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간도진위대 1권 (14화)
제4장 을사년에서 을사년으로 (1)
예상대로 그들이 넘어온 곳은 120년 전의 같은 장소였다.
그러나 10군단이 군단사령부로 개조한 것과 달리 지금은 자연 동굴일 뿐이다.
선발대로 나선 군인들은 주변을 수색해 나가며 공간을 확보했고, 그 뒤를 토목 장비들이 따라 나서며 신속히 동굴 내에 길을 만들어 갔다.
이들의 작업이 끝나야 뒤에서 대기하는 수많은 차량과 화물이 들어올 수 있기 때문이다.
이미 뒤따를 행렬과의 시간 약속도 되어 있었다.
꽈꽝!
쿠르르!
동굴 입구를 폭약으로 뚫자 환한 빛이 새어 들어왔다.
그 빛을 향해 불도저와 포클레인이 거침없이 달려들었다.
숙련된 중장비 기사들이 작업해서 그런지 동굴 입구는 금세 웬만한 트럭도 지나갈 만큼 넓어졌다.
정민창 중령은 이번엔 동굴 밖의 공간을 확보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해병대는 왼쪽으로, 특전사 대원들은 오른쪽으로 흩어져 사주경계하고 주변을 확보하라!”
해병대는 동굴 밖의 왼쪽으로 반원을 그리며 흩어져 주변을 수색해 나갔고, 특전사는 오른쪽을 담당했다.
그리고 군인들의 뒤를 따라 나간 장비들은 동굴 앞을 신속하게 정리했다.
작업이 시작되자 정민창 중령은 본대로 연락병을 보내 인원과 장비들을 보내라고 알렸다.
제일 먼저 통과해 온 것은 태진훈 교수와 변창섭 박사, 그리고 고민우였다.
그 뒤를 이어 수많은 건설 장비와 컨테이너를 실은 트럭들이 따라 들어왔다.
차량들의 전조등으로 인해 지하 공동은 순식간에 대낮처럼 밝아졌다.
그런데 두 학자는 도착하자마자 석비가 있던 부근을 부산히 뒤져댔다.
그러더니 어느 순간, 손길을 멈추고 뭔가 심각한 대화를 나누었다.
“글쎄, 이게 좋아할 일인지 모르겠군.”
“아무튼 분명한 것은 이곳에는 천부인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렇지요. 제가 발굴했던 곳이 이쯤이었는데…… 없군요.”
태진훈 교수가 손가락으로 비석의 왼편을 가리켰다.
“그렇다면…… 와우! 이거, 정말 놀라운데요? 도대체 천부인은 어느 정도의 에너지를 가졌기에 이런 게 가능할까요?”
“교수님, 무슨 일입니까?”
민우가 두 학자에게 다가가며 대화에 동참했다.
“그러니까 말일세, 이곳은 다른 우주가 아니라는 사실이지. 이곳이 다른 평행우주라면 여기에 또 하나의 천부인이 있어야 하지 않겠나?”
“어? 그러고 보니 그 말이 맞네요. 그렇다면…….”
“자네가 생각하는 게 맞네. 이곳은 우리가 살던 우주와 연결된 시공간이라는 사실이지.”
“그래도 천부인은 이곳에 있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렇지. 하지만 없잖아. 그리고 또 하나, 지금까지 전해 내려온 천부인은 오직 하나뿐이네. 우리 조상들이 계속 다른 평행우주와 연결해서 새로운 역사를 써 내려갔다면 방금 한 것처럼 양방향으로 웜홀이 열렸으니 회수도 가능했을 텐데 말이야. 그렇다면 천부인은 그 횟수만큼 늘어나야 하는데 하나밖에 없다는 것은…….”
“역시 같은 우주의 시공간이란 말이군요.”
변창섭 박사는 손가락으로 턱을 쓰다듬으며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손가락을 튕겨 딱! 소리를 냈다.
“말도 안 되는 상상이지만…….”
잠시 말을 끊은 변창섭 박사의 시선이 민우에게 향했다.
“고대인들이 천부인을 처음 만들 때는 당연히 한 개만 만들었겠지. 그런데 그걸 만들고도 남은 물질이 있었을 거야. 아마도 또 하나를 만들 수 있을 만큼? 그러니까 최초 이주자들은 그것을 들고 다른 평행우주로 이주한 셈이지. 그래서 그들이 도착한 이곳은 그들에겐 다른 우주였지만, 우리에겐…….”
“우리의 우주겠군요.”
“그렇지. 그들이 도착한 곳은 바로 우리들의 우주였지. 처음 그들이 시공간의 게이트를 열었을 때는 아마도 단방향이었을 거야. 그리고 웜홀을 여는 과정에서 천부인 하나에 해당되는 물질은 에너지를 모두 소모하고 그 세계에서 소멸되었겠지.”
“아하! 그래서 그분들은 양방향 웜홀에 대한 고민을 했겠군요.”
“그 결과가 바로 이 석비였을 거야. 석비 형태의 장치는 이곳에서 고안된 것이란 말이 되지. 참으로 대단해, 고대인들은 지식이란. 우리가 도착한 이곳 120년 전, 여기 밑에 있던 천부인은 우리가 들고 온 천부인의 연료이자 좌표 역할을 한 셈이라 할까? 한마디로 평행우주의 원리를 교묘하게 이용했다고 봐야겠지.”
“그러니까, 우리가 저쪽에서 이 장치를 구동시켰을 때 순간적으로 이 시간대와 연결되면서 이곳의 천부인이 반응해 웜홀을 열어 좌표를 전송함과 동시에 에너지를 모두 소모하고는 소멸했단 말이겠군요. 그런데 우리가 갖고 있는 천부인도 분명 양방향 통로를 열면서 에너지를 소모해야 정상 아닙니까?”
“그게 이 석비가 갖고 있는 신비한 힘이 아닐까 싶네. 물리학자들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던 그 시간의 패러독스를 해결했다고 할까? 이게 약간의 에너지 증폭을 일으켰을 것이네. 그래서 우리 천지인에는 미량의 에너지가 남아 소멸되지 않은 것이지. 또 1,200년을 기다려야 다시 사용할 수 있다는 건 그 기간 동안 다시 우주 에너지를 축적해야 한다는 말이겠지.”
“그럼 우리도 후손을 위해 처음 발굴했던 장소에 갖다 놓아야겠군요.”
“그렇지. 1,200년 후의 후손이 다시 사용하게 하려면. 하지만 학자로서 탐이 나는 것은 어쩔 수 없군. 이걸 갖고 연구해 보고 싶은데……. 태 선생님,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하하, 역시 물리학자답습니다. 나중에 제가 전체 회의 때 공론화시켜 보겠습니다.”
두 학자의 대화의 초점이 다른 곳으로 옮겨 갔지만 민우는 여전히 의문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러다 문득 뭔가가 떠오른 듯 질문을 던졌다.
“그러면 우리가 120년 동안 겪어 온 시공간은 어찌 되는 겁니까?”
“그것까지는 잘 모르겠네. 허수 시간이란 개념도 있으니까 그 자체가 작은 평행 우주가 되었거나 우주의 무(無)로 돌아갔겠지. 시공간을 하나의 띠라고 본다면 띠의 일부를 접어 붙여서 연결시킨 다음, 겹친 부분을 잘라냈다고 할까?”
변창섭 박사의 말이 끝나자 다들 침묵에 빠졌다.
분명 좋아할 만한 일일 수도 있다.
그러나 자신들과 함께 삶을 살았던 사람들이 빈 그림자와 같은 존재가 되어 버렸다는 사실에 마냥 기뻐할 수도 없었다.
“그러면 120년 후의 사람들은 우리가 알던 사람들이 아니겠군요. 어쩌면 태어나지 못할 수도 있고…….”
태진훈 교수는 조금 시무룩해진 민우의 어깨를 툭툭, 치며 말을 꺼냈다.
“난 불교신자다 보니 꼭 그럴 것 같지 않다는 생각이 드는군. 업의 씨앗이라는 것이 있기 때문에 크게 다르지 않을지도 모르지. 태어날 사람은 결국 태어날 거고, 다만 현실의 조건이나 환경은 매우 다르게 되겠지. 우리 때문에 많이 바뀌게 될 테니까 말일세. 그러니까 힘을 내자고!”
후일담이지만 이 소식이 전해지자 사람들의 대부분은 좋아했다고 한다.
어쨌든 다른 우주보다는 우리 우주, 우리의 시공간에서 생활한다는 것이 더 의미 있게 다가왔기 때문이리라.
그리고 그곳에 남은 사람들에게 진 마음의 빚도 어느 정도 덜어낼 수 있었다.
사실 사람들에겐 시간을 역류해 건너간 ‘도망자’란 자괴감이 조금이나마 가슴 한편에 자리하고 있었다.
다들 이 감정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았을 뿐.
하지만 앞으로 써내려갈 새로운 역사가 같은 하늘, 같은 땅에서 펼쳐지는 실제 역사가 된다는 것.
또 지금 이 땅에서 사는 이들에게, 앞으로 태어날 동료들에게 새로운 운명을 가져다줄 수 있다는 희망이 생기자 더욱 힘을 낼 수 있게 된 것이다.
시간의 게이트를 통과해 온 엄청난 양의 물자와 장비들이 동굴 바깥에 차곡차곡 쌓여 갔다.
그리고 막바지에 들어온 상당수의 부상자들을 치료하기 위해 동굴 안에 천막을 치고 임시 진료소가 꾸려졌다.
모두가 분주하게 자기 일을 하고 있을 때, 마지막으로 장순택 준장이 모습을 드러냈다.
저 건너편에서 심기를 다 소모한 듯, 그는 초췌한 표정이었다.
그러나 권두진 사령관의 유고로 당장 그가 나서서 군대의 지휘를 맡아야만 했다.
이내 감정을 추스른 장순택 준장은 정민창 중령에게 보고를 받았다.
“필승! 부사령관님께 보고드립니다. 수색 결과, 이곳은 저희가 있던 곳의 지형과 동일함을 확인하였고 주변에서 인적이나 인가를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그래? 그럼 당장 무인정찰기를 날려 더 넓게 정보를 수집하도록.”
장순택 준장의 부대가 운용하고 있는 정찰기는 2010년대 중반에 실전 배치된 송골매 2로, 틸트로터(Tilt―rotor)형 항공기 개념을 채택하여 활주로 없이도 이착륙이 가능했다.
즉, 이착륙을 할 때는 헬기처럼, 비행 시에는 로터의 각도를 수평으로 바꿔 빠른 속도로 날 수 있는 회전익기였다.
최고 속도는 시속 500㎞에 정찰 반경은 200㎞나 되고, 최대 8시간의 체공이 가능한 소형 스마트 무인기(Smart UAV)였다.
“특히 남쪽을 잘 살피도록. 지금 일본 놈들이 함경도를 헤집고 다닌다니까…….”
그들이 도착했을 것이라 추정되는 1905년은 러일전쟁이 한창인 시기였다.
일본군의 주력은 아직 만주 지역에 주둔하고 있었고, 러시아 발틱 함대와 일본 함대가 맞붙은 동해 해전은 아직 일어나지 않은 상황.
그리고 일본군의 일부 부대가 함경도의 동해 연안에 주둔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송상철 중령, 부하들을 이끌고 잔여 병력과 장비에 대한 보고서를 빨리 만들도록. 보고서가 만들어지면 바로 군 지휘관 회의를 소집하겠네.”
동굴 앞의 임시 주둔지가 내려다보이는 둔덕에 민우와 준태, 윤희가 올랐다.
물론 이곳의 지형은 2025년의 풍경과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
백두산 용암대지에 펼쳐진 완만한 구릉들이 주변을 감싸고, 나무는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대신 작은 관목들만 자라는 곳이다.
4월 말이지만 아직 주위의 풍경은 겨울에 가까웠다.
군데군데 눈의 자취가 남아 있었고, 산 정상으로 갈수록 눈이 두텁게 쌓여 있었다.
말없이 주변 풍경을 살펴보던 민우가 준태를 향해 입을 열었다.
“지금 1905년이 맞겠지? 을사늑약이 맺어진?”
“맞을 거야. 정찰기를 날렸다니까 몇 가지만 확인하면 알 수 있겠지.”
“을사년에서 을사년이라……. 우리가 있던 을사년이나 지금 을사년이나 똑같은 운명에 처한 셈이군.”
“그러게. 이게 무슨 운명의 장난인지…….”
목발에 의지해 둘의 대화를 듣던 윤희.
밑에서 분주하게 움직이는 사람들에게 시선을 주더니 준태에게 물음을 던졌다.
“선배, 당시 일본군이나 러시아 군 모두 강했다던데, 우리 군대로 이들을 감당할 수 있을까요?”
“물론 우리 군대만으로는 불가능하지. 하지만 여기 함경도와 간도에는 엄청난 수의 군인들이 예비되어 있어. 우리가 잘 포섭하면 금방 덩치를 불릴 수 있을 거야. 물론 이러한 것도 최근에 새로 밝혀진 역사적 사실이지만 말이야.”
“그렇다면…… 문제는 보급이로군. 탄약과 무기. 후우, 그것을 만들어 보급하려면 얼마나 걸릴까?”
“전체 회의에서 나온 얘긴데, 최소 1년 이상에서 최대 2년은 필요하다더군. 에너지와 자원을 확보하고 나야 군수공장도 지을 수 있으니까…….”
“그러면 1907년에나 본격적으로 싸울 수 있단 말이네요.”
“모르지. 보유하고 있는 실탄과 장비를 최대한 아껴서 쓰다 보면 어찌 되겠지. 어쨌든 앞으로 몇 년간은 간도 지방의 경영에만 힘을 쏟기로 했다니. 뭐, 그것도 쉬운 일은 아니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