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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의 계보 1권(23화)
제4장 삭풍(朔風)(3)


“무장하지도 않은 양민을 쏘다니, 이게 도대체 뭐하는 짓이야!”
그는 놀라움보다 분노의 감정을 더 강하게 느끼고 있었다.
“대대장님, 저들은 비적들과 내통하는 반역분자들입니다.”
“증거는? 저들이 내통했다는 증거라도 있나?”
채정혁은 분대장급으로 보이는 병사의 멱살을 잡아채고 윽박질렀다.
“비적들에게 식량과 은신처를 제공하니 이게 내통이 아니라면 뭐란 말입니까?”
“사실인가?”
채정혁은 갑작스러운 총격에 부들부들 떨고 있는 마을 주민에게 물었다.
“아바이, 뎌희가튼 뭣 모르는 촌부이 무신 힘이 있단 말왜까. 비 덜이 식료으 달라면 듕세로 피나디라도 쑤 줘야 하고, 자고 간다면 히 이라도 펴 둬야 함매.”
죽다 살아남은 사내의 영안 방언은 채정혁의 귀에 낯선 것이었지만 그들이 하는 말은 알아들을 수는 있었다.
채정혁은 한숨을 내쉬며 병사들에게 총구를 물리도록 했다. 아직까지 그는 정확한 판단을 내릴 수 없었다. 분명히 연대 본부에서 듣기에 일전의 학강 사건에서는 확실한 내통의 증거가 있었다고 했다. 그리고 해방군과 이곳 주민들 간의 사이가 썩 나쁘지 않음은 척 보아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이들이 반역을 돕기 위해 해방군을 지원하고 있다고 할 수는 없었다. 채정혁은 반대로 해방군이 오히려 이들을 돕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하고 있었다.
무장 상태나 체격을 보아할 때 해방군은 적어도 지금 시점에서는 잘 훈련되고 충분한 식량을 지니고 있는 듯 보였다. 이런 상태는 단순히 북해의 조그만 마을들에게서 지원받는다고 되는 것이 아니었다.
“앞으로 근거 없이 민간인에 대한 위해는 일절 금한다. 명심하라!”
채정혁의 명에 따라 적어도 그 마을에서 학살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출동했던 다른 중대가 한 촌락을 싹 쓸어버렸다는 보고를 채정혁은 주둔지에 도착한 뒤에 들었다.
채정혁은 분노했다.
지켜야 할 자국민을 학살하는 군대가 세상천지 어디에 있단 말인가. 그 탐학한 순의 군대도 이런 짓은 하지 않았다. 그런데 동양에서 가장 개명한 헌법을 가졌다는 대한제국에서 어찌 자국민을 상대로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단 말인가.
잔뜩 성이 치민 그는 대대원들을 집합시키고 단상에 올랐다.
“장하다, 병사 여러분! 여러분은 대단한 전공을 세웠다. 적을 격퇴하고 섬멸하는 훌륭한 전과였다. 여러분은 치하를 받아 마땅하다. 비무장 상태의 비적 부역자들을 상대로 열심히 사격 훈련을 하였으니, 그야말로 국가 방위의 임무를 누구보다 열심히 다 하고 있지 않은가? 제군들이 있는 한 아마 어떤 촌부들도 감히 낫을 치켜세우지 못할 터이니 이만한 전공도 없다. 그렇지 않은가. 당연히 총을 들고 진지를 위협하는 비적보다 잠방이나 입고 응큼한 속셈을 부리는 촌로들이 더 위험하지. 이상!”
채정혁의 신랄한 비꼼에 대대원들은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채정혁은 단상에서 내려간 뒤 대대본부로 향했다. 그는 학살을 지시하고, 이에 가담한 사관과 병사들을 모두 상부에 보고해 군사재판에 넘길 생각이었다.
“대대장님! 대대장님!”
화난 걸음으로 본부로 향하는 채정혁을 선임중대장 민철 정위가 불러 세웠다.
“뭐요?”
“대대장님께서 말씀하신 바는 알겠습니다만, 이곳에서는 상황에 맞는 유연한 조처가 필요합니다. 이곳의 복무 환경 자체가 어려움이 많은 상황에서…….”
채정혁은 민철 정위가 하는 말이 그다지 와 닿지 않았다. 그가 보기에 이들의 행동은 정말로 비적 떼를 막기 위한 필요한 조치라기보다는, 그저 복무 중에 받는 압박을 제멋대로 민간인을 상대로 푸는 행위에 가까워 보였다.
“그래서 우리 제국군이 마음껏 자국민을 상대로 총질하는 것을 눈감으란 말이오? 우리가 자칭 해방군을 보고 비적이라 하지만, 이거야말로 진짜 비적질 아니오. 주민들을 적으로 돌려 얻는 것이 대체 뭐요?”
“그들이 내통하는 것은 대개 사실입니다. 단지 비적들과 말만 맞춰놓고 원망하는 시늉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을마다 있는 사냥꾼들은 언제 저들과 한패가 되어 우리에게 총을 겨눌지 모릅니다. 실제로 그런 식으로 죽은 병사들이 여럿 있습니다. 비극적인 일입니다만 이 방법만이 국경의 안정을 유지하는 길입니다.”
민철 정위는 확고한 어조로 말했다. 그는 상당히 정중해 보이는 어조로 말하고 있었지만, 그 말밑에는 이곳의 암묵적인 규칙을 따르라는 요구가 짙게 깔려 있었다.
“그 모든 것이 사실이라 할지라도 그들이 재판도 없이 처형되어야 할 이유는 없소. 이런 행동들이 적에게 선전 효과가 된다는 걸 왜 모르나?”
“대대장님, 이건 위에서 내려온 명령입니다.”
“명령? 민간인들을 죽이는 게 명령이라고? 대단한 명령이군! 누가 이따위 명령을 내렸나?”
“적과 내통한 혐의가 있는 양민들을 가차 없이 즉결 처분하라는 것이 연대장님의 명령입니다.”
채정혁은 민철 정위의 말에 당황함을 감출 수 없었다. 연대급이나 되는 병력 전체가 민간 학살을 방조하다 못해 직접 가담하고 있다는 사실을 믿기 힘들었다. 사실상 이 정도면 방관이 아니라 적극적인 조장에 가까웠다. 전시에 적과의 내통자를 장교의 판단에 따라 즉결처분할 수 있다는 예외 조항이 있기는 했다. 그러나 공식적으로 북해전과의 교전 행위는 전쟁이 아니었고, 더군다나 민간인들의 내통 여부는 불분명한 것이었다. 혹여 그렇다 하더라도, 열 살배기 여자아이까지 죽일 것은 무엇인가.
적대적인 대대의 분위기 속에서, 자기 집무실에 틀어박혀 밤을 꼴딱 샌 채정혁은 동이 트자마자 말을 달려 이춘의 연대본부로 향했다. 그는 곧바로 연대장실로 들이닥쳐서 형식적으로 경례를 한 뒤, 바로 따지듯이 연대장에게 물었다.
“연대장님께서 내통 혐의가 있는 양민들을 사살하라고 명령하신 것이 사실입니까?”
“그래, 내가 명령했네.”
연대장은 이게 무슨 경우 없는 행동이냐는 듯, 불쾌함이 가득 담긴 표정으로 채정혁을 향해 예의 탁하고 갈라지는 목소리로 답했다.
“연대장님, 그렇다면 명령을 취소해 주십시오. 지나친 조치입니다. 이래서는 제국에 대한 북해인들의 충성심이…….”
채정혁의 말에 연대장 도길상은 손에 꼬나물고 있던 곰방대를 던지면서 채정혁의 말을 끊었다.
“이거 웃기는 새끼일세. 내지에서 매일같이 편하게 이불 깔고 자면서 군복만 걸치고 다니면 다 군인이냐? 네가 여기 사정을 뭘 알아? 북해놈들은 애당초 믿을 만한 것들이 아니야. 어? 더군다나 이런 국경지대에 사는 놈들은 완전 야만인 잡종 놈들이라 그 속이 시커멓기 짝이 없다고. 제국에 충성한다고 말만 하면 다 정말로 충성하는 건가? 어이, 채정혁 참령. 네놈이 뭘 알아? 속속들이 그놈들 마음속이라도 들여다보냐고. 그놈들이 언제고 비적 떼와 결탁해 총부리를 우리에게 들이밀지 모르는데, 미리 화근의 싹을 잘라 버리는 게 국경의 안전을 위한 최대의 방어인 줄을 왜 몰라!”
도길상 부령은 이럴 줄 알았다는 듯, 온갖 짜증을 숨기지 않고 고스란히 채정혁에게 쏟아부었다. 상관의 폭언에 채정혁은 잠시 할 말을 잃었지만 이내 자세를 꼿꼿하게 고치고 자신의 의견을 정확하게 전달하고자 했다.
“그 모든 것이 사실이라 할지라도 제국헌법은 모든 국민에게 재판을 통해 자신의 죄를 변호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하고 있습니다. 마땅히 내지와 한 몸이 된 북해에서도…….”
연대장은 자신의 책상 위에 놓여 있던 명패(名牌)를 집어다가 채정혁을 향해 던졌다. 어깨춤에 맞은 나무 명패는 두 동강이나 땅에 떨어지고, 채정혁은 갑작스러운 충격에 잠시 중심을 잃었다. 어깨에서 밀려오는 통증도 잠시, 도길상 부령의 이죽거림에 그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내가 귀관에게 헌법 강좌 들을 군번인가?”
채정혁은 굴하지 않고 말을 이어 나갔다.
“연대장님, 이런 조치들은 국경 주민을 진정으로 역도들에게 넘겨주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역도들은 북해인의 마음을 얻으려 선동하는데 제국이 무력으로만 대응한다면 어찌 되겠습니까?”
“그쯤 해 두자고, 참령. 애민정신도 좋지만 참령이 군인으로서 취해야 할 행동은 역도들을 쓸어버리는 거지, 그들을 두둔하는 게 아냐. 자꾸 이런 식으로 나온다면 항명죄로 자네를 군사재판에 회부하겠네.”
스스로도 좀 과했다 싶었던지, 도길상 부령은 조금은 누그러진 어조로 채정혁에게 말했다. 그러나 그가 더 이상 채정혁의 말을 들을 생각이 없다는 것은 분명했다. 그는 한숨을 쉬고서 바닥에 떨어진 곰방대를 다시 주워다가 담뱃불을 붙였다.
“…….”
“나도 귀관도, 그리고 귀관의 부하들도, 비적들을 쓸어버려야 여기에 온 의의가 있어. 자네가 여기에 정 그렇게 불만이 많다면 하나라도 더 많은 비적들을 죽이게. 그래야 내지로 돌아갈 거 아닌가? 내가 귀관이 비적과 내통하고 있다고 믿지 않게 하려면 앞으로 견마지로를 다해 비적 떼와 그 부역자들을 족쳐야 할 걸세. 알겠는가? 북해는 특수 지역이야, 특수 지역이라고. 여기서는 군령이 모든 것 위에 있다는 사실을 항상 기억해 두라고.”
도길상 부령은 이제 할 이야기가 모두 끝났다는 듯, 더 이상 입을 열지 않고 한 손으로 채정혁을 물렸다.
힘이 빠진 경례를 하고 쫓겨나듯이 연대본부를 나온 채정혁은 고립무원의 처지에 놓인 기분이 들었다.
주둔지로 돌아가서도 채정혁은 침울함 속에 잠겨 있었다. 그는 학살에 가담한 병력을 군사재판에 넘기려는 계획을 포기했다. 도리어 자신이 연대장의 손에 의해 군사재판에 회부될 판국이었다. 이런 식의 행동은 하나마나 무의미한 것이었다.
채정혁은 동생에게서 온 편지를 꺼내 들고서 마음을 다스리고자 해 보았으나 그것마저도 쉬운 것은 아니었다.
‘여긴 끝이 보이지 않는 진흙탕이야……. 황성으로 이만 돌아가고 싶구나.’
채정혁은 답장을 쓰기 위해 들었던 붓을 도로 치워 버렸다. 차마 편지에 지금 처해 있는 상황을 구구절절 적을 수가 없었다. 채정혁은 그저 잘 지내고 건강하다는 상투적인 말들만 적어 편지를 봉했다.

자괴감 속에서 무기력한 생활을 보내던 10월의 어느 날, 병사들이 적의 포로를 잡아왔다. 예전 같으면 즉결처분이었겠지만 채정혁의 지시로 포로에 대한 사살이 금지된 탓이었다. 끌려온 사내는 제멋대로 자란 긴 머리에 수염을 기르고 있었지만 가만 보니 얼굴은 젊어 보였다. 머리색은 검었지만 이목구비가 뚜렷한 것이 유럽계 혈통이 섞인 듯했다. 헌병이 신병을 인도하여 끌고 가려는 차에 채정혁은 그를 불렀다.
“대대장님께서 직접 심문하시겠단 말씀입니까?”
“그렇다. 그러니 귀관은 나가 보도록.”
심문실로 들어선 채정혁은 포승에 묶인 채 앉아 있는 사내를 바라보았다. 그는 태연한 표정이었다. 채정혁은 굳은 얼굴로 조서를 펴 들고서 사무적인 어조로 사내에게 물었다.
“이름은?”
“반역자가 무슨 이름이 있겠소? 그냥 백가요.”
“출신은?”
“북해요.”
“북해 어디?”
채정혁은 슬슬 빈정이 상하려 했지만 최대한 상대를 존중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심문에 있어서도 철저하게 교범대로 행동할 작정이었다. 지금 자신의 맞은편에 앉아 있는 비적이 어떻게 나오던지, 그는 신체적인 폭력으로 적에게서 원하는 대답을 끌어낼 생각은 없었다. 그러나 채정혁이 어떤 마음가짐으로 앉아 있는지는 전혀 상관없이, 포로는 여전히 비협조적인 태도로 나오고 있었다.
“호구조사를 나오셨나. 어디 출신인 게 뭐가 중요하오?”
채정혁은 한숨을 푹 쉬며 말했다.
“좀 더 협조적으로 나올 수는 없나? 이 심문 결과가 어떻게 나오느냐에 따라서 네 처분이 달라질 텐데.”
“애초에 그런 게 무서웠으면 총 들고 제국군 상대로 싸우겠소?”
당당한 것인지 무신경한 것인지 청년의 대답은 갈수록 가관이었다. 팔이 뒤로 젖혀져 포승줄에 묶여 있었으나, 다리는 쩍 벌린 채로 허리도 꼿꼿이 펴고 앉아 있었다. 기묘한 당당함에 채정혁은 짜증보다는 호기심을 느꼈다.
“나이는?”
“스물다섯이오.”
채정혁은 다시 그의 얼굴을 꼼꼼히 보았다. 생각보다 젊은 나이었다. 자신과는 나이 차가 거의 나지 않는 또래였다. 그런데 서로 전혀 다른 인생을 걸어와 지금 이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이 이상하게만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