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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랩퍼1권(16화)
5. 새로운 친구(3)
에반은 바닥을 뚫고 들어온 나무뿌리와 솟아오른 흙덩어리를 먼저 처리하기로 했다.
마음속으로 나무뿌리가 바닥으로 들어가는 장면과 바닥이 다시 평평해지는 형상을 강하게 상상했다.
그러나 두 가지 생각을 동시에 해서인지 정령에게 의사 전달이 되지 않았다.
에반은 잠시 고민을 하다가 말을 꺼냈다.
“이 나무뿌리를 원래대로 흙속으로 넣고 솟아오른 흙도 평평하게 해 줄래?”
에반이 말을 하며 장면을 떠올리자 대지와 나무의 정령들은 에반이 원하는 것을 들어주었다.
‘역시 인간에게는 말이 우선이겠지. 말을 하니 마음으로 떠올리기 쉽네. 이래서 정령과 말이 통한다고 했나?’
인간에게 텔레파시도 없는데 마음만으로 정확한 의사를 표현할 수가 없었다. 말을 하면서 심상을 그리자 쉽게 정령에게 의사를 전할 수가 있었다.
자신을 지우고 무아에 드는 것은 노력한다고 되는 것도 아니었다.
기약 없는 수련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에반은 미리 알포스 가족에게 방해하지 말라는 말을 했었다.
그런데 너무 빨리 마치자 에반은 아직 근처에 있는 정령을 다뤄 보기로 했다.
에반이 읽었던 신화를 소개한 책에는 정령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가 없었다.
그러나 에반은 전생의 산신령과 귀신을 섞어 놓은 것 같은 정령에게 이름을 지어 주기로 했다.
이 세계에 정령을 부르는 명칭이 있겠지만 친구가 된 정령에게 익숙한 이름을 지어 주기로 했다.
‘도가도비상도라고 하지만 정령들에게 내가 이름을 지어 주면 자아가 강해질 수도 있고 의미를 가진 존재가 되겠지.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고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는 시구가 이 경우에는 맞겠지.’
에반이 이름을 붙일 생각을 한 것은 정령의 수가 너무 많기 때문이었다. 기운이 뭉쳐져 마음이 생긴 미약한 정령들은 잡다하게 에반의 방에 몰려 있었다.
에반은 정령에게 이름이라는 의미를 부여해 주어야 자아도 생길 것 같고 융합해서 수도 줄어들 것 같았다.
에반은 어떤 이름을 붙일지 고민을 하다가 쉽게 순수한 의미를 연상하게 할 수 있는 이름을 골랐다.
에반은 기운과 의지를 실어 이름을 부르며 의미를 떠올렸다.
“목화토금수, 오행.”
에반은 익숙한 대로 나무를 떠올리며 목, 불을 떠올리며 화, 땅을 떠올리며 토, 쇠를 떠올리며 금, 물을 떠올리며 수를 소리 내어 말했다.
에반이 이름을 부르고 확실한 의미를 떠올리자 비슷한 기운의 정령들이 서로 뭉치며 자아가 생기고 의미를 가지기 시작했다.
기운이 뭉쳐 생긴 정령이라는 기운 덩어리들이 순수한 기운일 수는 없었다. 주도적인 기운이 있지만 자연처럼 복잡한 기운이 모여 있었다.
에반이 새롭게 의미를 부여하자 주도적인 기운에 따라 뭉치며 에반이 부여한 의미대로 새로운 존재로 탄생하기 시작했다.
바람의 정령이 에반의 볼을 간질이며 자신도 이름을 지어 주기를 원했다.
원래 풍은 목에 속한 기운이었다. 에반이 목을 숲과 나무로 심상을 그려 바람이 이름과 의미를 얻지 못한 것이다.
“풍.”
에반은 단군신화에서 풍운우를 떠올리며 바람의 이름을 지었다. 바람은 의미를 얻자 더욱 날뛰며 세상에 자신을 드러냈다.
그러자 창문 틈으로 비쳐 오는 햇빛과 방구석의 어둠이 일렁이며 에반의 마음에 심상을 전해 왔다.
‘그냥 확실히 오행으로 나눌 걸 그랬나. 빛과 어둠이 오행으로 나누어 흩어지지 않았네. 여기 신화에서처럼 빛과 어둠이 더 강한 의미이고 기운이기 때문인가?’
에반은 태극과 음양, 건곤, 명암 등 여러 의미를 생각해 보았다. 그러나 극단의 기운은 천족과 마족이 있는 세상에서 위험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었다.
“음양.”
에반은 태극 문양을 그리며 서로 상극이 아니라 합일되는 의미를 떠올렸다.
에반이 의미를 주자 빛과 어둠의 기운은 햇살이 어두운 구석을 비추는 곳에서 태극 문양을 그리며 얽혀 들었다.
그리고 태극의 흐름에 방에 흘러든 건조하고 습하고, 차갑고 더운 잡다한 정령들까지 빨려 들어갔다.
음양은 많은 것들을 흡수하며 다른 정령보다 덩치를 키워 갔다.
차츰 음양은 태극으로 서로 얽혀 들며 이 세상에는 나타난 적이 없는 특이한 기운이 되어 갔다.
에반은 자신이 이름과 의미를 부여해 새로워진 정령들에게 말을 걸어 보았다.
“어때, 새로운 자신이 좋아?”
‘이름을 계속 불러 줘.’
원래 정령은 희로애락 같은 감정 정도만 있었다. 그러나 새롭게 탄생한 정령들은 부여 받은 이름이 좋다며 계속 불러 달라고 에반에게 마음을 전해 왔다.
이름은 자아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에반은 이름을 불러 달라는 정령들의 말에 어설픈 실험이 성공한 것을 알았다.
에반은 정령에게 탄생의 선물을 한다는 생각에 호흡을 가다듬어 단전의 기운을 끌어올려 기운을 담아 이름을 말했다.
자신의 이름이 약간의 기운에 담겨 불러질 때마다 정령들은 이름에 담긴 기운을 흡수하며 좋아했다.
에반은 한참을 이름을 부르며 기운을 허비하고 나서야 정령들에게서 벗어날 수 있었다.
정령들은 친구로서 에반을 전적으로 믿고 있었고 에반의 강한 정신력에 이끌려 새로운 존재로 탄생했다.
친구였던 정령들은 에반에게 이름과 의미를 받아 새로 탄생하며 다소 종속적인 존재가 되었다. 정신체들에게 이름은 자아의 증거이지만 종속의 증명이기도 했다.
결과적으로 보면 정령들도 가능성이 많은 존재로 변한 것이지만 에반이 정령들의 호의를 이용해 자신의 부하들을 만든 것이다.
이렇게 에반에게 정령이라는 새로운 부하가 생기게 되었다. 이름처럼 무한히 성장할 가능성이 있는 부하들이었다.
에반은 정령들에게 거실로는 나오지 않도록 말을 한 후에 문을 열고 거실로 나갔다.
거실에는 데리가 온돌에서 담요를 뒤집어쓰고 에반이 나온 문을 지켜보고 있었다.
“너 괜찮아? 방 안에서 소리도 많이 나고 뭔가 이상한 기분이 들었는데 별일 없었어?”
데리는 바닥을 뚫은 나무줄기와 창문을 강제로 열고 들어온 바람 소리를 들었다. 정령이 몰리며 피부를 곤두서게 한 기운도 느꼈으니 더욱 긴장하며 에반이 있는 방을 지켜보았다.
“창을 휘두르며 수련을 해서 소리가 좀 많이 났나 봐. 앞으로 좀 조용히 수련할게. 좀 추운 것 같은데 나무라도 더 땔까?”
에반은 데리가 이상한 소문이라도 낼까 봐 변명을 하고 날씨가 춥다며 말을 돌렸다.
“그래, 좀 추운 것 같네. 그럼 아궁이에 장작 좀 넣어라. 그리고 너도 수련한다고 점심때 나오지 않았는데 수프라도 먹을래? 수련한다고 해도 식사는 해야지.”
“오늘은 수련이 잘되어서 식사까지 거른 거야. 앞으로는 식사는 거르지 않을게. 그런데 아저씨와 더글라스는 대장간에 간 거야?”
“응, 마을 사람들이 화살촉을 만들어 달라고 해서 대장간에 가셨어.”
“쇠도 별로 없다고 들었는데 뭐로 만들려고 그런 거야?”
“마을 사람들이 낡은 농기구와 석궁 화살로 화살촉을 만들어 달라고 했어. 네가 사냥을 잘하니 마을 사람들도 사냥이라도 해 보려고 하나 봐.”
마을에 사냥이나 덫의 열풍이 분다고 하자 에반은 걱정이 되었다. 겨울 산이라는 것이 준비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위험했다.
돌아가신 에반의 아버지같이 겨울에 가끔 사냥하던 어른도 있지만 분위기에 휩쓸려 산에 오르려는 사람도 있었다.
“눈에 동물의 발자국이 있어 사냥하기 쉽지만 몬스터가 있을지 모르고 폭풍이라도 불면 위험한데 걱정이네.”
에반이 살짝 걱정된다는 말을 꺼냈다. 누가 피해를 입게라도 된다면 엉뚱하게 에반에게 원망이 몰릴 수도 있었다.
“아버지가 그러는데 원래 첫눈 오면 축제처럼 마을 어른들이 산에 올라 사냥하기도 한대. 첫눈 내릴 때가 사냥하기 제일 좋은 시기래. 눈에 발자국도 남으면서 춥지도 않아 사냥에 적기래. 올해는 몬스터와 샤벨 타이거로 사냥을 못했으니 지금이라도 나서는 거래.”
“콜린 마을은 어떤지 몰라도 우리 마을은 그렇게 많은 어른이 사냥하러 산에 오른 것 같지는 않았어.”
“자경대장인 토마스 씨와 아버지가 말하는 것을 들은 것이니 나는 잘 모르겠어. 토마스 씨가 사냥을 잘 이끌겠지. 너는 사냥하는 데 따라가지 않을 거야?”
데리가 사냥하는 데 따라갈지 묻자 에반은 생각에 잠겼다. 눈길을 헤치며 돌아다니기에는 아직 어린 에반의 체력으로는 힘들었다.
“나는 아직 활을 잘 쏠 수 없고 힘도 부족하니 어른들과는 따로 다녀야 할 것 같아.”
“뭐, 네가 알아서 해야겠지. 그런데 전에 알리바바가 여인 왕국에 잡혀 갔던 이야기 좀 더 해 봐. 몇 주 동안 바쁘다고 이야기를 안 해 줬잖아.”
데리는 여인 왕국 이야기에 흥미를 보였다. 여자가 남자보다 더 무력과 사회 지위가 높은 사회를 이야기에 데리는 이상하게 집착을 보였다.
‘이거 좀 위험한데, 이 정도에서 끝내고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로 넘어가야겠다. 그동안 정신이 없어서 여인 왕국 이야기까지 했네. 데리야, 알리바바는 하렘 이야기 꺼내려고 한 거야. 여인 왕국에 관심을 두지 마라.’
에반은 이상한 예감에 이야기 소재와 주인공을 바꾸기로 했다.
여유를 찾아 데리에게 새로운 이야기를 해 준 에반은 다시 방으로 들어와 새로 생긴 정령들과 시간을 보냈다.
에반은 우선 동물을 수색하거나 주변을 정찰하는 데 많이 이용할 것 같은 풍에게 심상을 전해 오는 연습을 시켰다.
“풍, 대장간의 풍경을 보고 내게 전해 줘.”
에반은 대장간의 위치를 떠올리며 풍에게 대장간을 다녀와서 장면을 전달해 달라고 말을 했다.
창문을 넘어간 풍은 대장간의 풍경을 에반에게 심상으로 전해 주었다.
영상에는 알포스와 더글라스가 어렵게 철을 녹여 화살촉 모양의 틀에 붓고 있었다.
“잘했어, 풍. 여기 중충혈의 기운을 좀 흡수해 봐.”
중충혈은 바람의 기운이 흐르는 수궐음심포경의 혈 자리였다.
에반은 풍이 명령에 따르며 기운도 소모하고 대가도 주어야 할 것 같아 중충혈의 기운을 주었다.
혹시 많은 기운을 흡수할까 봐 중충혈이라는 혈도의 기운만 가져가도록 했다. 풍은 에반이 세운 중지를 스쳐 가며 약간의 기운을 흡수했다.
다행히 같은 성질의 기운이 좋은지 풍은 기운을 흡수하며 에반에게 좋다는 심상을 많이 보냈다.
‘나도, 나도.’
다른 정령들도 부럽다는 듯이 서로 주위를 돌며 서로 시켜 달라는 의미를 전해 왔다.
“질서.”
정령들이 두서없이 마음을 보내자 에반은 애완견을 길들이는 심성으로 강하게 질서라고 외치며 순서를 기다리도록 했다.
‘우, 우.’
처음으로 에반이 분위기를 조이자 정령들은 풀이 죽어 주변에 어두운 기운을 날렸다.
에반은 차례로 물을 찾게 하거나 불을 크게 키우고 흙을 솟아오르게 하는 등의 일을 시키고 상으로 속성에 맞는 기운을 주었다.
‘별로 기운을 쓴 것 같지는 않지만 왠지 배가 고파지네.’
기운이 빠지며 약간의 허탈감이 들자 에반은 다시 수련을 하기로 했다.
“내가 수련할 때는 방해하지 마라. 알아들었으면 대답을 해 줘.”
에반은 정령들이 수련을 방해할까 봐 명령조로 강하게 말을 했다.
‘가만히, 조용히.’
에반은 정령들에게 수련이 어떤 것인지 자신의 심상에 몇 번 떠올려 확실히 알려 준 후에 수련에 들어갔다.
에반과 정령들은 조금씩 서로에게 익숙해져 갔다. 아직까지는 서로 도움이 되는 관계를 만들고 있었다.
“그래, 수련은 잘했냐?”
저녁을 먹으며 알포스가 에반에게 말을 꺼냈다.
“네, 겨울이라 할 일도 없으니 열심히 수련하려고 합니다.”
에반이 의례적인 말을 하자 알포스는 낮에 자경대장인 토마스가 했던 말을 꺼냈다.
“토마스 씨가 마을 사람들과 사냥을 하러 산에 올라간다는데 너도 갈 거냐?”
“그 얘기는 데리에게 들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아직 눈길에서 사냥감을 쫓을 체력도 없고 활도 잘 쏘지 못하니 안 될 것 같습니다.”
“그래, 잘 생각했다. 공연히 따라다녀 봤자 고생만 하겠지. 샤벨 타이거를 잡았다고 행여 자신감에 차서 사냥하러 다니지는 마라.”
“토마스 씨가 뭐라고 말을 했나요?”
“네가 사냥을 잘한다고 여기는지 같이 데려가려고 하더라. 내가 너는 덫으로 동물을 잡는다고 했더니 한번 물어봐 달라고 하더라.”
‘필요도 없는 나를 눈 덮인 산에 데려가려고 해. 이런 뒤로 자빠져서 코나 깨져라.’
에반은 토마스의 의심스런 행동에 속으로 욕을 하며 예의 바르게 대답을 했다.
“저야 활을 당길 힘도 없지 않습니까? 그런데 겨울이 깊어졌는데 지금 산에 올라도 괜찮겠습니까?”
“날씨가 갑자기 나빠질 수도 있겠지만 토마스 씨가 알아서 하겠지.”
“저 때문에 공연히 많은 사람이 산에 사냥한다며 올라갈까 봐 걱정됩니다. 토마스 씨에게 한번 말이라도 해 주십시오.”
에반은 자신에게 시선이나 원망이라도 올까 봐 말을 꺼냈다.
“화살촉을 만들어서 건네주면서 말은 꺼내 보겠다.”
그러나 사냥을 이끌 자경대장인 토마스가 다쳐서 사냥은 연기될 수밖에 없었다.
토마스는 눈길에 뒤로 넘어졌는데 이상하게 코까지 다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