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제국의 계보 1권(16화)
제2장 세련(細漣)(8)


“묘안입니다만, 전 위험한 투자는 잘하지 않는 편입니다.”
김지형은 스스로도 입에 발린 말임을 알면서도 떠보았다. 물론 그것을 내무독판이 알아차릴 정도로 허술하지는 않았다. 항상 남에게 자기 진짜 감정을 내보이지 않는 훈련이 김지형은 충분히 되어 있었다. 만약 자신의 부친에게 한 가지 고마운 점이 있다면, 담담하다 못해 인간미가 없을 정도의 냉정함을 물려준 것이라고 김지형은 생각했다. 과연, 김지형이 의도한 대로, 약간 조바심이 난 내무독판이 말을 빠르게 하기 시작했다.
“하, 누구보다 적극적으로 위험을 무릅쓰고, 거기서 항상 기대 이상의 이익을 뽑아내는 투자의 귀재인 남작이 할 말씀은 아닌 듯싶소? 우리 요동군은 동아에서 최강군이올시다, 남작. 지금의 한국군은 요동군을 당해 낼 여력이 없소. 물론 한국의 해군이 세기는 하지. 하지만 어차피 요동과 한국 사이의 전쟁이라면, 결국 육전이 아니겠소? 여기 있는 강 중장을 비롯한 참모부의 두뇌들이 이미 전쟁이 일어나면 반드시 우리의 승리로 끝난다고 장담하고 있소. 우리 요동은 언제고 한국이라는 산을 넘지 않으면 미래가 없다는 사실은 남작도 잘 알고 있지요? 만약 이 거대한 계획의 일부로서 성심을 다해 준다면, 아국의 승전과 더불어 귀사는 최고의 혜택을 받게 될 것이외다. 화북, 요동, 한국, 그리고 남양을 잇는 대 자본이 되는 것이오. 기대되지 않소이까? 빈말이 아니라, 요동국의 국익은 곧 성광사의 사익이오, 성광사의 사익이, 곧 요동국의 국익이 되게 될 것이외다.”
요동의 실세인 내무독판이 이렇게까지 말하는 데, 애초에 거절하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다. 더군다나 김지형은 내심 이 제안을 거부할 생각도 없었다. 그러나 몸값을 좀 더 불려서 나쁠 것은 없었다. 최대한 성광사의 사익을 포기하고 국익을 위해 고뇌 끝에 결심했다는 인상을 줄 생각이었다. 당연히 이 자리에서 즉답은 피해야 했다.
“잘 알겠습니다. 긍정적으로 검토해 보지요. 하루만 말미를 주십시오. 내일 다시 찾아 뵈도 되겠습니까?”
“물론이오. 좋은 답변을 기대하리다.”

집무실 안에서 내무독판은 고급 여송연을 물고 창문 밖으로 마차에 올라타는 김지형의 모습을 보고 있었다. 참모차장은 내무독판을 향해 우려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정부 기밀의 상당수를 저자에게 넘겼습니다. 저자는 한국 정부와도 관련이 깊은데, 신뢰할 수 있겠습니까?”
강일흠 중장의 말에 지정환 백작은 피식 웃으면서 답했다.
“물론, 저자는 믿지 못하지. 하지만 저자의 돈에 대한 감각은 믿네.”
이내 강일흠까지 내보낸 뒤, 지정환 백작은 생각에 잠겨 들었다. 노련한 관료인 동시에, 대외강경파인 그는 단순히 빈말이 아니라, 진심으로 요동의 국가정신을 믿어 의심치 않는 애국자였다.
그는 지난 순과의 전쟁의 뒤처리에서 한국이 주도해 자행한 「삼국간섭」에 분노했었다. 삼국의 요구에 부득이하게 요동이 전쟁으로 얻어야 마땅했던 성과를 토해 낼 때, 그는 진심으로 비통한 마음이었다.
이제 그에게 있어 한국은 같은 민족의 피를 나눈 형제국이 아니라, 요동의 앞길을 가로막는 가증스러운 적이었다. 한국에 의해 요동은 해양으로 진출할 길이 막혀 있었고, 왕국이 성장하기 위해 얻어야 하는 배후지조차도 정당하지 못한 간섭에 잃을 수밖에 없었다. 특히 산동 반도를 할양받지 못한 것은 국익의 손해 정도가 아니라, 나라의 자존심에 손상을 입힌 일이었다.
‘당장 오늘뿐만이 아니다. 한국 놈들은 언제고 우리 앞길을 가로막을 것이다. 지금 손을 보지 않으면, 이놈들은 우리를 영원히 깔보면서 자기들 영향력 아래에 두려고 하겠지……. 그럴 바에는 능력이 있을 때 손을 봐야 한다. 그 다음에는 순을 완전히 제압하고, 러시아를 격퇴하고, 양을 누른 뒤, 화남으로, 남양으로, 북방과 서역으로……. 요동이 만세에 물려줄 영광스러운 복토를 넓혀야 할 일인데!’
지정환 백작은 손에 들고 있는 술잔을 만지작거렸다. 독한 「철령소주(鐵嶺燒酒)」가 잔속에 담겨 있었다. 보통은 물을 섞어 희석시켜 먹기 마련인데, 지정환 백작은 물도 타지 않은 채 독한 술을 그대로 마시고 있었다.
‘지금의 금상(今上)은 지난 50년간 요동의 대업을 위해 노력하셨다. 그러나 세자는? 위대한 국왕의 그늘 아래에서 무력하고 나약하게 자라났지. 그가 앞으로 탄생할 새 제국에 걸 맞는 군왕이 될 수 있을까? 아니, 애초에 갑작스럽게 세자가 즉위하기라도 한다면, 요동이 뻗어 나갈 수 있는 길마저도 완전히 차단될 것이다. 아무리 의정부가 보좌를 하더라도, 어림없는 소리다.’
다시 한 모금의 소주를 들이키고 나서, 지정환 백작은 고개를 저었다.
‘세자가 즉위하면 의회의 반대 세력이 날뛸 테고, 주상이 지금껏 세워 오신 지도력과 권위는 일거에 무너질지 모른다. 가급적이면 세자가 왕위를 잇기 전에 한국과의 전쟁을 성공적으로 끝내면 더욱 좋을 일이고, 왕위 문제도…….’
이제는 다 빈 술잔을 탁자 위에 내려 두고서, 백작은 소파 깊숙이 몸을 묻었다. 그는 진심으로 강력한 왕권을 신봉했다. 당대의 요동국왕 김호가 그를 진심으로 감화시켰다. 강력한 전제 왕권과 단합된 국가 정신은 불가능한 것도 가능하게 만들어 준다는 것이 그의 신조였다.
만약에 경멸스럽기 짝이 없는 한국의 의회정치와 같은 것이 요동에서도 벌어진다면, 열강들의 틈바구니에 있는 내륙국인 요동은 오래 지속될 수 없다는 것이 그의 판단이었다. 요동에는 강력한 지도자가 필요했다. 안으로는 반대 세력을 억누르고 밖으로는 외세를 제압할 군주가.
그렇기에 그는 이번 전쟁의 영웅으로 떠오른 영화군 김욱을 흥미롭게 주시하고 있었다. 물론 그가 어린 나이에 지도력을 발휘할 수 있는 자리에 오른 것은, 서자라고 해도 왕자라는 신분 덕이었다. 그러나 그는 주어진 권한을 통해 자신의 재능을 충분히, 아니, 기대 이상으로 훌륭하게 입증했다. 아직은 나이 스물에 가능성을 알 수 없는 원석에 불과하지만, 이 왕자는 명군으로서의 자질을 이미 보여주고 있었다.
‘……영화군, 그가 세자보다야 훨씬 인물이지. 왕위에는 재목이 되는 사람이 앉아야 한다. 그래야 주상이 세운 강한 왕권의 단결된 국가가 지속될 수 있다. …… 영화군에게 제왕의 자질이 있는지 좀 더 지켜보도록 할까.’
백작은 지그시 눈을 감으며 앞으로 벌어질 일들에 대해 생각했다. 아마 얼마 가지 않아 요동에도 격랑(激浪)이 몰아치게 될 터였다.

내무아문을 나와 마차에 오른 김지형은 이미 마음을 굳힌 뒤였다. 물론 위험한 투자라는 것은 잘 안다. 그러나 어차피 이대로 가다간 한국 자본의 공세에 시달리는 상황이 계속될 것이 뻔했다. 이것이 장기화되면 한국 시장은 포기해야 할 판국이다.
‘뭔가 전환점이 필요하긴 하지. 근데 그게 김요섭 일당을 돕는 것에서 시작이라.’
세상 참 재미가 있다고, 김지형은 생각했다. 그는 김요섭을 원망하기는커녕 결과적으로 그 일을 터트려 준 것에 내심 고맙다고 해야 할지도 몰랐다.
20여 년 전, 북해에서의 그 테러로 인하여 아버지 김현은 중상을 입고 경영 일선에서 물러나야 했다. 원체 까탈스럽고 냉담하게 사업에 관한 것만 생각하던 아버지였으나, 다리를 잃을 정도의 중상에는 버텨 내지 못했다. 그의 공백을 메우기 위해 사주 대리로 업무를 수행하기 시작한 것이 김지형이었다.
그는 아버지보다 더욱 냉정하고 계산적인 안목으로 사업을 하나둘 자신의 아래에 장악시켜 가면서 그 규모 또한 키워 나갔다. 나중에 건강을 어느 정도 회복한 김현이 일선에 복귀하려 했을 때, 김지형은 건강이 아직 완전히 회복되지 않았다며, 편안한 노후를 보내라며 김현을 반강제적으로 사업에서 밀어내 은퇴시켰다.
김현은 이미 모든 실권이 아들에게 넘어간 것을 알고 경악했으나, 이미 일은 벌어진 뒤였다. 이제 와서 한탄해 봐야 소용이 없었다. 김현은 어쩔 수 없이 뒷방 늙은이로 물러나야 했다. 이후는 김지형의 세상이었다.
김지형이 실권을 잡고 20년, 성광사의 자본은 비약적으로 발전해 나갔다. 이미 극동에서 성광사와 겨룰 만한 대자본은 손에 꼽을 만했다. 그러나 김지형은 이 정도에 머무를 생각이 없었다. 그는 재계의 실세로는 만족하지 못했다. 내성의 명문거족들은 겉으로는 정중할지 모르나, 아직도 김지형의 가문을 돈벼락 맞은 졸부 취급을 하고 있었다. 자식들을 모두 명문과 정략결혼을 시켜 튼튼한 인척 관계로 만들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여전히 자신의 볼품없는 남작 작위와 귀족질서 하에서의 위치에 불만이 많았다. 이것은 그가 생각하기에 절대 자신 같은 인물에게 합당한 대우가 아니었다.
‘그 옛날 거상 여불위는 돈과 모략으로 왕을 만들었다. 그보다 더한 부를 지닌 내가 여불위보다 못할 것은 무엇인가? 언제고 요동, 아니, 천하가 이 돈으로 움직이게 될 것이다. 이제 곧 국왕은 수명을 다 할 것이고, 다음 왕위에 세자가 오르려 하겠지. 그러나 그것은 결코 쉽게 되지는 않을 것이다. 명문거족의 그늘 아래에서 제 편한 대로만 사는 그런 놈팡이를 왕위에 앉힌다?’
김지형은 고개를 저었다. 그는 세자를 머릿속에서 지우고 영화군 김욱을 떠올렸다. 정상적인 상황이라면, 세자가 있는 지금, 막내이자 서자인 그가 왕이 될 가능성은 전무했다. 그러나 이미 나이 마흔이 가까운 세자가 왕의 기대에 못 미치는 무능하고 허약한 인물일뿐더러, 더욱이 다음 후계자가 될 자식조차 만들지 못한 상황이었다. 그렇다면, 만약에 세자만 사라져 준다면, 김욱에게는 충분히 대권의 가능성이 있었다.
젊은 시절, 김지형과 친분이 있었던 전 세자 김건이 죽고 왕실과의 끈이 끊긴 이래로 김지형은 절치부심해 왔었다. 형 김건에게 열등감을 느끼고 있었던 지금의 세자 김손은 의도적으로 자신의 지지층을 움직여 김지형을 견제하고 있었다. 때문에 김지형에게 있어서 김손이 왕위를 계승하는 것은 손해 중의 손해에 가까웠다. 막을 수 있다면, 막는 편이 그에게는 당연히 이득이었다.
‘진짜 투자는 이런 배당이 높은 일에 판돈을 거는 것이지. 정치라고 다를 바 없다. 내가 그에게 적절한 투자를 하고, 그가 왕이 된다. 그리고 그다음엔…….’
이제 세상은 봉건적인 명문귀족들의 시대가 아니라 자본의 시대였다. 김지형은 자본을 가진 자가 이 세상의 실질적인 왕이 될 수 있음을 굳게 믿고 있었다. 왕위 계승이라는 장기판 위에다가 충분히 경쟁력 있는 말 하나 올려 두는 것은 나쁘지 않은 투자였다.

한 달의 휴가를 마치고 채정혁은 정식으로 참령 승진 사령장을 받았다. 북해의 둔하(屯河) 진위연대 제2대대장의 보직이었다. 채정혁은 인사부에 보직 이동을 고한 뒤, 모처럼 참모부의 고재완 정령을 만났다. 고 정령은 채정혁의 북해행에 아쉬워하면서도 이것이 새로운 기회가 될 것이라고 격려했다.
“춥고 외진 곳이지만, 그만큼 우리 군부에서도 중요하게 생각하는 지역일세. 둔하 일대에서부터 요동의 국경연선에 이르는 곳까지, 울창한 삼림을 중심으로 북해의 반란분자들이 암약하고 있네. 때문에 이곳에서의 군사적 안보가 절실한 시점이네. 이곳에서 전공을 올린다면 자네는 동년배에서는 매우 탁월한 성과가 될 걸세. 물론 더 좋은 자리도 따라서 오겠지.”
고재완 정령과의 면담을 마치고, 참모본부를 나선 채정혁은 8월의 무더위에 빨리 승합마차에 올라 작열하는 햇살을 피하려 했다. 낯선 얼굴의 사내가 채정혁의 어깨를 부여잡은 것은, 그가 막 용산의 육군본부 앞을 지나가는 승합마차에 오르려 할 때였다. 그는 어깨를 잡은 것이 미안하다는 듯, 멀쑥한 미소를 지으며 친근하게 채정혁에게 말을 붙여왔다.
“채정혁 참령님이 아니십니까? 승진 축하드립니다.”
채정혁은 갑작스러운 이 사내의 행동에 불쾌감을 느꼈다.
승합마차에 못 타게 된 것뿐만이 아니라, 낯선 이에게 어깨를 잡아채인 것이 더 기분이 나빴다.
그러고 보니, 이 사내를 본 기억이 없는데도 자신의 관등성명과 승진 여부까지 알고 있었다. 채정혁은 좋지 않은 기분이 들었지만, 우선은 사내의 정체부터 알아야 했다.
“실례지만, 누구십니까?”
“아, 소생은 그저 통신원이올시다. 잠시 채 참령님과 이야기를 좀 나눴으면 해서 말입니다. 이거 무례한 줄 알면서도, 급한 마음에 실례했습니다. 날도 더운데 저기 길가의 찻집으로 가시지요.”
통신원. 그 말에 채정혁의 얼굴이 일순 굳어졌다. 일반적으로 통신원이란 신문사에 소속된 정보원을 말하는 것이었으나, 사내가 슬쩍 내보인 허리춤 사이로 보이는 것은 분명히 마패(馬牌)였다. 얼핏 보기에도 진짜임에 분명해 보이는 그 마패는, 바로 제국익문사의 상징이었다. 제국 최대의 정보기관인 익문사는 겉으로는 연합통신사로 위장한 내각 직속의 첩보 부서였다. 일반인들은 익문사의 존재를 거의 인지하지 못하고 있으나, 익문사가 하는 업무는 국내첩보·대외정보수집·기관사찰·정보조작 등 다양한 영역에 걸쳐 있었다. 그들의 행동은 거의가 대외비에 붙여지는 것이었다.
익문사가 정확히 무엇을 하는지는 내각 수상과 관련 부처의 특정 인사만이 알고 있을 정도였다. 군에 몸을 담고 있는 채정혁도 익문사의 존재와 그 하는 일에 대해서 막연히 존재만 알고 있는 정도였다.
그 익문사가 무엇 때문에 자신을 찾는단 말인가?
긴장감을 느낀 채정혁은 찻집에서 요원과 자리를 마주 앉자마자 그것부터 알고 싶어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