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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도진위대 1권 (23화)
제5장 만남 (6)


“자유, 평등, 이성의 시대라고, 자신들이 인류 최초로 미명에 빠져 있던 인간 정신을 해방시켰고, 자유를 쟁취했고, 그렇게 독립된 이성의 주체로서 합리적인 사회 시스템을 만들었다고 떠들던 자들. 그들이 만든 근대 자유주의란 거대한 지배 구조. 사람이 도구가 되고, 인간의 생명과 소중한 노동이 돈의 가치로, 숫자로 환산되는 세상. 정말 미친 시대가 시작된 것이지. 문제는 아무도 이 사회 구조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거야.”
“그렇긴 해. 소외의 시대라는 말. 모든 가치가 뒤바뀌고 모든 존재가 도구화되는 대소외의 시대.”
“이 시대를 보냈던 조상들이 생존과 투쟁하며 몸으로 배운 못된 근대성, 잘못된 근대성. 그게 결국 우리의 운명을 이곳으로 이끌게 된 거지. 모순을 세상의 법칙인 양 당연하게 받아들여야 했던 할아버지들이 세상이 바뀌어 모순을 모순 그대로 보는 현대사회에 적응하지 못한 현실이 21세기의 한국을 결국 이렇게 만든 것이니까. 사회의 관성은 또 다른 관성을 낳는 거고…….”
“후우, 정말 우리가 역사의 외통수에 걸려 이곳으로 온 셈이네. 정말 슬프다.”
“그러니까 앞으로 우리는 더욱 신중하고 깊은 고민을 해야 돼. 당장엔 눈앞에서 알짱거리는 일제란 괴물과 싸워야 하고, 이 한 고비를 넘긴 다음에 어떻게 만들어야 할지를. 괴물의 얼굴이 아닌 인간의 얼굴을 가진 역사로…….”
“선배.”
“응?”
“안 어울려, 그런 얘기.“
“그, 그런가? 나답지 않게 좀 그렇지? 괜히 밤 분위기에 취해서 말이지. 어참, 공기가 너무 좋아 탈이야. 에혀!”
“바보 같아, 그런 얘기가 선배랑 안 어울린다는 게 아니라고!”
“뭐? 그럼 뭐가?”
“하지만 고마워. 같이 이곳에 있다는 게……. 춥다. 들어가서 잘래.”
민우는 끝내 몰랐다. 왜 그렇게 공기 좋고 분위기 좋은 그들의 밤이 이렇게 막을 내렸는지.

빽빽이 들어찬 침엽수가 물결치며 흐르는 곳.
이 침엽수림의 하늘은 좁기만 하다.
혈기방장했던 젊은 날의 꿈이 이곳에서 보이는 하늘처럼 움츠러들었다.
잘못된 시대가 이렇게 만들었다.
그 반작용으로 터져 나오는 것은 뜨거운 분노.
또 그에 대한 반작용으로 정신은 늘 빛을 찾아 헤맨다.
늦게나마 삼수 출신의 어여쁜 아내와 알콩달콩 꾸린 살림이 깊게 파인 마음의 생채기를 잠시 보듬어주었지만, 그의 시선은 언제나 하늘을 향해 있었다.
30대 후반으로 보이는 이 사내.
180㎝의 큰 키, 떡 벌어진 강건한 신체.
눈빛도 형형하다.
사내는 동료 포수 세 명과 함께 산을 타며 어떤 흔적을 쫓고 있었다.
10여 년에 걸친 사냥꾼 생활의 이력이 그의 발걸음에 묻어난다.
험하고 수림이 울창한 산을 오르는데도 호흡이 흐트러짐 없이 일정한데다, 발걸음은 어찌나 가벼운지 소리 하나 나지 않는다.
과연 호랑이도 잡아낸다는 북청의 용맹한 포수답다.
“흠, 좀 이상하구만.”
그는 손짓을 하여 동료 포수들을 불러 모았다.
“여길 보라우. 여기까지는 급하게 도망친 것 같으이. 그런데 조 위쪽부터는 흔적이 별로 없어. 한 사람의 흔적만 제대로 남아 있지 않갔어? 어똑해 된 것 같나?”
“여서 헤어진 고이 아니갔습네까?”
“그럴 수도 있갔어. 아니면 고 한 사람 빼고 다른 이들은 우리만큼이나 산을 잘 타는 사람이갔디. 그렇다면 고들은 우리 같은 포수들인가?”
“뭐 그리 고민하오. 그냥 한 사람의 흔적이라도 따라가 보시라우.”
“고럴까?”

한편, 의견을 주고받는 네 사람을 먼 숲에서 망원경으로 관찰하는 이들이 있었다.
“저 사람들, 누굴까요?”
“글쎄, 화승총을 든 걸 보니 이 지방의 의병이거나 사냥꾼 같은데.”
“일본 놈 첩자일 수도 있지 않습니까? 헌병들을 사살했으니 가만있을 리 없잖아요.”
“첩자일 가능성도 있겠지. 어쨌든 우리는 거리를 유지하며 계속 감시한다.”
“네, 알겠습니다.”
이번에 중령으로 진급한 특전사 경정민 팀장은 계속 거리를 유지하며 그 일행들을 관찰했다.
지난번에 김환경 하사가 사고 친 이후로 대신 배치된 팀이다.
특전대장은 팀장 급들 중에서 최선임인 경정민의 팀에게 이곳을 맡겼다.
“확실하군. 저들은 정확하게 우리의 정찰 경로를 짚어서 쫓아오고 있어. 분명 저번 사건과 관계가 있는 것 같으니 체포한다.”
경정민 팀장이 수신호를 했다.
그에 팀원들이 재빨리 흩어져 자리를 잡고, 그들이 다가오기를 기다렸다.

계속 전진하던 네 사냥꾼이 갑자기 멈춰 섰다.
“멈추라우!”
“와 그러시네까?”
“느낌이 안 좋구만기래. 숲이 너무 조용하디 않갔어. 마치 호랭이가 사냥감을 앞에 두고 덮치기 직전의 분위기 같구만기래…….”
숲은 정적에 휩싸여 있었다.
한참을 기다려도 변화가 없자 그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다시 전진하기 시작했다.
“손들어! 움직이면 쏜다!”
“헛!”
바로 앞에서 튀어나온 특전대원들.
이렇게 가까이 있었는데도 몰랐다니. 그보다 저 괴상망측한 차림이라니.
사냥꾼 무리는 일순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누구시라요?”
모두가 놀라 당황한 사이, 4명 중 우두머리 격인 사내가 이내 평정심을 되찾고 되물었다.
경정민 팀장은 살짝 이채롭다는 표정을 떠올리더니 그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그건 내가 물어볼 말. 당신들은 누군가?”
“우리래 북청에 사는 포수들이오. 갑산을 거쳐 이리로 온 길이오만.”
“그럼 여기서 무엇을 하고 있었나?”
“고 물음에 답하기 전에 내래 먼저 묻갔소. 그대들이 일전에 의병을 구해 달아난 자들이오?”
“그렇다면?”
“고럼 우린 같은 편이니 이제 총 좀 내려놓으시라요.”
그 말을 듣고 경정민 팀장은 총을 내렸지만 팀원들은 여전히 경계를 유지했다.
“내래 안산사포계 연대장 홍범도라 하오. 야들은 우리 대원들이고.”
“헉!”
“와아! 홍범도래, 홍범도.”
팀원들 사이에서 환성이 터졌다.
놀랍기는 경정민 팀장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는 팀장답게 침착함을 유지하며 활짝 웃는 얼굴로 홍범도에게 다가갔다.
“아, 홍 대장이셨군요. 전 경정민이라 합니다. 대한독립전선의 특전대 중대장을 맡고 있습니다.”
경정민은 팀장이란 명칭을 이 시대 사람들이 알 리 없으니, 직급에 맞춰 자신을 중대장이라 소개했다.
“내를 아시오?”
홍범도는 반색하는 특전대원들의 반응에 당황한 기색이었다.
비록 자신이 이 부근에서 이름난 포수이기는 해도 저들까지 자신을 알아볼 리는 없었기 때문이다.
“하하! 당연히 알지요. 워낙 이름난 독립…… 아니, 포수신데요. 핫하!”
실수할 뻔했다.
경정민 팀장은 팀원들에게 고개를 돌려 눈짓을 했다.
아는 척하지 말라는 신호다.
팀원들도 이내 그 뜻을 알아차렸다.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대첩으로 유명한 홍범도.
얼마나 멋진 인물인가.
독립군 역사상 한 번도 패전이 없던 장군.
한 번도 흔들림 없고, 한 번도 과오가 없던.
대부분의 독립운동가들이 한 번쯤은 자신의 명성에 먹칠을 하고 그릇된 길로 엇나갔지만, 그는 평생 일심으로 독립투쟁의 길을 걸었다.
끝까지 굽힘 없이 독립투쟁을 하다 스탈린의 고려인 강제 이주 때 카자흐스탄으로 끌려가 쓸쓸히 말년을 보낸 인물.
본부에서도 이 시대에서 몇 안 되는 믿을 만한 인물이라 평가하여 일찍이 1차 포섭 대상으로 점찍어 놓은 상태였다.
평양 출신으로 공장 노동자, 광부, 화전민, 군인, 스님, 포수(사냥꾼), 심지어 10년 전 을미의병 때 류인석의 진영에 들어가 의병 활동도 했다.
이렇듯 다채로운 이력을 가진 그.
지금의 그는 삼수, 갑산, 북청 및 혜산을 오가며 포수로 활동하던 시절로, 70여 명의 포수를 모아 ‘안산사포계’를 조직해 연대장의 신분을 갖고 있기도 했다.
여기서 연대장이란 대외 교섭을 위한 직능 대표를 말함이다.
어떤 협회의 협회장이라 생각하면 맞을 것이다.
원래의 역사대로라면 이들은 2년 후부터 독립군 활동을 하게 되었을 것이다.
“대한독립전선이라……. 그럼 의병 조직이갔군. 맞소?”
“하하! 네, 그렇기도 합니다.”
“고렇기도 하다? 흠, 고런데 총이며 복장이며 좀 특이하오? 얼굴에 칠을 한 것도 고렇고.”
“이상합니까?”
“첫인상에서 조금 흉악하다는 느낌이 있지만, 군인이라면 마땅히 고런 인상도 필요한 법 아니갔소, 고런대로 괜찮은 것 같소.”
경정민 팀장은 대원에게 본부로 연락하라 지시하고는 홍범도에게 본부로 함께 가자고 제안했다.
홍범도는 당연히 수락했다.
“갑산에 들렀는데, 사람들이 일본 헌병 놈들을 쏴 죽이고 애국지사를 구해 준 사람들이 나타났다 하지 않갔어. 너무 궁금하여 뒤를 쫓던 길이었소. 내친걸음인데 당연히 본부라는 곳에 가 봐야 하지 않갔소?”
“그럼, 이쪽으로…….”
빽빽한 숲을 조금 걷다 보니 수림 사이를 시원하게 뻗은 큰길이 홍범도 일행의 눈에 펼쳐졌다.
“어라? 언제 요기에 길이 나 있었디?”
“저희가 낸 길입니다. 여기서 몇 십 리 떨어진 본부까지.”
“아, 고생 많으셨갔소? 이런 험지에 길을 내다니.”
“사나흘 걸렸습니다만.”
“사나흘? 에이, 고거이 말이 되는 소리요?”
“하하! 가 보시면 압니다.”
조악하지만 그래도 혜산 방면 도로 건설 계획의 1단계인 15㎞ 구간이 완성된 상황이었다.
길을 따라 조금 더 올라가자 큰 공터가 나오고, 거기에는 유민을 태워 갈 용도로 배당된 트럭이 한 대 주차되어 있었다.
어제부터 특전대원들이 곳곳에서 인도한 유민들을 데려오기 위해 수송 수단을 제공하기로 한 것이다.
그래서 이 넓은 공터가 자연스럽게 정류장이 되었다.
거대한 트럭의 덩치에 놀라고 그게 저절로 움직이는 데에 놀라고, 또 빠른 속도로 달리는 것에 놀라고.
홍범도와 동료들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본부 입구에 도착하자 지도부 인사들이 모두 나와 홍범도 일행을 맞이했다.
홍범도 일행을 데리고 간다는 연락을 받은 본부는 잠시 흥분에 휩싸였다.
드디어 역사 속의 거물과 첫 접촉이 이루어진 것이다.
그것도 가장 믿을 만하다는 홍범도 장군과.
그래서 모두가 예를 표하기 위해 마중 나온 것이었다.
누가 ‘마중 나가자’란 제안을 한 것도 아닌데, 발걸음이 저절로 움직였다.
“홍 대장님, 저희 대한독립전선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지도부 모두가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홍범도를 바라보았다.
“허허! 내래 뭐라고 이리 과분한 인사를 하는 기요?”
“홍 대장님이라면 충분히 그럴 만한 분이죠. 자, 이쪽으로…….”
태진훈 대표와 장순택 사령관이 나란히 홍범도 대장을 안내했다.
홍범도 대장 일행은 허허벌판과 같던 백두산 산록에 거대한 천막 도시가 생긴 것을 보며 이 단체의 규모가 만만치 않음을 알았다.
게다가 자신들이 타고 온 것과 같은 트럭들이 수백 대가 서 있는 풍경하며, 거대한 중장비들이 작업하는 모습을 보고는 그 자리에 얼어붙어 버렸다.
“저갔이었소? 길을 낸 기물이 말이오.”
“그렇습니다.”
“대단하심네다. 별유천지지라……. 요곳은 마치 다른 세상에 온 것 같고만.”
“하하! 그렇습니까?”
홍범도는 지도부들로부터 이 단체의 기원과 목적, 앞으로의 계획에 대한 이야기를 장시간 묵묵히 들었다.
물론 단체의 기원에 대한 이야기는 미안하게도 대외적으로 만들어진 시나리오를 들려줄 수밖에 없었다.
러시아 우랄 산맥의 예카테린부르크 근처에서 단체로 모여 살고 있다가 이주했다는 스토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