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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의 계보 1권(25화)
제4장 삭풍(朔風)(5)


“상심이 크시겠습니다.”
의견 충돌이 있었지만 겪어 본 바 민철 정위는 사람이 나쁘지는 않았다. 다만 그의 단점이라면 군 조직의 권위주의에 너무나도 충실한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그는 억울한 인명의 희생이나 군사행동의 도덕성 같은 것을 고려하는 이는 아니었다. 그저 명령이 내려왔으면 지체 없이 이행하는 것이 그가 생각하는 군인의 덕목이었다.
그러나 적어도 그가 자신을 조롱하고자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아니라는 걸 채정혁은 알고 있었다. 민철에게서 그 말을 듣는 순간, 오히려 가슴이 후련하다는 느낌을 채정혁은 받았다.
“아니네. 두 달도 못 버티고 나가게 된 게 부끄러울 뿐이지. 귀관 말이 맞았네. 내가 너무 이 동네를 몰랐던 걸지도…….”
민철 정위는 가볍게 경례를 붙였다. 그는 어떻게 이런 상황이 되었는지 자세히 따져 묻지 않았다. 채정혁은 그나마 그런 마음 씀씀이가 고마웠다.
내심 후련한 마음으로 짐을 정리해 둔하로 나갔다. 연대장으로부터 호출이 들어와 있었지만 깨끗하게 무시했다. 당장에 헌병대가 들이닥치지는 않은 것을 보니, 그간 협박하던 내전 세력과의 내통죄로 기소하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그러나 적어도 항명죄나 부적응을 사유로 들어서 상부에다가 채정혁의 보직해임을 압박한 것은 확실해 보였다.
어차피 연대본부로 들어가 봐야, 이죽거리면서 세상살이는 이런 것이라고 조롱 섞인 훈계나 늘어놓을 것이 분명한데다가, 어차피 이제는 공식적으로 직속상관도 아닌지라 채정혁은 미련 없이 연대본부 쪽을 돌아보지도 않고 이춘역에서 출발하는 열차에 올라탔다.
어쩌면 이 일로 군에서의 진급길이 막혀 버릴지도 몰랐다. 그러나 채정혁은 더 이상 이 문제에 연연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상급부대가 위치한 영안부로 가서 공식적인 처분을 기다리면 될 일이었다. 적어도 이 시궁창 같은 국경에서 벗어나는 것만으로도 그는 충분히 만족하고 있었다.

***

개국 445년 12월, 오랜 휴정 끝에 개회한 요동국 의회는 아수라장이었다. 이듬해인 446년도의 군비 예산안을 놓고 여야가 격렬하게 충돌한 것이었다.
자유주의 성격을 표방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전통적으로 국왕과 연대해 온 「자유당」은 막대한 군비 증강을 주장하며 세금의 인상을 주장하고 있었다. 오히려 보수주의 정파로 야당인 「국민당」이 증세와 군비 증강 모두 불필요하다며 자유당을 논박하는 기괴한 풍경이 그곳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아니, 도대체 지금 시점에서 왜 증세까지 해가면서 군비 증강이 필요하단 말입니까?”
국민당 총재인 한인완(韓寅完) 후작이 자리에서 일어나 거세게 반발하고 있었다. 요동 최고의 명문인 성내 오가 중에서도 가장 으뜸이라 할 수 있는 심양 한씨의 영수이기도 한 그는, 지난 수십 년간 이루어진 국왕전제의 확대로 인하여 그 운신의 폭이 상당히 좁아져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한 상황에서 국왕과 결탁하고 있는 군부를 더욱 키워 주는 이런 예산안에 그는 절대로 동의할 수 없었다.
이러한 생각은 나머지 국민당 의원들도 마찬가지였다.
이번의 증세안은 특히 귀족 계층에게까지 엄청난 양의 세금을 거두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었다. 한마디로 말해서, 국민당 지지 계층에게서 돈을 뜯어와 군사 방면에 투자하겠다는 것이 이번 예산안의 골자였던 것이다.
“대요동국이 승운의 기세를 탈 것이냐, 아니면 멈칫하다 구렁텅이로 빠져들 것이냐 하는 주요한 시점에 우리는 서 있습니다. 제경들께서는 부디 사익을 탐하지 말고 국익부터 생각해 주십시오. 내가 주문할 것은 그게 전부입니다. 나뿐만 아니라, 자유당의 전원은 이번 예산안에 동의하기로 이미 합의를 마친 뒤입니다. 우리는 여차하면 사재까지 털어서 이번의 국방력 증강 건에 관해서 멸사봉공의 자세를 보일 것을 각오하였습니다.”
독판내무부사의 직위에 앉아 있는 동시에, 실질적으로 자유당의 지도자인 지정환 백작은 강경한 어조로 타협의 지점이 없음을 천명했다.
이내 장내는 술렁이기 시작하고, 의원들의 고함 소리가 터져 나왔고, 뒤이어 예산안의 통과를 거부하고 퇴장하자는 선동이 뒤를 이었다.
“퇴장한들 어쩌려고……. 어차피 국민당의 의석수라 봐야 겨우 삼분의 일인데 말이요. 칙임의원들과 자유당을 다 합치면 이미 의사정족수를 초과하는데.”
국민당의 강력한 반발을 강 건너 불구경하듯이 보며 자유당 의원들은 쑥덕거렸다. 그들 중에는 내심 당의 기조인 자유주의 정책과 전혀 상반되는 이번의 예산안에 대해서 껄끄러워하는 사람도 있기는 했다.
그러나 이미 자유당 내부에서는 이 안건이 통과된 뒤에 상응하는 보상이 주어질 것임을 의원들에게 은근슬쩍 흘려 놓고 있었다.
당장 세금을 좀 내더라도 이익을 볼 구멍은 많았다. 자유당 의원들 중에서도 군수품 공장을 보유하고 있는 이들이 있었고, 그렇지 않더라도 군대와 밀접히 관련된 전신, 철도 등의 사업에 투자하고 있는 이들이 많았다.
이도저도 아니라 할지라도, 나중에 자신들에게 유리한 법안을 통과시켜 어떻게든 당장의 손해는 보상받을 터였다. 그러나 국민당 의원들의 경우는 이야기가 달랐다.
이번의 군비 증강은 당장 표면적인 목표도 목표지만, 주로 지대 수입에 의존하는 국민당 의원들에게 직격타를 날리는 것이기도 했다.
특별히 보유한 산업체가 많지 않고, 주로 전통적으로 요동 각지에 가지고 있는 가령(家領)에서 걷히는 소득으로 돈을 굴려 자본을 증식한 사람이 많은 이들에게 있어서, 불로소득에 대한 강력한 세금을 때리는 이번의 증세안은 그야말로 최악의 소식이나 다름없던 것이었다.
예전 같으면 이러한 상황에서 국왕에 대해 압박이라도 실행해 봤을 텐데, 현 국왕 김호의 집권 기간 동안 국민적 지지를 등에 업고 강력해진 왕권은 그들이 이제 어떻게 해 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일부 의원들이 퇴장하였으나 정족수가 충분히 달성되었으므로 익년 예산안을 표결에 붙이도록 하겠습니다.”
남아 있는 의원들은 압도적 찬성으로 안건을 통과시켰다.
이내 이 예산안은 세밑의 요동국을 들끓게 만들었다. 대개의 국민들은 이 조치에 찬성했다. 세금을 조금 더 내는 것이 불만이기는 했지만, 일전의 요순전쟁 이후 삼국간섭을 통해 국가적으로 염원했던 산동반도를 얻지 못한 것에 대해 요동인들은 분개하고 있었다.
좀 더 군사력을 증강하여 열강의 반열에 올라야 한다는 군국주의적 주장이 이미 요동의 대중들 사이에 만개해 있었다. 그러한 상황에서 이번 예산안은 열렬한 지지를 받았다.
예산안에 반대했던 국민당 의원들을 희화화한 그림에 매국노라는 글자를 적은 전단이 성경부 시가지에 며칠 동안 날아다닐 정도였다.
원하는 바대로 예산안을 통과시킨 자유당 내각의 대신들은, 국왕 김호가 주최하는 비밀 어전회의로 속속들이 모였다. 오전에 의회에서 예산안이 의결되자마자, 소란을 틈타서 태안궁으로 입궐한 것이었다.
“제경들이 수고가 많았소.”
태안궁의 늙은 호랑이라 불리는 국왕 김호는 허옇게 센 백발에 어울리지 않는 기백이 여전했다. 그는 대원수의 군복을 차려입고 패도(佩刀)한 채로 회의장에 들어서 앉았다.
국왕이 임명하는 칙임 의원들과 국왕의 편에 서 있는 자유당 의원들이 국왕의 지시 없이 이러한 예산안을 통과시킬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이미 이러한 청사진에는 김호의 입김이 닿지 않은 곳이 없었다.
“모두 주상 전하의 성덕의 덕분입니다.”
“들으라고 하는 부러 하는 소리는 그만두고…….”
김호는 손가락으로 옥좌의 팔걸이를 두드리면서 입시해 있는 대신들의 면면을 보았다. 그가 공들여서 핵심적인 위치에 앉혀 놓은 수족들이 모두 도착해 있었다.
“오늘 예산안은 다름 아니라, 조만간 우리 요동이 국운을 건 승부를 걸기 위한 예비 작업이었음을 다들 잘 알고들 있을 것이요. 그 승부라는 것도 다들 이미 짐작들은 하고 왔겠지.”
국왕의 말에 좌중은 감히 대답하지 못하고 침묵했다. 그만큼 지금 국왕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무게가 있는 것이었다.
다름 아닌 전쟁을 결의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이번 전쟁은 당연한 말이지만 요순전쟁과 같은 손쉬운 것이 아니었다.
상대는 동방 최강의 강대국인 대한제국이 될 터였다.
요동의 역사는 곧 제국의 우산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몸부림이었으며, 그것이 성취된 뒤로는 극한(克韓)을 하고자 하는 경주였다. 일부분의 성취를 거두기도 했으나, 여전히 요동은 한국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어느 시점에서 한국을 넘어서지 못하면 요동에게 남은 선택지는 그 자리에 주저앉는 것뿐이라는 것이 오늘 이 자리에 모인 사람들의 공통된 생각이었다.
“이미 공식적으로는 아니지만 이 내용에 관해서는 다들 숙려했을 것이라 믿소. 물론 우리가 오늘 당장의 전쟁을 결의하는 것은 아니오. 당분간은 이 자리에 모인 사람들 외에는 이 사실이 알려져서는 안 될 것이오. 그러나 생각보다 그 시기는 머지않을 것이오. 충분한 준비가 끝나는 순간, 우리는 압록강을 건널 것이오.”
국왕 김호는 단호하게 전쟁을 수행할 것을 못 박았다.
그는 한쪽 손에 잡은 왕홀을 한 번 강하게 바닥에 부닥뜨렸다. 탁, 하는 소리가 숨소리조차 멎은 어전의 좌우로 퍼져 나갔다.
“주상 전하의 뜻을 받들어 견마지로를 다하겠습니다.”
내무독판 지정환 백작이 대신들을 대표해서 국왕에게 아뢰었다. 김호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지정환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전쟁은 결정된 사항이었다. 조금 더 신중하자는 일부의 반대가 있었으나, 전체적인 대세를 움직일 수는 없었다. 이미 김호가 천명한 사안이었다.
거기다가 실세인 내무독판이 절치부심하며 추진하고 있는 일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굳이 분위기를 거슬러 봐야 남는 것이 없다는 사실은 모두가 잘 알고 있었다.
또한 누구도 전쟁에서 질 것이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요동 육군은 한국군을 상회하는 강병이었다. 어차피 요한 간에 전쟁이 벌어진다면 주된 전장은 바다가 아닌 육지가 될 터였다.
전격전을 통해 육지에서 적세를 격파한다면 전쟁의 승기를 잡는 것은 생각보다 어렵지 않을 터였다.

***

성경의 근위 기병사단 지휘부에서 퇴근하여 자택으로 돌아온 김욱은 의회가 군비 증강안과 증세안을 포함한 신년도의 예산안을 통과시켰다는 내용이 전면에 배치된 석간신문을 받아 들고 조용히 그 내용을 읽고 있었다.
「성경제일신문(盛京第一新聞)」은 요동에서 으뜸가는 석간신문으로, 김욱 또한 빠짐없이 매일같이 그 신문을 받아보고 있었다.
딱히 그 논조가 마음에 들거나 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항상 국정의 시세가 어떻게 반응하는지는 민감하게 알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적어도 성경제일신문은 주의 주장이 담긴 사설보다는 충실한 보도 내용으로 이름이 높으니, 그나마 볼 만하다고 치는 셈이었다.
‘……보통의 예산안이 아니다. 전쟁이 아니라면 이 정도의 증강안은 불필요해.’
김욱은 신문을 보며 빠르게 핵심을 짚어 나갔다. 제일신문에서는 이번 예산안의 주요한 목적이 순나라 전역으로 넓어진 군사력 투사 범위를 밀도 있게 보강하기 위한 것인 동시에, 국민당의 유한계급 의원들을 향한 공격적인 정략(政略)이 아닌가 하고 있었다.
그러나 김욱의 생각은 달랐다. 순나라 주차군은 이미 충분히 병력이 증강되어 있고, 기율도 잘 잡혀 있으며, 보급도 충분한 상황이었다. 단순히 그 지역에 병력 증파를 위해서 이런 규모의 예산안은 필요치 않았다.
“내가 부왕이라면 이 기세를 몰아 한국을 친다.”
김욱은 부왕 김호가 전쟁을 기획하고 있음을 눈치 채고 있었다. 궁내에 머물던 시절 측근에 있던 궁내부 직원 하나가 이미 비밀리에 어전회의가 진행된 것 같다고 김욱에게 알려온 터였다.
예산안을 통과하자마자 대외적으로 알리지 않은 채 각의를 소집했다는 사실은 그만큼 중차대한 목적을 띄고 있음을 암시하는 것이었다.
김욱의 날카로운 콧날 아래로 입술이 살짝 움직였다. 그의 얼음장 같은 얼굴 위에 간만에 미소가 서렸다. 전쟁이야말로 그가 더욱 비상할 수 있는 기회였다. 야망을 성취할 길은 난세에 비로소 열리는 법이었다.

***

전운(戰雲)이 북쪽에서부터 점차 올라오고 있었으나, 이를 알아챈 사람들은 극히 소수에 불과했다. 아무도 생각보다 이른 시기에 참혹한 전란의 시기가 도래할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채정혁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는 영안부에 위치한 북해사령부의 대기실에서 하릴없이 창밖을 바라보며 빨리 황성으로 돌아가 정상적인 일과로 돌아가기만을 학수고대하고 있었다.
바깥은 여전히 불야성이었다. 어로를 다녀온 어선들과 멀리 태평양을 건너온 무역선들이 영안부의 항구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채정혁의 마음은 멀리 철길 따라 이어져 있을 황성으로 향해 있었다. 아마 영안의 밤보다 훨씬 찬란하게 황성의 운종로는 오늘도 빛나고 있을 터였다.


【제국의 계보 2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