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제국의 계보 1권(21화)
제4장 삭풍(朔風)(1)
「인간은 인종의 노예도, 언어의 노예도, 종교의 노예도,
강물의 흐름의 노예도, 산맥의 방향의 노예도 아닙니다.
인간들의 대결집, 건전한 정신과 뜨거운 심장이야말로
민족이라 부르는 도덕적 양심을 창출합니다.」
―에르네스트 르낭(Joseph Ernest Renan),
《민족?(Qu est―ce qu une nation?)》
「중남미 사람들과 에스파냐는 공통된 과거를 갖고 있고, 언어와 인종이 같다.
그러나 에스파냐는 그들과 한 나라를 이루고 있지 않다.
어째서 그러한가? 우리가 필수적이라고 알고 있는 한 가지가,
즉, 공통된 미래가 결여되었기 때문이다.」
―호세 오르테가 이 가세트(Jos Ortega y Gasset),
《대중의 반역(La rebelion de las masas)》
흑룡강 중류에서 조금 떨어진 산악지대는 인간의 발길이 잘 닿지 않는 울창한 수해(樹海)였다. 오래전 야인여진과 수렵민들의 땅이었던 이곳은, 지금은 한국 북해도의 드넓은 오지 중 하나였으며, 머지않은 곳에서 요동과의 국경선이 지나가는 곳이었다.
가장 가까운 마을도 수십 리를 나가야 하는 이곳은, 그만큼 삶의 조건이 가혹하기는 했지만 비밀스러운 활동을 하기에는 제격인 곳이었다.
현재 북해에 주둔하고 있는 제국군을 상대로 무장투쟁을 전개 중인 북해해방전선의 지휘부 또한 이곳 산야에 자리 잡고 있었다. 숲을 한참을 들어가야 하는 산마루에 차려진 지휘 본부는 이름에 걸맞지 않게 몇 개의 통나무집과 허술한 목책이 전부였다.
그러나 적어도 이곳에 자원해서 입대한 사람들은 이러한 고난쯤은 그다지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 이들이었다. 어차피 가야 할 길은 가시밭의 고난스러운 길이었다. 아무도 손쉽게 독립이 쟁취될 것이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어쩌면 살아서 그날을 보지 못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총과 검을 들고 싸워야 할 때였다.
“이번에도 요동 국경연선에서 보급품이 도착했습니다.”
목책 안쪽의 지휘부 건물에 앉아서 선잠을 자고 있던 김요섭은 부관의 목소리에 잠을 깼다. 전날 밤늦게까지 잠을 이루지 못한 탓에 그는 신경이 날카로웠다. 그러나 괜한 짜증을 부릴 사람은 아니었다. 그는 애써 웃음을 지으며 부관에게 물었다.
“보급품이라면, 으레 몇 달 전부터 도착하기 시작한 그것 말인가?”
“예. 이번에도 역시 식량뿐만 아니라 총기와 총탄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모두 프랑스제의 질이 좋은 우수한 제품들입니다.”
“알겠네. 우선은 분류해서 무기고와 군수창고에 채워 두도록. 아니, 내가 직접 나가서 감독하도록 하지.”
김요섭은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섰다. 부관의 말대로 수레에 실린 무기와 군수품이 병사들의 손에 의해 내려지고 있었다. 이러한 물품들은 지금 북해전에게는 절실한 것이긴 했다.
오랜 지리멸렬한 투쟁 끝에, 점차 북해의 중심부인 영안부 일대에서 밀려나 북쪽의 산간지대로 밀려난 해방운동 세력은 몇 년간의 침체 끝에 새로운 투쟁의 방향을 결정하고 전열을 재정비하고 있었다.
1840년의 테러 이후로 동영으로 다시 망명길에 올랐다가, 얼마 전 다시 북해로 숨어들어 온 김요섭 또한 그들 가운데에 있었다.
이제는 새로운 젊은 세대가 이 운동에 참여하고 있었고, 옛 동지들은 거의 죽거나 은퇴하여 남아 있지 않았다. 그러나 김요섭은 이곳에서 자신이 해야 할 일을 금방 찾을 수 있었다.
이제는 비록 나이가 들어 직접 총을 들고 적들과 싸울 수는 없었으나, 그만큼 지혜와 원숙한 노련함을 그는 가지고 있었다. 그를 기억하는 옛 동지들은 그를 참모부와 군수부의 업무를 총괄하도록 배려해 주었고, 그는 이내 북해해방전선의 주요한 지도자들 중 하나가 되었다.
물론 상황은 여의치 않았다. 대략 3천 명에 해당하는 인원이 북해전을 결성하여 물리적 투쟁을 결의했으나, 무기는 형편없었고, 당장 먹고 입을 것조차 충분히 갖추기 힘들었다. 오로지 북해 각지에서 답지하고 있는 소액의 후원에만 의지해야 하는 이들에게, 충분한 재원을 확보하여 투쟁을 지속하는 것은 절실한 과제가 될 수밖에 없었다.
어느 날 갑자기 그 필요를 누가 알아차리기라도 한 듯, 적지 않은 양의 무기와 군수물품이 보내지기 시작한 것은 천우신조였다. 간신히 병력을 지탱할 정도만의 물자로 생활하던 이들이, 본격적으로 군사적인 투쟁에 돌입할 수 있을 정도의 충분한 보급품이었다.
이 물품들은 북해와 요동의 국경에서 밀무역에 종사하며 군수품의 매입도 책임지고 있는 북해해방전선의 요원을 통해서 들어온 것이었다. 그 또한 이 물품이 전달된 내역에 대해서는 상세히 알지 못했다. 어렵게 마련한 자금을 가지고 요동에서 무기를 반입할 경로를 알아보던 중에, 어떤 독지가가 북해전을 후원하길 원한다며 그 대리인이라는 사람이 접촉해 온 것이었다. 처음에는 제국익문사의 끄나풀이 아닌가 의심했지만, 그들은 약속대로 많은 물품을 정확한 날짜에 인도해 주었다. 더군다나 첩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시켜 주듯이, 국경에서 물품을 인도한 다음에는 일괄적으로 북해전의 통제에 맡겨서 정보가 누출되지 않게 도와주기까지 했다.
‘……허나 한두 번도 아니고, 이렇게 지속적으로 많은 물품을 보내오는 것은 이상하다. 일전에는 금괴까지 포함해서 보내오지 않았던가.’
처음에는 막대한 지원에 기뻐했던 김요섭이었으나, 몇 달에 걸쳐 지속적으로 상당한 지원이 이루어지자 점차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정도의 지원을 계속하려면 일개 독지가의 능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었다.
그쪽에서 말한 바에 따르면, 그저 북해 혁명에 크게 공감하는 지지자라고 했지만, 단순히 그렇게 생각 가능한 품을 벗어난 것임에는 틀림없었다.
“야, 이번에는 통조림까지 포함되어 있다.”
“누군지 몰라도 신이 그분을 도우소서.”
북해전의 남루한 병사들은, 거듭된 지원에 이제 완전히 혈색을 되찾고 있었다. 충분한 옷감이 지원되어 군복을 만들어 입을 수 있었고, 하루에 두 번 풀죽으로 주린 배를 채웠으나, 이제는 넉넉한 양의 식료품으로 하루에 세 끼를 먹을 수 있었다.
실전뿐만 아니라 훈련까지 하기에도 충분한 무기와 탄약 덕분에 병사들의 실력도 날이 갈수록 늘고 있었다. 어찌 보면 꿈만 같은 일이긴 하지만, 이 모든 것이 그저 호의에서 나온 것이라고 믿기에 김요섭은 너무 늙었다.
“너무 들뜨지 말고, 어서 물건들을 채워 넣도록. 이제 곧 해가 질 시간이다.”
김요섭은 보급품의 도착으로 한껏 들떠 있는 병사들을 채근하고서는, 조용히 물건을 싣고 온 연락책을 불렀다.
“이보시게.”
“예, 참모장 동지.”
“혹시 다음에는 따로 사람을 움직여서 이 보급품이 정확히 어떤 조직에게서 흘러나오는지 확인해 줄 수 있나?”
김요섭의 말에 연락책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또한 물건을 받아 오면서 의문을 느끼던 차였다. 이 물건들은 분명히 철도를 통해 국경까지 이동해 오는 것이 분명해 보였다. 요동의 공업지대에서 생산된 지 며칠이 안 되는 물건들이 포함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 다음에 마차에 실어 국경으로 보내지지만, 분명히 개인이 후원하는 것이 아닌 조직적인 세력이 개입되어 있음은 분명해 보였다. 그러던 차에 김요섭이 조사해 보라고 했으니 굳이 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물론입니다. 한 번 최대한 사람을 풀어 확인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구태여 목숨이 위험하게 진행할 필요는 없네.”
“알겠습니다.”
김요섭은 나직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원이 어디서 오는 것인지를 확실하게 해 두지 않으면 언젠가 위험한 화살이 되어 돌아올 수도 있었다. 김요섭이 오랜 투쟁과 망명 생활에서 배운 것은 단 한 가지였다. 대가 없는 호의는 없다는 것이다.
북해해방전선, 약칭 북해전은 그 유래를 거슬러 올라가면 김요섭의 아버지인 김효가 1830년에 영안대학의 학생들을 중심으로 해 결성했던 「북해자치동맹(北海自治同盟)」에까지 닿는다.
연합법의 발효와 뒤이은 북해의 내지로의 합방, 그리고 한국 정부의 탄압과 분열되는 해방운동의 질곡 속에서 북해의 독립, 혹은 자치를 주장하는 단체들은 소규모로 흩어졌다가 다시 합치기를 반복했다.
30년이 넘는 투쟁 끝에, 대부분의 비무장결사들은 해체의 길로 들어섰고, 테러와 게릴라전을 통해서 근근이 저항하던 무장 단체들이 최후로 뭉쳐서 세운 것이 바로 이 북해해방전선이었다.
이들의 주 근거지는 북해의 북서쪽 삼림지대였다. 흑룡강 연안의 울창한 삼림지대에서 대략 삼천여 명의 무장해방군이 한국군과 대립하고 있었다.
이들은 몇 개의 조그만 지역들을 한국군의 손에서 빼앗아 「해방구역」을 조성했다. 북해 전체에서 볼 때는 한 줌과 같은 공간이었지만, 적어도 이곳에서 그들은 한국 정부의 통제에서 벗어난 완전한 해방의 이상을 추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활동은 끊임없는 위협을 받아야 했다. 요동 국경에서 멀지 않은 속칭 해방 삼구(三區)라 불리는 양원(陽原), 반산(半山), 탁온성(托溫城)의 삼진(三鎭)은 모두 조그마한 삼림 속의 마을이었다.
송화강(松花江)과 탁온강(托溫江)이 합류하는 지점에 위치한 이 지역을 3천 명의 해방군이 간신히 사수하고 있었지만, 그 외의 마을들은 잠시 점령한 뒤 한국군의 공세에 못 이겨 퇴각하기를 반복하는 상황이었다.
해방군과 직접 맞서는 제국군 부대는 바로 해방구에서 탁온강을 거슬러 올라간 곳에 위치한 둔하의 진위연대였다. 원래 북해군에 소속되어 있던 파견대(派遣隊) 중 하나였던 이 부대는, 북해 합방과 함께 원래 함경도 경성에 위치해 있던 제33진위연대와 부대가 합쳐져 주둔지를 요동에 대한 주요 방비 거점 중 하나인 둔하로 옮겨 편성되었다.
당초에는 요동과의 국경을 방비하기 위해 주둔한 부대였으나, 북해 해방운동의 거점이 이 둔하의 근방으로 옮겨옴에 따라 지금은 해방군 진압을 주 목적으로 삼고 있었다.
최근 들어 이들 사이의 긴장은 점차 잔혹한 폭력을 수반한 전투로 불거져 나오고 있었는데, 둔하 주둔지와 해방구의 중간 지점쯤에 위치한 학강(鶴崗)에서의 비극이 그 단적인 예였다.
학강은 원래 북해도독부 소속의 조그마한 위소(衛所)가 설치되어 있던 조그만 마을로, 3백인 남짓한 인구는 대개 옛 여진족 출신의 가난한 수렵민이었다.
이들은 해방구의 북해해방군으로부터 한동안 보호를 받고 있었는데, 북해해방군은 이들이 건네는 호피(虎皮)나 담비 가죽 따위를 비싼 값에 사들여 거의 이윤을 남기지 않고 자신들의 밀무역 루트를 통해 요동에 팔아 주었다.
때문에 학강 주민들 사이에서 해방군의 인기는 높았다. 세금도 걷지 않고, 마을을 보호해 줄뿐더러 주민들이 생산한 물품들을 비싼 값에 팔아 주니 좋아하지 않을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관계는 오래가지 못했다. 해방구의 범위가 점차 확대되는 것을 둔하의 진위연대에서는 경계하고 있었고, 해방군 경계 병력이 다른 작전을 위해 잠시 학강에서 철수한 틈을 타 진위연대는 이 마을로 들어가 학살을 자행했다.
둔하 진위연대의 방침은 확고했다. 반란 세력과 협력한 이들을 완전히 삭근(削根)하여 화근을 도려내겠다는 것이었다.
학강 주민들은 적에 대한 부역자로 지목되어 일부는 즉결 총살당하고, 일부는 둔하로 끌려가 군사법정에 기소되었다. 살아남은 이들은 대개 풀려나긴 했지만, 이미 범법자의 낙인은 찍힌 뒤였고, 그들이 대대로 살아왔던 마을은 이미 지도 위에서 사라진 뒤였다.
영안의 북해도청에서는 이 학강에 아주 한국계 이주민들이 살아갈 새로운 시가지 조성의 계획을 세웠고, 둔강 진위연대는 일부 대대들을 이곳으로 이동시켜 보다 근본적인 해방군의 견제를 도모하고 있었다. 학강에서는 이제 여진족들을 볼 수 없게 되었다.
북해해방전선이 분노한 것은 당연한 귀결이었다. 갑작스레 우수한 장비로 무장하고 진열을 재정비한 북해전의 해방군은 전면적인 둔하 진위대에 대한 공격을 계획하고, 끊임없이 게릴라전을 펼치며 둔하 진위연대를 압박해 오고 있었다.
얼마 전에는 둔하로 이어지는 철도가 이들에 의해 일시 점거되고 전신과 교통이 일시에 마비되는 사건도 있었다. 이런 반목이 계속될수록, 이들의 서로에 대한 증오심은 점차 깊어져만 갔다.
채정혁이 둔하 진위연대의 제2대대장으로 부임해 온 것은 바로 이 시점의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