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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의 계보 1권(24화)
제4장 삭풍(朔風)(4)


“무엇 때문에 반역 행위를 저지르는 건가? 목적은?”
“제국의 압제로부터 북해를 해방시키는 것. 정말 몰라서 묻소?”
“……본래 북해가 내지가 아닌 하나의 도독부로 되어 있었으나, 지금은 엄연히 내지의 열네 번째 도로 편입되어 동등한 대우를 받고 있다. 법적으로 무슨 차별이 있으며, 호적에 어떤 차등이 있단 말인가. 제국 각지에서 북해 출신의 인사들이 활약하고 있는 사실을 정말 몰라서 그렇게 말하는가? 그대 또한 젊음을 이런 일에 낭비하지 말고 보국하는 일에 바치면 더욱 좋았을 것을.”
“이 무슨 궤변이오. 진지하게 날 설복시키겠다고 하는 소리면 그만두시오. 이거 무슨 제국 정부에서 펴낸 싸구려 선전지에 나오는 문구도 아니고. 하여간, 당신들은 보고 싶은 것만 보니까 진짜 현실이 어떤 건지 모르지. 예, 백번 양보해서 그렇다 칩시다. 그 황은이란 걸 몸소 받고 사는 사람들 있지. 그런데 700만 북해인 중 그게 얼마나 될 성싶소? 법적으로 행정구역만 동등하면 아무 차별이 없나? 엄연히 북해는 내부 식민지올시다.”
“현 시점에서 제국의 시정이 북해인에게 있어서 미흡한 점이 있을 수 있음은 인정한다. 그러나 내지와 북해는 한 뿌리에서 나온 형제이며, 같은 언어와 역사를 공유하는 한민족이다. 더군다나 제국 의회는 북해권익법을 통과시켜 내해일체(內海一體)의 지침을 천명했다. 일시동인(一視同仁)과 팔굉일우(八紘一宇)를 실현하는 것이 우리 정부가 지금 가장 북해정책에 있어서 매진하는 사안이다. 세계에서 가장 번영하는 조국이 북해 문제에 그만큼 열심을 다하고 있단 말이다. 그대는 당장의 모자람만 보고 미래를 보지 못하는가? 나날이 국가의 정치는 인민을 위하게 될 것이고, 그런바 북해도 진정으로 통합되는 날이…….”
“당신, 진보 사관의 신봉자시구려. 그렇담 우리와도 말이 잘 통하겠는걸.”
비아냥인지 칭찬의 뜻인지 알 수 없는 포로의 말이었다.
“내해일체, 일시동인, 팔굉일우. 피차 헛소리인 거 알 테니 그만합시다. 그리고 한 뿌리에서 나온 민족, 허, 그걸 누가 정합니까? 황성부의 관료? 제국대학의 교수? 뭐, 민족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멀리 가지 말고 내 코와 눈을 보시오. 이게 전형적인 한민족의 얼굴로 보이시오? 뭐, 그것도 양보한다 칩시다. 하지만 설령 내지와 북해가 정말로 한 뿌리에서 나온 형제로, 그 과거를 공유하고 있다 할지라도 현재와 미래는 공유하고 있지 않소. 아무리 그럴싸하게 포장해 봤자 북해는 내지의 내부 식민지에 불과하오. 오직 독립만이 해결할 수 있는 문제요.”
포로의 말에 채정혁은 짐짓 목소리를 높였다.
“좋다. 그대의 말이 다 옳다 치자. 그렇다면 무슨 수로 제국에게서 독립을 할 텐가? 제국은 세계 최강의 경제력과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다. 한 줌도 안 되는 너희가 무슨 수로 제국을 무너트린단 말인가. 아니, 하다못해 북해의 700만 인민은 모두 그대들에게 동조하고 있는가? 만약 그들이 함께 손을 잡고 일어났다면 제국군이 아무리 광포한들 그 기세를 막아 세울 수 없는 노릇인데.”
채정혁의 말에 포로는 잠시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겼다. 그는 숨을 한 번 크게 들이쉬고서는 강렬한 눈빛으로 채정혁을 똑바로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건조하게 갈라진 입술에서 그의 단호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렇소. 우리는 외로운 투쟁을 하고 있소. 그러나 여기 부대 사정을 보면 제국군이 세계 최강이라는 것도 거짓말이지. 물론 비무장의 민간인 상대로는 어디 견줄 데 없는 사격술을 가지고 있는 것 같지만 말이오. 하지만 나는 믿고 있소이다. 중요한 건 계란으로 바위를 깨트릴 수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가 아니올시다. 바위를 향해서 계란이라도 던져 보는 것이야말로 더욱 중요한 일이지. 물방울 하나가 천만년을 떨어지면 바위를 쪼개기 마련이오. 우리 목숨은 어쩌면 초개같이 들판에 버려질지 모르지만, 세대를 이어, 누군가 대의를 위해 목숨을 바치면 그 뒤를 이어 누군가가 와서 싸울 것이오.”
포로의 확고한 신념을 파훼할 방법은 없었다. 사실 채정혁도 그들의 논리가 어느 정도 옳다는 것은 내심 인정하고 있었다. 채정혁은 그에게서 무슨 뚜렷한 반역의 증거를 잡아낼 생각은 없었다. 그는 점점 이 논쟁을 즐기고 있었다.
“좋다. 혹여 제국이 옛날 동영을 방기하였듯이 북해를 독립시킨다 치자. 그렇다고 한들 이 약육강식의 국제사회에서 어찌 살아남겠는가. 북해에 군사력과 자본은 충분한가? 북해를 호시탐탐 노리는 요동과 러시아, 일본으로부터 누가 북해를 보호한단 말인가? 그대도 진서의 예를 알고 있겠지. 거칠게 제국의 통치에 대해 저항했으나, 결국 현실을 인정하고 그들은 자치에 만족했다. 북해는 사실상 자치가 필요 없을 정도로 내지와 균일한 대우를 받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독립도 무용이오, 자치도 그다지 쓸모가 없으니 이 모든 피 흘림은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채정혁은 이번의 논리에 자신이 있었다. 그러나 포로는 담담하게 고개를 내저을 뿐이었다.
“만약 요동과 러시아 혹은 일본이 한국의 독립을 침해하려 한다면, 한국인들은 독립을 지키기 위해 무기를 들고 싸울 것이오. 마찬가지로 그들이 북해의 독립을 침해하려 한다면, 북해인들도 독립국의 국민으로서 그들과 맞서 싸울 것이오. 그건 당신네들이 정해 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정해 주는 것이오.”
채정혁은 논쟁을 마치고 본론으로 들어갔다. 익문사가 말한 증거가 있다면 증인도 필요하다. 그런 걸 떠나 이자는 무어라고 답할지 채정혁은 흥미로웠다.
“그렇게 말하는 너희가 요동의 앞잡이가 되어 국가 변란에 가담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요동과 손을 잡으면 북해의 독립이 보장이 된다는 것인가, 혹여 제국을 버리고 새로운 외세를 택하겠다면, 그것은 옳은 행동인가?”
막힘이 없던 청년이 갸우뚱하며 되물었다. 그는 영문 모를 소리를 한다는 표정으로 채정혁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무슨 근거로 우리가 요동의 앞잡이라고 단정하는지 모르겠소.”
채정혁은 포로를 밀어붙일 수 있다는 생각에 미묘한 쾌감을 느꼈다.
“너희 무리에 요동제 최신 소총이 반입되고 있는 것을 확인했다. 도대체 무슨 여유가 있어서 요동제 소총을 사용한단 말인가. 뿐만 아니라 프랑스제 소총도 막대하게 들여왔더군. 누가 그 수입에 소요되는 비용을 부담한단 말인가. 외부와 결탁하지 않고서야 이게 가능할 말인가?”
“하, 그깟 무기가 그렇게 중요하겠소? 해방군이 요동 무기를 쓰는 것은 사실이오. 국경만 건너면 쉽게 구할 수 있으니. 프랑스 무기? 당신은 모르겠으나 우리의 행동에 공감하는 독지가들이 요동뿐만 아니라 북해 내부와 제국 전역에서도 적지 않소. 이들의 씨가 마르지 않는 이상 끊임없이 우리 북해전에는 무기와 식량이 보급될 것이오. 필요하다면 우리는 이런 도움을 사양치 않고 연공의 무기든, 러시아의 무기든, 심지어는 제국산 무기도 쓸 수 있소. 중요한 것은 누가 만들었냐가 아니라, 누가 쓰는가요. 설령 요동이 흑심을 품고 지원을 할지라도 상관없소. 그들이 당치 않은 요구를 해온다면 우리는 언제고 요동을 향해서도 총을 들 것이오.”
그에게는 막힘이 없었다. 그러나 채정혁은 그의 의견에 완전히 공감할 수는 없었다. 분명히 그는 자신의 대의를 쫓고 있음에 분명했다. 그러나 그만큼 이해하기 어려운 측면도 있었다.
“그렇다고 치자. 그러나 그대들은 어디까지나 불법 단체이다. 심지어는 북해 인민의 의사를 충분히 대변하고 있다고 말할 수도 없다. 그대의 말마따나 북해와 내지는 결이 다른 민족일 수도 있지. 그런데 정말로 그대들이 원하는 것을 쟁취해 집권한다면 뜻하는 바대로의 이상향을 이룩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인가? 정말로 영안부의 번영하는 중산 계층과 이곳 일대의 남루한 여진계 북해인들이 함께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은 아니겠지. 인간의 역사는 늘 반목과 투쟁의 역사였네. 점차 나아지겠지만…… 하지만 지금 단계에서 그대들이 제국 정부의 북해 정책에 비해서 보다 더 나은 대안을 제시한다고 볼 수는 없겠군.”
“…….”
포로는 별다른 대꾸 없이 채정혁을 쏘아보고만 있었다.
“나를 상대하는 지금은 말뿐이지만, 다음 단계부터는 강도 높은 심문이 기다리고 있을 텐데……. 털어놓을 게 있으면 지금 모두 털어놓는 게 피차 좋은 일일 것 같군. 너희 쪽 정보에 대해선 할 말 없나? 무엇이든 말하면 내 선처를 약속하겠다.”
“당신도 믿지 않는 얘기를 나한테 해봤자 무슨 소용이오? …… 물론 세상에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인간이 어디 있겠소이까. 그러나 처음부터 이 일을 하면서 죽음은 각오한 바요. 다만 어차피 죽을 거라면 고문 없이 깔끔하게 죽는 게 내 바람이오.”
채정혁의 말에 포로는 코웃음을 쳤다. 그는 이 심문장에 들어와서 한 번도 그 기개를 굽히지 않았다. 채정혁은 그 자세만큼은 감탄할 만하다고 생각했다. 물론, 오늘 심문에서 채정혁도 포로를 설득시키지 못하고, 포로도 채정혁을 설득시키지는 못했다. 어차피 상대에게 자신의 견해를 이해시키는 것은 별로 중요한 것이 아닐 수도 있다. 사회의 구조는 그들에게 나름의 역할을 부여하고 있었다. 아마 내일 세상이 뒤집힌다 하더라도 채정혁이 북해전에 가담하거나, 반대로 저 포로가 제국군에 입대하는 일은 없을 터였다.
“……마지막으로 더 할 말 있다면 하게.”
“앞으로 피를 얼마나 더 흘리고 시간이 얼마나 더 걸릴지 모르지만, 결국 승리하는 건 우리요. 그러니 당신들도 헛수고하지 말고 한국으로 돌아가시오. 고향이 그립지 않소?”
채정혁은 포로의 말에 아무런 대꾸를 하지 않았다. 심문은 이제 끝났다. 채정혁은 헌병을 불러서 포로를 다시 구류장으로 옮기도록 했다.
“헌병! 데리고 나가게.”
채정혁은 텅 빈 심문실에 앉아서 방금 마주 앉았던 포로에 대해서 생각했다. 아마 그는 이제 제국의 역적이라는 죄목으로 비참한 미래를 맞이하게 될 터였다. 차라리 총살형이면 운이 좋은 편이었다. 만약 그에게 운이 따라 주지 않는다면, 이곳 둔하보다 훨씬 북쪽의 설원으로 끌려가 영구적인 노역에 처해질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런 미래를 고려조차 하지 않는 듯 시종일관 당당했다.
최후의 승리는 그들의 것이라는 근거 없는 자신감이 그에게서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채정혁은 그의 당당함에 어이가 없었다. 그러면서도 내심 감탄한 것도 사실이었다.
책상 위에 놓여 있는 심문 조서에는 그가 채증한 기록들이 고스란히 적혀 있었다. 채정혁은 잠시 그것을 놓고 어떻게 보고할 것인지 고민했다. 그러나 이대로 제출할 생각은 접었다. 통신원이 말하는 증거는 있었으나, 충분하다고 말하기에는 부족했다. 그는 익문사가 원하는 대로 조작을 해 가면서 증거를 완벽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청년의 말처럼 중요한 건 무기를 누가 만들었냐가 아니고 누가 쓰느냐에 있었다. 북해해방군이 요동의 무기를 쓴다 할지라도 그들이 요동의 앞잡이라 할 수는 없으니까.
채정혁은 조서를 고쳐서 옮겨 적고서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영 개운하지 않은 하루였다. 밖으로 나와 보니 벌써 첫눈이 날리고 있었다. 북쪽의 공기가 시릴 정도로 차가웠다.

채정혁이 조서를 연대 본부에 올린 뒤, 연대 지휘부와 오구산 대대 간에는 신경질적인 전언들이 오고 갔다. 비적 토벌을 촉구하는 연대장과 신중하게 문제에 접근하는 채정혁 사이에 불화가 생기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더 이상 이 꼴을 두고 볼 수 없군. 내가 전에 경고를 했었지? 자네가 하고 있는 행동들은 내게는 비적 떼를 싸고 도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는군. 더 이상 긴말 하지 않겠네. 지금 당장 이따위 행동을 그만두지 않으면 나는 준비된 고발장에다가 도장을 찍어서 영안의 군사법원으로 보내겠네.”
신경전 끝에 화가 끝까지 치밀어 오른 연대장은 채정혁을 협박해 왔다. 채정혁은 황성의 고재완 정령을 통해 북해국경의 실상을 군 수뇌부에 직접 상주하는 방법도 생각해 보았지만, 결국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어차피 오지라는 북해에서도 변방인 이곳은 세상의 관심사에서 버려진 지역이나 마찬가지였다. 어쩌면 무공을 쌓을 무대가 될 수도 있겠으나, 이미 자신의 전공을 평가해 줄 연대장과는 단단히 틀어진 뒤였다. 그렇잖아도 군 생활에 회의감을 느끼고 있던 채정혁은 군복을 벗을까 하는 고민까지 하게 되었다.
‘아주 이런 상황이 계속된다면, 차라리 그냥 옷을 벗고 나가 버리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다. 애초에 무슨 일신의 영달을 하자고 입대한 것도 아니고…….’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입은 군복이었으나, 채정혁이 나름 제국의 군인으로서 자부심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상대적으로 열악한 육군에서 복무하면서도, 국가의 번영과 국민의 안전을 지키는 것이 군인의 참된 책무라고 생각해 왔었다. 그 생각은 지금도 바뀌지 않았다. 그러나 제국 군조직의 말단, 이곳 변방의 진위연대에서 마주친 제국군의 모습은 그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것이었다. 자기 나라 국민조차 지키지 못하는 군대라면, 과연 그 존재 가치가 무엇일가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머나먼 실론과 인도양에서 죽어간 전우들이 채정혁의 눈가로 스쳐 지나갔다.
채정혁의 고민은 오래가지 않았다. 11월, 이미 오구산에는 두껍게 눈이 쌓여서 움직이기조차 힘들어진 때였다. 대대장실에서 난로를 피워 놓고 하릴없이 생각에 잠겨 있던 채정혁에게 보직 대기 명령이 떨어진 것이었다.
명령장을 수령한 시각부로 채정혁은 대대장직에서 해임된 것이었다. 임시로 선임 중대장인 민철 정위가 채정혁의 업무를 인계받으러 대대장실을 찾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