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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호전기 1권(2화)
제1장 귀향(歸鄕)(2)
“그렇지, 그것도 너무나 자연스럽게 행한 이화접목이다. 금매관의 아이들이라 하더라도 결코 쉽지 않을 게야.”
중년인, 바로 화산파의 장로인 삼절수사 매단양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제자인 방운학의 물음에 답을 해 주었다. 방운학은 사부인 매단양의 말에 놀란 눈으로 진호를 다시금 쳐다보았다. 금매관은 사문인 화산의 일대제자들이 수련하는 곳으로 매화검수들을 배출하는 곳이다. 자신 역시 금매관에 머물고 있으니 진호가 더욱 대단해 보이는 것이었다.
한편 진호는 마춘삼을 일으켜 앉히고는 상세를 보았다. 다행히 장 파열은 생기지 않았다.
“끄응!”
그때 신음과 함께 흑수삼웅들이 정신을 차리며 일어섰다. 너무나 창졸지간에 당한 탓인지 흑수삼웅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진호를 노려보며 엉거주춤 섰다.
“꺼져!”
진호의 입에서 나직한 일갈이 터져 나오자 흑수삼웅은 주섬주섬 물러나 문밖으로 도망쳐 나갔다.
마침 그때 만복루를 들어서던 정의맹 풍운대 이십사 조원들과 조장 장오는 의아한 표정으로 흑수삼웅을 쳐다보았다.
“저놈들 뭐야, 흑수방의 곰 세 마리 아냐? 뭔 일이지?”
장오가 도망가고 있는 흑수삼웅의 등을 쳐다보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끙! 누구신지 모르지만 감사합니다!”
마춘삼이 정신을 차리며 자신을 구해 준 진호에게 감사의 인사를 했다.
“춘삼이 형, 나 진호요!”
“진호? 소하촌의 진호?”
마춘삼이 반색을 하며 물었다.
“맞아요. 소하촌의 그 진호요.”
대답을 하는 진호의 입가에 미소가 살짝 어렸다.
“너, 너 정말 진호냐?”
객잔을 들어서다 마춘삼과 진호의 대화를 들은 장오가 떨리는 목소리로 급박하게 물었다. 진호가 고개를 돌려보니 커다란 덩치의 청년이 자신을 보고 있었다. 진호는 상대가 어릴 적 가장 절친한 친구였던 장오임을 단박에 알아보았다.
“그래, 나다. 곰탱이, 잘 있었냐?”
진호가 씨익 웃으며 장난스럽게 물었다.
“너, 이 자식! 살아 있었구나!”
장오는 진호의 팔을 와락 감싸 안으며 외쳤다.
“살아 있지 않음 내가 죽기라도 바란 거야?”
“이놈이…… 도대체 어떻게 된 거냐? 온다 간다 말도 없이 갑자기 군역을 갔다기에 얼마나 황당했는 줄 아냐? 어디에 있었던 거냐?”
장오는 정신없이 질문을 뱉어 냈다.
“뭐, 상황이 그렇게 되었다.”
진호는 다그치듯 퍼부어 대는 장오의 질문 공세에 그저 싱긋이 웃으며 대답했다.
“솔직히 하도 네놈 소식이 없어서 오랑캐 놈 화살에 꼬치처럼 꿰어서 뒈진 줄 알았다. 네놈 떠난 날을 기일로 잡아 제사까지 지내려고 했다니까.”
장오가 약간은 의뭉스럽게 장난기가 담긴 목소리로 말을 했다.
“뭐? 제사?”
진호는 어이가 없다는 듯 피식 웃고 말았다.
“일단 앉아라. 너희들은 거기서 한잔해라!”
장오는 같이 온 조원들에게 자리를 잡도록 하고는 진호의 자리에 앉았다.
“자, 한잔하자!”
장오는 진호의 자리에 놓여 있던 분주를 따라 진호에게 건넸다.
“그나저나 어디에 있었던 거냐? 다시 북방이 시끄럽다던데 오랑캐 놈들하고 노닥거렸냐?”
“아니, 복주에 있었다.”
진호는 서서히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
“복주? 그럼 왜구?”
“그래. 남해안의 왜구 놈들하고 실컷 놀았다.”
“하긴 왜구 놈들도 어지간히 설쳐 댄다고 하더구나. 그럼 그거 왜도냐?”
그제야 장오는 진호 옆에 긴 보퉁이가 놓여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곤 물었다.
“그래. 기념으로 분실물 하나 챙겼다.”
진호가 보퉁이를 가볍게 툭툭 치며 말했다.
왜도는 대단히 재질이 좋아 고가로 거래되기 때문에 왜구와 전투를 하던 병사들 가운데 전역 시에 몰래 숨겨 나오는 경우가 많았다. 남해 쪽의 병사들은 습득한 왜도를 흔히 분실물이라고 표현하였다.
“그래, 춘삼이 형은 괜찮수?”
진호가 옆에 앉아서 말없이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마춘삼을 보며 걱정된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어, 그래. 난 괜찮다. 고맙다. 네 덕분에, 휴…….”
춘삼은 수심이 가득한 얼굴로 머뭇거리며 대답을 했다.
“뭔 일인데 그놈들이 행패를 부린 거요?”
“아니 뭐, 저…… 그런 일이 좀 있어서…….”
춘삼은 머뭇거리며 대답을 회피하였다.
“젠장! 춘삼이 형, 아직도 못 끊었수? 내가 저번에도 그랬잖아! 그러다 쥐도 새도 모르게 가는 수가 있다고. 그놈들이 얼마나 독종들인데……. 쯧쯧.”
장오는 뭔가 아는 듯이 춘삼을 질책했다.
“뭐야? 뭔 일인데 그러냐?”
진호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물었다.
“뭐긴. 춘삼이 형이 도박에 빠져 가지고, 흑수방 놈들한테 고리채 끌어다 쓰곤 못 갚으니 저놈들이 저러는 게지……. 춘삼이 형, 제발 정신 좀 차리슈. 쯧쯧.”
장오는 한심한 눈길로 춘삼을 쳐다보며 말을 했다.
“그만 해라. 춘삼이 형, 얼마나 빚진 게요?”
“그게…….”
춘삼은 장오의 눈치를 보며 차마 말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관둬라! 얼마냐가 중요한 게 아냐. 저놈들은 이 객잔을 날로 먹으려고 하는 거니까. 저놈들 흑수방 놈들만이라면 문제가 아닌데, 흑수방 뒤에 하오문이 버티고 있어서 어찌할 수도 없다. 그놈들은 한번 노린 건 절대 놓치지 않으니까. 그나저나 호야, 너도 피곤하게 생겼다. 저 곰 세 마리도 보통 질긴 놈들이 아닌데…….”
장오가 걱정스런 눈빛으로 진호를 보며 말을 했다.
“그냐? 정 귀찮으면 다 죽여 버리지 뭐.”
진호는 여전히 무표정하게 말을 뱉었다.
“컥! 야! 지금 상황에서 그딴 농담이 나오냐?”
장오가 어이없다는 듯이 외쳤다.
“농담은 무슨……. 네가 몰라서 그렇지, 내 취미가 살인이고, 특기가 목 쑤셔 구멍 내기인데…….”
진호가 정말 그렇다는 듯이 진지한 표정을 짓고 말하였다.
“이놈이 그따위 진지한 표정으로 헛소리하는 버릇은 여전하네. 더 이상 귀찮은 일 생기기 전에 이거 한 잔 들고 자리 옮기자!”
장오가 술잔을 들며 말을 했다.
“자리는 뭐……. 근데 늦은 거 같은데.”
진호가 하얀 이를 드러내고 씨익 미소를 지었다.
그제야 장오의 귀에 객잔 밖에서 수십 명이 뛰어오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흑수삼웅이 급히 연락을 취해 흑수방도들 삼십여 명을 데리고 객잔으로 뛰어오고 있었다.
“쩝, 춘삼이 형 가게 박살날 거 같으니 내가 나가야겠다. 금방 갔다 올 테니, 간만에 춘삼이 형 솜씨나 발휘해 봐요. 형 그거 잘했잖아, 어두탕. 후후…….”
느긋하게 말을 뱉으며 진호는 일어서서 객잔 밖으로 나갔다.
“뭐? 이 미친놈!”
장오는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진호를 따라나섰다.
“아니. 오야, 넌 그냥 춘삼이 형하고 앉아 있어라. 옛날에 누구는 술이 식기 전에 적장의 목을 따서 왔다고 하더만, 이럴 줄 알았으면 술을 데워 놓을 걸 그랬나.”
진호는 장오를 향해 손사래를 치면서 천천히 객잔 입구로 걸어 나갔다.
그러나 장오는 못내 불안한지 진호를 따라 객잔 밖으로 나섰다. 그러자 장오와 같이 객잔에 들어왔던 풍운대 조원들도 재미난 구경거리라도 생겼다는 표정으로 객잔 밖으로 나와서 장오의 뒤에 섰다.
“뭘 그리 바쁘게 오나?”
객잔 입구에 선 진호가 느긋하게 흑수삼웅을 보며 말을 건넸다.
“너, 이 새끼! 뒈져라!”
턱을 맞아 잠시 뇌가 흔들렸을 뿐 별다른 부상을 입지 않았던 흑수삼웅의 막내인 공해가 진호를 보자마자 대뜸 번개같이 발검을 하며 진호를 찔러 갔다. 진호는 별반 움직임 없이 가볍게 공해의 검을 흘려버리곤 관수로 공해의 천돌혈을 찍어 버렸다.
“켁!”
칼을 찔러 간 공해가 오히려 목을 부여잡고 뒤로 튕겨 나갔다.
“저 새끼가! 쳐라! 찢어 버려!”
흑수일웅 막여는 선공을 한 막내 공해가 뒤로 튕겨 나오자 광분하여 외쳤다. 막여의 외침에 삼십여 명의 흑웅대들은 저마다 박도를 뽑아 들고 진호를 향해 짓쳐 들었다. 진호는 날이 시퍼런 박도를 살짝살짝 좌우로 흘리면서 흑수방도들의 목 가운데 천돌혈을 관수로 찌르거나 상대의 옆구리를 팔꿈치로 찍어 버리고 나아가며, 좌우 어깨로 철산고의 수법으로 상대 턱을 날려 버렸다. 뒤쪽의 적이 거리가 없으면 엉덩이를 튕겨 둔(臀)의 수법으로 상대를 밀어내고는 나려각(懶驢脚)의 한 수로 다리를 뒤로 뻗어 상대의 하복부를 찍어 차 버렸다. 흑수방도들은 진호에게 팔이 잡히는 순간 어깨가 탈구되어 버렸고, 진호의 발이 스치는 순간 정강이뼈가 부러져서 주저앉아야 했다. 사지의 관절뿐만이 아니라 내딛는 진호의 걸음마저 상대의 발등을 부숴 버렸다. 그야말로 사소한 움직임 하나하나가 모두 치명적인 공격이 되었다. 진호의 움직임은 마치 ‘난전이란 이런 것이다’라는 전형을 보여 주는 듯하였다.
“허, 대단하구나! 미끄러지듯 나아감은 유운처럼, 표홀하게 돌아섬은 매화처럼, 지키되 지키지 않으니 금강부동이라. 강함은 부드러움으로 흘리니 태극을 따르고, 일 권 일 타에 강건함을 실었으니 금강나한이요, 내지름의 날카로움은 사일의 이치를 담고, 잡고 꺾어 비틀어 버림은 대라의 뜻을 품었으니 도대체 저 청년은 누구인가?”
진호와 흑수방도들의 대결을 지켜보던 삼절수사 매단양의 입에서 감탄이 터져 나왔다.
“사부님, 그가 구파의 공동 전인도 아닐진대 어찌 그의 투로에 구파의 비전이 모두 담겨 있는 것처럼 말씀을 하십니까?”
방운학은 의구심이 가득한 눈으로 사부인 매단양에게 물었다.
“글쎄다……. 그가 태극의 이치를 근본으로 사량발천근과 이화접목의 무리마저 담아내니 만류귀종의 이치에 따라 그리 보일 수도 있겠지만, 내가 보기엔 분명히 그의 투로에 구파의 비전이 혼재되어 있는 듯이 보이는구나.”
매단양은 여전히 진호의 움직임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말을 했다.
“사실 흑도의 부랑배 서른 명 정도는 백매관의 아이들도 손쉽게 해치울 수 있을 것입니다.”
방운학은 평소 칭찬에 인색한 사부 매단양이 진호를 과하게 평한다는 생각이 들어 약간은 못마땅한 표정을 지으며 말을 하였다.
“그래, 운학아! 너의 말대로 우리 백매관의 아이들만 해도 흑도의 부랑배 서른 명 정도는 어렵지 않게 처리할 수 있다. 하지만 저 청년처럼 내공을 쓰지 않는다면 힘들 것이다.”
매단양은 천천히 고개를 저으며 답을 했다.
“그럼 저 사람이 내공도 없이 단지 근력만으로 저러한 움직임을 보인다는 것입니까?”
방운학이 놀란 눈으로 진호가 있는 쪽을 쳐다보며 되물었다.
“그러니 하는 말이다. 장난스런 가운데서도 투기는 살짝살짝 느껴지지만 내기는 전혀 담겨 있지 않구나. 군역을 마치고 왔다 하더니 아마도 무수한 실전 속에 터득한 요령이겠지.”
“그리하면 그가 만약 내공을 익혔다면 대단한 경지에 이르렀겠군요?”
“아마도 그럴 것이다. 그가 같은 나이 대의 본산 제자들과 비슷한 내공만 지녔다 하더라도 절정을 바라볼 것이다. 만약에 그가 특별한 연이 있어 일 갑자 정도의 내공을 지녔다면 나로서도 승부를 장담할 수 없을 것이다.”
“설마 그 정도란 말입니까?”
방운학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스승인 매단양을 쳐다보았다.
스승인 삼절수사 매단양이 누구인가? 사문인 화산에서도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고수로 이미 초절정의 경지에 이르러 검향지경을 바라본다는 평을 받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이십 대의 청년에게 스스로 승부를 장담할 수 없다고 하니 놀라울 따름이었다. 방운학은 진호라는 자가 내공이 미미하다는 사실에 묘한 안도감이 드는 자신을 느낄 수 있었다.
“허! 아무리 봐도 저 진호라는 청년은 구파의 기본공을 알고 있음이 분명하다. 기본공이라 하나 어찌 구파의 비전이 군문에 전해졌을꼬?”
매단양은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독백을 하였다.
“아마도 육전단 예하의 적건대 출신일 것입니다.”
조용히 두 사제 간의 대화를 듣고 있던 소검후 연지하가 이미 정리가 되어 가는 밖의 상황을 다시 한 번 쳐다보고는 입을 열었다.
“적건대라 함은?”
매단양이 연지하를 쳐다보며 되물었다.
“척계광 대장군이 육전단을 맡고 있을 당시 만든 부대입니다. 당시 척 대장군은 기효신서를 쓰기 위하여 방대한 자료들을 모았는데 거기에 구파의 기본공이 담긴 비급들도 많았다고 합니다. 상승의 비전이 아닌 탓에 각파에서도 그리 괘의치 않았던 모양입니다.”
소검후 연지하는 짐작 가는 바가 있는 듯이 말하였다.
“기효신서라 함은 척 대장군이 쓴 병법서 아닙니까?”
방운학이 들은 적이 있다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그렇지요. 당시 수집된 책들 가운데 각파의 기본공과 같은 무서들은 기효신서와 같은 군문의 병법서를 쓰는 데 별 도움이 되지 않으니 따로 분류하여 놓았는데, 최초 무인들로 구성된 별동대인 적건대가 생존율이 낮다 보니 무인들이 적건대를 기피하게 되어 그 이름이 유명무실하게 되자, 일반 병사들 가운데 자질이 있는 자들을 뽑아 모아 둔 무서의 기본공들을 익히게 하여 적건대를 운용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그러한 연유로 적건대 출신의 병사들은 대부분 각파의 기본공을 두루 익히고 있다고 합니다.”
연지하는 밖의 진호가 있는 쪽을 흘깃 쳐다보고 막힘없이 대답을 했다.
“허, 그런 일이! 근데 어찌 소검후가 군문의 일을 그토록 자세히 아시는가?”
매단양은 군문과 전혀 관계가 없는 소검후가 군문의 일을 자세히 아는 것이 신기한 듯이 물었다.
“그게…… 후! 과거에 소녀가 적건대에게 생명의 구함을 받은 일이 있어 나름 조사한 바가 있었습니다.”
연지하는 가벼운 탄식을 내뱉으며 말을 했다.
“호…… 그랬던가?”
매단양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