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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의 계보 1권(14화)
제2장 세련(細漣)(6)
“저 썩어 빠진 놈!”
“권력의 개에게 뜨거운 맛을 보여주자!”
“아주 다시는 저런 허튼소리를 못하도록 혀를 뽑아 버려야 해!”
“사장 앞잡이인 반장놈부터 족쳐 버립시다!”
점차 분위기는 격앙되어 가고 있었다.
노동자들의 예기치 못한 반응에 기세등등하던 경찰과 반장은 당황했다. 이대로 가만히 있다가는 꼼짝없이 맞아죽을 판이었다.
노동자들의 반응에 놀란 것은 그들 뿐만은 아니었다. 이관휘는 단상 위에서 목청껏 소리쳤다.
“안 됩니다, 형제들! 폭력은 절대로 안 됩니다!”
노동자들의 아우성이 터져 나왔다.
“뭐가 안 된단 말이오? 저놈들은 우리를 매일같이 두들겨 패는데!”
“똑같이 갚아 줍시다!”
이관휘는 우선 노동자들은 진정시켜야 했다. 이것은 그가 바라는 방향이 아니었다.
“안 됩니다. 저들이 폭력을 행사한다고 해서 우리가 저들과 똑같이 행동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어디까지나 평화적으로 저들과 맞서 싸워야 합니다! 여러분의 부모와 아이, 부인과 형제자매 앞에서 부끄럽지 않은 사람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관휘의 필사적인 설득에 노동자들의 격앙은 점차 잦아들었다. 이관휘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꼼짝도 못하고 사색이 되어 있는 경찰과 반장을 보내줄 것을 요구했다. 그들은 헐레벌떡 서둘러 공장 밖으로 도망쳤다.
“형제들이여! 여기 준비된 깃발들이 있습니다. 여기에 우리의 요구를 적어 들고 밖으로 나가 행진합시다.”
이관휘의 지휘에 따라, 글을 아는 일부 노동자들이 나서서 대부분 문맹인 나머지 노동자들의 외침을 하나둘 적어 나갔다.
10시간 이하의 노동, 매주 일요일 휴식의 보장, 법정 최저 임금의 도입, 산업재해보험의 적용, 체벌의 중지, 부당 해고 반대…….
만족스럽게 하나둘씩 만들어지고 있는 현수막(懸垂幕)들을 바라보며 이관휘는 아직 비어 있는 하나의 흰 천으로 된 현수막 위에다가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라고 적었다.
그는 얼굴 만면에 웃음을 띠우고서 방금 쓴 그 현수막을 쥐어 들고서 노동자들을 향해 외쳤다.
“형제들, 우리의 요구를 펼쳐 들고 밖으로 나섭시다! 평화적인 시위를 통해서 우리가 원하는 것을 알리고 반드시 쟁취합시다!”
삑! 삐익!
그때 찢어질 듯 공기를 가르는 호루라기 소리와 함께, 일단의 경찰들이 공장으로 들이닥쳤다. 분명히 아까 쫓겨난 두어 명의 경찰이 본대에 사실을 보고하고 기동대를 꾸려 난입한 것임에 분명했다.
그중에는 위압적으로 말 위에 올라타서 곤봉을 거침없이 휘두르는 기마경찰들도 있었다.
장내는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더러는 말발굽에 채이고, 더러는 곤봉에 두들겨 맞아 의식을 잃고 있었다.
“반란 선동자들이다! 모두 잡아들여!”
“이게 무슨 짓들이오! 당신들은 부끄럽지도 않소!”
단상 위의 이관휘가 눈앞에 벌어지는 폭력 사태에 절규하듯이 외쳤다.
“저놈, 저놈부터 끌어내! 저놈이 주모자다!”
쫓겨났던 경찰이 그를 지목하자 경찰들이 달려들었다.
노동자들이 방어진을 치고 대항했지만 맨 그들로선 곤봉을 휘두르는 경찰들을 당해낼 수가 없었다.
‘아,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겨우 이것뿐이란 말인가?’
이관휘는 눈앞에서 펼쳐지는 지옥도에 저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나왔다. 그는 애써 저항해 보았지만 소용이 없었다.
일부 노동자들이 이관휘를 구하기 위해서 달려왔지만 이미 그의 양쪽 팔은 경찰들의 손에 쥐어 잡혀 있었다. 그는 이윽고 쏟아지는 곤봉 세례 속에서 정신을 잃었다.
다음 날 어느 신문에도 공장에서 발생한 일은 보도되지 않았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신문은 조용했다.
박람회의 안전과 원활한 진행을 위해 아예 노동자 구역 일부가 봉쇄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알지 못했다.
채정혁은 휴가를 맞아 여동생 정아 함께 평양 만국박람회 구경에 나섰다.
26세의 나이로 참령으로 진급한 그는 곧 북해 진위대의 대대장으로 보직을 받아 부임 예정이었다. 그곳은 북해분리주의자들의 유격군이 출몰하는 지역으로, 제국 전 지역에서 유일하게 총성이 끊이지 않는 지역이었다. 정식으로 발령이 나기 전에, 잠시 유예기간 삼아 휴가를 내주어 평양까지 나올 수 있었다.
‘이게 도대체 승진인지 좌천인지…….’
채정혁은 입맛이 씁쓸했다.
분명 계급은 올랐지만, 발령받게 된 부임지는 모두가 기피하는 지역이었다.
날씨는 춥고, 소요는 끊임없이 일어나는 곳.
상부에서는 그의 참전 경력과 그간의 성과를 보아 적임자로 판단했는지 모를 일이지만, 적어도 채정혁은 그곳으로 가게 된 것이 죽어도 즐겁다고는 말을 못할 상황이었다.
더군다나 동생과도 떨어져서 가야 하는 길이니 마음이 편할 리가 없었다.
그러나 이미 결정은 났으니 채정혁으로서는 상부의 명령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명령은 명령이었다.
아쉬운 대로 그는 북해로 가기 전 마지막 휴가를 여동생과 평양에서 보낼 작정이었다.
양아버지는 채정혁에게 이제 결혼할 나이가 되었으니, 참한 아가씨와 선을 보지 않겠느냐 제안했지만, 그는 아직 때가 아니라며 일축했다. 그는 동생의 대학 진학에 관한 문제만으로도 정신이 없었다.
이제 고등여학교 졸업반인 채정아는 열일곱이었다. 나들이용 양장을 입은 그녀는 어느덧 숙녀 티가 완연하게 드러나고 있었다.
체구는 아담하지만 나긋나긋했고,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은 얼굴은 누가 봐도 감탄이 나올 외모였다. 단아하고 동양적인 눈썹 아래의 커다란 눈이 인상적인 얼굴이었다.
그들 남매가 지나갈 때는 남자들이 한 번씩 고개를 돌리곤 했다. 그럴 때마다 채정혁은 묘한 경계심과 자부심을 동시에 느꼈다.
고개를 돌리는 것은 남자들 뿐만은 아니었다. 채정혁도 오늘은 한껏 멋을 부린 채 나온 길이었다. 늘씬한 체구에 단단한 몸매, 그리고 꽤나 인상적인 외모를 가진 그는 서구식 정장과 중절모와 잘 어울리는 체형이었다.
그는 요새 유행하는 「하이―카라 신사」처럼 보였다.
“오라버니, 이것 좀 보세요!”
채정아는 박람회를 위해 잡아온 남양의 신기한 새들을 보며 즐거워했다.
채정혁은 그 모습을 보며 평양까지 온 것이 잘한 일이다 싶었다.
박람회는 과연 동양 최초의 만국박람회답게 볼 만했다. 근대 기술과 다양한 볼거리가 어우러진 박람회는 연일 사람들로 성시였다. 그러나 정혁은 그중에서도 최고의 인기인 남양관의 인종 전시회는 가지 않기로 했다.
섬세한 감수성의 여동생이 사람을 전시하는 모습에 상처를 받을까 봐 우려해서였다. 그 자신도 그런 모습은 보고 싶지 않았다. 더군다나 사람까지 미어터질 것을 생각하니, 발걸음을 하지 않는 편이 나을 듯싶었다.
대신에 채정혁과 채정아는 비교적 사람들이 많이 몰리지 않는 전시관들을 중심으로 구경했다.
특히 한산한 곳에 위치한 시암관에서 오래 머물렀는데, 남방의 불교문화에 대한 책을 일전에 읽고서 관심을 보이던 채정아가 꼼꼼히 이것저것 둘러보느라 한참을 그곳에서 있었던 것이다.
첫날의 관람을 마치고 둘은 요사이 유행하는 양식집에서 저녁 식사를 한 후, 숙소를 향해 길을 떠났다.
숙소는 평양 서쪽 외곽 지역에 있었다. 한산한 주택 지역 한가운데 자리한 이곳은, 시설이 그다지 훌륭한 편은 아니었지만, 값이 싸고 깔끔하다고 평양에 오기 전에 추천받은 곳이었다.
주소를 이미 적어 둔 뒤라 찾아가기 어렵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었는데, 예상치 못하게도 초행길이라서 그런지 도통 길을 찾을 수가 없었다. 지도를 보며 지름길이랍시고 접어든 길은 점점 어둡고 낡은 골목으로 접어들고 있었다.
“오라버니, 이 길이 맞나요? 아무래도 아닌 것 같은데…….”
“잠시만, 다시 한 번 지도를 봐야겠다.”
채정혁은 주머니에 접어 넣을 수 있을 정도의 조그만 시가(市街) 지도를 보며 끙끙댔다. 그러나 손바닥만 한 지도에서 지금의 위치를 확인하는 것은 좀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육군유년학교 시절부터 독도법(讀圖法)은 항상 좋은 성적을 거두었던 채정혁이었으나, 이렇게 복잡한 도시의 골목길을 잘 헤아려 가는 것은 쉽지 않았다.
“여보쇼, 신사 양반. 재미 좋구먼?”
그때 어디선가 나타난 세 명의 사내가 그들을 둘러쌌다. 그들은 궐련을 입에 꼬나물고서 품이 넓은 바지 사이로 다리를 휘적거리며 접근해 왔다.
채정혁은 경계심을 느끼고 동생의 앞으로 섰다.
“뭐요?”
채정혁이 잔뜩 날이 선 목소리로 이들을 채근했으나, 그들은 전혀 개의치 않는다는 듯이 점차 압박해 들어오며, 종래에는 아주 채정아의 앞까지 얼굴을 들이밀었다.
“야, 요즘에 자유연애가 유행이라면서?”
“그러게, 근데 그것도 장소를 봐가면서 해야지, 이런 점잖은 동네에서 젊은 남녀가 낄낄거리고 다니고 말이야.”
“팔자 좋구만, 어? 이런 예쁜 여자를 옆에 끼고 다니니 기세등등하시겠수다, 형씨?”
생전 처음 겪어 보는 무례한 행동에 두려움을 느낀 채정아가 뒤로 물러서면서 채정혁의 팔을 붙들었다. 채정혁은 위협을 느낀 다기 보다는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무례한 행동 마시오. 이 아이는 내 동생이오. 용건이 뭐요?”
껄렁패의 우두머리 같이 보이는 사내가 잠시 기침을 하더니, 바닥에 가래침을 뱉은 후 탁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말했잖아. 여기는 점잖은 동네라고. 우리 같은 사람들이 하루하루 열심히 나라를 위해서 몸이 부서져라 일하는 곳이란 말이지. 너네 같은 밥벌레들이 얼씬거릴 곳이 아니라고. 어? 시발, 이거 옷 좀 보소. 완전 수입품 아니야? 양놈처럼 입고 다니니 좋아? 우리는 다 낡은 잠방이나 겨우 걸치고 다니는데. 좋겠수다? 귀족 나리. 옷도 빼입고, 여자도 끼고 다니고.”
“길을 잘못 들었을 뿐이오. 그리고 우리는 귀족이 아니오.”
채정혁은 자신의 중절모와 채정아의 깃털 달린 모자를 벗어 던졌다. 그의 행동에 껄렁패는 적잖이 놀란 눈치였다. 채정혁의 짧은 머리와 동생의 단정하게 땋은 머리가 드러났다. 바짝 깎은 머리는 군인들의 머리이고, 단정하게 땋은 머리는 여학생들이 하고 다니는 것이었다.
“나도 생계에 메인 몸이고, 내 동생은 학생이오. 내게 요구할 것이 있다면 말해 보시오. 내가 해줄 수 있는 것이라면 도와드리리다.”
“하이고, 진짜 신사시네. 뭐 이야기가 좀 통할 것 같으니 내 간단히 말하리다. 우리가 해고된 데다가 취업 길도 막막해서 굶고 있거든. 적선 좀 하쇼.”
“돈이 필요하다면 도와드리겠지만 이런 방식은 옳지 않소. 당신들 처지는 이해하지만…….”
“이해한다고, 엉? 이해한다고! 이것 봐라, 이 양반이 우리를 이해한다네!”
사내가 낄낄 웃더니 이윽고 성난 목소리로 열변을 토해 냈다.
“밥솥을 긁어 봐도 애새끼들 한 끼 먹일 밥도 없고, 마누라가 아파도 약 한 첩 못 지어 오는 우리 처지를 이해한다고? 아 시발, 뚫린 입이면 다 지 멋대로 나불거리나? 이 새끼 봉창 두드리는 소리 보소, 지랄 한다 진짜.”
흘끗 보니 채정아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채정혁은 슬슬 짜증이 머리끝까지 밀고 올라오는 것이 느껴졌다. 분명히 사정이 좋지 않아 보이긴 했다. 그런데 솔직히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공감은 가지 않았다.
도대체 왜 그들이 처한 상황을 자신들에게 화풀이하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채정혁은 당장 따져 붙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간신히 진정하고 사내의 눈을 쏘아보며 절제된 표현으로 답했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내가 책임져야 할 일은 아니오.”
“훈계는 필요 없고, 가진 돈이나 다 내놔. 어차피 댁들은 그 돈 없다고 큰일 나는 건 아니잖아?”
사내는 이제 아주 채정혁의 어깨를 밀어붙이며 말했다. 채정혁이 손을 들어서 사내를 제압하려는 사이, 어디선가 호각 소리와 함께 누군가 뛰어오는 소리가 골목을 울렸다.
“시발, 짭새다. 튀어!”
껄렁패들은 호각 소리가 들리자마자 표정을 일그러뜨리면서 뛰어갔다. 그러면서 채정혁의 잘 뺀 신사복에다가 가래침을 뱉고 가는 것을 잊지 않았다.
“개 같은 새끼들, 잘 먹고 잘 살아라. 퉤!”
채정혁은 아주 화낼 기분도 들지 않았다. 그는 손수건으로 가래침을 닦은 뒤 길 위에 버렸다. 꽤나 아끼던 손수건이었는데 이런 데 쓰게 되어 아쉽다는 생각도 잠시, 살집이 오른 순검 하나가 헐레벌떡 뒤늦게 놈들을 쫓아가며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