간 왜구와의 전투에 참가해야 하는 것을 말합니다. 과거에는 곤란을 겪는 백성들을 도와 공덕을 쌓는 것을 말하였지만, 왜구의 활동이 심해진 이후로는 왜구로부터 부녀자들을 보호하고 피해를 당한 백성들을 구휼하는 데 중점을 두게 된 것이지요. 주로 맡게 되는 일이 직접 전장에 뛰어드는 일은 아닌지라 많은 전투를 겪게 되는 것은 아니지만, 나름대로 제법 많은 실전을 겪게 되지요.”
연지하는 말을 하면서 과거의 편린을 떠올리고 있었다.

***

“학!”
마지막 한 줌의 내공까지 끌어 모아 출수하였건만 적장은 간단히 연지하의 검을 잘라 버렸다. 연지하가 급히 바닥을 굴러 피하지 않았다면 두 동강 난 검과 함께 그녀의 몸마저 분리되었을 것이다. 간신히 피하기는 하였으되 더 이상은 어떻게 대항해 볼 수가 없었다. 관군이 왜구들이 흘린 역정보에 속아 이서만(梨西灣)으로 집결한 사이 왜구들은 부녀자들과 난민들을 피신시켜 놓은 이곳 유가장으로 내습하였다. 부녀자들을 보호하던 보타암의 제자들과 경비대인 육전단 오십오 백인대가 이미 한 시진이 넘게 필사의 저항을 하고 있었지만 도저히 중과부적이었다.
주사로 얼굴을 칠한 듯이 붉은 얼굴을 한 기괴한 모습의 적장이 자신을 내려다보며 흉측한 웃음을 짓고 있건만 이미 탈진한 연지하로선 도저히 빠져나갈 방법이 없었다.
“온나…… 키레이…….”
적장은 알 수 없는 말들을 중얼거리며 칼끝으로 연지하의 옷을 찢으며 희롱하고 있었다. 갑자기 휙 하고 전장을 한 번 둘러본 적장은 사악한 미소를 지으며 장도를 들어 연지하를 베어 갔다. 적장의 도가 자신을 향해 내려쳐 오는 그 찰나의 순간, 세상의 시간이 모두 정지한 듯한 느낌과 함께 연지하의 눈엔 적장의 도신에 새겨진 두 글자가 너무나도 선명하게 박혀 들었다. 죽음 앞에서 대개 사람들이 그러하듯이, 연지하도 여섯 살 어린 나이에 사부의 손을 잡고 사문인 보타암에 입문하여 지내왔던 순간순간들이 주마등처럼 찰나지간에 스쳐 갔다. 연지하는 마지막으로 사부인 검후 이옥화의 인자한 모습이 너무나도 그리웠다.
챙! 챙! 챙!
“칙쇼!”
갑자기 연이어 날아드는 수전들을 쳐 내며 적장은 괴성을 질렀다.
연지하가 정신을 차려 보니 한 흑의인이 수전들을 날리면서 적장에게 섬전처럼 다가들고 있었다. 흑의인이 연지하의 머리를 넘는 순간 그의 옆구리에서 섬광이 작렬하였다. 흑의인이 전광석화와 같이 발도를 함과 동시에 적장을 베어 간 것이다.
챙! 챙! 챙!
연이어 도와 도가 맞부딪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흑의인과 적장은 순식간에 십여 초의 공방을 벌였다. 공방을 통해 서로 만만치 않음을 느꼈는지 잠시 흑의인과 적장은 서로 상대의 미간을 향해 도를 겨누며 대치한 상태가 되었다. 잠시 후 적장의 어깨가 가볍게 들썩인 순간 그 찰나의 순간을 놓치지 않고 흑의인의 팔이 거짓말처럼 쭈욱 늘어나며 적장의 목을 전광석화처럼 찔러 갔다. 적장은 다급하게 흑의인을 향해 도를 내질렀지만 적장의 도는 흑의인의 목옆 좌측 승모근의 윗부분을 베어 내며 지나쳤다. 그러나 그땐 이미 흑의인의 도는 적장의 천돌혈을 꿰뚫고 있었다. 격렬한 공방으로 흐트러진 호흡을 가다듬기 위해 도의 간격에서 벗어나 적장이 가볍게 숨을 들이켜는 순간을 놓치지 않고, 흑의인은 쌍수도인 자신의 장도를 좌수만으로 내질러 도의 간격을 줄여 버리며 상대의 목을 꿰뚫은 것이다.
“크으!”
흑의인이 자신의 도를 뽑아내자 적장은 가래 끓는 소리와 함께 서서히 무너졌다. 흑의인은 자신의 도를 살펴보곤 여러 군데 듬성듬성 날이 빠져 있자 신경질적으로 도를 던져 버렸다. 그러고는 자신의 피를 머금은 적장의 칼을 주워 들고 전장을 향해 외쳤다.
“지금부터 이곳은 적건대가 맡는다. 의용대와 오십오 백인대는 뒤로 물러서도록!”
외침과 동시에 여기저기서 수전이 날아들어 왜구들의 목과 심장에 박혀 들고 이마에 적건을 동여맨 일단의 흑의인들이 담장을 넘어 들어와 왜구들을 도륙하기 시작했다.
전장을 살펴보던 흑의인이 고개를 돌려 힐끗 연지하를 쳐다보았다. 뜻밖에도 흑의인의 새카맣게 그을린 얼굴은 무척이나 어려 보였다. 피로 물든 이마의 적건과 형형하게 빛나는 맹수를 닮은 그의 안광이 아니었다면 그저 또래의 시골 소년에 지나지 않아 보였다. 그런 흑의인이 전장의 주역이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 연지하였다. 잠시 연지하의 상태를 살펴본 흑의인은 다시 전장으로 뛰어들어 적들을 베어 넘기기 시작했다.

***

“흠, 소검후가 그런 일도 다 겪었구려.”
매단양이 나직이 탄식하며 말했다.
연지하의 이야기가 끝났을 때 밖의 상황은 이미 정리가 되어 있었다.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별다른 지친 기색도 없이 등을 돌린 진호의 뒤엔 흑수방도 삼십여 명과 흑수삼웅이 부러진 팔다리를 끌어안고 널브러져 있었다.
“휘유∼ 장 조장님 친구 분 대단하네요.”
장오의 뒤에서 진호와 흑수방도 간의 대결을 구경하던 풍운대 위사 황노칠이 감탄 어린 표정을 지으며 말을 했다.
“끙, 진짜 괴물이 되었군. 저놈은…… 노칠아. 너도 이곳 출신이니까 들어 봤을 거야, ‘소하귀동(小河龜童)’이란 이름을. 바로 저 녀석이 그 소하귀동이야.”
장오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했다.
“헉! 소하귀동! 저놈, 아, 아니, 저분이 바로 그 소하귀동이란 말입니까?”
황노칠은 놀라움에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었다.
소하귀동.
진호가 열세 살 어린 나이에 항주 북로 일대를 주름잡던 흑도 패거리인 양교방 오십여 명을 단신으로 무참히 박살 내 버린 후에 항주 일대에 널리 알려진 별명이었다.
진호와 장오의 고향인 항주 소하촌은 전당강의 지류인 소하강 주변의 고운 백사장이 절경으로 이름난 곳이었다. 당시 양교방의 소방주와 방도 오십여 명이 상춘회(常春會)를 절경인 소하강변에서 벌이다가 열세 살 꼬마였던 진호와 시비가 붙었다. 양교방도들이 술잔을 돌리며 왁자지껄 한창 흥이 올라갔을 때 진호가 나타나서 시끄러우니 꺼지라고 했다.
그게 시비의 발단이었다. 흑도 패거리 오십여 명이 단지 시끄럽게 떠든다는 이유로 진호에게 복날 개 맞듯이 무참하게 두들겨 맞았던 것이다. 그 일 때문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은 양교방이 제대로 싸워 보지도 못하고 흑수방에게 패퇴하여 지리멸렬하였다는 후문이 있을 정도였다. 당시 항주 근교의 아이들에게 ‘소하귀동’이란 이름은 공포와 꿈을 동시에 주는 존재였다.
그때의 상황을 옆에서 지켜보고 있었고 누구보다도 더 크게 소문낸 장본인인 장오는 과연 진호가 얼마나 더 성장했는지가 궁금해서 따라나선 것이었다.
객잔으로 돌아온 진호는 자신에게로 몰리는 시선을 느꼈다.
특히 삼절수사 매단양 일행의 시선이 강하게 느껴졌다.
‘화산…….’
처음부터 그들이 화산파 일행인 줄은 알았으나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러나 마주 앉은 장오는 입장이 다른지 화산파 중년인의 존재를 알고는 안색이 굳어졌다. 삼절수사 매단양인 것을 알아본 것이다.
“곰탱이! 한잔하자!”
불쑥 진호가 잔을 높이 들면서 장오에게 내밀었다.
“어어, 그래.”
장오는 엉겁결에 잔을 따라 들었다.
“카아! 역시 고향이 좋구나! 술맛조차 이리 부드러우니……. 하하! 춘삼이 형, 이거 무슨 술이오? 향이 정말 부드럽네.”
진호가 춘삼이 있는 주방 쪽을 보며 외쳤다.
“역시 술이든 꽃이든 향이 부드러워야 해. 억센 것은 목에 걸린단 말이야.”
진호가 잔을 빙빙 돌리며 나직이 독백을 했다. 그러나 그 말을 들은 장오와 매단양 일행은 안색이 변할 수밖에 없었다.
‘음……. 화산과 악연이 있나?’
매단양이 생각하기에는 향이 억센 꽃이라 함은 혹한의 추위를 이겨 내고 피어나는 매화를 상징으로 하는 화산을 말함이 분명했다.
‘저 사람, 내가 남장한 사실을 비웃고 있어.’
연지하는 진호가 자신의 존재를 비웃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녀의 안색이 차가워졌다.
‘이, 이놈, 호야! 상대를 봐 가면서 개겨야지. 화산의 삼절수사 매단양에게 도발을 하다니…… 위험하다!’
장오가 급하게 살펴보니 매단양은 뭔가 복잡한 표정을 짓고 있었고, 매단양과 일행인 미장부는 안색이 차갑게 변해 있었다.
“사숙! 여기에 계셨군요.”
일촉즉발의 묘한 분위기를 깬 것은 뜻밖에도 키가 훤칠하고 시원하게 생긴 귀공자풍의 청년이었다.
“아, 금 사형! 오셨군요!”
방운학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반갑게 청년을 맞았다.
“그래, 방 사제도 원행에 수고가 많구나. 사숙, 모인이 인사드립니다. 원로에 고생이 많으셨지요.”
청년은 매단양에게 공손하게 읍하며 인사를 하였다.
“그래, 오랜만이구나. 그동안 잘 지냈느냐? 청룡단에서의 생활은 지낼 만하고?”
매단양이 청년을 보며 자상하게 웃고 있었다. 청년의 소매에는 매화 두 송이와 청룡 두 마리가 새겨져 있었다. 그것은 청년이 매화검수이자 정의맹 청룡단원임을 나타내는 표식이었다.
‘청룡단주 금모인이 하필 지금…….’
장오는 어떻게 해야 하나 잠시 고민을 했다. 자신의 조원들은 이미 청룡단주의 출현에 자리에 일어나서 기립해 있는 상태였다.
“소검후님도 오랜만입니다. 이번에 주작단을 맡으시게 되었다고 들었습니다.”
금모인은 연지하를 향해서 밝게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네…….”
연지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를 받았다.
“자자, 앉자꾸나. 여러 사람이 불편해 하니…….”
매단양이 주위를 둘러보며 금모인 등에게 자리를 권했다.
“그러지들 말고 자리에 앉게.”
금모인이 기립해 있는 자신을 수행한 청룡단원들과 맹의 풍운대 위사들로 보이는 사람들을 둘러보며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단주님, 안녕하십니까?”
엉거주춤 서 있던 장오가 금모인과 눈이 마주치자 다급하게 인사를 했다.
“오, 그래. 장오가 아니더냐? 여긴 사적인 자리이니 너무 그렇게들 예의 차리지 말고 편하게 해라. 조원들과 한잔하러 온 모양이니 쉬다 가거라.”
금모인은 시원한 인상만큼이나 밝게 웃으며 장오의 인사를 받고는 자리에 앉아 사숙인 매단양 일행과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젠장, 어라? 이놈은 어디 갔어?’
장오가 금모인과 잠시 인사를 나누는 사이 진호가 사라져 버린 것이었다. 장오가 급하게 객잔 밖으로 나가 보니 저만치서 진호가 휘적휘적 걸어가고 있었다.



제2장 회상(回想)(1)


“얌마! 갑자기 가 버리면 어떻게 하냐?”
장오가 휘적휘적 가고 있는 진호를 따라잡고 말을 던졌다.
“어, 너무 시끄러워서. 너도 알잖아, 나 시끄러운 거 무지 싫어하는 거…….”
진호가 고개를 돌리지도 않고 말을 하였다.
“모인 형님이 위치가 있다 보니…….”
“모인 형님?”
진호가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갸웃하였다.
“어, 너 모르냐? 화산파에서 수련한다던 모영이 사촌 형이잖아. 금가장의 대공자이기도 하고 말이야. 화산검룡! 청룡단주! 천하제일의 후기지수!”
말을 하는 장오의 눈빛엔 부러워하는 기색이 감돌았다.
“아, 모영이! 그러고 보니 그놈이 어지간히 자랑스럽게 떠들어 대던 기억이 있는 것 같네.”
진호가 그제야 생각이 조금 난다는 듯이 말을 하고는 다시 걷기 시작했다.
“그나저나 넌 무슨 맘으로 화산의 매단양 장로에게 시비를 건 거냐?”
장오가 진호를 따라 다시 걸으며 물었다.
“시비는 무슨…….”
진호는 별거 아니라는 듯이 피식 웃고 있었다.
“끙! 상대도 봐 가면서 해야지, 대화산파의 장로에게…….”
“그치가 화산파의 장로냐?”
“그럼 정말 몰랐냐? 삼절수사 매단양과 그 앞에 소검후가 앉았더만!”
“소검후, 소검후라…….”
진호는 소검후라는 말을 몇 번 중얼거리고 있었다. 언젠가 자신과 한 번은 엮였던 단어인 거 같은데 생각이 나지 않았다.
“당금에 대화산파의 장로에게 그렇게 시비를 걸고도 멀쩡한 건 너밖에 없을 거다!”
장오가 입에 침을 튀기며 말을 하였다.
“그만 해라. 화산파는 지미…….”
진호는 고개를 돌려 와우산 아래로 어둠이 내려앉은 소하촌을 바라보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

“호야, 자냐?”
진성은 옆에 누운 동생을 돌아보았다.
“엉? 아니, 안 자. 왜?”
진호는 이불 밖으로 고개를 내밀며 형을 보았다.
“수련하는 거 힘들지?”
“엉? 아니, 안 힘든데. 난 재밌는데.”
진호는 흑백이 뚜렷한 맑은 눈동자에 치기를 가득 담고 형을 바라보며 말했다.
진성은 동생을 보면 늘 안쓰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섯 살 터울인 동생 진호는 걸음마를 할 무렵부터 부친의 지도하에 수련을 하고 있는 자신을 따라 마보니 궁보니 하는 것을 따라하더니, 제법 몸을 가눌 수 있게 된 세 살 때부턴 본격적으로 수련에 참여하였다.
진성과 진호 형제의 수련 가운데 제일 힘든 것이 태극권 칠십이 식의 형을 시연하는 것이었다. 남들은 그게 뭐가 힘드냐고 하겠지만, 그들 형제의 태극권 시연은 남다른 것이었다. 한 번 숨을 들이쉬고는 숨이 다할 때까지 태극권 칠십이 식을 전부 다 펼쳐야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