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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의 계보 1권(17화)
제2장 세련(細漣)(9)
“익문사에서 대체 제게 무슨 볼일이 있으신지?”
사내는 씩 웃으며 그의 말을 물렸다.
“성격이 급하시군요. 일단 목이나 축이고 얘기하지요.”
점원이 수정과를 내오자 사내는 단숨에 한 잔 모두를 입속에 털어 넣었다.
“야, 시원하구만. 역시 여름엔 이게 최고지. 채 참령님도 어서 드시죠.”
채정혁은 수정과를 마시는 둥 마는 둥 하며 그 사내의 모습을 뜯어보았다.
나이는 삼십대 중반 정도로, 깡마른 얼굴과 길게 찢어진 눈이 전형적으로 인정머리 없어 보이는 외모를 만들어 내고 있었다. 도리어 의심이 갈 정도로 너무나 정보원 같은 외모였다.
채정혁은 순간 웃음이 터져 나왔지만, 지금 상황이 그저 웃어넘길 만한 것은 아니었다. 자신을 뜯어보는 시선을 이미 눈치 채고 있는 듯, 사내는 쓰고 있는 모자를 일부러 만지는 척하며 끌어 내린 다음에 채정혁을 향해 입을 열었다.
“다시 한 번 승진을 축하드립니다. 거, 나이 스물여섯에 참령이라, 요즘 세상엔 쉽게 못 볼 빠른 진급이지요. 앞으로도 승승장구하실 인물이십니다.”
“……감사합니다.”
무슨 목적이 있어서 치켜세우는 것이겠지만, 우선은 사내에게 협조하는 수밖에 없었다. 괜히 제국익문사를 건드려서 좋을 것이 없다는 사실은 채정혁도 잘 알고 있었다.
길가는 와중에 잡혀서 이렇게 앉아 있는 상황이지만, 우선은 그들이 자신에게 무엇을 바라는지는 정확히 알고 넘어가야 했다.
“북해로 가는 것이 좌천이라고 생각하는 장교들이 많은데, 꼭 그렇지도 않아요. 군인은 모름지기 무훈을 세워야 하는 법입니다. 지금 평화로운 제국에서 북해보다 더 무훈을 세우기에 적당한 장소가 어디가 있습니까?”
통신원은 찻잔을 튕기면서 말을 이었다. 채정혁은 같은 소리를 고재완 정령에게 막 듣고 나온 다음이었지만, 같은 말이라도 이 사내에게 듣는 것은 그 느낌이 달랐다. 어딘가 비꼬는 듯한 사내의 말투는 좀체 적응이 되지 않는 것이었다. 채정혁은 슬슬 빙빙 말을 돌리는 그의 화법에 짜증이 돋고 있었다.
“본론을 말씀해 주시지요.”
채정혁은 정면으로 치고 들어갔다. 그러나 요원은 전혀 당황해 하지도 않고서는, 이제는 빈 찻잔을 가지고 손장난을 치며 지나가는 말처럼 아무렇지 않게 이야기할 뿐이었다.
“아, 이게 본론입니다. 북해에서는 엄청난 공을 세워서 돌아올 수 있지요. 요즘 같이 전쟁도 없고, 내부 소요도 없는 때에는 말입니다. 그 정도만 해도 공이지요. 예컨대 말입니다. 북해 해방군을 자처하는 비적 떼들이 실상은 요동의 앞잡이로, 그들의 후원을 받는다는 증거가 일선 부대에 의해 밝혀진다면, 그런 게 공적이지요.”
“증거가 없으면요?”
반문하는 채정혁에게 통신원은 씩 웃어 보였다. 비웃는 표정이었다.
“허허, 무슨 말씀이십니까? 증거가 없을 리가 있나요? 증거는 말입니다, 늘 원하는 자리에 있어야 하는 겁니다.”
채정혁의 마음은 더욱 불편해졌다. 그의 머리가 빠르게 회전하고 있었다.
‘이자가 나에게 접촉하는 이유가 이런 것이란 말인가? 현지 부대에 가서 증거를 잡으라고? 존재하지 않는다면 조작까지 하는 한이 있더라도?’
애초에 그런 요구를 자신에게 하는 목적부터 알 수 없을뿐더러, 이렇게 비선으로 접촉해 오는 이유도 알 수 없었다. 애초에 제국익문사가 자신에게 협조를 필요로 한다면, 군부의 윗선을 통해 알려오는 방법도 있었다.
이런 방법은 아무리 비밀주의를 우선하는 익문사라고 하지만, 채정혁이 느끼기에 정상적인 방식이 아니었다. 만약에 그런 사실관계를 조작하여 보고하더라도, 만약에 일이 틀어졌을 경우에 전공 조작으로 덤터기를 쓰는 것은 익문사가 아니라 채정혁이었다. 이런 일을 넙죽 받아먹을 것을 기대하고 자신에게 접근했다는 것 자체가 이해가 가지 않는 노릇이었다.
“그런데 왜 하필 저입니까? 익문사가 직접 나설 수도 있는 것이고, 육군 정보국도 있지 않습니까?”
“……그건 우리가 채 참령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지요.”
채정혁이 일순간 흠칫하자 통신원을 손을 저으며 느물거리는 어조로 말을 이어 갔다.
“아, 너무 이상하게 생각하지 마십쇼. 뭐 남들보다 좀 더 잘 안다는 정도이니. 실론 전역에서 공훈을 세운 젊은 영웅, 이른 나이에 진급을 거듭하는 유능한 장교…… 거기에 늙으신 부모님과 어린 여동생을 위해 헌신하는 가정적인 인물. 현 시국에서 여론이 아주 좋아할 만한 인재상이지요. 그리고 내년에 여동생이 성심여전에 들어가려면 학비가 더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우리 같은 말단 직원들은 여동생이나 딸자식 여전 보내는 건 꿈도 못 꿀 일인데, 하하!”
사내의 빈정거리는 듯한 어조에 채정혁은 불편한 기색을 감출 수 없었다. 자신에 대해 이렇게 상세하게 조사하고 온 것 자체가 매우 불쾌한 일이었다. 더군다나 이렇게 비꼬듯이 말하는 태도는 매우 무례하기 짝이 없는 것이었다.
“천하의 익문사가 일개 장교의 뒤를 캐고자 흥신소 역할을 할 줄 몰랐습니다.”
채정혁의 반격에 통신원은 계면쩍은 듯 웃었다. 그러나 사내의 다음 말은 채정혁의 폐부를 찌르는 것이었다.
“뭐, 이 정도야 기초적인 소양이죠. 경안 5년의 간첩사건, 그러니까 한서명 사건 이후 장교들 내사는 군 내부에게만 못 맡깁니다. 채 참령님이라면 사정을 이해하시겠죠?”
채정혁은 순간 손에 쥐고 있던 찻잔을 떨어뜨릴 뻔했다. 자신도 모르게 부들부들 떨리는 몸을 간신히 진정시켰지만, 등골을 따라 흘러내리는 식은땀의 느낌은 너무나도 선명했다.
자신의 친부 한서명이 관련된 사건이 바로, 경안 5년의 간첩사건이었다.
‘도대체 이자는 무슨 말을 하려는 거지? 이해하냐고? 무엇을? 이자는 무엇을 알고 있는 거지?’
채정혁은 동요하지 않고 평안을 유지하려 했으나 맘처럼 쉽지 않았다.
“지금까지 참령님은 아주 잘해왔습니다. 이제 참령님이 제국에 충성하는 군인임을 다시 한 번 입증할 기회가 온 겁니다. 아무쪼록 기회가 왔을 때 잘 잡으시길.”
채정혁의 머리는 더욱 혼란스러웠다. 아버지의 이름이 언급된 것이, 그 익문사 요원이 노리고 자신을 협박하고자 하는 것인지, 아니면 우연찮게 나온 것인지는 확신할 수 없었다. 아니, 어쩌면 그것이 우연이라고 자신이 믿고 싶은 것인지도 몰랐다.
채정혁은 현기증이 치밀어 오르는 느낌을 받았다. 눈앞이 흐려지는 느낌에 의자에 주저앉아 무어라 대답도 못하고 있는 채정혁을 남겨둔 채, 통신원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아시겠습니까, 채 참령님? 우리는 언제나 참령님을 주시하고 있다는 것을. 그럼 무운장구를 기원합니다. 또 뵙지요.”
그 말을 끝으로 사내는 찻값을 지불한 뒤 찻집을 나섰다.
채정혁은 한동안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한 채 창백한 얼굴로 생각에 잠겨 있었다. 15년 전 사건 이후 분명히 공식적으로 자신의 존재는 지워진 것이었다. 그리고 채정혁이라는 새로운 사람이 되었다. 그걸 알고 있는 사람은 자신과 양부모뿐일 터였다.
물론 익문사가 조사하려 든다면 못 밝혀낼 것도 없는 일이다. 그러나 하필 이 시점에서 이러한 사실을 알고 있음을 은유하는 것은 이해하기 힘들었다. 어쩌면 채정혁이 두려워하는 것은 익문사가 이 사실을 알고 있을지 모른다는 것이 아닐지도 몰랐다.
‘내가 무엇을 두려워하는 거지? 반역자의 아들이라서?’
반역자의 자식이라고 밝혀진다 한들 입헌국가인 한국에서 자신을 연좌로 처벌할 일은 없을 것이다. 물론 신분을 속이고 군대에 들어온 것에 대한 책임을 지고 군복을 벗어야 할 터였다.
‘그런 거야 아무래도 상관없다. 하지만 정아는?’
여동생은 아무것도 모른다. 그저 어릴 적에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남매가 양자로 입적된 것으로만 알고 있었다. 그 아이가 태어난 지 1년도 안 된 시점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알아서도 안 될 일이고, 알려져도 안 될 일이다. 누가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반역자의 딸을 상대해 주겠는가. 그들은 사회에서 버림받아 지금껏 성취한 걸 모두 잃고 최하층으로 굴러떨어질 것이다. 자신과 여동생의 꿈은 산산조각나고야 말리라.
자신이야 그걸 감내할 수 있다 쳐도, 정아가 알지도 못했던 일로 굴레에 빠져서는 안 될 일이었다.
채정혁은 마음을 다잡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건 내 과민반응에 불과하다. 앞으로도 아무 일 없을 것이다. 내일도 오늘과 똑같을 것이다. 하지만 정말 누군가 우리의 비밀을 알고 그것을 위협하는 무기로 삼는다면, 그때는…….’
찻집을 나서는 채정혁은 더 이상 더위를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초조한 걸음으로 용산의 대로변을 걸었다. 8월의 뜨거운 태양이 그의 등 뒤로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제3장 와신(臥薪)(1)
「다른 민족들의 역사는 해방의 역사이다.
그러나 러시아의 역사는 농노제에 의한 전제 체제의 역사이다.
……우리는 망치로 머리를 내려쳐서라도 각성해야만 한다!」
―표트르 야코블레비치 차다예프(П.Я.Чаад ев),
《역사철학에 관한 서한(Философические письма)》
「나의 러시아여, 그대는 어디로 향하여 달리고 있습니까? 대체 어디로 가는 것입니까? 대답해 주십시오!
……그대가 전 세계를 뒤로 젖히고 달려 나갈 때, 바람은 수천 조각으로 찢어지면서 으르렁거립니다. 그리고 언젠가는 모든 나라, 모든 제국도 어쩔 수 없이 비켜서서 당신에게 길을 내줄 것입니다!」
―니콜라이 바실리예비치 고골(Н. В. Г голь),
〈죽은 혼(Мёртвые души)〉
「러시아의 역사적 사명은 유라시아의 정치적 통일과……
칭기즈칸의 계승자이자 후예로서 아시아로 나아가는 것이다.」
―니콜라이 세르게예비치 트루베츠코이(Н. С. Трубецкой),
《칭기즈칸의 계보(Наследие Чингисхана)
발트해의 검푸른 바다 위로 낙조(落照)가 붉게 타오르며 떨어지고 있었다. 1861년의 9월, 이제 가을로 접어드는 북방의 수도는, 바다의 한가운데에서 마치 신기루처럼 솟아나 있었다. 바다 아래로 가라앉는 햇빛은 도시의 종탑을 비끼며 밤이 찾아오고 있음을 알렸다. 궁정과 박물관, 그리고 거대한 선착장과 도서관을 잇는 대로들 사이로 사람들은 밤을 준비하며 빠르게 흩어지고 있었다. 도시를 은은하게 가로지르는 네바강의 가교(架橋) 위에는 청지기들이 가스등에 불을 피우고, 사람이 빠져나간 상가의 점원들은 유리창에 커튼을 치고 문을 걸고 있었다.
160년 전 러시아의 서구화를 열망한 차르는 이 서쪽 바다와 마주한 늪지대 위에 서서 하나의 청사진을 그렸다. 늪은 메워지고, 도로가 닦이고, 항구가 건설되었다. 아무것도 없던 허허벌판 위에 하나의 웅장한 도시가 세워졌다. 이 아름다운 북방의 보석은 그 도시를 지을 것을 명령한 차르의 이름을 따서 상트페테르부르크라 불리게 되었다.
러시아는 끊임없이 서구화를 열망하는 제국이었다. 표트르 대제의 대개혁은 낙후하고 봉건적인 러시아 사회를 밑바닥부터 뒤흔들어 놓았다.
표트르 대제 이전의 러시아와 그 이후의 러시아는 근본적으로 다른 나라였다. 그는 군사, 사법, 행정과 같은 분야에서부터 일상적인 삶에 이르기까지 러시아인의 얼을 뒤흔들어 놓았다.
그들의 영혼은 야만적이나 엄숙했던 옛 삶에서 강제로 일으켜 세워져 이성과 근면을 주입받았다. 그의 치세에 이르러 러시아 제국은 하나의 신흥 강국으로 떠올랐다. 그러나 그의 성공적인 치세 또한, 근본적인 결함을 안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분명 페테르부르크는 수많은 사람들의 눈물과 피땀 위에서 건설된 도시였다. 늪지대는 모래와 자갈뿐만 아니라, 사람들의 시체로 함께 메워져 나갔다. 누군가는 그 도시의 건물 아래마다 하나의 주검이 묻혀 있다고 말했다.
도시뿐만이 아니었다. 체제의 변혁은 그만한 대가를 요구하는 것이었다. 표트르 대제는 성공적인 관료 제도를 정착시켰으나, 근본적인 신분제도에는 손을 대지 않았다. 일종의 타협으로 남은 러시아의 잔혹한 농노제도는 오랫동안 러시아의 발전을 가로막는 짐 덩어리로 남게 되었다.
표트르 대제 이후 크나큰 변혁이 없던 러시아 사회는 최근 20년간에 옛 개혁의 시대를 떠올리게 하는 변화를 겪고 있었다.
당대의 차르 알렉산드르 2세의 치하에서 러시아는 새로운 실험장이 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