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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도진위대 1권 (18화)
제4장 을사년에서 을사년으로 (5)


다음 날, 오늘도 어김없이 중장비들의 소음이 숙소의 아침을 깨웠다.
이곳 지하 본부는 장기적으로 비밀 무기고와 비밀 연구소로 활용하기로 오래전부터 결정해 둔 터.
그래도 단체로 이주하기 전까지는 지내야 할 임시 숙소도 있어야 하고, 지하 본부의 공간을 정리하는 작업도 필요했다.
또한 남쪽 일부와 북쪽 화룡 방향으로 길을 내는 일도 시급했다.
하여 수뇌부는 바로 도로 공사를 시작했다.
남쪽으로 15㎞ 정도의 길을 내는 공사 과정에서 부수적으로 목재도 얻을 수 있었다.
이에 남쪽으로 조금 더 내려가야 만나게 되는 울창한 삼림지대에 특전대의 본부가 될 건물을 목조로 짓기로 했다.
이 삼림지대는 일제 치하에서 독립군들이 활동하던 공간이기도 했다.
그러나 북쪽으로 내는 길에 대해서는 상당한 고민이 필요했다.
이곳에서 북쪽으로는 백두산의 완만한 고원 구릉지가 마치 평야 지대처럼 수십 킬로미터가량 펼쳐진다.
한마디로 불도저만 쭉쭉 밀고 가도 길이 만들어질 수 있는 지형인 것이다.
그러나 화룡은 백두산의 동북 방향에 자리한 곳.
화룡의 남쪽은 두만강과 나란히 뻗은 강남산맥이 막고 있고, 서북쪽은 노야령산맥이 감싸 안고 있었다.
그 정점은 증봉산(1,676m)이다.
화룡의 서남쪽에 떡하니 자리 잡은 이 산은 후일 청산리 전투로 유명해졌다.
해란강 또한 이 산에서 발원한다.
문제는 이 증봉산의 산자락을 넘어야 한다는 것이다.
서쪽에서 들어가든, 남쪽에서 들어가든.
그래서 전문가들은 세 가지 노선을 지도부에 제시했다.
먼저 북쪽 노선.
백두산에서 거의 정북방향으로 토문강(오도백하)을 따라 쭉 올라가다 삼도(三道) 부근에서 화룡 방향을 정동으로 놓고 90도로 방향을 전환해 골짜기를 따라 가는 노선.
실제로 이 동쪽 길은 21세기 중국 길림성의 간선도로 노선이기도 했다.
두 번째로는 두만강을 따라 동진하다 홍기하(紅旗河)를 타고 북상하는 것.
홍기하는 두만강의 지류로서, 화룡 부근에서 발원해 남쪽으로 흘러 두만강과 만난다.
후일 활용하기에도 좋은 노선이지만 문제는 두만강을 따라 길게 가다 보면 노출되기 쉽고, 무산이 가까워 보안상 문제가 있다는 것이 단점이었다.
물론 나중에 필수적으로 건설해야 할 노선이기는 했다.
그래서 결국 채택된 노선은 이른바 서북 노선이었다.
토문강―대마록구하(大馬鹿溝河, 홍기하의 지류)―홍기하―사금구(沙金溝) 지대―해란강―화룡으로 이어지는 길.
사금구 지대는 명칭에서 알 수 있듯 사금이 나오는 곳이다.
또한 갈탄도 폭넓게 매장되어 있어 자원 개발을 위해서라도 어차피 길을 내야 할 곳이었다.
지도부는 도로를 내는 데 약 1개월을 잡았다.
계곡의 하천 변을 따라 가는 노선이라 비교적 길을 내기 수월할 것이다.
또 트럭이 간신히 지나갈 수 있기만 해도 되니 포장이 필요 없었다.
당연히 노반 기초를 다지거나 자갈을 까는 작업도 뒤로 미뤘다.
다만 하천을 건너는 다리를 건설하는 것이 문제였다.
다행히 전문가들은 이곳의 하천들이 폭이 좁아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라 판단했다.
기실 두만강의 중상류는 동네 개울에 가까울 정도로 강폭이 좁았다.
그래서 길을 내는 과정에서 벌목한 나무로 다리를 급조하기로 했다.

아침 일찍 해병대와 민우 일행이 길을 나섰다.
무장을 간편히 꾸린 1개 소대를 정찰 부대로 보내 앞을 살피고 후미를 경계하며 천천히 걸어갔다.
아니, 천천히 걸어갈 수밖에 없었다.
모든 보급품을 들고 가야 했기 때문이다.
군장을 등에 지고 행군하는 것도 힘든 일인데, 보급품까지 들고 가야 하는 해병대 병사들.
그래도 본부에서는 차가 달릴 수 있는 곳까지 물건을 실어 주기는 했다.
그러나 토문강 구간을 벗어나자 더 이상 차가 갈 수 없어 대마록구하 구간부터는 걸어가야 했다.
“후욱! 후욱!”
“후와! 이거, 내 평생 이렇게 빡센 행군은 처음이다.”
강철체력을 갖춘 해병대원들조차도 금세 물먹은 솜마냥 퍼져 버렸다.
특히 탄약상자를 든 대원들이 가장 힘들어 했다.
그래도 후미 경계병과 행렬 중간의 보급품을 책임진 부대원들이 일정 시간씩 서로 교대하며 들어 그나마 이 정도의 속도가 나는 형편이었다.
일행은 자주 휴식을 취하며 조금씩 전진하고 있었다.

꼬박 이틀에 걸쳐 주파한 대마록구하 구간을 지나 홍기하 구간으로 접어들자 한결 길이 좋아졌다.
“오! 이거, 나중에 길을 낼 때 고생 좀 덜겠는데?”
간도로 향하는 이주민들의 대부분은 남부여대, 즉 남자는 봇짐을 등에 지고 여자는 머리에 이고 걸어갔다.
그리고 일부 형편이 좋은 사람들은 몇 대의 소달구지에 짐을 나눠 싣고 갔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소달구지 정도가 지나갈 수 있는 길이 자연적으로 만들어져 있었다.
홍기하 구간은 간도 이주민이 많이 사용한 통로였다.
[치익! 전방에 길 가다 쉬고 있는 민간인 15명 발견. 유민으로 추정됨. 조치 바람.]
“알았다. 접촉을 허가한다. 말을 붙이며 잠시 붙잡고 있도록. 즉시 요원을 보내겠다. 이상.”
선행하던 정찰대에서 연락이 왔다.
정민창 대대장은 즉시 민우 일행을 출발시켰다.



제5장 만남 (1)


아직 쌀쌀한 봄 날씨.
하지만 소달구지를 끌고 험한 길을 가다 보니 땀이 절로 난다.
일행들은 땀도 식힐 겸 앞에 있는 작은 공터에서 휴식을 취하기로 했다.
길을 가다 한두 무리씩 사람들이 합류하다 보니 일행은 어느새 15명 정도로 불어 있었다.
작은 바위에 앉아 숨을 고르는 판석.
지난 일을 생각하니 또 한숨이 나온다.
장판석은 황해도 사리원 사람이다.
그는 자기 땅을 갖고 농사를 짓던 자영농이었다.
부농은 아니었지만 나름대로 부모를 봉양하고, 아내와 아이를 먹여 살리는 데 부족함은 없었다.
그러나 그의 운명은 러일전쟁이 시작되며 완전히 바뀌었다.
어느 날, 일본 헌병대와 더불어 측량 기사가 나타나더니, 자신의 땅에서 측량을 하기 시작했다.
무엇을 하는 거냐고 물었더니 몰라도 된다고 한마디 던지더니 가 버렸다.
그리고 며칠 후 집에 찾아온 헌병 대원들은 자신보고 짐을 싸 당장 떠나라 했다.
판석의 땅이 경의선 철도역 부지로 결정되었다는 이유로.
그런 법이 어디 있냐고 따져 물었더니 나라 법이 그렇게 바뀌었단다.
철도가 지나는 곳이나 철도역 부지로 결정된 땅은 일본 측이 무상으로 수용할 수 있다고 했다.
그렇게 장판석의 가족은 땅도 집도 모두 잃고 하루아침에 쫓겨났다.
결국 근처 친척집을 전전하며 식구들은 더부살이를 했고, 판석과 아내는 품을 팔아 하루하루를 연명했다.
심지어 그 죽도록 미운 일본 놈들의 철도 공사 현장에서도 품을 팔았다.
그러던 어느 날, 솟구치는 울화를 매일 술로 달래던 아버지는 술김에 헌병대로 쳐들어가 항의하다 체포돼 재판도 없이 그 자리에서 처형을 당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세상천지에 있을 수 있단 말인가!
아버지의 무덤 앞에서 피를 토하도록 절규하고 데굴데굴 구르며 통곡했다.
그러나 더 서러운 일은 이웃들이 그들을 기피한다는 것이었다.
아마도 서슬 퍼런 헌병대의 눈길이 무서웠던 모양이다.
이제 판석의 가족은 고향에서 살 수 없게 되었다.
결국 모든 것을 잃은 판석은 죽기 아니면 살기라는 결심을 하고 이렇게 간도로 향한 것이었다.
“으, 죽일 놈들…….”
자기도 모르게 새어 나오는 욕설.
“아바이야, 이제 지난 일 고만 생각하시다. 그러다 몸이나 상하면 우짤라 하네.”
노모의 목소리에 그제야 판석은 상념에서 깨어났다.
그때,
“에그머니! 누, 누, 누구시네?”
숲을 헤치고 모습을 드러낸 해병대원들을 보고 아내가 깜짝 놀라 소리쳤다.
“우왁! 귀신이네.”
모두가 몸을 벌벌 떨며 그 자리에 돌처럼 굳어 버렸다.
그들의 시야에 잡힌 해병대원들의 모습이란, 분명 낮도깨비이거나 귀신임에 틀림없었다.
얼굴에 알록달록 바른 위장 크림 덕에 눈의 흰자위가 더욱 하얗게 도드라져 보였고, 나름 안심시킨다고 웃고 있는 것 같은데 오히려 그게 더 괴기스러웠다.
하얗게 빛나는 이빨이며, 일그러진 얼굴근육이며, 거기다 웬 바가지를 뒤집어쓰고 있다.
겁에 질린 아이들은 울음을 터트렸다.
“안녕하십니까? 허, 이런…….”
“헉! 귀신이 말을 합네, 말을!”
“살, 살려 주십시다. 저희는 가진 게 몸뚱어리뿐입시다.”
이제 유민들은 이들을 산적으로 착각했다.
말을 하는 것을 보고 인간이란 것은 인지했지만, 뒤늦게 어깨에 멘 총을 발견한 것이다.
“아∼참, 내가 이럴 줄 알았지. 박 중사님 얼굴 보면 누가 봐도 산적이지 말입니다.”
박일도 중사가 나서려는 것을 극구 말리던 김태호 병장이 한마디를 던져 댔다.
접촉하라는 지시가 내려오자 반가운 마음에 얼른 나선 참이었는데…….
“야! 내 얼굴이 어때서!”
그가 동의를 구하려는지 소대원들을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모두가 그의 시선을 피했다.
소대장인 황상국 중위는 아예 시선이 하늘로 올라가 있다.
그의 얼굴근육이 웬일인지 바르르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다.
“하여간, 이 인간들…….”
그때, 무전병의 등 뒤에서 무전기가 소리를 냈다.
예전에 중대 단위 부대에 배치됐던 P―999K 무전기를 대체한 TMMR의 개량형 무전기였다.
무게도 20㎏에서 10㎏으로 소형화됐고, 성능도 대폭 향상되었다.
이런 산악 지역에서도 30∼50㎞까지 통신이 가능했다.
또한 같은 단말기가 중계기 역할까지 겸할 수 있고, 3자 동시 통화도 가능하며, 데이터도 주고받을 수 있는 최신형 무전기였다.
“으헉!”
“에구머니나! 상자에 사람이 있시꺄?”
무전병이 통신하는 것을 보자 더욱 놀라는 사람들.
유민들에게 오늘은 신기한 일투성이였다.
“소대장님, 고민우 씨가 거의 다 왔답니다.”
“그래, 알았다.”
소대장인 황상국 중위가 유민들에게 다가갔다.
아까와 같이 격렬하게 경계하는 반응은 아니었지만 여전히 두려워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안녕하십니까. 전 이 부대의 소대장을 맡고 있는 황상국이라 합니다. 여러분들을 놀라게 해서 죄송합니다. 저희는 대한독립전선의…… 그러니까 뭐냐, 암튼 한국군의 해병대…… 에휴! 이거, 미치겠구만…….”
자신들을 뭐라 설명해야 할까 갈피를 잡지 못해 난감해하던 황상국 중위가 뒤통수를 긁적거리고 있을 때, 민우의 목소리가 들렸다.
“하하, 수고하셨습니다. 저희가 말을 해 보지요.”
“오, 고민우 씨. 그럼 부탁드립니다.”
유민들의 시선이 이번에는 민우 일행에게 향했다.
또다시 신기한 관심사가 생긴 셈.
먼저 준태가 앞으로 나서더니 유민들에게 공손히 인사를 했다.
“저는 박준태라고 합니다. 군인들 얼굴 보고 많이 놀라셨나 봅니다. 하지만 두려워 마십시오. 이분들은 군인입니다. 얼굴에 뭘 칠한 것은 숲에서 눈에 띄지 않게 하려고…… 박 중사님, 위장 크림 좀 지워 보시죠.”
박일도 중사가 예의 미소를 흘리며 위장 크림을 지웠다.
그러자 멀쩡한 사람 얼굴이 나타났다…… 기보다는 다른 형태의 무서운 얼굴로 변신했다.
준태의 실수였다.
박일도 중사의 외모를 미처 고려하지 못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래도 사람 얼굴은 맞다.
다행히 준태가 나서자 유민들이 조금 진정되었다.
아무래도 험상궂은 군인보다 말끔한 인상의 청년이 나서니 조금 나은 것 같아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