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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의 계보 1권(15화)
제2장 세련(細漣)(7)


“게 서거라, 이놈들! 헉헉!”
한 손으로는 곤봉을 들고 한 손으로는 등을 든 순검은, 종래에 그들의 빠른 발을 쫓지 못한 채, 더 이상 추격을 포기하고 채정혁과 채정아가 있는 곳으로 다가왔다.
“괜찮으십니까? 헉헉! 이거 나이가 들다 보니, 뛰는 것도 시원찮아져서 말입니다.”
순검은 땀이 잔뜩 묻은 이마를 소매로 훔쳐 닦고서는, 채정혁을 바라보며 말했다.
“네, 덕분에…….”
순검은 그들 남매를 위 아래로 살펴보더니 이내 굳은 표정이 되었다. 그가 보기에 이런 노동자 구역에 있을 만한 사람들이 아니었던 것이다. 혹여나 노동자를 선동하기 위해 들어온 황성의 샌님들이면 곤란한 노릇이었다.
“뭐하시는 분들이십니까? 신분증 좀 볼 수 있을지.”
갑작스러운 요구에 정혁은 약간 불쾌감을 느꼈지만 요구대로 지갑에서 휴가증을 꺼내 그에게 보여줬다. 순검은 읽어 보더니 화급히 거수경례를 올려붙였다.
“아, 육군 장교시군요! 이거 몰라봐서 죄송합니다. 여기가 워낙 치안이 좋지 못한 곳이라서요. 이런 확인 절차가 요즘 불가피하게 필요합니다.”
실례했다는 듯 살찐 순검은 얼굴에 난처한 미소를 떠올리면서 증명서를 채정혁에게 돌려주었다.
굳이 순검의 행동을 따질 생각이 없었던 채정혁은, 간단히 괜찮다는 표시로 고개를 주억이고 나서는 순검에게 물었다.
“아닙니다. 그런데 이런 일이 여기서 잦습니까?”
그 말에 순검은 침을 튀겨 가며 일장연설을 토해 냈다.
“말도 마십쇼. 워낙 흉악한 놈들이라서 말이죠. 아, 저 새끼들, ……표현이 거칠어 죄송합니다. 그만큼 쓰레기 같은 놈들이라서요. 여튼 공장에서 개기다가 짤린 놈들인데, 개 버릇 어디 못 준다고 심심하면 지랄입니다. 지들 잘못은 생각 안 하고, 아니, 어느 누가 자기 돈 주는 사람한테 대든단 말입니까? 일자리를 주는 것만도 고마운 줄 알아야지. 정말 웃기는 소리죠. 저런 놈들을 어떤 사장이 쓰겠습니까? 나라도 안 쓰죠. 언제 한 건 걸리기만 하면 단단히 혼 좀 내줄 겁니다. 그렇잖아도 요새 시국이…….”
순검의 말이 끝날 기미도 안 보일뿐더러 곁에 선 채정아의 표정이 점점 더 어두워지는 것을 본 채정혁은 얼른 이곳을 떠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잘 알았습니다. 그럼 이만 가 봐도 되겠습니까? 동생이 많이 힘들어하는 것 같아서.”
“아, 예 물론입니다. 제가 숙소까지 모셔다 드릴까요?”
별로 순검과 더 시간을 보내고 싶지 않았던 채정혁은 제안을 정중하게 거절했다. 대신 그는 숙소로 가는 길만을 알려 주길 청했다.
생각보다 숙소는 그다지 멀지 않았다. 그러나 큰길을 건너서 노동자 구역 밖으로 나가야 했다. 역시 헤매다가 잘못 기어들어 온 것이 잘못이었다.
“정아야, 괜찮니?”
채정혁의 옆에서 말없이 걷던 채정아는 그 말에 고개를 올려다보았다.
“……오라버니.”
“왜?”
“저 사람들 너무 탓하지 마세요. 불쌍한 사람들이에요. 잘못된 것이 있다면 이 세상에 있지 저 사람들에게 있는 게 아니에요.”
그는 동생의 갑작스러운 말에 적잖이 놀랐다. 원래 동생이 착하고 마음 씀씀이가 넓은 아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 정도로 생각이 깊을 줄은 몰랐다. 동생의 표정이 좋지 않았던 것이, 단순히 두렵거나 기분이 나빠서가 아니었다는 것을 채정혁은 알아차렸다.
“그래, 네 말이 맞다…….”
채정혁은 한숨을 내쉬며 하늘에 뜬 달을 쳐다보았다. 스산한 골목길 위로 외로운 초승달이 희끄무레한 빛을 내뿜고 있었다. 괜스레 마음이 울적해지는 기분이었다.

***

1861년 8월, 요동 성경부의 관가(官街)에 자리한 내무아문(內務衙門) 건물로 고급 정장을 차려 입은 남자가 정중한 안내를 받아 들어섰다. 이내 널찍한 독판내무부사(督辦內務府事), 곧 한국의 내부대신 급인 내무독판의 집무실의 문이 열렸다. 그는 자연스러운 태도로 집무실로 들어서서 모자를 벗고 앉아 있는 내무독판에게 목례했다.
그는 바로 성광사주 김지형(金智炯)으로, 원래 정부에 수많은 인맥을 가지고 있었기에 이러한 방문은 흔히 있는 일이었다.
이권이 걸려 있든 없든 내각과 정부에 인간관계를 만들어 놓고 수시로 기름칠을 하는 것은 그의 주요한 할 일 중 하나였다. 그러나 오늘 굳이 내무아문을 찾아온 것은 원하는 목적이 있어서였다.
그렇잖아도 한 번 찾아볼까 하던 차에 때마침 전보를 통해 내무독판이 찾는다는 전갈이 온 참에 주저하지 않고 김지형은 내무아문으로 향했다.
김지형은 그간 평양 박람회를 둘러보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그가 원체 한국에도 적지 않은 자본을 투자하고 있었기에, 압록강을 건너 한국을 드나드는 것은 종종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는 이번 평양 방문에서 시선이 곱지 않은 것을 느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성공한 대자본가인 그가, 모종의 질시와 증오를 받는 것은 익숙한 일이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조금 그 결이 달랐다. 질투심에서 나온 견제가 아닌, 한국의 동료 자본가들이 그를 바라보는 눈길이 심상찮았던 것이다.
그다지 겉으로 드러나는 태도는 차이가 없었지만, 미묘한 공기의 다름도 김지형의 예민한 감각을 비켜 갈 수는 없었다. 당초에 한국 재계에서 성광사의 사업 독점에 불만이 많은 것은 주지의 사실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완전히 한국에서 그를 몰아내기 위해 그들끼리 담합이라도 한 모양이었다. 흔히 있던 오찬 약속조차 응하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이제는 새로운 돌파구가 필요한 시점이었다. 이번 방문에서 뭔가 새로운 걸 얻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그는 내무대신의 집무실에 들어섰다.
“어서 오시오, 남작.”
내무독판의 집무실로 들어서자, 작금의 요동국 독판내무부사의 자리에 앉아 있는 지정환(池精煥) 백작이 반갑게 그를 맞이했다. 그는 요동의 명문거족인 성내 5가 중 하나인 동녕 지씨의 일원으로, 심양왕립대학을 졸업한 이후 순탄하게 관료생활을 해 비교적 이른 나이에 내무독판의 자리까지 오른 이였다.
국왕 전제가 점차 강화되며 의정부와 삼정승이 무력화된 현 시점에서, 내무독판이야말로 정부의 실무를 맡는 사실상의 최고위직이었다.
김지형은 집무실에 들어서자마자 내무독판의 곁에 낯설지 않은 인물이 함께 배석해 있는 것을 눈치챘다. 다름 아닌 군부의 참모차장인 강일흠(姜壹欽) 중장이었다. 대외 강경파로 유명한 참모차장이 내무독판의 영향력 아래에 놓여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관가의 인물들이야 다들 알고 있는 사실이었지만, 성광사주와의 만남에 굳이 함께하고 있는 이유는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김지형은 강일흠 중장에 대한 경계심을 풀지 않고 얼굴에 가식적인 미소를 떠올리며 내무독판의 인사에 화답했다.
“그간 격조했습니다. 백작 각하. 찾으신다는 이야기를 듣고 지체 없이 달려왔습니다.”
“하하, 뭐 그리 급하게 올 필요는 없었는데. 남작이 한국에서 어제야 돌아온 줄 알았으면 이렇게 바로 부르지는 않았을 게요.”
내무대신은 넓고 편한 소파에 앉기를 권한 뒤, 은근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오늘 내가 남작을 부른 것은 말이오, …… 긴히 부탁할 일이 있어서요.”
“어떤 부탁 말씀이십니까?”
김지형의 되물음에, 내무독판 지정환 백작은 서두를 것 없다는 듯 손을 저으며 소파 깊숙이 몸을 묻으며 입을 열었다.
“이야기는 천천히 합시다. 그전에 남작에게 한 가지 묻고 싶소. 성광사는 요동국의 자본이지요?”
“물론입니다, 각하. 요동국의 이익이 곧 성광사의 이익이지요.”
김지형의 대답이 만족스럽다는 듯, 내무독판은 껄껄 웃으면서 손에 낀 반지를 쓰다듬었다. 기분이 좋을 때 나오는 습관이었다. 그러한 사실을 잘 알고 있는 김지형은, 내무독판이 손을 예의 주시하고 있었다.
“역시 남작은 애국자이시오. 나라를 위해서는 아끼는 게 없으니 말이외다. 남작이 말 한 바와 같이 나라가 잘되어야, 우리 같은 사인들도 잘되는 것이 아니겠소? 거, 강 중장, 여기 김지형 남작에게도 그걸 좀 보여주시오.”
“예. 각하.”
옆에서 말없이 앉아 있던 강일흠 중장이 품에서 사진 한 장을 꺼내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안경을 쓰고 수염을 기른 중년의 사내를 찍은 사진이었다. 얼핏 보기에는 학자연하는 샌님처럼 보였지만, 눈빛 하나는 기이할 만치 강렬한 사람이었다. 어디선가 보았던 느낌이 들었지만, 김지형에게는 낯선 얼굴이었다.
“이것이 누구지요?”
“아무리 못 본 지 오래되었기로서니, 남작은 사촌 동생도 몰라보시오? 북해 분리주의자의 수괴, 김요섭이올시다.”
김요섭이라는 이름을 듣자, 김지형은 1840년의 테러 사건이 불현듯 떠올랐다. 영안부에서 열린 북해합방의 기념식장이었다. 행사가 시작되려던 찰나, 갑자기 폭탄이 터지고 총탄이 오고 갔었다. 그 혼란스러운 현장에서 김지형도 하마터면 저승길에 오를 뻔했다.
어지간한 일에는 꿈쩍도 않는 냉담한 그였지만, 그때의 일을 생각하면 불현듯 모골이 송연해지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운 좋게도 그는 파편이 볼에 스치며 난 조그만 상처를 제외하고는 멀쩡히 그곳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그러나 만약 총탄이 조금만 더 왼쪽으로 날아왔다면, 그는 꼼짝없이 생을 마감하거나 병신이 되었을 것이다.
김지형에게는 불행인지 아니면 다행인지, 동석했던 아버지 김현은 아들만큼 운이 좋지 않았다. 폭탄의 반경 안에 있었던 그는, 중상을 입고 한쪽 다리를 잘라 내는 대수술을 해야만 했다.
그리고 종래에는 그 후유증으로 두고두고 고생하다가 경영 일선에서 물러나야 했었다. 김지형은 그 기회를 삼아 성광사를 아버지 손에서 완전히 빼내 와 장악할 수 있었다.
그는 나중에 제국 경찰의 수배서가 나온 다음에, 북해에서의 테러 행위에 자신의 사촌인 김요섭이 가담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사촌이라뇨. 이미 아버지 대에 절연한 폐족입니다. 새삼스럽게 이자에 대해 뭔가 알고 싶은 건 아니실 테고…… 본론을 말씀해 주시지요.”
김지형의 표정이 별로 좋지 않은 것을 보고서는, 내무독판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서는 강일흠 중장을 바라보며 말했다.
“좋소. 강 중장, 설명해 주시오.”
그때까지 침묵을 지키고 있던 참모차장 강 중장이 묵직한 입을 열었다. 그가 말하는 것을 대강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었다.
작년 9월에 이르러 자칭 북해해방전선(약칭 북해전)이라는 분리주의자들의 연합전선이 등장했다. 북해전은 북해해방군이라는 독자적인 군대를 창설하여, 북방의 울창한 숲과 산지를 근거로 대한제국에 대한 유격전을 전개하기 시작했으나, 아직 그 세력은 미약한 것이었다.
그러나 요동에서는 이 세력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지금은 잠잠하지만, 북해의 분리주의는 언제 다시 터질지 모르는 뇌관과 같은 것이었다. 이 세력의 활동과 선전이 활발해진다면, 북해 전역에서 필히 다시금 동요가 발생할 것이었다.
요동 정부는 한국이 북해 문제에 발목이 잡히기를 기대하던 차에, 이들의 존재를 파악할 수 있었다. 만약 이들에게 무기와 군자금을 지원한다면 이들이 장기적으로 한국의 움직임에 거추장스러운 방해물이 되어 줄 터였다.
“……그러한 이유로, 저와 내무독판 각하, 아니, 요동국 정부라고 하지요. 정부에서는 성광사주께서 회사를 통해 이들에게 지원해 주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강일흠의 말이 끝나자, 김지형은 눈매를 좁히며 되물었다.
“말씀하신 바는 알겠습니다. 그런데 왜 이 일을 특무사가 나서지 않고 성광사가 해야 합니까?”
“정부가 나설 수 없기 때문이오. 우리가 아무리 북해의 소요를 바란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정부의 계획으로 진행될 수는 없소. 우리가 아무리 교묘하게 포장한다 한들 제국익문사도 놀고먹는 조직은 아니니까. 그러나 성광사가 나선다면 좀 이야기가 달라지지.”
김지형은 양이 태평국과의 전선에 발이 묶여 있고, 러시아와의 국경분쟁이 마무리된 지금, 한국이야말로 요동의 행보에 사사건건 방해를 하는 가상의 적 제1호임을 익히 잘 알고 있었다.
상황이 그렇다 보니 양국 모두에 막대한 자본을 투자하고 있는 그로서는 상당히 난처한 형국이었다. 그러나 어차피 이 상황을 길게 끌고 갈 수 없다면, 김지형도 나름의 활로를 확보해야 할 시점이었다. 애초에 그런 이유로 내무독판을 볼 생각이지 않았던가.
그러나 내가 좀 급하다 해서, 가진 패를 다 드러내고 먹이를 조르는 개처럼 침 흘리며 달려들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각하께서도 잘 아시겠지만, 성광사는 한국에 투자한 자본이 어마어마합니다.”
“물론 잘 알고 있소. 허나 요동국의 이익은…….”
김지형은 다소 무례해 보일 수 있지만 내무대신의 말을 끊었다.
“물론 요동국의 이익이 성광사의 이익이지요. 그러나 이 경우는 다르지 않습니까?”
“그렇다 칩시다. 그러나 남작, 생각해 보시오. 우리가 순과 전쟁을 일으킬 때 명분 중 하나가 순이 요동의 자본을 몰수한 것이었지요. 그때 성광사도 꽤 손해를 본 것으로 아는데.”
“그랬습니다.”
김지형이 관심을 가지는 것처럼 보이자, 내무독판 지정환 백작은 김지형에게로 몸을 가까이 붙이며 목소리를 낮췄다.
“하지만, 평화 조약의 결과 성광사는 두 배로 보상을 받고 대 순 투자는 더 활발해졌지요. 이번 승전이 아니었으면 성광사가 화북에 이토록 영구적으로 안정적인 발판을 마련할 수 있었겠소? 이쯤 되면 명민한 남작은 이해가 다 되었으리라 보는데, 어떻소이까?”
물론 김지형은 이미 내무대신의 말을 다 이해하고 있었다. 성광사가 나서서 북해의 분리주의 세력을 후원하여, 만약 들키지 않으면 더욱 좋을 것이고, 혹여 발각이 되어 제국 정부가 한국 내의 성광사 자본을 몰수하고 전쟁의 명분으로 삼더라도 상관이 없었다. 오히려 그럴 경우, 요동에게도 적절한 명분이 한국에게 생기는 셈이었다. 만약 그렇게 전쟁이 발발하여 요동이 승리를 거둘 경우, 몰수된 한국 내의 성광사 자본은 순에서 그랬던 것처럼 몇 배로 보상받게 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물론 요동이 한국에 대해 승리한다는 보장은 없다. 그러나 어차피 한국 내에서 우리 성광사의 위치가 갈수록 좁아지는 것도 현실.’
생각은 이미 움직이고 있었지만, 김지형은 부러 난색을 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