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간도진위대 1권 (21화)
제5장 만남 (4)
김환경 하사가 속한 팀은 조금 특수하게도 처형 직전의 인물을 구출한 탓에 복귀를 했지만, 다른 팀들의 임무는 계획대로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아직 일본군과 조우한 팀은 없었지만, 특전대원들이 접촉하게 되는 유민들의 수는 점차 늘어났다.
일제가 행정권을 장악하면서 지방관들이 친일파 인물로 교체되고, 이에 따라 주민들에 대한 수탈이 걷잡을 수 없이 심해졌다.
일본군의 횡포까지 더해 설상가상인 상황이었다.
그래서 간도로 발길을 옮기는 이들이 기하급수적으로 늘고 있었고, 본부에서는 몰려오는 유민들을 따뜻하게 맞아 주었다.
단기적으로는 그들에게서 이 시대에 대한 정보를 얻는다는 이점이 있지만, 장기적으로 봐서는 부족한 인력을 수급할 수 있다는 점이 더욱 큰 긍정적인 요소로 다가왔다.
오는 족족 받아들여 일거리도 주고, 기술 교육이나 소양 교육도 시켜 주다가 같이 동행한다는 원대한 계획이 시작된 것이다.
본부의 공터가 엄청나게 넓어져 갔다.
간이 연병장도 만들고, 받아들인 유민을 수용할 시설도 필요했다.
거기에다 수많은 트럭과 중장비, 각종 차량들을 주차할 공간까지.
군 장비와 중요한 기계나 설비는 지하 공동 안에 있었다.
본부에서 화룡 방향으로 길을 내는 공사 또한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었다.
벌써 토문강 구간 수킬로미터가 완성되었다.
이 공사에는 아침마다 수많은 공사 차량과 이들을 호위할 군인들이 동원되었다.
그런데 어제부터 또 한 부류의 사람들이 끼어들었다.
다름 아닌 유민들이었다.
대부분의 유민들은 숙소를 나와 도로 공사 현장을 구경하다 일이 끝날 때면 같이 돌아왔다.
처음 유민들이 공사 차량을 따라갈 때만 해도 지도부는 그들이 일손을 보태려고 그러는 줄 알았다.
한마디로 순진한 착각이었다.
유민들은 그저 구경하러 가는 것이었다.
흰옷을 입은 유민 수백 명은 아직은 무서운지 멀찍이 떨어져서 두런두런 얘기를 나누며 공사 현장을 지켜보았다.
그로 인해 조그마한 둔덕에 하얀 꽃이 활짝 핀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저저! 불도차 좀 보라우! 작은 나무는 그냥 화∼악 밀어 버리는 거이 속이 다 시원하지 않네?”
“폭뢰차는 어떻고? 큰 손으로 한 번 푸욱∼ 뜨면 곳간 하나 꽉 채울 만큼 흙더미를 퍼 올리지 않갔어?”
유민들이 처음 중장비를 보았을 때는 모두가 한결같이 기겁을 하고 사시나무 떨 듯 몸을 떨었다.
어떤 이는 연신 부처님을 찾았다.
조그만 자동차조차도 본 적이 없는 사람들이니 어쩌면 당연한 일.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이젠 조금 익숙해졌는지 그들은 하루 종일 중장비들로 공사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운율에 맞춰 흥겹게 강평까지 하면서.
어떤 이는 작업자들에게 장비의 이름을 물어보기도 했다.
불도저라 했더니 ‘불도차’가 되었고, 포클레인은 ‘폭뢰차’가 되었다.
어떤 이는 밀차, 손차라 부르기도 했다.
이런 과정 속에서 유민들은 ‘대한독립전선’이란 단체에 대해 점차 경외감을 품어 갔다.
이런 대단한 기물들과 기골이 장대하며 용맹한 군인들이 있는데 무엇이 두렵겠는가!
게다가 사람들의 인성도 마냥 좋게만 느껴졌다.
생활양식과 사고방식은 자신들과 많이 달랐지만, 그래도 따뜻하고 예의 바른 사람들이라 이해해 줄 수 있었다.
그래서 유민들 사이에서는 저들의 바짓가랑이라도 붙잡고 같이 살아야 한다는 공감대가 서서히 형성되고 있었다.
그런 결심은 점차 행동으로 나타났다.
누군가는 도와줄 일이 있느냐고 하며 일을 달라고 졸랐고, 어떤 이는 운전을 배우고 싶다고 했다.
이들의 눈에 제일 멋있게 보이는 사람은 트럭이나 중장비를 모는 기사였다.
그 무시무시한 장비들을 능숙하게 다루는 모습이란.
특히 아이들에겐 21세기 아이돌 스타 못지않게 느껴졌으리라.
뒤처져 오던 본대를 마주했을 때, 유민들은 군대의 규모에 놀랐다.
그리고 자신들을 지켜 주기 위해 화룡으로 가는 군대란 말을 듣고 무척이나 든든해했다.
조금씩 말을 섞으며 친해진 두 집단.
유민들은 힘들게 탄약상자를 들고 가는 대원을 보고는 자신들의 소달구지를 내어 주거나 지게를 벗어 주었다.
그래 봐야 일부만 실을 수 있었지만, 그래도 큰 도움이 되었다.
대신 달구지에 실려 있던 유민들의 가벼운 짐은 군인들이 들어 주었다.
그런데 그 와중에 아직 훈훈한 관계로 발전하지 못한 사람들도 있었다.
“처자, 내 잘못했시다. 에구, 내래 입이 방정이갔네. 그러니 이만 화를 푸시기요.”
“아니, 무슨 잘못을 했다고 그러세요? 그쪽은 사실을 말했을 뿐이잖아요? 그렇지 않나요?”
“뭐, 사실은 사실이지만서도 기분 나빴다니 내래 용서를 구하는 것 아니오리꺄?”
“뭐라고요? 사실은 사실이다?”
미련할 만큼 우직한 대답에 윤희가 다시 토라졌다.
사실 판석은 왜 이렇게 윤희가 화를 내는지 준태에게 들었다.
하여 그게 그들 사회에서 엄청난 결례라는 얘길 듣고 바로 사과를 했으나 윤희의 화는 좀처럼 풀리지 않았다.
여자의 마음을 제대로 짚지 못한 판석의 실수인 것이다.
그러나 힘들게 행군을 하는 해병대원들에게 있어 둘의 신경전은 조그마한 청량제가 되었다.
“크크, 사실은 사실이래.”
민우 또한 이 소소한 즐거움을 그냥 넘길 리 없다.
“아우∼ 이 인간을 확!”
움찔!
민우와 판석이 동시에 움찔거렸다.
민우를 향해 불끈 치켜든 윤희의 주먹이 주변의 시선을 의식한 듯 우뚝 멈춰 섰다.
“하하…… 윤희야, 이제 그만 화 풀자고. 저렇게 사과하시는데…….”
“흥! 언제 사과하셨는데? 난 들어 본 적이 없는데?”
“장난도 너무 오래가면 진심이 돼. 그러니 그만해.”
“히히! 그런가?”
준태가 만류하자 그제야 씨익 웃어 보이는 윤희.
민우가 그런 윤희의 모습을 보고 진저리를 쳤다.
무슨 의미의 진저리인지는 민우만이 알 터.
윤희의 미소를 보자 판석의 굳었던 표정이 그제야 풀렸다.
그 역시 ‘저 종잡기 어려운 성격을 가진 처자가 자신과 가족을 쫓아내면 어쩌나’ 하는 생각으로 잔뜩 긴장했던 터였다.
물론 다른 사람들은 윤희가 분위기 메이커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을 진즉에 알고 있었지만 말이다.
어느 정도 기분이 풀린 듯 보여 판석이 조심스레 말을 붙였다.
다리 상처가 아직 다 아물지 않아 조금 절룩거리는 윤희의 모습이 마음에 걸린 듯했다.
“저기, 다리도 불편한 것 같은데 내 달구지에 타고 가시면 어떻합네?”
“괜찮아요. 무거운 짐을 진 군인들도 걸어가는데요. 뭐.”
확실히 기분이 풀렸는지 한결 부드러워진 윤희의 말투였다.
홍기하 구간에서 민우 일행은 반대쪽에서 내려오는 유민들도 만날 수 있었다.
그들 중에는 중국 관헌에게 재산을 빼앗기고 쫓겨난 사람도 있었고, 마적의 위협에 시달리다 목숨이라도 부지하자는 생각으로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는 이들도 있었다.
한데 이들이 해병대원들을 만났을 때의 반응은 판석 일행의 경우와 달랐다.
정민창 대장이 위장 크림을 말끔히 지우라고 지시를 내린 것이다.
그들은 오히려 태극기를 앞세운 건장한 군인들을 만나자 너무나 반가워했다.
왜 진작 오시지 않았슴둥, 하며 울먹이는 사람도 있었다.
마적들에게 가족을 잃은 사람들은 서럽게 울었다.
민우는 유민들 중 한 명에게 현지 사정에 대해 물어보았다.
“아이고, 말도 마시꼬망. 이범윤 장군께서 왜놈들과 싸운다고 간도를 떠나자마자 청나라 관리들이 아주 살판이 났지 안 갔소. 변발을 하지 않으면 쫓아내겠다고 얼마나 협박을 하데는지, 옆 동네 어떤 사람한테는 변발 안 했다고 어마어마한 벌금을 매겼읍새. 그걸 내지 못하니까 아새끼들을 동원해 땅이며 재산을 가져갔음둥. 세상에 그런 흉악한 놈들이 어디 있음둥?”
청나라 관리들은 간도에 거주하는 한인들에게 청나라 땅에 살고 있으니 변발을 하고 청나라 사람이 되라고 강요했다고 했다.
변발은 곧 귀화를 의미했다.
그 지시를 어기면 당연히 처벌이 뒤따랐다.
“마적들은 어떻습니까?”
“보면 모름둥? 죠 안깐이(아낙)는 새뱅이 마적에게 당했음둥. 더 말해 무실하겠슴메. 아직 삼도구(화룡)에는 오잴까, 그 근처 골짜기 마을들 몇 개가 털렸꼬망. 그 놈들 춘궁기 때는 더 기승을 부리 모앵이지.”
“가을에도 그렇꾸마. 추수기 때도 많이 올꼬망.”
옆에서 얘기를 듣던 다른 유민도 끼어들었다.
준태는 유민들을 달래며 자신들과 같이 돌아가자고 설득했다.
다시는 약탈당하거나 중국 관헌에게 시달리지 않게 해 주겠다는 약속까지 했다.
“그런데 요맹큼 수의 군인들로 그들을 감당할 수 있겠음둥? 간도가 얼매나 넓은지 모르메?”
“하하! 우리 군대는 약하지 않습니다. 게다가 이 부대의 열 배가 넘는 군인들이 한 달만 있으면 화룡으로 옵니다. 저희는 선발대일 뿐입니다.”
“와! 열 배임둥?”
“그렇습니다.”
유민들을 안심시키기 위해 준태가 살짝 과장했다.
“대단하꼬망. 그럼 당신들은 황제 폐하께서 비밀리에 보낸 군데임메?”
“그게…….”
유민들은 이범윤 장군이 폐하의 밀명을 받고 활동한다는 사실을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그러니 그들에겐 준태가 말한 이들이 이범윤 장군의 공백을 메우기 위해 나타난 것이라 충분히 착각할 만했다.
이제 부대의 편제는 모두 완료되었다.
남북을 따지지 않고 장병들을 한데 섞어 편제하느라 조금 시간이 걸렸을 뿐, 편제하는 과정에서 별문제는 없었다.
처음에는 효율성을 고려해 출신 별로 묶어 놓을 생각도 했으나 부대의 근간이라 할 수 있는 통일성이 무너질 것이 우려되어 섞어서 편성하기로 한 것이다.
만약 권두진 사령관과 더 많은 북측 군인들이 살았다면 얘기는 달라졌겠지만.
그리고 제식훈련부터 시작해 여러 가지 부대전술을 남쪽 방식으로 통일하고는 시간 날 때마다 새로 편제된 부대들끼리 훈련을 했다.
그러는 동안 이 시대에 대한 정보가 어느 정도 입수되자 조직의 틀을 잡기 위한 확대회의가 열렸다.
“비록 시대가 갈렸지만 우리를 위해 희생해 주신 권두진 사령관과 장병들을 위한 묵념의 시간을 갖기로 하겠습니다. 일동 묵념!”
“…….”
희생자를 떠올리며 잠시 숙연해진 분위기를 다잡은 송상철 중령이 입을 열어 회의의 시작을 알렸다.
“먼저 군 편제와 관련하여 새로 임명된 고위 간부들을 소개하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아, 잠깐만요.”
그때, 갑자기 태진훈 교수가 송상철 중령의 말을 끊었다.
“중이 제 머리 못 깎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하하, 그래서 제가 나서야겠습니다.”
무슨 의도인지 이해하지 못한 군인들은 저마다 의아해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장순택 사령관과 다른 민간인들은 이미 합의가 된 듯 의미 모를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