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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랩퍼1권(15화)
5. 새로운 친구(2)
에반은 무의식 깊이 들어가기 위한 명상을 준비했다.
내공 수련도 명상일 수도 있겠지만 운기에 마음을 뺏겨 쉽게 무아지경에 이르기는 어려웠다. 운기가 되면 마음이 기운에 몰릴 수밖에 없기 때문이었다.
에반은 내관을 해서 단전에 마음을 두고 호흡을 지워 갔다. 몸과 기운, 호흡을 지워 가며 무아지경에 이르는 명상을 했다.
단전의 내공이 많아 처음에는 내관법을 하기 어려웠지만 차츰 관조의 시선을 유지할 수 있었다.
무아에 들어 내관을 하기 위해서는 오랜 수련이 필요하지만 에반은 전생의 영향인지 쉽게 관조에 들어갈 수 있었다.
에반은 깊은 명상에 들어갈 수 있는 가능성이 보이자 본성을 깨우기 위한 정신 수련을 하기로 했다.
정신 수련은 몸과 내공이 최고조일 때 폐관을 해서 많은 준비 시간을 두어 안전하게 시작해야 했다.
그러나 내공으로 한겨울에 피부가 붉어지고 덥고 입술이 바짝 마르는 에반은 안전하게 준비할 시간이 없었다.
“며칠간 방에서 수련에 집중하려고 하니 제가 나오기 전에 방해하지 말아 주십시오.”
“에반이 돌아가신 아버지께 배운 것이 많은 것 같구나. 샤벨 타이거를 잡은 덫이 심상치 않을 때부터 알아봤다.”
에반이 당분간 방에서 수련에 집중한다고 알렸다. 알포스는 기사들의 수련을 떠올렸는지 에반의 아버지까지 거론하며 띄워 주었다.
전에는 데리가 에반이 귀여워 투덜거리는 말이라도 했겠지만 샤벨 타이거를 본 후에는 수련한다고 하면 별로 방해하지 않고 있었다.
데리는 거대한 샤벨 타이거 사체를 본 후에는 에반이 어리지만 더 이상 동생처럼 대하지 못했다.
무력과 능력이 모든 것에 우위인 사회의 한 단면이었다. 데리는 에반을 더 이상 편하게 대하지 못했다.
에반도 부작용을 겪으며 데리에게 신경 써 주지 못했다. 어느새 친한 데리와 벽이 생긴 것이다.
더글라스도 아침부터 에반이 꾸준히 수련하는 것을 보며 정말 제대로 된 무술까지 배웠다는 생각을 하는지 가끔 훔쳐보기도 했다.
더글라스가 호기심에서인지 배워 보고 싶어서인지 훔쳐보지만 에반이 엉거주춤하게 서 있거나 가만히 앉아 있자 따라 하지는 못하고 있었다.
마보는 모르는 사람이 본다고 따라 할 수 있는 수련이 아니고 좌선은 더욱 외부에서 알 수 없는 수련이었다.
에반이 샤벨 타이거를 잡으며 능력을 보이자 부작용도 있지만 어린애라고 무시하는 사람은 없어진 장점은 있었다.
마실 물 정도만 방에 두고 에반은 방에서 좌선에 들어갔다.
에반은 비정상적으로 정신과 영성이 강하니 어떻게 해서든지 이번에 조절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무도라는 것은 몸을 앞세우는 것이다. 몸을 수련해 안전하게 기와 정신의 세계로 나가는 체계였다.
기 수련이나 정신 수련부터 하는 문파가 있고 효율도 좋지만 위험은 감수해야 했다. 몸보다 기와 정신이 앞서면 주화입마와 미칠 위험은 높아질 수밖에 없었다.
에반은 명상으로 무의식의 영역에 들어가 정신이과 영성을 봉인해 균형을 이루기로 했다.
‘나의 정신체는 아직 육체와 완전히 합일이 안 되어 정신체의 속성이 남아 있겠지. 정신체는 의지에 따르니 봉인도 가능할 거야. 이 방법이 안 되면 죽을 각오를 하고 기운을 더 모아 환골탈태라도 시도해 봐야지.’
에반은 무아지경에서 정신체로 자각하면 스스로 봉인해 몸과 균형을 맞춘다는 것을 각인했다.
그리고 봉인이 안 된다면 몸을 내공에 맞추는 시도를 하기로 했다. 벼랑 끝에 서 있으니 위험을 감수하고 하는 선택이었다.
보통은 육체 수련이나 내공 수련보다 명상이 더 어렵고 고위의 수련이었다. 기도 뜬구름 같은데 정신은 더욱 난해한 영역이었다.
정신을 건드리는 수련은 난해한 만큼 잘못될 확률이 높았다. 비상 상황이니 위험한 시도를 하는 것이다.
에반은 천천히 호흡을 줄여 가다 문뜩 데리까지 자신을 편히 대하지 않는 사실에 외로움이 진하게 올라왔다.
능력이 있다는 것을 보이면 어른 취급을 하는 세계이지만 요즘 데리가 자신을 어렵게 대하는 것이 느껴졌다.
알포스도 이제는 자신을 순수하게 대하지는 못하는 것 같았다. 약간이나마 가족이나 인간 사이의 정을 느끼게 되었는데 새로운 벽이 생기게 된 것 같았다.
그동안 새로운 삶을 연장하기 위해 정신없었지만 알포스 가족과 지내면서 마음의 안정을 찾았었다.
서로의 필요에 의해서 한 집에서 살게 되었지만 식사를 함께하고 체온을 나누며 자는 것은 서로에게 많은 영향을 주기 마련이었다.
에반은 철없고 발랄한 데리나 무뚝뚝한 더글라스에게 정이 들 수밖에 없었다.
‘정이 생기니 외로움도 느끼게 되는 건가? 기약할 수 없는 수련에 들어가니 여러 생각이 나는 건가?’
에반은 다시 일어나 기공으로 몸을 덥히고 생각을 비우고 앉았다.
마음을 가라앉힌 에반은 기운에 신경 쓰지 않고 단전만을 바라보며 호흡의 리듬에 몸과 마음을 맞추어 갔다.
호흡을 하는 리듬에 몸과 마음을 맡겨 저절로 리듬에 끌려가도록 기다렸다.
제대로 단계를 밟아 수련을 하는 경우에도 이 단계에서 주화입마가 일어나는 경우가 많았다.
화두로도 많이 쓰이는 처음 이전에는 무엇이 있나라는 말이 있다. 자아 이전에는 무엇이 있나라는 의문은 동양에서 많이 다루는 주제였다.
나를 잊는 무아지경을 목표로 한다면 수련 전에 미리 확고한 체계를 세우고 시작해야 했다.
자아를 지우고 나서 무엇을 할지 모른다면 당연히 정신줄을 놓게 된다. 도리와 체계가 없는 수련은 정신병자를 만들 뿐이었다.
마보와 같은 기초 수련과 내공 수련은 모두 이런 의문에 대한 답을 몸에 새기는 수련이었다. 전체 수련 체계가 이런 의문에 대한 답이었다.
경지에 이르러 정신의 영역에 들어서면 그동안 쌓은 수련에 따라 정신의 영역을 개척하게 되는 것이다.
정신의 영역에 안전하게 발을 내밀기 위해 힘든 수련을 해서 몸과 내공에 해답을 각인하는 것이다.
이런 위험한 수련을 하는 것이지만 에반은 미지의 두려움은 없었다. 이미 정신체로 정신의 세계에 대해 감을 잡았기 때문이었다.
에반의 깨달음은 자아의 껍질을 벗으면 본성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깨어난다는 것이었다.
육체에서 생긴 자아는 정신세계에 적응할 수 없었다. 자아가 지워지면 깨어나는 본성만이 정신세계에서 의지를 세울 수 있었다.
불성이나 원신 같은 비슷한 용어가 있지만 창천문을 수련한 에반은 그것을 본성이라고 정의했다.
에반은 또 의지가 곧 현실이 되는 정신세계의 법칙에 대해서도 경험했었다. 수련하며 새긴 의지가 본성을 이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강철호의 생애에서는 마지막 한 달을 집중해서 수련하면서 살고 싶다는 의지를 새겼다.
수련을 하며 새긴 의지로 본성이 깨어나 많은 일을 겪고도 승천을 하지 않고 에반의 몸에까지 들어오게 된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정신체로서의 경험과 새로 얻은 어린 몸 때문에 부작용이 생겼다. 에반은 다시 본성을 깨워 균형을 맞추기로 했다.
에반은 내관을 하며 호흡의 리듬에 맞추어 깊이깊이 관조에 들어갔다.
무의식 깊이 들어가자 차츰 자아가 흐려지며 본성이라고 할 수 있는 정신이 깨어나기 시작했다.
자아와 마음이라는 커튼이 걷히고 깨어난 정신은 고향이라고 할 수 있는 하늘을 한번 올려다보았다.
그러나 아직은 하늘로 돌아갈 때는 아니었다.
에반의 본성은 하늘을 본 후에 마음 깊이 새겨진 의지를 일으켰다.
‘도와줘, 친구가 필요해.’
본성이 일으킨 의지는 에반이 계획한 것이 아니었다.
이렇기 때문에 정신 수련은 기초나 꾸준한 수련이 아니라면 불행한 결말이 나오는 경우가 많았다.
정공을 꾸준히 수련한 후에 본성이 깨어났다면 양신을 이루는 신기를 모았을 수도 있었다.
무예를 수련하며 강해지기를 열망했다면 더 많은 내공을 모았을 수도 있고 마공을 수련했다면 파괴력이 강한 기운을 모았을 수도 있었다.
본성은 에반의 마음에 깊숙이 새긴 외로움을 벗어나고 도움을 줄 수 있는 친구를 열망했다.
보통 정신 수련에 들어가려면 며칠은 폐관을 하고 집중해야 겨우 이를 수 있었다.
그렇게 며칠을 집중한 후에 들어갔다면 집중된 의지로 에반의 계획대로 영성을 봉인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에반은 정신세계로 들어가는 것이 익숙하고 쉬웠다. 금방 본성을 깨워서 수련 전에 일어난 감정의 여운이 영향을 끼친 것이다.
감정에 휩쓸려 외부에서 도움을 구했으니 지구에서라면 귀신들이 끌려왔었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다행히 에반이 있는 곳은 다른 세상이었다. 자연의 기운이 강하고 천계와 마계가 있어 귀신이 드물었다.
정신이 외로움을 벗어나고 도움을 구할 친구를 구하는 의지를 일으키자 주위에 있는 자연의 기운이 몰려왔다.
그래도 육체라는 한계가 있어 본성의 의지가 멀리 퍼지지 않았다.
이 세상은 정령 외에도 천족과 마족이라는 정신체가 있었다. 만약 멀리까지 의지가 퍼졌다면 많은 존재가 에반에게 몰려왔을 것이다.
근처의 숲과 하천, 대지, 하늘, 바람, 마을의 장작불에서 거하는 작은 불의 정령까지 의지에 이끌려 왔다.
주신이 창조했다는 상급 정령들이 아니라 자연의 기운이 뭉쳐 저절로 생긴 미약한 정령들이었다.
‘친구가 되어 줄게, 너는 누구?’
에반의 주위로 몰린 정령들은 서로 에반에게 친구가 되겠다며 마음을 보냈다.
‘나는 에반, 친구가 되어 줘.’
‘그래, 친구가 되어 줄게.’
정령들과는 계약을 맺기 어려웠다.
계약자도 바람이나 물과 같은 순수한 기운을 품어야 정령과 동조를 하며 계약을 맺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인간이 소우주를 품고 있지만 한 속성을 순수하게 품기는 어려웠다. 정령과 계약을 맺으려면 특별한 수련이나 정기를 타고나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본성은 마음을 나누는 방법으로 간단히 많은 정령과 계약도 아닌 친구가 되었다.
본성은 창조자에게 받은 조각으로 수련해서 키운다면 신까지 될 수 있는 씨앗이었다.
신의 조각인 본성이 순수하게 친구라는 마음을 보내자 정령들은 모두 즐겁게 받아들였다.
할 일을 마친 본성은 다시 무의식에 잠겨 들었다.
그리고 다행히 에반이 계획한 대로 몸에 무리가 되지 않도록 더욱 깊은 무의식으로 잠겨 들었다.
에반이 다시 본성을 깨우려면 오랜 수련을 거쳐야 가능해지게 되었다.
점차 자아가 깨어나며 에반은 세상을 인지하게 되었다. 자아가 있다면 관조도 없고 몸과 기운에 휩쓸려 본성이 깨어나지 않는다.
그러나 자아가 있어야 생명체로서 감정과 이성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었다.
에반은 감각이 돌아오며 차츰 호흡과 몸이 느껴지고 경맥을 도는 기운도 느껴지게 되었다.
본성이 깨어나며 많은 정신력과 기운을 썼지만 내공은 전신 경맥에 거침없이 운기되고 있었다. 기운이 더욱 순수해진 것이다.
에반은 관조의 시선으로 지켜보았던 본성이 했던 일을 기억했다.
수련 전에 잠시 외로움을 느꼈지만 그런 잠깐의 감정이 본성까지 움직일 정도로 마음에 깊이 새겨졌는지 에반도 놀랐다.
‘역시 감정이 수련의 장애인 건가? 아니면 감정이 본성까지 움직일 정도로 힘이 있는 건가? 그래도 균형을 찾았으니 계획대로 된 것이겠지.’
에반이 내공을 단전에 모아 정리를 하며 눈을 떴다.
주위는 바닥을 뚫고 나무뿌리가 땅에서 솟아나 있고 닫아 두었던 창문은 열려 있었다.
그릇에 담아 두었던 물도 흘렀고 심지에는 저절로 불이 켜져 있었으며 창날은 저절로 빛을 발하고 있었다.
에반의 기감으로 주위에 무언가 기운이 뭉쳐 있는 것이 느껴졌다.
‘이게 정령인가? 아직 영안을 뜨지 못해 눈에 보이지 않네. 대화는 어떻게 하는 거지?’
오감을 가지고는 정령의 형상을 보고 말을 나눌 수가 없었다. 기운 덩어리인 정령은 제3의 눈이라는 영안을 뜨지 않는 한 형체를 볼 수 없었다.
에반이 자연의 정령을 어떻게 할지 생각하자 마음에서 이미지가 그려졌다.
‘친구, 친구, 친구.’
그림을 떠올리거나 눈을 감고 회상하는 것처럼 마음을 통해 의미가 전달되어졌다.
‘기운 덩어리와 말로 의사를 나누는 것도 이상하겠지.’
에반은 마음속에 그림을 그리듯이 반가워라는 의미와 즐거운 감정을 그렸다. 금방 정령들에게서 긍정적인 기분이 전해져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