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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도진위대 1권 (2화)
제1장 2025년 - 한민족, 역사의 역류와 만나다 (2)


“신경 꺼∼라. 이미 내놓은 자식인데 뭘. 다른 말로 하면 자유인이라고 할까? 크크.”
“하여간 넉살 하난 좋아. 그게 선배의 유일한 장점인 거 알아?”
“뭐라? 내가 뭐 어때서? 머리 좋지, 잘생겨서 여자들한테 인기도 많지, 학벌도…….”
“정말 손가락 오글거리는 게, 폭력을 부르는 말투라니까. 에휴, 내가 어쩌다 이 선배 밑에 들어와 이리 고생인지…….”
“널 놀리는 재미 빼면 이 사무실에서 무슨 낙이 있겠냐? 후후. 그래, 어쩐 일이냐?”
“오늘 저녁 시간 괜찮아? 날씨도 꿀꿀한데 술이나 한잔하자고.”
그러면서 윤희는 아무도 못 보게 손가락 세 개를 살짝 펴 보였다.
이를 흘깃 본 민우가 짐짓 못 본 척하며 목소리를 높였다.
“오호라, 데이트 신청인가? 너도 내 매력에 흠뻑 빠진 모양이군. 하하하. 근데 내가 설마 너처럼 선머슴 같은 여자를 좋아하겠냐?”
한윤희의 작지만 매서운 주먹이 그의 명치에 작렬했다.
“억! 야! 아프잖아?”
“그 선머슴아의 주먹으로 갈비뼈가 얼마나 튼튼한지 더 시험해 볼까?”
같은 공간 안에 있어도 누구는 야근 걱정하고, 누구는 사무실 구석에서 부하 직원과 말장난을 한다.
또 하나의 큰 사건이 터진 날.
하지만 늘상 그날의 사고 앞에 ‘큰’이란 형용사를 관용적으로 붙여야 할 정도로 ‘또’ 터지는 사고에 불과했다.
그만큼 모두가 사건 사고에 무감각해진 상태이고, 정보기관 특유의 엄격함과 기강이 사라진 지도 오래되었다.
이런 분위기가 벌써 일 년 가까이 이 공간을 지배하고 있었다.

비가 내리고 나서인지 저녁이 되자 기온이 뚝 떨어졌다.
퇴근하는 시민들의 등은 곱사등이마냥 한결같이 굽어 있다.
날씨 때문인지 길가에 일렬로 늘어선 군인들의 살벌한 눈초리를 피할 심산인지, 저마다 고개를 푹 숙이며 바삐 걸음을 옮기는 시민들.
모두가 세월의 더께를 잔뜩 짊어진 노인네가 된 것처럼, 젊은이건 늙은이건 모두 그렇게 잔뜩 웅크려 걷고 있는 사람들.
광화문 앞에는 한국산 K2A1 전차와 일본의 TK―X 전차가 위압적으로 서 있었다.
부산스럽게 오가는 초식동물 무리 한가운데에서 오롯이 고개를 쳐들고 나른하게 주변을 살피는 육식동물처럼.
을씨년스런 날씨와 잿빛 하늘이 어우러진 완벽한 회색 도시.
이곳은 대한민국의 수도였던 서울이다.

“야! 내가 왜 그놈을 만나야 되는데? 사람 염장 지를 일 있냐? 엉! 내 여친 빼앗아 간 놈을?”
“뺏어 가긴 누가 뺏어 가! 선배 혼자 짝사랑해 놓고 누구한테…….”
“그게 어디 짝사랑이냐고! 서로 키스까지 한 사이인데 짝사랑이냐?”
“어휴, 내가 말을 말아야지. 모임에서 술 취한 여자한테 몰래 뽀뽀해 놓고는. 그 언니가 착해서 그렇지 나 같으면 바로 성희롱으로 고소하는 건데…….”
남이 들어 주기라도 바라는 듯 큰소리로 투닥거리며 걷는 민우와 윤희.
민우는 서른두 살, 윤희는 스물여덟,
외모 또한 어디 빠지지 않는 두 사람인 터라 모르는 사람이 보면 사이좋은 선남선녀 연인처럼 보였겠지만, 실상은 이런 대화를 하고 있었다.
그래도 대학교 선후배 사이라 허물없는 사이이긴 했다.
대로에서 골목길로 접어들자 살짝 분위기가 변하는 두 남녀.
윤희는 화장을 고치기 위함인지 손거울을 들고는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러고는 민우에게 나직이 말했다.
“뒤는 나름 깨끗한 것 같은데…….”
그래도 민우는 여전히 도살장에 끌려가는 개처럼 억지로 윤희의 손에 떠밀려 어느 선술집에 들어가는 모양새를 연출했다.
참으로 모양이 안 났지만.

들어오는 두 남녀를 보고 손을 흔드는 한 남자.
민우의 대학교 학과 동기로, 학계에 남아 박사과정을 밟고 있는 박준태였다.
그는 한국 근현대사 전공자였다.
“여어∼ 이게 얼마 만이야?”
맞은편에 털썩 앉는 민우와 윤희.
먼저 민우가 시비를 걸 듯 입을 열었다.
“세월 좋은가 보네. 모두 죽지 못해 사는데 말이지.”
“그렇게 보여? 나야 뭐 세상 관심 끊고 좋은 세월 보내고 있다고 치자. 그럼 왜놈의 주구 역할이나 하고 있는 넌 뭐지?”
“뭐라고!”
“선배!”
다시 시작된 둘의 신경전을 뾰족한 함성으로 저지하는 윤희.
둘의 성격은 그야말로 극단적으로 달랐다.
진중하고 합리적이며 꼼꼼한 스타일의 준태와 그에 반해 직관을 중시하고 매사에 감성적인 민우.
특히 민우의 과격한 감정 표출은 학교를 다닐 때부터 이름이 높았다.
그러다 보니 둘은 그때부터 견원지간이었다.
졸업하고도 여전히 사이가 좋지 않은 두 사람.
사이 나쁜 친구들이 오랜만에 만나 다시 서로를 향해 말의 칼을 휘둘러 가볍게 상처 입히고, 또 그 상처를 언제 그랬냐는 듯 술로 달래는…… 그저 그런 친구들 사이의 술자리.
그렇게 보아 달라는 듯, 둘의 행동은 한결같은 분위기를 술자리 내내 유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기이하게도 그런 태도와 달리 두 사람은 남몰래 진지한 필담을 주고받았다.
모든 디지털 기기는 믿지 못할 상황이었기에 표정과 말이 전혀 일치하지 않는, 다소 원시적인 손의 대화.

미행은?

걱정 마라. 깨끗하다.

생각보다 연기를 잘하는 모양이야.

그래? 아예 이 캐릭터로 계속 갈까?

피식 웃으며 민우를 보는 힐끗 올려다보는 준태.

조직에서 이번에 중요한 것을 발견했다.

뭔데?

역사를 바꿀 만한 거라면 믿을 수 있겠냐?

뭐? 역사를?

우리 집에 가서 얘기하자. 그러자면 누군가 확실히 취해야 하는데, 캐릭터상…….

준태의 시선에 민우의 인상이 절로 찌푸려졌다.

또 나냐? 하여간 캐릭터 잘못 잡았어. 이래서 첫 단추가 중요하다니까. 젠장!


2025년 2월 25일 11:00.
북한 양강도 풍서군 남부 개마고원 초입.

[치직, 당소 여우 굴. 쥐구멍 나와라. 이상.]
“여긴 쥐구멍.”
[큰 모자 셋. 귀소 통로로 이동 중. 잘 맞이해 줄 것. 이상.]
“알았다. 이상.”
신경질적으로 무전기를 내려놓으며 황선일 병장이 투덜거렸다.
“젠장. 쥐구멍이 뭐냐, 쥐구멍이! 여우 굴은 또 뭐고!”
“큭큭, 하여간 윗분들 작명 센스란 정말 죽여주지 않습니까? 근데, 무슨 일이랍니까?”
같이 경계근무를 서던 김종선 상병이 말을 받아 주었다.
“민간인 세 명이 이쪽으로 오니까 안내해 주란다.”
“또 옵니까? 벌써 꽤 많이 모인 것 같은데…….”
“이들이야말로 진정한 애국자들이지 않냐. 잘 맞이해 주라고. 그러니 네가 대대본부까지 안내해 드려라.”
“그건 그렇고, 웬일로 한 달째 이렇게 조용하답니까?”
“낸들 알겠냐? 근데 대충 짐작은 간다. 남쪽이야 대가리가 다 단번에 장악당하는 바람에 별문제가 없겠지만, 이쪽은 피아가 불분명하니까 전선이 형성되길 기다리는 거겠지. 뭐, 그래 봐야 오래 안 가겠지. 모일 만한 부대는 거의 이쪽에 다 모였으니까…….”
초병들의 시선이 다시 남쪽으로 향했다.
현재 이들이 경계를 서고 있는 곳은 개마고원의 남쪽 끄트머리에 자리한 풍서군이었다.
풍서군은 그 유명한 삼수갑산, 즉 삼수군과 갑산군의 바로 남쪽에 자리한 지역으로, 남쪽에서 올라온 제104 기갑여단 소속의 잔여 병력이 주둔하고 있었다.
황 병장과 김 상병이 지키고 있는 도로는 신포―북청―풍서―혜산으로 연결되는 간선도로였고, 대부분의 남쪽 출신 인사들이 이곳을 통해 양강도 삼지연군에 있는 본부로 들어왔다.
“저기, 누가 옵니다.”
김 상병의 손짓을 따라 시선을 돌리니 30대 후반의 남자 둘과 30대 중반의 여성 한 명이 초소 쪽으로 걸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신분을 확인하는 김 상병에게 통행증을 내보이는 민간인들.
통행증은 남쪽에서 활동하고 있는 정보원들이 발급해 준 신분 확인서였다.
“한국대 물리학과 변창섭 교수님?”
“그렇습니다. 그리고 이쪽 여성분은 의사인 이수진 박사, 저분은 지질학자인 이태인 박사요.”
“반갑습니다. 그럼 지금부터는 제가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곧 세 사람의 신원을 확인한 김종선 상병이 초소 곁에 세워 둔 군용 지프차로 이들을 안내했다.
“고맙소. 그래, 많이 모였소?”
“지금까지 한 200여 분이 이곳을 통과했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변창섭 교수는 군용 지프차에 몸을 실었다.


2025년 2월 25일 14:00.
양강도 삼지연군 지하 본부.

흰 눈 덮인 백두산의 산머리를 배경으로 꽤 넓은 도로가 거대한 지하 공동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한국독립전선의 본부가 자리한 곳.
남쪽에 있던 본부 인원 중 상당수가 이번 ‘발견’을 계기로 이곳으로 옮겨 와 남북 합동군 병력과 합류했고, 이내 군과 힘을 합쳐 통일된 조직을 만들었다.
단체의 이름을 개명해야 한다는 주장이 일부에서 제기되기도 했지만, 군 지휘부는 크게 문제 삼지 않았다.
“어서 오십시오, 변 박사님.”
“반갑습니다, 장순택 장군님.”
“그래, 오시는 동안 별일 없었습니까?”
“휴전선 넘을 때 조금 긴장했는데…… 북쪽의 특수요원들이 잘 안내해 줬습니다. 그보다 웬일인지 남쪽의 휴전선에 대한 감시가 느슨하더군요. 꼭 갈 사람 가라는 느낌이랄까?”
“문제가 될 만한 사람들을 모조리 북으로 몰려는 수작입니다. 그래야 남쪽의 안정을 보다 빨리 이룰 수 있고, 향후 잠재적 적국이 될 중국 쪽은 반대로 고생 좀 하라는, 일석이조의 전략적 선택을 한 것이겠죠. 뭐, 덕분에 우리 병력도 큰 손실 없이 넘어올 수 있었으니까 불행 중 다행이랄까…….”
이곳 지하 본부에 모인 남쪽 인사들은 동해안을 따라 육로로 오거나 배를 타고 신포항을 통해 들어왔다. 그중 동해안의 육로는 통일 초기에 서둘러 연결한 도로였다.
“지금 남쪽 사정은 어떻습니까?”
“빌어먹을 놈들! 아주 왜놈들이랑 어찌도 궁합이 잘 맞는지. 북 치고 장구 치고 있죠. 마치 처음부터 짠 것처럼 말이죠.”
“그랬을 겁니다. 아마도…….”
“시민들의 움직임은 어떻습니까?”
“다들 계속되는 경제난에 지친 모양입니다. 오히려 잘됐다는 여론도 만만치 않은 듯 굶어 죽는 것보다 낫다는 얘기가 시중에서 설득력 있게 돌고 있는 모양입니다.”
“어쩌다 이 나라가 이렇게 됐는지…….”
“후우, 모두의 잘못이겠죠. 매국노들이 저렇게 설치고 나라를 장악하게 만든 것이 큰 실수였습니다. 감언이설에 속아 그놈들을 지지해 준 국민들도 그렇고, 철저하게 단죄하지 못하고 뿌리를 뽑지 못한 역대 정권도 그렇고……. 결국 모두의 책임입니다.”
“…….”
이런 류의 대화. 수십 번, 아니, 수백 번 나눠 온 대화일 게다.
모두를 지치게 만드는, 그리고 언제나 그렇듯 대화의 끝은 피눈물이 날 정도로 치솟는 분노의 표출로 마무리되었다.
차라리 이런 대화는 안 하느니만 못했다.
“준비는 잘되고 있습니까?”
열기가 고조되자 변 박사가 감정을 추스르며 대화를 현재로 돌렸다.
“지금 남쪽 요원에게 최종 지령을 내렸습니다. 최종 지령을 접수하고 실행하려면 최소 두 달은 더 걸릴 겁니다.”
“두 달이라……. 그나저나 그거, 확실히 열리는 겁니까?”
“무조건 그렇게 되어야 합니다. 안 그러면…… 휴우, 그 결과를 상상하기도 싫어지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