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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의 계보 1권(19화)
제3장 와신(臥薪)(3)
1859년 초봄, 나타샤가 17세 때의 일이었다. 북아시아 내륙 지역은 다른 지역보다 봄이 늦게 왔다. 이제 막 새싹이 트려던 어느 날, 그녀가 봄이 찾아오면 입을 옷을 어머니와 함께 수선하고 있을 때, 갑작스러운 할하군의 대대적인 침입이 있었다.
몽골 기병과의 교전은 상시적인 것이었으나 이번의 공격 규모는 예전을 웃도는 것이었다. 무엇보다 이번 공격에는 요동군도 함께하고 있었다. 얼마 전 러시아의 후원을 받는 준가르 기병대의 대규모 공세로 전쟁의 방아쇠가 당겨진 것이었다.
이르쿠츠크의 남서쪽에 위치한 이 요새가 요동―할하군의 반격에 가장 먼저 노출된 것은 당연한 이치였다.
미처 가족들을 안전한 이르쿠츠크로 보낼 여유도 없었다. 중대를 지휘하던 레온스키 대위는 분전했지만 중과부적으로 요새는 함락되었고, 선두에서 지휘하던 대위는 결국 요동군의 총탄에 맞아 전사했다. 이윽고 몽골 기병들이 요새로 밀려들어 왔다.
할하군은 관례대로 약탈을 시작했고, 할하의 관습을 아는 요동군은 굳이 제지하지 않았다. 아수라장이 벌어졌다. 할하군은 닥치는 대로 빼앗고 불 지르고 겁탈했다. 그들의 마수가 곧 레온스키 대위의 집에 닥쳐온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신의 저주를 받을 타타르 놈들, 당장 우리 집에서 꺼져! 한 발이라도 들어오면 가만두지 않을 거야!”
아직 아버지가 전사했다는 사실 자체를 모르는 나타샤는 아버지가 준 연습용 검을 뽑아 들고 집을 지켰다. 할하군 병사들은 어이없다는 듯 웃으면서 쳐다보았다. 피가 뚝뚝 떨어지는 그들의 두꺼운 칼은 나타샤의 세검과는 비교가 될 수 없었다. 그들의 길게 찢어진 눈이 나타샤에게는 마치 악마처럼 보였다. 아무리 그녀가 아버지에게서 검술을 배웠다 하나 전쟁으로 단련된 병사들을 상대하는 것 자체가 무리였다. 기술은 있을지 몰라도, 공포심에 압도된 그녀는 제 실력도 나올 수 없었다. 칼 한번 내지른 것을 끝으로 그녀는 손쉽게 그들의 손아귀에 떨어졌다.
어머니 바실리사가 몸으로 달려들었으나 헛수고였다. 모녀가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한 찰나, 어디선가 말을 타고 달려온 레르몬토프 소위가 병사 한 명을 대동한 채 그들을 향해 총을 쏘고 칼을 휘둘렀다. 갑작스러운 난입에 할하 병사들은 그녀를 놓고 전투태세를 취했다. 소위는 말에서 내린 뒤, 권총을 할하 병사들에게 겨눈 채 나타샤를 일으켜 세웠다.
“나타샤, 어서 어머니를 모시고 북문 쪽으로 피하시오. 여긴 나한테 맡기고!”
“알렉세이, 아버지는요? 무사하신가요?”
다급하게 묻는 나타샤에게 알렉세이는 청천병력 같은 소식을 전했다.
“……대위님께선 전사하셨소. 마지막으로 당신 안위를 부탁했소. 자, 그러니 어서!”
아, 아버지! 나타샤의 깊고 큰 눈에서 눈물이 터져 나왔다. 그러나 아버지의 죽음을 슬퍼할 여유도 없었다. 소위는 신속히 그녀와 어머니를 말 위에 올려 태웠다. 그사이에 함께 온 병사는 이미 할하군의 칼에 쓰러졌다.
“안 돼요, 알로샤! 당신은 어쩌고!”
“나는 어떻게든 살아남을 테니, 내 걱정하지 말고 어서 가!”
나타샤는 눈물을 흘리며 말고삐를 잡았다. 그녀 혼자뿐이라면 모를까, 어머니의 목숨도 자신의 손에 달려 있었다.
알렉세이의 검술 솜씨가 형편없는 것은 그녀도 잘 알지만, 지금은 도저히 함께 싸울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알렉세이 페트로비치! 알로샤! 꼭 살아야 돼요, 죽으면 안 돼!”
알렉세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약혼자를 보냈다. 말을 타고 빠져나가던 나타샤는 불길한 예감이 들어 고개를 돌렸다. 중과부적으로 싸우던 알렉세이가 할하군의 칼날을 맞고 쓰러지는 장면이 마치 정지된 그림처럼 그녀의 망막에 맺혔다. 그녀는 가슴이 터질 것 같았으나 말은 앞으로만 내달리고 있었다.
그녀의 도주도 얼마 가지 못했다. 북문을 벗어나 이르쿠츠크를 향하는 길로 접어들었으나 이미 적군의 마수는 그곳까지 뻗어 있었다. 할하군의 화살이 날아와 말을 맞췄고, 나타샤와 어머니는 그대로 낙마했다. 나타샤는 어머니의 위로 떨어졌다. 나타샤는 큰 상처를 입지 않았지만, 땅에 떨어진 타격을 그대로 받은 어머니는 머리가 깨진 채로 정신을 잃어가고 있었다.
“어머니? 어머니! 정신 차리세요!”
그때 네 명의 할하군이 그녀 주위를 둘러쌌다. 공포보다 분노의 감정이 나타샤의 정신을 지배했다. 그녀는 검을 빼 들어 한 놈을 찔렀으나 스치는 데 그쳤다. 분노에 사로잡힌 나타샤는 닥치는 대로 검을 휘둘렀으나 병사들은 장난감을 가지고 놀듯이 그녀를 희롱했다. 결국 나타샤는 그들에게 아무런 상처도 입히지 못하고 그들의 우악스러운 손아귀에 떨어졌다. 그때 나타샤는 자신이 몽골어를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 그토록 저주스러울 수 없었다.
“엉덩이도 튼튼해 보이고, 아기를 잘 낳을 골격이야.”
“내가 가질 수는 없겠지?”
“우선은 칸에게 바친 뒤에 배분을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아쉽지만, 이 계집년 미모를 보니 우리한테까지는 기회가 안 올 듯싶은데. 껄껄.”
병사 하나가 아쉽다는 듯 그녀의 엉덩이를 손으로 두드리며 지저분하게 웃었다.
“아, 뭐. 아쉽긴 하지만 이르쿠츠크까지 들어가면 거기도 계집이 널려 있을 테니…….”
“힘겹게 싸운 다음에 여자를 차지하는 것이 가장 행복한 일이 아니겠는가.”
“잡담은 그만하고, 우선 귀환해야 해서 보고해야 하니, 이년은 말 위에 잘 묶어서 어서 가세.”
나타샤는 이런 말들을 들으며 분노와 공포로 몸서리를 쳤다. 그들은 그녀의 가느다란 팔목을 묶고 말 위에 태웠다. 그녀는 다급히 몽골어로 피를 흘리며 정신을 잃고 쓰러진 어머니를 함께 데려가 주길 청했다. 일순간 그들은 러시아 여인이 몽골어를 할 줄 아는 것에 놀라워했지만, 그것뿐이었다.
“늙고 뚱뚱한 여편네를 먹여 살릴 식량은 우리에게 없다.”
“이제 독수리 밥이 되는 게 저 여편네 운명이야. 자, 가자!”
나타샤는 엄청난 분노와 증오로 뒤범벅된 강렬한 감정이 그녀의 뇌간을 끊어버리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러나 가냘픈 그녀가 묶여 있는 채로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스스로 혀를 끊어 목숨을 버리고 싶은 마음도 가득했지만 실행으로 옮길 수는 없었다.
‘영원히 저주 받을 타타르 놈들, 그리고 그 위에 있는 요동 놈들. 내 죽는 날까지, 아니 죽어서도 네놈들을 용서치 않겠다. 반드시 네놈들이 멸망하는 꼴을 내 눈으로 지켜보고 말 것이야.’
끌려온 나타샤가 능욕을 면한 것은 역설적으로 그녀의 미모 덕이었다. 요새의 다른 여인들은 이미 할하군의 노리개가 된 뒤였다. 다만 전리품이 될 정도의 미모를 지닌 여인은 군막(軍幕)에 진상되는 것이 관례였고, 나타샤는 그중에서도 칸에게 바쳐질 정도의 빼어난 미모였다.
그러나 나타샤와 같은 일부의 여인들을 제외하고는 그러한 운조차도 따라주지 않았다. 점령된 러시아 요새의 도처에서 비명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군기가 엄정한 요동군은 혀를 차면서도 할하 몽골인들의 이런 만행을 방관했다.
‘성모시여, 대체 우리가 무엇을 잘못해서 이런 벌을 받아야 합니까. 여자로 태어난 게 그렇게 큰 잘못이란 말입니까? 무엇 때문에 우리가 이 야만인들에게 이런 치욕을 당해야 합니까?’
독실한 정교회 신자였던 나타샤는 고통 속에서 아무것도 해주지 않는 신을 향해 분노를 느꼈다. 신이 존재한다면, 왜 저 요동의 무신론자와 할하의 우상숭배자들이 우리 신실한 정교회인들을 박해한단 말인가? 비참한 불행의 늪에서 구원의 빛은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신에 대한 믿음을 잃었다.
그러나 이들과 마찬가지로, 러시아와 준가르군 역시 할하와 요동 이주민의 촌락들을 점령하면 가차 없이 남자들은 도륙하고 여인은 능욕했다. 러시아와 요동, 그리고 러시아의 괴뢰인 준가르와 요동의 괴뢰인 할하 사이에 계속된 교전은 해묵은 증오를 이 땅위에 빚어냈다.
이러한 증오감은 전쟁을 중세적 야만의 형태로 이끌어냈다. 그러나 페테르부르크와 성경에서는 이러한 희생을 부차적인 것으로 파악하고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단지 양국의 언론이 상대의 야만적인 만행에 대해 시끄럽게 떠들고 있을 뿐이었다.
나타샤는 포로 중 한국어와 몽골어를 이해하는 유일한 여성인 덕에 따로 격리된 채 치욕적인 요구를 받아야 했다. 요동군 장교들과 할하 부족장들의 술시중을 맡게 된 것이다.
그녀는 저항했지만 그들의 완력을 이겨 낼 수 없었다. 군복을 입은 요동군 장교들의 일그러진 시선과 유목민 복장을 한 부족장들의 음탕한 시선을 받으면서 나타샤는 굴욕감과 더불어 증오심으로 치를 떨었다. 오직 칸의 후궁으로 들어간다는 운명이 그녀를 더 큰 굴욕에 빠지지 않게 하였다.
이대로 할하의 도성, 카라코람까지 가게 된다면 꼼짝없이 칸의 후궁에서 살아야 할 판국이었다. 그러나 운명의 신은 그녀를 완전히 버리지 않았다. 뒤늦게 이동해 온 러시아의 대규모 군대가 할하의 선발대를 무찌르고 이동하는 포로의 무리들을 신속하게 따라잡아 구출한 것이었다.
마침내 자유의 몸이 된 나타샤는 오랫동안 억눌러 왔던 분노를 폭발시켰다. 그녀는 러시아군의 군도를 빼앗아 이제는 반대로 포로가 된 할하의 병사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아버지의 원수, 어머니의 원수, 약혼자의 원수! 죽어도 잊지 못할 그 모두를 찢어발기고 싶었다. 어떤 이유에서든 그녀가 살인자가 되는 것을 막은 사람은 콧수염을 나이에 걸맞지 않게 점잖게 기른 젊은 장교였다. 그는 신속하게 달려들어 그녀의 손목을 낚아챘다.
“놔요, 당장 놔! 저 자식들 다 죽여 버릴 거야!”
“아가씨, 그만두시오. 포로는 죽이지 않는 법이오.”
“하! 저놈들이 우리 포로들에게 어떤 만행을 저질렀는지 알고나 하는 소리예요? 저놈들이 무슨 짓을 했는지 아냐고! 당신이 뭘 아냐고!”
거세게 몸부림치던 나타샤는 터져 나오는 눈물을 참지 못하고 결국 주저앉았다. 적들에 대한 증오와 분노, 부모와 약혼자의 원수를 갚아야 한다는 의무감, 홀로 능욕을 면한 채 온갖 괴롭힘을 당한 다른 여인들에 대한 죄책감이 복합적으로 그녀를 지배했다.
눈물을 멈추지 못하는 그녀를 젊은 장교가 다독였다. 그가 바로 육군 대령이자 대요동 전권대사의 명을 받은 니콜라이 이그나티예프 백작이었다.
이후 오갈 곳 없게 된 나타샤의 신병을 거둔 이도 이그나티예프였다. 전쟁이 끝나면 그녀는 장렬하게 전사한 아버지 몫의 퇴직금과 연금을 수령할 수는 있었다. 그러나 이제 나타샤에게 남은 가족은 없었고, 저 멀리 쿠반 강 유역에 아버지의 친척들이 산다고 하지만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이들이었다.
백작은 처음에 불행한 운명의 처녀를 동정심으로 거두었으나, 지나 보니 그녀가 겉모습만 아름다운 게 아니라 많은 재능을 가진 재원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무엇보다 한국어와 몽골어를 할 줄 아는 그녀의 능력은 군에도 큰 도움이 되었다.
처음에 그녀는 요동과 할하와 관련된 모든 것을 거부했지만, 곧 자신의 처지를 깨닫고 백작의 일을 도왔다. 나타샤와 백작이 함께 있는 모습을 보면서 적지 않은 사람들이 이들의 관계에 대해 지레짐작했지만, 불행했던 사건 이후 남성에 대한 혐오감이 팽배한 나타샤는 말할 것도 없고 이 야심만만한 청년 귀족에게는 성애에 대한 갈구보다 야망에 대한 갈구가 훨씬 컸다.
그의 목적은 시베리아에 대한 러시아의 권위를 관철해 내는 것이었다. 그리고 러시아 내에서 최고의 아시아 전문가로서 인정을 받아 외교관으로서의 업적을 쌓아 나가는 것이었다. 총명하고 재주가 많은데다 아름답기까지 한 나타샤의 존재는 앞으로도 그의 앞날에 도움이 됐으면 됐지 손해는 되지 않으리라는 것이 이그나티예프의 판단이었다.
복수심에 불타는 나타샤 또한 이 권력자와 함께하면 그녀의 일생의 목표인 요동과 할하에 대한 복수를 달성하는 길을 앞당길 수 있다고 믿어 한배를 타게 되었다.
나타샤는 1860년 말에 니콜라이와 함께 페테르부르크에 도착했고, 이후 이그나티예프 백작가에 기거하면서 보통 자유롭게 책을 읽거나 가끔 백작이 부탁하는 한국어 문서를 러시아어로 번역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여전히 요동이나 할하와 관련된 모든 것은 증오스러웠지만, 그럴수록 그녀는 한국어를 잊지 않도록 더욱 열심히 공부했다. 무엇이든 배워두라는 아버지의 가르침을 잊지 않았거니와, 한국어를 배울수록 복수를 향한 자신의 전의를 다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