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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도진위대 1권 (19화)
제5장 만남 (2)


어느 정도 진정된 유민들은 이들 삼총사의 모습을 천천히 훑어보았다.
깔끔한 단발머리에 키는 자신들보다 머리 하나만큼은 더 크고, 인물도 준수했다.
한데 옷차림이 낯설었다.
한성에 구경 갔다 온 사람들 얘기대로 이게 그 서양식 옷인 모양이라 생각했다.
개중엔 여자도 한 명 끼어 있었는데, 몸에 짝 달라붙은 파란색 바지에 역시나 짝 달라붙는 하얀 상의를 입었다.
얼굴은 눈꽃처럼 희었다.
“저 처자 봅세. 무슨 키가 저렇게 크누?”
“에미나이가 바지를 입었시다. 시상에…….”
“에미나이가 저렇게 삐쩍 말라서야……. 저래서 어디 애라도 낳을 수 있나오?”
마치 품평회라도 열린 듯 여러 목소리가 쏟아져 나오자 민우의 옆에 서 있던 윤희의 얼굴이 빨갛게 물들어 갔다.
이들에겐 당연히 홍일점인 윤희가 도드라져 보였고, 자연스럽게 그녀에 대한 첫인상이 여과 없이 입에서 흘러나왔다.
윤희의 어깨가 부르르 떨렸다.
무엇보다 마지막 말이 뼈아팠나 보다.
준태가 유민들과 대화를 하는 사이, 민우는 사람들을 날카롭게 관찰해 나갔다.
유민들의 복장은 다양했다.
머리띠도 없이 봉두난발을 한 사람, 챙이 좁은 갓을 쓴 사람, 어떤 이는 벙거지를 쓰기도 했다.
그동안 먼 길을 걸어와서 그런지 피로에 지친 얼굴이었다.
옷 또한 때에 절어 누렇게 변색되어 있었다.
해병대원 한 명이 유민들을 살피는 민우에게 자신의 소감을 얘기했다.
“생각보다 사람들 키가 큰데요?”
“그렇죠. 우리 시대 사람들보다 전체적으로 작기는 하지만 비교적 키가 컸다고 합니다.”
역사에 대해 열심히 공부했던 민우는 실제로 구한말의 한국인 키에 대한 몇 가지 증언을 찾아볼 수 있었다.
그중 어떤 선교사는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여러분들이 처음 동양에 왔다면 일본인, 중국인, 한국인을 구별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나처럼 이들 사회를 두루 경험해 보면 이내 한국인을 확실히 구별할 수 있게 된다.
한국인은 활달하고 걸음걸이가 씩씩하다. 호기심이 많으며, 다른 두 민족과 달리 청결한 편이다. 또한 자존심이 대단히 강한 민족이다.
그리고 외모상으로도 이들을 구별할 수 있는데, 특히 키에서 차이가 나타난다. 한국인은 중국인과 일본인에 비해 키가 훨씬 크다. 자기 어깨 정도밖에 안 되는 작은 일본 군인에게 키 큰 한국인이 폭행당하는 장면을 서울에서 종종 보게 되는데, 그 광경이 참으로 어색하게 느껴진다.
마치 어른이 아이한테 매 맞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거기에다 함경도 사람들은 다른 한국인에 비해 훨씬 컸다고 합니다. 성인 남자 평균키가 167.7㎝였다고 하니까요.”
말을 하면서도 민우는 유심히 유민들을 살폈다.
그러던 중 한 인물에 시선이 꽂혔다.
30대 정도로 보이는 남자인데, 유독 그 남자만 단발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물론 이 시대에 단발하는 풍속이 많이 퍼지기는 했지만, 아직도 대다수의 사람들은 상투를 틀었다.
단발이라는 점도 한몫했지만 민우가 주목한 이유는 다른 유민과 달리 그는 경황이 없는 중에도 군인들을 세심하게 살피고 있었기 때문이다.
“저 사람, 뭔가 있는 것 같은데?”
민우가 귓속말로 윤희에게 말했다.
윤희가 의아한 듯 쳐다보자 민우는 아무 말 없이 그 남자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에 따라 윤희도 그에게 눈길을 주었다.
“그러니까 세 가족이 함께 용정으로 가고 있다는 말씀이시죠?”
“야, 야, 그렇습네다.”
“이런, 말씀 편하게 하십시오. 저 한참 어리거든요.”
준태의 부드러움이 유민들을 많이 안심시킨 모양인지 대화가 한결 편해졌다.
준태가 일행을 의병과 비슷한 의용군이라고 소개했기에 마음을 놓은 듯했다.
오래전, 멀리 러시아로 집단 이주했다가 조국의 형세가 위급하다는 소식을 듣고 마을 사람들 모두가 다시 돌아왔다고, 신식 무기로 무장한 군대도 만들고 지금은 백두산 부근에서 머물렀다가 화룡으로 가는 길이라고 소개한 것이다.
그때, 민우가 앞으로 나서며 질문을 던졌다.
“여기 세 가족분들 이외에 다른 분들은 없습니까?”
“아이요. 저 청년은 일행이 없시다. 두만강 부근에서 만나 우리와 같이 동행했꾸만…….”
“그렇습니까?”
민우는 다시 그 남자에게 시선을 돌렸다.
역시나 민우가 유심히 관찰했던 남자였다.
“왜 혼자 오셨습니까?”
“장사나 해 볼까나 하고 나신 길이디.”
“무슨 장사를?”
“기러니끼니 요것저것…….”
민우가 말을 끊었다.
“이 험한 간도에서 혼자 장사를요? 여기저기 마적 떼가 설치고 다니는 이 간도에서요?”
“기게 고조…….”
“당신, 좀 수상한데? 혹시 일본군과 관계가 있지 않나?”
“아, 아, 아이라요. 난 그냥 장사치일 뿐이라요.”
“흠, 그래요? 여러분, 혹시 저 사람한테서 이상한 점 발견하지 못하셨나요?”
민우의 말에서 일본이란 말이 나오자 유민들의 반응이 민감해지며 표정 또한 일순간에 굳어졌다.
“기러고 보니 좀 이상한 면이 있습네다. 장사하러 간다는 사람이 짐도 별로 없고, 간도의 형편도 잘 모린 거 같고, 기곳 사정도 모린데 무신 장사를 한다는 건지. 돈도 별로 없고 말입네다.”
세상 물정을 잘 모르던 유민들에게 돈이란 여전히 엽전이나 주화를 의미했다.
엽전의 가치가 워낙 떨어져 장사 밑천 정도라면 거의 몇 지게 이상을 짊어져야 한다고 여긴 것이다.
당시 미국 돈 1달러가 엽전 한 지게였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으니.
그래서 그 점이 특히 의심스러웠던 것이다.
물론 이는 유민들의 순진한 상상의 산물일 뿐이었다.
대체 어떤 상인이 몇 지게씩 엽전을 지고 다니며 장사를 하겠는가.
그러나 당황했는지 그 남자는 스스로의 덫에 걸리고 말았다.
“도, 돈이래 조금 가지고 있수다.”
그는 벌벌 떨며 품에서 일본 제일은행권 1엔짜리 지폐 5장과 5엔짜리 군표 한 장을 꺼내 보였다.
다 합해 10엔이었다.
일본 제일은행권 지폐는 일본이 꼼수를 부려 1902년부터 발행된 화폐였다.
그러나 그 폐해가 너무 커서 대한제국 정부와 민중에게 배척을 받았다.
그러던 차에 1904년 8월 체결된 제1차 한일협약에 따라 일본인 재정 고문으로 부임한 메가다 수타로[目賀田種太郞]가 법정화폐로 지정해 강제적으로 통용시켰다.
남자가 꺼낸 10엔이면 쌀 두세 가마를 살 수 있는 액수.
하지만 워낙 물가의 연동이 크고, 화폐의 종류가 많다 보니 정확하게 얼마 정도의 실물 가치가 있는지 확인하기는 어려웠다.
그런 사정을 비춰 볼 때, 대한독립전선의 수뇌부가 간도를 경영하기 시작하면 새로운 화폐 정책을 내놓아야 할 터였다.
아무튼 남자가 꺼내 보인 돈 중에 문제가 되는 것은 군표였다. 일진회원 중 정탐을 담당하는 이는 일본군으로부터 급여를 받는다는 소문이 있었는데, 그 돈일 가능성이 다분했다.
다만 물정 모르는 유민들은 그것을 보고 신기해했다.
한마디로 유통된 지 얼마 안 되다 보니 유민들은 그 돈의 존재를 미처 모르고 있다는 뜻이었다.
“군표를? 하하하! 당신, 큰 실수한 거야.”
남자는 사람들이 군표의 존재를 모를 것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민우는 오히려 증거를 잡았다는 양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군표라는 건 전쟁을 치르는 일본군 놈들이 통용화폐가 부족하니까 발행했다고 들었지. 그런데 문제는 말이야, 시중에서는 그놈을 다 꺼린다는 점이지. 당신, 군표를 받은 것을 보니 왜놈의 군대와 무슨 거래를 했나 본데……. 게다가 상인이란 자가 시중에서 꺼리는 군표를 가지고 있다? 자, 이게 무슨 뜻일까?”
“일진회 놈이었시다! 저런 쳐 죽일 놈이 있습네!”
유민들이 너나할 것 없이 분노했다.
자신들이 떠도는 이유가 무엇이던가.
바로 일본 놈들 때문이지 않은가.
한데 그런 일본군만큼이나 미운 존재들이 있었다.
아니, 저들이 더 미웠다.
원래 앞잡이들이 더 악질적인 법이라 유민들이 그들에게 당한 억울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민우는 더 볼 것도 없다는 듯 황상국 중위에게 눈짓을 했다.
그에 황상국 중위는 주저없이 명령했다.
“잡아!”
해병대원들이 움직이자 기회만 엿보던 남자가 후다닥 숲을 향해 내달렸다.
탕!
해병대원 한 명이 공중에 대고 총 한 발을 쏘았다.
“어이쿠!”
총소리에 놀란 유민들.
그러나 도망치던 그 남자는 더 놀랐는지 이마를 땅에 대고 부르르 몸을 떨고 있었다.
“그냥 확! 죽여 버리세요!”
윤희가 뾰족하게 소리를 질렀다.
안 그래도 이상한 소리를 듣고 부아가 치밀었는데, 일진회 놈을 만나고 보니 분노가 폭발한 것이다.
윤희는 내친김에 말을 더 덧붙였다.
“그리고 거기 갓 쓴 아저씨! 저 삐쩍 마르지 않았다고요! 아니, 내가 어디가 부족해서 애를…….”
윤희가 씩씩거리며 자신에게 만행을 저지른 이―공교롭게도 장판석이었다―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분노의 감정을 쏟아냈다.
하지만 이내 분위기가 이상하게 돌아간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니, 그게 아니고. 난 마르지 않았고…… 아, 내가 무슨 말을……. 아, 짜증나!”
그처럼 혹독한 평가를 처음 들어 본 윤희는 많이 당황했는지 말을 할수록 이상한 내용만 튀어나왔다.
“큭큭큭!”
“푸풉! 푸하하하!”
해병대원들은 웃음을 억눌러 참다가 결국 폭발하고 말았다.
영문을 모르는 유민들은 ‘저 에미나이, 성질이 장난 아니네’란 표정으로 윤희를 바라볼 뿐이었다.
윤희는 얼굴이 빨개진 채 씩씩거리며 장판석을 노려보았다.
“아무튼 아저씨, 두고 보자구요.”
화창한 봄날.
싱그러운 숲 속에서 불어온 맑은 바람 한줄기가 사람들의 땀을 식혀 주었다.

“이쪽으로 앉으시지요. 그래, 간도로 가시는 중이었다고요?”
“야, 야. 그렇슴메다.”
“말씀 편하게 하십시오. 제가 다 불편하네요.”
남자는 장순택 사령관에게 극도의 예를 보여 주고 있었다.
명령에 따라 특전대원 한 명이 최초로 접촉한 유민들을 데리고 왔다.
간도로 떠나던 일가족이었다.
무산으로 가지 않고 이쪽으로 온 것을 보면 화룡이나 용정이 아닌 안도 방면으로 갈 계획이었나 보다.
“가족들의 생계를 책임져 드릴 테니 우리와 같이 계시면서 이것저것 좀 가르쳐 주십시오. 우리는 먼 곳에서 방금 도착한 터라 이곳 사정을 잘 모릅니다. 한두 달 후에 우리도 간도로 넘어갈 거니까 그때 같이 가셔도 됩니다.”
“거, 불감청고소원임메다. 길티 않아됴 내래 걱정이 태산이었임메. 생계와 안전꺼정 책임져 준다 카니 이보다 고마운 일은 없음메다.”
함경도 원산 출신의 유민 서영경은 외모상 30대 중후반 정도로 보였지만, 실제 나이는 서른이라 했다.
아마도 고생을 많이 해서 그렇게 보이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