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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의 계보 1권(18화)
제3장 와신(臥薪)(2)
1843년 백부 콘스탄틴 1세의 뒤를 이어 즉위한 알렉산드르 2세는 1848년 혁명의 여파 속에서 농노제를 폐지하는 칙령을 반포했다.
이것은 엄청난 변화였다.
농노들은 영지의 족쇄에서 풀려나와 자유롭게 이동할 권리를 얻었다. 해방된 농노들은 차르를 해방자로 칭송했다. 그러나 그들의 삶이 근본적으로 바뀐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신분의 해방과 얻게 된 농지를 49년에 걸쳐서 몸값으로 갚아야 했고, 이를 견디다 못한 농민들은 대도시로 향하여 도시 노동자 계층이 되었다.
페테르부르크와 모스크바를 중심으로 한 산업화가 막 꽃을 피우는 상황에서 농촌에서 올라온 인력은 산업화의 중요한 인력이 되었으나 그들이 얻는 것은 별로 없었다.
해방이라는 이름이 무색하게도, 농민과 태동해 가는 노동계급의 불만은 누적되어 가고 있었다. 기본적으로 서구화와 근대화를 향한 러시아의 열망은 철저하게 일방 집중적인 것이었다.
단기적으로 알렉산드르 2세는 대외정책의 성공으로 모든 문제를 덮을 수 있었다. 러시아는 1850∼53년의 대북방 전쟁에서 동맹국들과 함께 스웨덴을 격파하고 발트해의 패권을 획득했고, 1854년 반(反)폴란드적인 서부 우크라이나 봉기에 개입하여 오랜 라이벌 폴란드―리투아니아와의 전쟁에서 동부 갈리치아를 제외한 우크라이나 전역을 얻는데 성공했다.
비록 폴란드―리투아니아 전체를 향한 러시아의 야망은 연합 왕국과 프랑스의 방해로 바르샤바의 문턱에서 진격이 좌절되긴 했지만, 러시아는 세계의 패권에 도전하는 강력한 제국으로 부상하였다.
「제국의 쌍두 독수리 깃발이 한 번 나부꼈던 곳에서는 절대 그 기를 내릴 수 없다.」
전임 차르 콘스탄틴의 동생이자 현 차르 알렉산드르의 아버지인 니콜라이 대공은 러시아의 정복을 향한 열망을 그렇게 한마디로 정리했다.
오랜 숙적인 연합 왕국과 프랑스는 러시아의 계속되는 팽창을 우려하여 일시적으로 연합하였고, 서쪽과 남쪽으로 향하는 길이 막힌 러시아는 동쪽으로 눈을 돌렸다.
재작년에 벌어진 요동과의 전쟁은 러시아의 동쪽 국경선을 기존의 앙가라강에서 레나강까지 넓혀 놓았다. 중앙 시베리아 고원 전체를 얻은 것이다.
현재로서는 쓸모없는 동토의 땅이지만, 엄청나게 넓은 새로운 영토의 확장은 러시아인들을 만족시켰다. 10년간의 전쟁들을 통해 러시아는 막대한 영토를 얻었지만 적지 않은 인명을 잃었다는 것을 사람들은 쉽게 잊어버렸다.
어느덧 백야의 계절도 끝나가는 페테르부르크의 해는 일찌감치 떨어졌다. 이미 정부 기관이 운집한 페테르부르크의 중심가 넵스키(Невский) 대로에서 멀지않은 귀족·관료 거주 지구인 아드미랄테이스키(Адмиралтейский)구의 한 저택에선 주인의 귀가 후 저녁 식사를 준비하는 하인들의 움직임으로 분주해져 있었다.
이 집은 육군 소장이자 외무성 아시아국장인 니콜라이 파블로비치 이그나티예프(Н.П.Игнатьев) 백작의 저택이었다. 이그나티예프 백작은 올해 스물아홉에 불과했지만, 제국의 관료로서 성공적인 경력을 쌓아가고 있었다.
이 똑똑하고 야심만만한 젊은 백작은 장교인 동시에 외교관으로서 3년 전 부하라 아미르국과 히바 칸국으로의 사절단을 맡아 목숨을 위협받는 위기 속에서 그들과 조약을 체결하고 중앙아시아 지역의 정보를 입수하여 차르에게 보고했고, 이를 통해 그는 명성을 얻었다.
1년 뒤 차르는 그에게 더 어려운 임무를 맡겼다. 시베리아 고원을 향한 러시아군의 진격에 동참하게 한 것이다. 카자키를 선봉에 세운 러시아군은 숱한 고난을 겪으며 요동군과 싸웠고, 일진일퇴의 공방전 속에서 진격은 한계에 부딪혔다. 그러나 요동이 남쪽 순에서의 급격한 정세 변동에 눈길을 돌리게 되자, 이그나티예프는 전권대사로서 성경에 방문하여 요동에게서 대폭 양보를 얻어내는 데 성공했다.
앙가라강에서 레나강까지, 350만 제곱킬로미터에 해당하는 광대한 영토가 공식적으로 러시아의 영토로 편입되었다.
이는 단순히 면적으로만 따지면 옛 로마제국 전토에 맞먹는 크기였다. 눈에 보이는 쾌거에 페테르부르크는 환호했다. 한 줌과 같은 원주민들이 수렵으로 생계를 잇고, 겨울이면 영하 60도에 육박하는 강추위가 지배하는 땅이라는 사실은 아무도 고려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이 동토의 땅의 실제보다는 지도상에서 멀리 뻗어 나간 국경에 더욱 관심이 많았다. 아무도 요동이 어째서 쉽게 그 땅을 포기했는지는 알지 못했다. 이미 수명을 다한 모피 무역은 요동에게 있어서 이 땅을 무리해서 지니고 있을 의미를 사라지게 만들었던 것이다. 그러나 러시아는 그 땅이 어떤 땅이든, 땅을 넓힌 것에 만족했다.
이그나티예프는 개선장군으로서 금의환향했고, 차르는 그에게 성 블라디미르 훈장을 수여하고 육군 소장의 지위와 외무성 산하 아시아국의 국장 자리를 맡겼다. 그는 나이 서른도 안 되어 러시아 제국의 동방 전략의 실무를 맡는 인물이 된 것이었다.
이때, 이그나티예프가 동방에서 가져온 다양한 전리품의 목록에는 특별한 것이 끼어 있었다. 바로 묘령(妙齡)의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그녀는 이후 백작의 저택에 기거했고, 하인들은 미모의 처녀가 아직까지 독신인 백작이 동쪽에서 거느리고 있었던 현지처로, 수도까지 데려온 것이려니 생각했다.
나탈리야 알렉산드로브나 레온스카야(Наталья Александровна Леонская), 애칭 나타샤(Наташа)는 창밖을 바라보자 어느덧 해가 저물어 가고 있음을 보고 읽고 있던 책을 덮었다. 요즘 유행하는 이반 세르게예비치 투르게네프(И.С.Тург нев)의 《첫사랑(Первая любовь)》이라는 소설이었다.
‘첫사랑이라.’
나타샤는 한숨을 쉬며 책의 표지를 바라보았다.
그녀에게도 첫사랑이 있었다. 그녀가 온 마음을 바쳐 사랑했고 사랑받았던 첫사랑. 그러나 그는 이제 다시는 볼 수 없는 운명이었다.
불과 재작년에만 해도, 자신이 가족과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이 머나먼 수도 페테르부르크까지 오게 되리라고 상상이나 할 수 있었을까? 그녀는 운명의 장난에 몸서리를 쳤다.
열아홉 살의 나타샤는 누가 봐도 아름다운 처녀였다. 러시아인 특유의 투명할 정도로 창백한 피부 위에 뚜렷하고도 빼어난 얼굴, 군살 하나 없이 날씬하면서도 굴곡진 몸매, 물결치는 듯 어깨 위로 타고 내리는 긴 금발은 감탄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었다.
그녀의 커다란 눈동자가 어딘가를 주시할 때마다, 그 시선의 너머에 있는 남자들은 마치 불에 덴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러나 그녀의 얼굴은 웃지 않는 굳어 있는 인형과 같았다. 그것은 상처 입은 사람의 얼굴이었다.
백작이 이 젊은 미녀를 대동하고 페테르부르크의 저택에 돌아왔을 때, 하인들이 그녀를 백작의 정부로 오해한 것도 어찌 보면 당연했다. 그렇게 아름다운 여자의 운명은 그다지 순탄하다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었다. 그들의 삶은 대개 질시와 동경, 탐욕과 멸시가 뒤섞인 시선들을 감내하는 과정이었다.
집안의 하인들은 그녀를 애매하게 대했다. 앞으로는 정중하게 대하면서도 뒤로는 헛소문이 떠돌았다.
특히 하녀들은 그녀를 노골적으로 키득거리며 무시했다. 시베리아 출신의 촌뜨기가 귀족을 잘 물어서 출세했다는 것이다.
나타샤는 이러한 태도에 화가 났지만, 애매한 위치의 그녀가 이를 백작에게 고하거나 하녀들을 꾸짖을 수는 없었다.
어느 날 우연히 나타샤에 대한 하녀들의 험담을 듣게 된 백작은 돌아가는 상황을 뒤늦게 알게 됐다. 백작은 하인들을 불러 모았다.
“나탈리야 알렉산드로브나 레온스카야 양은…….”
백작은 힘이 들어간 눈으로 하인들을 노려보며 말을 이었다.
“영예로운 제국 육군 장교의 영애이자, 이그나티예프가의 귀중한 손님이니 정중하게 대하도록. 다시는 불미스러운 말이 내 귀에 들어오지 않게 하라.”
백작의 엄격한 명령 이후 하인들의 태도는 확연히 달라졌다. 그러나 그녀의 외로운 생활이 그다지 나아진 것 같지는 않았다. 그날 이후의 삶은 무언가 속이 빈 껍질처럼만 느껴졌다.
나타샤는 창문을 열어 석양이 지는 페테르부르크를 바라보았다. 어디선가 들려오는 노랫소리에 나타샤는 눈을 감고 옛 추억 속으로 빠져들었다.
도나우를 넘는 코자크, 원래는 우크라이나 자포로제 코자키(Запорожцi козаки)의 민요지만 지금은 러시아를 넘어 폴란드와 독일에도 번안되어 사랑받는 노래였다.
그녀는 익숙한 멜로디에 이내 추억에 잠겨 들어갔다.
「Лучше було б, лучше було б не ходить,
Лучше було б, лучше було б не любить,
Лучше було б, лучше було б та й не знать,
Чим тепер, чим тепер забувать!
차라리, 차라리 떠나지 않는다면
차라리, 차라리 사랑을 하지 않았다면
차라리, 차라리 서로 알지를 못했더라면
이렇게, 이렇게 떠나가네!」
나타샤는 러시아의 동방 거점이었던 이르쿠츠크 출신이었다. 이곳 페테르부르크에선 기차를 타고 철도의 동쪽 종착역인 우랄 산맥의 예카테린부르크까지 간 뒤, 그곳에서 말로 한참은 더 달려야 도달할 수 있는 곳이었다.
지금이야 제국의 국경이 레나강까지 확장되었으니 더 이상 최전선이라 할 수 없지만, 그 이전에는 앙가라강이 흐르는 이르쿠츠크가 제국의 가장 동쪽 전선이었다. 그녀가 살았던 곳은 이르쿠츠크에서 조금 떨어져 있는 전방의 요새였다.
그녀는 어린 시절부터 그곳에서 살았다. 그녀의 아버지 알렉산드르 이바노비치 레온스키(A.И.Леонский)가 그 요새에 주둔하고 있는 군인이었기 때문이다.
레온스키는 이르쿠츠크에서는 한참 멀리 떨어진 흑해 유역의 쿠반 카자키(Кубанские кaзаки) 출신이었다. 카자키는 독특한 집단으로서 차르에게 봉직하는 군사 카스트인 동시에 자유농이었고, 러시아군의 최전방에는 언제나 그들이 있었다.
기병전의 달인인 그들의 용맹함과 잔인함은 대대로 악명이 높아 주변 국가들, 특히 폴란드―리투아니아와 요동국의 전선 병사들은 카자키라면 학을 뗄 정도였다.
쿠반 카자키는 돈 카자키(Донские кaзаки), 테렉 카자키(Терское казачье)와 함께 러시아 남부 지역 3대 카자키 집단으로, 일반적으로 그들의 근거지와 가까운 캅카스 전선에 투입되었으나 레온스키는 불운하게도 동방 전선으로 차출되었다. 그 뒤 그는 쭉 이르쿠츠크 근교에서 복무해야만 했다.
캅카스의 산악 지대에서 이맘 샤밀(Imam Shamil)의 무슬림 전사들과 싸운 그의 친족들과 달리 레온스키의 주된 상대는 초원의 몽골 기병들이었다.
국경을 넘어 러시아인 정착촌을 공격하는 몽골 기병들로 인해 러시아와 할하는 상시적인 교전 상태였고, 동방에 복무하는 카자키 기병대의 주된 임무는 국경을 넘어 공격해 오는 몽골 기병을 격퇴하는 것이었다.
나타샤는 아버지 알렉산드르와 어머니 바실리사의 하나뿐인 딸이었다. 그녀의 위아래로 형제자매가 더 있었지만, 국경의 혹독함 속에서 모두 유년기를 넘기지 못하고 죽었다.
그랬던 만큼 그녀를 향한 부모의 사랑은 지극한 것이었다. 전선에서는 용맹한 카자키인 레온스키 대위도 딸과 관련된 일이라면 사족을 못 썼다. 전방이라 여자학교가 없는 만큼 비싼 돈을 들여 가정교사를 초빙, 귀족 영애 못지않은 교육을 시키려고 노력했다.
나타샤는 가정교사로부터 프랑스어, 역사, 문학 등을 배웠고 아버지의 뜻에 따라 몽골계 요동군 포로로 항복한 뒤, 러시아 군대에 편입된 병사로부터 한국어와 몽골어도 배웠다.
프랑스어야 러시아 상류 사회에서 많이 사용하는 언어라 배우는 게 당연하다지만, 러시아어와 언어 체계가 전혀 다른 한국어와 몽골어는 배우기도 어렵거니와 나중에 이곳을 뜨면 쓰일 일도 없을 것 같았다.
무엇 때문에 이걸 배워야 하냐고 불평하는 어린 나타샤에게 아버지는 단호하게 말했다.
“사람은 모름지기 배워야 한다. 뭐든지 배워서 나쁠 게 없지.”
그것은 레온스키 대위의 지론이었다. 레온스키는 카자크 농민으로 태어나 오랫동안 군인으로 복무하면서 배우지 못한 것을 한탄하고 딸에게만은 하나라도 더 가르쳐 주려고 했다. 그는 여자도 스스로 몸을 지키는 법을 배워야 한다며 검술과 승마술도 가르쳤다.
용맹한 전사였던 아버지는 딸에게 혹독하게 가르쳤고, 검술 연습을 하다 다치고 들어오는 일도 부지기수였다.
어린 나타샤가 고통을 못 참고 울 때에도 그는 딸에게 쉬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전방의 요새는 가끔 있는 몽골 기병의 습격을 제외하면 전반적으로 평화로웠다. 어쩌면 평화롭다기 보다는 지루한 곳이었다.
한창 성장기의 나타샤는 남자라곤 군인밖에 없고 제 또래의 여자애라곤 찾아볼 수 없는 이 요새에서 보내는 하루하루가 지겨워서 견딜 수 없는 지경이었다. 가끔 하녀를 대동하고 이르쿠츠크에 가서 물건을 사거나, 읽을 책거리를 한 무더기 빌려와서 읽고 또 읽는 게 그녀의 소일거리였다.
그러던 어느 날, 알렉세이 페트로비치 레르몬토프(А.П.Лермонтов)라는 젊은 장교가 요새의 소대장으로서 부임하면서 그녀에게도 봄날이 찾아왔다.
27세의 젊은 나이로 요절한 낭만주의 시인, 레르몬토프와 성이 같은 이 청년은 이름 값 하듯이 군인보다 시인에 더 가까운 사람이었다. 청춘의 남녀는 금방 사랑에 빠지게 되었고, 장래를 약속하는 사이가 되었다.
알렉세이는 카자크가 아니라 지방의 소귀족 출신이었고, 둘째는 어떻게든 강건한 군인으로 만들겠다는 아버지의 강요 때문에 카자키가 복무하는 최전방까지 끌려온 몸이었다.
그는 한때의 장난이 아니라 진심으로 나타샤를 사랑할 것을 맹세했고, 자신의 영지로 그녀를 데려갈 것을 약속했다. 진심으로 그들의 약혼을 축복한 레온스키 대위도 어느덧 25년의 카자크 의무 복무 기간을 얼마 남겨 놓지 않은 상황이었다.
사병에서 출발해 전공을 세워 대위까지 올라 러시아 제국 관등제의 끄트머리로라도 오른데다가, 육군성이 주는 넉넉한 퇴직금과 함께 그가 꿈에서도 그리워하던 쿠반 강으로 돌아갈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어쩌면 평화 속에서 행복한 나날은 계속될 수 있었을 것이다. 만약 그해의 전쟁이 없었더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