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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의 계보 1권(22화)
제4장 삭풍(朔風)(2)


둔하는 송하강의 북쪽 지류인 탁온강의 중류에 위치한 도시다. 이곳은 원래 명나라 누르간도사의 둔하위(屯河衛)와 오둔하위(五屯河衛)가 잠시 설치된 뒤, 이후 영안도독부의 개척으로 인해 한국령으로 포함된 곳이었다.
이곳은 원래 원나라 이래 몽골어 지명인 「이 」으로 불렸으며, 지금도 둔하군(屯河郡) 이춘읍(伊春邑)으로 그 지명이 남아 있었다.
둔하 진위연대의 주둔지로부터 약 10리 위쪽의 탁온강 우안에 자리한 이춘읍내는 요동으로 이어지는 국경도시이자 영안에서 출발한 철도의 종착점이기도 했다. 이춘역은 바로 제국의 모든 철도를 통틀어 제일 최북단 역이었다.
‘마침내 왔구나.’
9월 초지만 내지와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추웠다. 허름한 이춘역의 역사에서 나와 사방을 둘러보니, 탁온강과 마주한 조그마한 언덕을 따라 삼백여 채의 조그만 건물들이 옹기종기 서 있는 마을이었다. 읍내라고는 하지만 내지의 어지간한 읍 소재지에도 견줄 바는 못 되는 곳이었다.
내지 출신 장교들이 둔하 진위연대 같은 곳을 기피하는 이유는 단순히 비적(匪賊)으로 불리는 북해전 게릴라들 때문만은 아니었다. 부대를 나오면 아무것도 없는 조그만 강안의 마을뿐, 사방이 숲과 산, 그리고 헐벗은 들판뿐이니 아무리 복무 중인 군인이라지만 갑갑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었다. 더군다나 겨울은 오죽 추운가.
아직 9월임에도 불구하고 둔하군 이춘의 날씨는 벌써 초겨울이었다. 차갑게 내려앉은 공기에 채정혁은 정신이 번쩍 드는 기분이었다.
북해는 채정혁이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할머니의 고향이었다. 그러나 잘은 모르지만, 아마 이 둔하에서 멀지 않은 어디쯤은 아닐 것이다. 이곳은 그만큼 이주민조차 찾기 힘든 북쪽이었다.
그러나 북해의 사정을 모르는 이들에게 북해 하면 연상되는 것은, 이곳 이춘과 같은 조그만 변경 마을에 핏줄이 천한 여진 출신의 사람들과 코쟁이 유럽계 이주민들이 뒤엉켜서 나무나 캐고 반역이나 꿈꾸고 있는 기괴한 이미지였다.
그러고 보니 아버지가 죽고 나서 언론들이 사냥개 같이 달려들어, 아버지가 물려받은 북해 혈통에 대해 설왕설래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마치 이 땅에서 자고 나란 모든 것이 반역의 씨라도 물려받은 듯 언론들은 호도했었다.
이춘의 읍내를 보면서 잡상에 빠져 있던 것도 잠시, 이미 그를 마중 나와 있던 진위연대의 참위(參尉)의 안내를 받아 채정혁은 지휘부로 향해야 했다.
“참령 채정혁, 둔하 진위연대 제2대대장으로 부임했음을 신고합니다.”
“어서 오게. 먼 길에 노고가 많았군. 나는 진위연대장 도길상 부령이네.”
도길상(都吉常) 부령이라는 중년의 사내는 탁한 목소리에 안색이 누런 사람이었다. 그는 연신 짧은 곰방대로 연초를 피워대며 콜록거렸다. 척 보기에도 이곳의 진위연대를 지휘하는 것이 견딜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황성부는 어떤가? 아직 날씨가 덥겠지? 그래도 차라리 더운 게 훨씬 나아. 더우면 옷이라도 벗지, 추우면 어떻게 하나. 껴입고 또 껴입어도 몸에 오한이 든 것처럼 부르르 떨리네. 아직 9월인데 말이야. 이런 계절에 여기 오다니, 좀 고생을 할 걸세. 한 달만 더 지나면 완전히 겨울이 찾아오네. 그리고는 4월이 지나갈 때까지 끔찍하지, 정말로. 자네는 어디 속하는지 잘 모르겠지만, 여기까지 굴러들어 오는 장교는 딱 두 부류 일세. 잘났거나, 못났거나. 중간 치기는 이런데 부임해 오지를 않아. 그런데 어느 쪽으로 이곳에 오든 결과는 같지. 다들 마지못해 하루하루 보낼 뿐이네. 비적 놈들은 끊임없이 우리를 못살게 굴지, 날씨는 더럽게 춥지……. 하여간 쉽지 않겠지만 여길 벗어날 방법을 내 한 가지 가르쳐 주지.”
“말씀해 주십시오.”
“그냥 죽어라 비적 떼를 잡는 수밖에 없어. 많이 잡을수록 상부에 보고할 거리가 많아지니 말일세. 그렇게 눈에 띄면, 혹시 아나? 빨리 다른 곳으로 전출시켜 줄지. 근데 뭐, 따뜻한 데서 막 여기 오면 몸이 풀어질 대로 풀어져서 비적 떼한테 끌려가지만 않으면 다행이지. 하여간 어지간해서는 한 번 여기 오면 몇 년간 나가기 힘드니 각오나 단단히 먹어 두라고. 젠장맞을! 좀 제대로 된 놈이 왔으면 나도 더 좋았겠지만, 아쉬운 대로 자네로 참을 수밖에. 여튼 열심히 해 보든가.”
부령의 말은 이유 모를 적대감을 느끼게 했다. 빈정거림을 넘어서 노골적인 시비조였다. 그러나 어찌 되었든 한동안 얼굴을 마주 보고 살아야 할 상관이었다. 채정혁은 감정을 숨긴 채 경직된 구령을 붙였다.
“감사합니다. 충성!”

연대장실에서 나온 채정혁은, 말을 타고 이춘읍에서 남쪽으로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대대 주둔지로 향했다. 역시 둔하군에 속해 있는 이곳은 오구산(梧丘山)으로 불리는 곳이었다. 주둔지를 중심으로 대략 80여 채의 민가로 이루어진 마을이 있었는데, 이곳이 오구산면의 면소재지라고 했다. 마을과 마주한 대대주둔지의 정문에는, 이미 연락을 받은 대대의 장교들이 채정혁을 맞이하기 위해 나와 있었다.
“충성! 선임 중대장 민철 정위입니다. 오구산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수고가 많소. 괜찮다면 바로 현황을 파악해 보고 싶은데.”
민철(閔澈) 정위는 채정혁보다 예닐곱은 더 많아 보였다. 경례를 주고받은 후 그들은 바로 실무적인 대화로 화제를 옮겼다.
“대대 총원은 현재 579명입니다. 지난달에 있었던 비적들과의 교전에서 사상자가 발생한 이후 아직까지 충원이 되진 못했습니다.”
“적의 근거지는 어디며, 동태는 어떻소?”
“자칭 해방군이라는 비적들은 남북으로는 탁온강 중류에서부터 송화강에 이르는 지역, 동서로는 국경연선에서부터 철길이 지나가는 지역에 이르기까지 출몰하면서 울창한 숲에 의지해 유격전을 펼치고 있습니다. 주로 도로에 출몰해 세금이나 금광에서 채굴한 금을 싣고 둔하로 향하는 마차를 습격해 탈취해 갑니다. 사실상 도적 떼나 다름없습니다. 가끔씩 경계 초소에 대한 공격을 할 때도 있고, 인근의 조그만 촌락들을 점령할 때도 있습니다. 최근에는 그 강도가 점점 세져서, 어디서 흘러들어 왔는지 모를 최신형의 무기들로 무장하고 철도를 점거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반격할 경우 숲으로 내빼거나 요동 국경을 넘어 은신하는 경우도 있어서 뚜렷한 대응 방책을 세울 수 없는 상황입니다. 다만 곧 겨울이 오는 만큼 당분간은 행동에 나서진 않을 것 같습니다.”
채정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민철 정위의 안내를 받아 대대본부 앞 연병장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이미 대대의 전 병력이 새로운 대대장을 맞이하기 위해 도열해 있었다.
“대대, 차렷! 신임 대대장님께 경례!”
“보국!”
“보국.”
도열해 있는 병사들과 경례를 주고받은 후 채정혁은 짤막하게 훈시를 했다.
“반갑다, 대대원 여러분. 나는 새롭게 오구산의 대대장으로 부임해 온 채정혁 참령이라고 한다. 제국의 북단에서 분투하고 있는 그대들의 노고는 황성에서부터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감히 반역을 획책하는 비적들을 소탕하며 북해의 방비를 든든하게 하고 있는 그대들이야말로 제국군 전 병대의 귀감이다. 다만 한 가지 우려스러운 소문이 걱정이다. 제국군이 북해의 양민들에 대해 적절치 못한 태도를 취하고 있다는 것이다. 나는 이것이 헛소문이라고 믿는다. 우리는 적을 격퇴함과 동시에 주민의 재산을 보호하고 치안을 유지하는 양대 책무를 지니고 있다. 어느 한쪽도 소홀함이 없어야 할 것이다. 이상.”
간단한 열병식이 끝나고, 채정혁이 자리를 뜨자 여기저기서 투덜거리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아, 좆나 이번 대대장 개빡세 보이는데?”
“여기가 어떤 데인지도 모르고 벌써부터 훈계질이니.”
“저 나이에 계급은 벌써 참령이지, 굳이 이런 데까지 기어들어 온 것도 그렇지, 출세하고 싶어서 좆나 안달 난 것 같은데 벌써부터 내 말년이 피곤해지는 소리가 들려온다.”
특히 일반 사병들의 불만은 대단했다. 애초에 장교 계급에 대한 적대감이 있는 이들이었다. 원치 않게 이런 북방까지 끌려와 제대로 된 대우도 받지 못하며 하루하루 둔전병(屯田兵)이나 다름없는 일과를 보내고 있는 이들에게 각이 잡힌 규율을 강요하는 장교는 북해해방군을 뛰어넘는 사실상의 주적이었다.
채정혁이 주둔지에 머무르면서 이것저것 알아본 결과 상황은 생각보다 더 좋지 않아보였다. 경안 연간에 있었던 북해주둔군의 반란 사건 이후 북해 출신 병사나 사관들은 가급적 북해에는 주둔시키지 않았다.
그 이후 북해의 치안이 비교적 안정적으로 돌아오고 내지 출신의 북해 복무 기피로 인력 부족에 부딪히게 되자 이들은 다시 쓰이게 되었으나, 요동과의 국경 지역은 일절 북해 출신들을 쓰지 않았다.
자연히 이 지역에서 복무하는 병사나 사관은 아무런 끈이 없거나 진급에서 제일 적체된 자들이었다. 국경 근무를 유배처럼 생각하는 그들의 불만은 상당히 높았다. 그들에게 바라는 것이 있다면 단 하나, 공을 세워서 조속히 이 지옥 같은 국경을 탈출하는 것이었다.
‘한마디로 정리해서 개판이구만.’
채정혁은 자조감을 느낄 정도였다. 어딜 봐도 둔하의 병력은 긍지 높은 제국군이라 하기 힘들었다. 식민지 전쟁만 있었을 뿐 본토에서 큰 전쟁이 없었던 수백 년의 평화로 인해 제국의 원칙인 국민개병제가 실질적으로 무너진 지 오랜 세월이 지난 터였다.
귀족이나 중류계급의 자제들은 군역을 대신하여 ‘방위세’라는 명목의 간단한 세금을 내면 군 면제를 받게 되어 있었고, 군대에 오는 것은 예외 없이 간단한 세금조차 내지 못하는 하층계급의 청년들이었다. 그중에서도 속된 말로 가장 끈 없는 자들이 오는 곳이 북해에서도 최전방인 국경 지역이었다.

채정혁이 오구산 대대로 부임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북해해방군의 습격이 있었다. 그들은 상당한 호위 병력을 붙였음에도 세금을 실은 마차들을 약탈하고 인근 초소까지 습격하는 대담함을 보였다.
채정혁은 즉각 2개 중대를 이끌고 추격에 나섰다. 채정혁의 신속한 반격에 해방군은 적지 않은 타격을 입고 후퇴했다.
그가 아군을 치료 중인 군의관에게 적의 부상자들도 치료해 주라고 지시했으나 살아 있는 적은 없었다. 부상자까지 모두 데려간 것처럼 보였다.
채정혁은 몇 구의 시신들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제멋대로 자란 수염과 덥수룩한 머리가 지저분하기 짝이 없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입고 있는 옷은 이상하게 질이 좋았고, 무기 또한 썩 괜찮은 것이었다.
잠시 그들이 남겨 놓은 총기를 집어 들어 살펴본 채정혁인 그것이 프랑스제임을 알아보고 깜짝 놀랐다. 생각보다 적의 무장 상태는 좋은 편이었다.
‘살아 있을 때 적이라 할지라도 죽은 자는 죽은 자일 뿐이다…….’
그는 군모를 벗어 잠시나마 죽은 자에 대한 경의를 표한 뒤 시신들을 매장하라고 지시했다.
막사로 돌아온 채정혁은 노획한 적의 무기들을 좀 더 꼼꼼하게 살펴보았다. 무기의 질이 상당했다. 어떤 총은 한국군의 제식 소총보다 더 사거리가 길고 정확했다. 총의 특정한 표식은 없었지만 대부분은 프랑스제였고, 개중에는 더러 요동산, 그것도 최신 60식 제식 소총으로 보이는 총기도 섞여 있었다.
총기의 모든 표기가 지워져 있었지만, 최근 요순전쟁에서 활약한 무기였음을 채정혁은 금방 알아보았다.
관전무관으로 요순전쟁에 파견되었던 당시 매일같이 보아왔던 총기였다. 동양에서 총의 성능이 좋기로는 요동을 따라올 나라가 없었다.
‘도대체 이자들이 어떻게 이런 총을 확보할 수 있지?’
채정혁은 의문에 사로잡혔다. 그때 그의 머리에 여름의 기억이 스쳐 지나갔다. 익문사 통신원이 했던 말이었다. 정말 그가 말했던 증거가 있단 말인가.

북해해방군은 울창한 숲속으로 들어간 뒤 낮에는 잠잠하다가 밤에 튀어나와서 공격을 하곤 했다. 야습에 대한 대비를 해도 신경을 긁는 일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대낮일지라도 숲 속으로 들어가는 것은 결코 안전을 보장할 수 없는 것이었다.
토벌이 쉽지 않음을 직감한 채정혁은 결국 회군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어떤 작은 촌락을 보게 됐다. 국경지대에는 주로 숲에서 활동하는 사냥꾼과 그 가족들이 거주하는 촌락들이 드문드문 있었다.
촌락에 들어서니 적이 지나간 흔적들이 보였다. 채정혁이 마을을 잠시 순회하는 사이, 병사들이 다짜고짜 촌락에 들이닥쳐 총질을 하기 시작했다.
“뭣들 하는 짓이야! 사격 중지! 사격 중지!”
채정혁은 말 위에서 권총을 쏘며 상황을 진정시키려 애썼다. 그는 순간 당황했다. 그가 아는 한 명령 없이 이렇게 무차별로 사격하는 경우는 없었다. 굳이 제국군 교범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당연히 상관의 지시 없이 제멋대로 행동하는 것은 허락되지 않는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