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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호전기 1권
진호전기 1권(1화)
작가서문
오래전부터 무협을 사랑하는 애독자로 지내 온 터라 한 번쯤은 직접 무협을 쓰고 싶었는데 오랜 시간을 망설이다가 용기를 내어 이렇게 진호라는 사내의 이야기를 쓰게 되었습니다.
처음 제가 글을 쓰게 되었다고 하자 주위의 일관된 반응은 신기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워낙에 글과는 관계가 없어 보이는 외모 탓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물론 제 스스로도 신기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글 쓰는 재능이 유별나지 않다는 것을 스스로도 잘 알고 있으니 말입니다.
진호라는 사내는 오랫동안 무협을 읽어 오면서 한번 그려 보고 싶은 캐릭터여서 비록 글을 쓰는 재능은 없지만 이야기를 들려주는 마음으로 풀어 나가 보려고 합니다.
제가 머릿속에 그리는 진호라는 사내를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위이불맹(威而不猛)이라는 논어의 한 구절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위엄이 있으나 사납지 않고 부드럽다는 뜻입니다.
냉철한 이성의 소유자인 진호는 자신에게 검을 들이댄 적을 대함에 있어서는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베어 버릴 정도로 냉혹하지만, 사랑하는 이들과 신뢰하는 동료들을 위해서는 한없이 희생하는 따뜻한 마음의 소유자이며, 또한 사랑하는 여인을 위해 아낌없이 주기도 하는 순정의 사내이기도 합니다.
진호라는 사내가 보여 주는 남성상은 제 스스로도 늘 닮고 싶은 모습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오늘날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이들에게서 좀처럼 찾아보기 힘든 모습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진호전기를 읽는 동안만큼은 남자의 향기에 잠시 취해 볼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 봅니다.
끝으로 부족한 제 글을 출판하기 위해 애써 주신 뿔미디어의 모든 분들께 감사의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임 홍준 올림
서장
간간이 밀려온 파도가 달빛에 부서지며 내는 자지러지는 신음만이 고요한 밤바다를 달래고 있던 해수면 위로 갑자기 검은 물체 하나가 불쑥 나타났다. 검은 물체는 사람의 머리였다.
머리를 내민 흑의인은 전방에 정박해 있는 거대한 흑선의 갑판을 잠시 주시하다가 소리 없이 갑판 위로 솟아올랐다. 그 동작이 너무 자연스러워 마치 허공을 부유하는 귀신과도 같았다.
공중에 뜬 상태에서 순간적으로 좌우를 훑어본 인영의 손을 떠난 세 개의 반짝이는 수전이 찰나지간에 갑판 위에서 졸린 눈으로 번초를 서던 왜구들의 천돌혈에 박혀 들었다. 외마디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쓰러지는 왜구들을 확인한 흑의인은 자신의 허리에 묶여 있던 가는 줄을 강하게 세 번 당긴 후 끊어 버렸다. 그와 동시에 허공에서 방향을 선미 쪽으로 틀고 앞으로 나아간 흑의인은 귀신처럼 소리 없이 움직이면서 선상의 번초들을 제거하기 시작했다.
흑의인이 처음 선상으로 올랐던 자리로 돌아온 시간은 일각 정도가 흐른 뒤였다. 그사이 어느새 흑의인이 서 있는 갑판 밑쪽에는 두 척의 소선이 나타나 있었다. 두 척의 소선은 흑선과 떨어진 곳에서 흑의인과 연결된 줄로 신호를 받은 후 맹렬히 노를 저어 다가온 것이다.
흑의인이 수신호를 보내자 두 척의 소선에서 두 개의 갈고리가 날아와 갑판에 걸쳐졌다. 흑의인이 사방을 주시하며 왜구의 기척을 살피는 동안 소선에 타고 있던 아홉 명의 흑의인들은 순식간에 모두 갑판 위에 올라왔다. 새로이 나타난 이들 역시 모두 처음의 흑의인과 마찬가지로 이마에 적건을 두르고 있었다.
“역시 진 대주!”
그중 한 명이 하얀 이를 드러내며 씩 웃고는 처음의 흑의인을 향해 엄지를 치켜들며 나직이 감탄조로 말했다. 그러나 대주라 불린 흑의인은 여전히 무심한 눈빛을 한 채 대원들에게 수신호를 보냈다. 그의 수신호가 떨어짐과 동시에 아홉 명의 대원들은 사방으로 흩어져 자리를 점하기 시작했다.
쾅!
대원들이 자리를 잡자 흑의인은 한 발 나가며 진각을 밟았다. 진각은 거대한 흑선 전체가 울릴 만큼 강렬하였다. 강한 진각 소리에 놀라 잠이 깬 왜구들이 갑판으로 뛰쳐나왔다. 갑판으로 뛰쳐나온 왜구들은 영문을 몰라 사방을 둘러보며 웅성거리고 있었다.
그때 또 한 번의 진각이 울렸다. 두 번째 진각을 신호로 대기하고 있던 대원들의 손에서 수없이 많은 수전들이 쏟아졌다. 수전들은 어김없이 왜구들의 천돌혈과 심장에 박혀 들었다. 잠이 깨지 않은 왜구들은 어둠 속에서 날아드는 수전들에 변변히 대항 한번 해 보지 못하고 쓰러져 나갔다.
쾅!
갑판에 나타난 왜구들 대다수가 쓰러지고 뒤늦게 나타난 사무라이들이 수전을 쳐 내기 시작하자 대주는 다시 한 번 강하게 진각을 밟았다. 그러자 대원들은 박도를 뽑아 들고 삼 인 일 조가 되어 왜구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일반 왜구들은 물론이고 개개인의 검술이 뛰어난 사무라이들도 삼 인이 일 조가 되어 펼쳐지는 합격술에 속수무책으로 쓰러졌다.
“칙쇼!”
챙챙챙!
분개한 고함 소리와 함께 일조 대원들의 박도가 두 동강 난 채 날아가며 처음으로 공격이 막혔다. 상반신의 옷도 채 다 걸치지 않은 사무라이 하나가 일조의 박도를 잘라 내며 짓쳐 들어가고 있었다. 왜구의 우두머리 사무라이였다. 일조 대원들에게는 절체절명의 순간이었다. 그러나 갑자기 나타난 칼 하나가 우두머리의 칼을 가볍게 잘라 내며 동시에 그의 목을 몸에서 분리해 버렸다. 자신의 어이없는 죽음이 믿기지 않은 듯 부릅뜬 우두머리의 두 눈엔 자신을 베어 버린 칼의 검신에 새겨진 글자가 또렷이 비쳐졌다.
마사무네[政宗]
제1장 귀향(歸鄕)(1)
항주를 병풍처럼 에워싼 봉황산의 봉우리들 사이로 느릿느릿하게 해가 넘어가고 있는 유시경. 항주 포구 선착장에 위치한 정의맹 이십오 분초에서 근무 중인 정의맹 풍운대 위사 장오는 권태로운 눈빛으로 항주로 들어오는 마지막 정기선에서 내린 승객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정의맹이 자리 잡은 항주 외곽 곳곳에 총 서른여섯 개의 분초가 세워져 있었다. 이들 분초의 역할은 항주를 드나드는 무림인들의 동향을 감시하고 주요 인물의 출입을 보고하기 위한 것이다. 분초에서의 근무는 특별한 공문이 내려오지 않은 이상 크게 주의할 일이 없었다.
일상의 무료함이 가득 찬 표정으로 연신 하품을 해 대던 장오의 눈이 갑자기 이채를 띠기 시작했다. 장오의 시선은 죽립을 눌러쓰고 흑의를 입은 한 사내에게 고정되었다. 왼손에 보퉁이로 둘러싼 긴 물체를 든 사내는 보통의 체격에 평범한 모습이었을 뿐 결코 무인의 느낌은 아니었다. 그러나 묘하게도 그 사내에게선 왠지 모를 강인함이 느껴지고 있었다.
“어이! 장 조장, 교대 안 할 거야?”
교대조인 팔조 조장인 황기가 넋을 놓고 뭔가를 쳐다보고 있는 장오를 툭 치며 불렀다.
“어, 아! 예, 교대해야죠. 헤헤.”
장오는 흑의인에게 향했던 시선을 거두고 등 뒤로 다가온 황기를 보며 실없이 웃었다.
“뭐, 이상은 없지?”
황기는 장오가 보던 쪽을 쓰윽 둘러보면서 물었다.
“예, 뭐 특별한 일은 없었습니다. 곧 신입 위사 모집이 있어서 그런지 낭인들이 제법 눈에 띄네요, 헤헤.”
장오는 덩치만큼이나 큰 얼굴에 가득 웃음을 담고서는 대답하였다.
“그렇겠지. 에효, 이번엔 똘똘한 놈 하나 밑으로 오려나…….”
황기가 분초의 한구석에 자리를 잡으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그럼 황 조장님 수고하십시오! 저는 애들하고 만복루에 가서 분주나 한잔 걸치고 들어가야겠습니다. 헤헤.”
“그려, 수고했네! 야, 문철아! 가서 물이나 한 잔 떠오너라!”
장오는 황기의 수인사를 뒤로하고 조원들과 함께 분초를 떠났다.
***
항주 시내에서 포구로 가는 길인 소향로의 끝자락에 위치한 객잔인 만복루는 조금 전 여객선에서 하선한 손님들과, 하루 일과를 마치고 한잔 걸치기 위해 들른 사람들로 북적대고 있었다. 포구의 선착장에서 잠시 장오의 시선을 받았던 흑의인, 진호는 만복루의 한구석에 앉아 간단한 요기와 분주 한 병을 시키곤 붐비는 항주 포구의 풍경을 감회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우당탕탕!
갑자기 주방 옆의 별실 문이 거칠게 떨어지며 장년인 한 명이 굴러 나왔다. 그 장년인은 다름 아닌 만복루의 주인인 마춘삼이었다.
“마춘삼, 이 새끼야! 내가 우습게 보여? 내가, 이 흑수이웅 여대 나리가 네 눈에는 새피리 젓만 하게 보인단 말이지…….”
말상의 얼굴을 가진 장한 한 명이 심한 욕설을 뱉으며 마춘삼을 발로 차고 있었다.
곧 별실에서 두 명의 장한이 따라 나오면서 바닥에 뒹굴고 있는 마춘삼을 포위하듯 에워싸고는 킬킬거리고 있었다.
“마춘삼? 춘삼이 형?”
흑의인 진호는 소동이 일어나고 있는 입구 쪽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진호가 고개를 들어 살펴보니, 봉변을 당하고 있는 장년인은 자신의 어린 시절 추억 한쪽에 자리하고 있는 춘삼이 형이었다. 항주 시내 주루에서 숙수 일을 배우고 있어 가끔 자신과 아이들에게 먹을 것을 챙겨 주곤 하던 형이었다.
“어이, 말대가리! 그만 하지.”
나직하면서도 묵직한 목소리가 진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어떤 개 시러배 놈이…….”
말상의 얼굴을 가진 장한, 흑수이웅 여대는 자신이 가장 싫어하는 말대가리라는 말에 분기탱천하여 자신 쪽으로 다가오는 진호를 노려보았다. 흑수삼웅의 맏이인 막여와 막내인 공해도 어이가 없다는 듯이 진호를 노려보며 천천히 움직여 품자 형태로 진호를 에워쌌다.
여대는 정의맹이 있는 항주인지라 흔한 게 무림 고수라서 격분한 가운데서도 상대를 살펴보았다. 그러나 상대는 태양혈도 밋밋하고 눈에 정광이 어려 있는 것도 아니었다.
여대가 안면에 비릿한 조소를 흘리며 갑자기 발밑에 깔려 있는 마춘삼의 배를 발뒤꿈치로 찍어 차 버리고는 진호를 향해 번개같이 일 권을 내질렀다. 단순한 흑도의 무뢰배가 아닌 듯, 여대가 뻗은 주먹에는 내기가 담겨 있어 기세가 제법 날카로웠다. 웬만한 일반인이 그 주먹에 맞는다면 안면이 뭉개져 피 떡이 되어 날아갈 정도였다.
그러나 진호는 그저 가볍게 휙 하고 팔을 휘저으며 한 바퀴 핑그르르 돌고는 고개를 숙여 배를 잡고 뻗어 있는 마춘삼을 살폈다. 만약 진호를 공격한 여대와 그 옆에 서 있던 흑수일웅 막여와 흑수삼웅 공해가 피분수를 뿜으며 뒤로 날아가지 않았다면 진호가 손을 썼다는 사실을 전혀 알 수가 없었다.
“허, 대단하구나!”
객잔의 창가 쪽 자리에서 일련의 상황을 지켜보던 세 명의 일행 가운데 청수한 인상을 지닌 중년인의 입에서 감탄의 한마디가 나지막이 흘러나왔다. 그들 일행은 탈속한 모습의 청수한 중년인과 두 명의 잘생긴 청년들이었다. 중년인과 청의 청년의 소매에는 백매화가 아름답게 새겨져 있었다. 그리고 백의를 입은 청년은 정말 눈을 뗄 수 없을 정도로 대단한 미장부였다. 중년인이 말을 뱉음과 동시에 백의의 미장부 역시 놀랍다는 눈으로 진호를 쳐다보고 있었다. 다만 청의를 입은 다른 청년 하나만이 약간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운학아, 제대로 못 본 게냐?”
운학이라 불린 청의 청년은 뚱한 표정으로 앞의 중년인을 바라보았다.
“네? 아뇨, 사부님. 그가 한 발 나아가며 들어오는 상대의 목젖에 있는 천돌혈을 관수로 찍고 팔을 휘둘러 다른 두 사람을 날려 버린 것은 보았습니다. 다만 백매관의 아이들만 되어도 가능한 한 수였지 싶은데 사부님이 대단하다고 하셔서…….”
말을 하는 운학이라는 청년의 표정엔 의아함이 가득했다.
“쯧, 그러니 제대로 못 본 게지.”
중년인은 가볍게 혀를 차며 묵묵히 생각에 잠긴 미장부를 쳐다보았다. 중년인의 시선을 의식한 듯 미장부는 가볍게 숨을 내뱉고는 말을 받았다.
“휴, 확실히 매 장로님의 말씀처럼 저 한 수는 정말 고절하군요. 저 사람이 반삼재보로 상대의 권격을 정면에서 흘리며 관수로 천돌혈을 찍은 것은 별 어렵지 않은 일 초지만, 그 다음 초식은 흔히 볼 수 있는 한 수가 아니에요. 천돌혈을 찍었을 때의 반탄되는 힘을 그대로 살려 반보 횡으로 움직이며 발검하려는 상대의 손을 눌렀다가 발검하려는 힘의 탄력까지 실어 상대의 턱을 빗겨 쳐서 속도를 살리는 동시에 전사경을 배가시켜 뒤로 돌아서며 니권으로 우측에 선 사내의 안면을 가격한 것이죠. 단지 내력에 의존하여 힘으로 상대를 물리친 것과는 전혀 차원이 다른 것이죠. 내기가 담긴 권격과 발검의 반응만 보아도 저기에 쓰러진 자들도 그리 호락호락한 자들은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저 사람은 자신의 힘은 서 푼도 채 쓰지 않고 세 명의 상대를 간단히 날려 버린 것입니다.”
너무나 짧은 찰나의 상황에 대한 설명치고는 대단히 길었지만 백의를 입은 미장부의 표정엔 설명을 다하지 못한 아쉬움이 엿보이고 있었다.
“이화접목! 설마 소검후께선 그가 이화접목의 묘리를 행하였다는 말씀입니까?”
의아한 표정을 풀지 못한 채 방운학이 백의를 입은 청년, 즉 소검후 연지하를 보며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진호전기 1권(1화)
작가서문
오래전부터 무협을 사랑하는 애독자로 지내 온 터라 한 번쯤은 직접 무협을 쓰고 싶었는데 오랜 시간을 망설이다가 용기를 내어 이렇게 진호라는 사내의 이야기를 쓰게 되었습니다.
처음 제가 글을 쓰게 되었다고 하자 주위의 일관된 반응은 신기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워낙에 글과는 관계가 없어 보이는 외모 탓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물론 제 스스로도 신기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글 쓰는 재능이 유별나지 않다는 것을 스스로도 잘 알고 있으니 말입니다.
진호라는 사내는 오랫동안 무협을 읽어 오면서 한번 그려 보고 싶은 캐릭터여서 비록 글을 쓰는 재능은 없지만 이야기를 들려주는 마음으로 풀어 나가 보려고 합니다.
제가 머릿속에 그리는 진호라는 사내를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위이불맹(威而不猛)이라는 논어의 한 구절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위엄이 있으나 사납지 않고 부드럽다는 뜻입니다.
냉철한 이성의 소유자인 진호는 자신에게 검을 들이댄 적을 대함에 있어서는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베어 버릴 정도로 냉혹하지만, 사랑하는 이들과 신뢰하는 동료들을 위해서는 한없이 희생하는 따뜻한 마음의 소유자이며, 또한 사랑하는 여인을 위해 아낌없이 주기도 하는 순정의 사내이기도 합니다.
진호라는 사내가 보여 주는 남성상은 제 스스로도 늘 닮고 싶은 모습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오늘날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이들에게서 좀처럼 찾아보기 힘든 모습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진호전기를 읽는 동안만큼은 남자의 향기에 잠시 취해 볼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 봅니다.
끝으로 부족한 제 글을 출판하기 위해 애써 주신 뿔미디어의 모든 분들께 감사의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임 홍준 올림
서장
간간이 밀려온 파도가 달빛에 부서지며 내는 자지러지는 신음만이 고요한 밤바다를 달래고 있던 해수면 위로 갑자기 검은 물체 하나가 불쑥 나타났다. 검은 물체는 사람의 머리였다.
머리를 내민 흑의인은 전방에 정박해 있는 거대한 흑선의 갑판을 잠시 주시하다가 소리 없이 갑판 위로 솟아올랐다. 그 동작이 너무 자연스러워 마치 허공을 부유하는 귀신과도 같았다.
공중에 뜬 상태에서 순간적으로 좌우를 훑어본 인영의 손을 떠난 세 개의 반짝이는 수전이 찰나지간에 갑판 위에서 졸린 눈으로 번초를 서던 왜구들의 천돌혈에 박혀 들었다. 외마디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쓰러지는 왜구들을 확인한 흑의인은 자신의 허리에 묶여 있던 가는 줄을 강하게 세 번 당긴 후 끊어 버렸다. 그와 동시에 허공에서 방향을 선미 쪽으로 틀고 앞으로 나아간 흑의인은 귀신처럼 소리 없이 움직이면서 선상의 번초들을 제거하기 시작했다.
흑의인이 처음 선상으로 올랐던 자리로 돌아온 시간은 일각 정도가 흐른 뒤였다. 그사이 어느새 흑의인이 서 있는 갑판 밑쪽에는 두 척의 소선이 나타나 있었다. 두 척의 소선은 흑선과 떨어진 곳에서 흑의인과 연결된 줄로 신호를 받은 후 맹렬히 노를 저어 다가온 것이다.
흑의인이 수신호를 보내자 두 척의 소선에서 두 개의 갈고리가 날아와 갑판에 걸쳐졌다. 흑의인이 사방을 주시하며 왜구의 기척을 살피는 동안 소선에 타고 있던 아홉 명의 흑의인들은 순식간에 모두 갑판 위에 올라왔다. 새로이 나타난 이들 역시 모두 처음의 흑의인과 마찬가지로 이마에 적건을 두르고 있었다.
“역시 진 대주!”
그중 한 명이 하얀 이를 드러내며 씩 웃고는 처음의 흑의인을 향해 엄지를 치켜들며 나직이 감탄조로 말했다. 그러나 대주라 불린 흑의인은 여전히 무심한 눈빛을 한 채 대원들에게 수신호를 보냈다. 그의 수신호가 떨어짐과 동시에 아홉 명의 대원들은 사방으로 흩어져 자리를 점하기 시작했다.
쾅!
대원들이 자리를 잡자 흑의인은 한 발 나가며 진각을 밟았다. 진각은 거대한 흑선 전체가 울릴 만큼 강렬하였다. 강한 진각 소리에 놀라 잠이 깬 왜구들이 갑판으로 뛰쳐나왔다. 갑판으로 뛰쳐나온 왜구들은 영문을 몰라 사방을 둘러보며 웅성거리고 있었다.
그때 또 한 번의 진각이 울렸다. 두 번째 진각을 신호로 대기하고 있던 대원들의 손에서 수없이 많은 수전들이 쏟아졌다. 수전들은 어김없이 왜구들의 천돌혈과 심장에 박혀 들었다. 잠이 깨지 않은 왜구들은 어둠 속에서 날아드는 수전들에 변변히 대항 한번 해 보지 못하고 쓰러져 나갔다.
쾅!
갑판에 나타난 왜구들 대다수가 쓰러지고 뒤늦게 나타난 사무라이들이 수전을 쳐 내기 시작하자 대주는 다시 한 번 강하게 진각을 밟았다. 그러자 대원들은 박도를 뽑아 들고 삼 인 일 조가 되어 왜구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일반 왜구들은 물론이고 개개인의 검술이 뛰어난 사무라이들도 삼 인이 일 조가 되어 펼쳐지는 합격술에 속수무책으로 쓰러졌다.
“칙쇼!”
챙챙챙!
분개한 고함 소리와 함께 일조 대원들의 박도가 두 동강 난 채 날아가며 처음으로 공격이 막혔다. 상반신의 옷도 채 다 걸치지 않은 사무라이 하나가 일조의 박도를 잘라 내며 짓쳐 들어가고 있었다. 왜구의 우두머리 사무라이였다. 일조 대원들에게는 절체절명의 순간이었다. 그러나 갑자기 나타난 칼 하나가 우두머리의 칼을 가볍게 잘라 내며 동시에 그의 목을 몸에서 분리해 버렸다. 자신의 어이없는 죽음이 믿기지 않은 듯 부릅뜬 우두머리의 두 눈엔 자신을 베어 버린 칼의 검신에 새겨진 글자가 또렷이 비쳐졌다.
마사무네[政宗]
제1장 귀향(歸鄕)(1)
항주를 병풍처럼 에워싼 봉황산의 봉우리들 사이로 느릿느릿하게 해가 넘어가고 있는 유시경. 항주 포구 선착장에 위치한 정의맹 이십오 분초에서 근무 중인 정의맹 풍운대 위사 장오는 권태로운 눈빛으로 항주로 들어오는 마지막 정기선에서 내린 승객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정의맹이 자리 잡은 항주 외곽 곳곳에 총 서른여섯 개의 분초가 세워져 있었다. 이들 분초의 역할은 항주를 드나드는 무림인들의 동향을 감시하고 주요 인물의 출입을 보고하기 위한 것이다. 분초에서의 근무는 특별한 공문이 내려오지 않은 이상 크게 주의할 일이 없었다.
일상의 무료함이 가득 찬 표정으로 연신 하품을 해 대던 장오의 눈이 갑자기 이채를 띠기 시작했다. 장오의 시선은 죽립을 눌러쓰고 흑의를 입은 한 사내에게 고정되었다. 왼손에 보퉁이로 둘러싼 긴 물체를 든 사내는 보통의 체격에 평범한 모습이었을 뿐 결코 무인의 느낌은 아니었다. 그러나 묘하게도 그 사내에게선 왠지 모를 강인함이 느껴지고 있었다.
“어이! 장 조장, 교대 안 할 거야?”
교대조인 팔조 조장인 황기가 넋을 놓고 뭔가를 쳐다보고 있는 장오를 툭 치며 불렀다.
“어, 아! 예, 교대해야죠. 헤헤.”
장오는 흑의인에게 향했던 시선을 거두고 등 뒤로 다가온 황기를 보며 실없이 웃었다.
“뭐, 이상은 없지?”
황기는 장오가 보던 쪽을 쓰윽 둘러보면서 물었다.
“예, 뭐 특별한 일은 없었습니다. 곧 신입 위사 모집이 있어서 그런지 낭인들이 제법 눈에 띄네요, 헤헤.”
장오는 덩치만큼이나 큰 얼굴에 가득 웃음을 담고서는 대답하였다.
“그렇겠지. 에효, 이번엔 똘똘한 놈 하나 밑으로 오려나…….”
황기가 분초의 한구석에 자리를 잡으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그럼 황 조장님 수고하십시오! 저는 애들하고 만복루에 가서 분주나 한잔 걸치고 들어가야겠습니다. 헤헤.”
“그려, 수고했네! 야, 문철아! 가서 물이나 한 잔 떠오너라!”
장오는 황기의 수인사를 뒤로하고 조원들과 함께 분초를 떠났다.
***
항주 시내에서 포구로 가는 길인 소향로의 끝자락에 위치한 객잔인 만복루는 조금 전 여객선에서 하선한 손님들과, 하루 일과를 마치고 한잔 걸치기 위해 들른 사람들로 북적대고 있었다. 포구의 선착장에서 잠시 장오의 시선을 받았던 흑의인, 진호는 만복루의 한구석에 앉아 간단한 요기와 분주 한 병을 시키곤 붐비는 항주 포구의 풍경을 감회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우당탕탕!
갑자기 주방 옆의 별실 문이 거칠게 떨어지며 장년인 한 명이 굴러 나왔다. 그 장년인은 다름 아닌 만복루의 주인인 마춘삼이었다.
“마춘삼, 이 새끼야! 내가 우습게 보여? 내가, 이 흑수이웅 여대 나리가 네 눈에는 새피리 젓만 하게 보인단 말이지…….”
말상의 얼굴을 가진 장한 한 명이 심한 욕설을 뱉으며 마춘삼을 발로 차고 있었다.
곧 별실에서 두 명의 장한이 따라 나오면서 바닥에 뒹굴고 있는 마춘삼을 포위하듯 에워싸고는 킬킬거리고 있었다.
“마춘삼? 춘삼이 형?”
흑의인 진호는 소동이 일어나고 있는 입구 쪽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진호가 고개를 들어 살펴보니, 봉변을 당하고 있는 장년인은 자신의 어린 시절 추억 한쪽에 자리하고 있는 춘삼이 형이었다. 항주 시내 주루에서 숙수 일을 배우고 있어 가끔 자신과 아이들에게 먹을 것을 챙겨 주곤 하던 형이었다.
“어이, 말대가리! 그만 하지.”
나직하면서도 묵직한 목소리가 진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어떤 개 시러배 놈이…….”
말상의 얼굴을 가진 장한, 흑수이웅 여대는 자신이 가장 싫어하는 말대가리라는 말에 분기탱천하여 자신 쪽으로 다가오는 진호를 노려보았다. 흑수삼웅의 맏이인 막여와 막내인 공해도 어이가 없다는 듯이 진호를 노려보며 천천히 움직여 품자 형태로 진호를 에워쌌다.
여대는 정의맹이 있는 항주인지라 흔한 게 무림 고수라서 격분한 가운데서도 상대를 살펴보았다. 그러나 상대는 태양혈도 밋밋하고 눈에 정광이 어려 있는 것도 아니었다.
여대가 안면에 비릿한 조소를 흘리며 갑자기 발밑에 깔려 있는 마춘삼의 배를 발뒤꿈치로 찍어 차 버리고는 진호를 향해 번개같이 일 권을 내질렀다. 단순한 흑도의 무뢰배가 아닌 듯, 여대가 뻗은 주먹에는 내기가 담겨 있어 기세가 제법 날카로웠다. 웬만한 일반인이 그 주먹에 맞는다면 안면이 뭉개져 피 떡이 되어 날아갈 정도였다.
그러나 진호는 그저 가볍게 휙 하고 팔을 휘저으며 한 바퀴 핑그르르 돌고는 고개를 숙여 배를 잡고 뻗어 있는 마춘삼을 살폈다. 만약 진호를 공격한 여대와 그 옆에 서 있던 흑수일웅 막여와 흑수삼웅 공해가 피분수를 뿜으며 뒤로 날아가지 않았다면 진호가 손을 썼다는 사실을 전혀 알 수가 없었다.
“허, 대단하구나!”
객잔의 창가 쪽 자리에서 일련의 상황을 지켜보던 세 명의 일행 가운데 청수한 인상을 지닌 중년인의 입에서 감탄의 한마디가 나지막이 흘러나왔다. 그들 일행은 탈속한 모습의 청수한 중년인과 두 명의 잘생긴 청년들이었다. 중년인과 청의 청년의 소매에는 백매화가 아름답게 새겨져 있었다. 그리고 백의를 입은 청년은 정말 눈을 뗄 수 없을 정도로 대단한 미장부였다. 중년인이 말을 뱉음과 동시에 백의의 미장부 역시 놀랍다는 눈으로 진호를 쳐다보고 있었다. 다만 청의를 입은 다른 청년 하나만이 약간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운학아, 제대로 못 본 게냐?”
운학이라 불린 청의 청년은 뚱한 표정으로 앞의 중년인을 바라보았다.
“네? 아뇨, 사부님. 그가 한 발 나아가며 들어오는 상대의 목젖에 있는 천돌혈을 관수로 찍고 팔을 휘둘러 다른 두 사람을 날려 버린 것은 보았습니다. 다만 백매관의 아이들만 되어도 가능한 한 수였지 싶은데 사부님이 대단하다고 하셔서…….”
말을 하는 운학이라는 청년의 표정엔 의아함이 가득했다.
“쯧, 그러니 제대로 못 본 게지.”
중년인은 가볍게 혀를 차며 묵묵히 생각에 잠긴 미장부를 쳐다보았다. 중년인의 시선을 의식한 듯 미장부는 가볍게 숨을 내뱉고는 말을 받았다.
“휴, 확실히 매 장로님의 말씀처럼 저 한 수는 정말 고절하군요. 저 사람이 반삼재보로 상대의 권격을 정면에서 흘리며 관수로 천돌혈을 찍은 것은 별 어렵지 않은 일 초지만, 그 다음 초식은 흔히 볼 수 있는 한 수가 아니에요. 천돌혈을 찍었을 때의 반탄되는 힘을 그대로 살려 반보 횡으로 움직이며 발검하려는 상대의 손을 눌렀다가 발검하려는 힘의 탄력까지 실어 상대의 턱을 빗겨 쳐서 속도를 살리는 동시에 전사경을 배가시켜 뒤로 돌아서며 니권으로 우측에 선 사내의 안면을 가격한 것이죠. 단지 내력에 의존하여 힘으로 상대를 물리친 것과는 전혀 차원이 다른 것이죠. 내기가 담긴 권격과 발검의 반응만 보아도 저기에 쓰러진 자들도 그리 호락호락한 자들은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저 사람은 자신의 힘은 서 푼도 채 쓰지 않고 세 명의 상대를 간단히 날려 버린 것입니다.”
너무나 짧은 찰나의 상황에 대한 설명치고는 대단히 길었지만 백의를 입은 미장부의 표정엔 설명을 다하지 못한 아쉬움이 엿보이고 있었다.
“이화접목! 설마 소검후께선 그가 이화접목의 묘리를 행하였다는 말씀입니까?”
의아한 표정을 풀지 못한 채 방운학이 백의를 입은 청년, 즉 소검후 연지하를 보며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되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