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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의 계보 1권(12화)
제2장 세련(細漣)(4)


“제국의 산업 진흥을 위하야 불철주야 노력하는 신민 제군과 외국에서 온 귀빈 여러분. 이 자리에 함께하게 되어 짐은 기쁘오. 이 훌륭한 박람회를 기꺼이 즐기며 좋은 시간을 가지길 바라오.”
황제의 짧은 축사(祝辭)에 이내 군중은 들끓었다.
“황제 폐하 만세!”
“만수무강하시옵소서!”
올 해 서른 살의 황제, 건흥제 이표가 즉위한 지도 4년이 되어 가고 있었다.
7년 전 부황이자 15대 황제였던 영종(英宗) 경안제(景安帝)의 뒤를 이어 즉위한 형인 16대 황제, 강종(康宗) 인안제(仁安帝)는 즉위 삼 년 만에 후계자를 남기지 못하고 급서(急逝)했다.
황위를 이을 것이라고는 전혀 예상치 못했던 젊은 황자, 신친왕 이표가 17대 황제로 즉위하여 연호를 「건흥(建興)」이라 정했을 때,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의 존재에 대해서 잘 알지 못했다.
그러나 이 젊은 황제는 이내 큰 인기를 국가적으로 끌게 되었다. 큰 키에 엄숙해 보이는 외모와는 달리 서민적이고 친숙한 행보를 보인 황제는, 조야에 두루 인기가 많은 황제였다.
그는 구중궁궐에 있던 선대 황제들과 달리 여러 행사에 참석하며 신민과 함께하는 것을 즐겼다. 예술에도 조예가 깊다고 알려진 황제는, 황실 일가를 대동하고 전시회나 음악회에도 자주 모습을 드러냈다.
신민들은 이 젊은 황제에게 존경 어린 갈채를 기꺼이 보냈다. 황제가 참석하는 자리는 당연히 그 격이 한참 높아지기에, 예술가들은 경쟁적으로 황실의 눈에 띄려고 노력했다. 뿐만 아니라 그는 가끔씩 평복을 입고 서민 지구에 행차하여 서민들―물론 미리 궁내부가 신경 써서 선발한 이들―과 술잔을 기울이며 그들과 스스럼없이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내각과 궁내부는 전례 없었던 황제의 돌출 행동에 난처함을 느끼면서도 그것을 사실상 묵인했다. 내각이 인기가 없는 만큼 신민들에 대해 황실에 대한 존경과 사랑이 내각의 무능한 지도력에 대한 차양막 역할을 해주었던 것이다.
공식적으로 유럽식 제복을 입은 황제의 어진이 전국 관공서와 학교에 내걸려 관료와 교사, 학생들은 어진을 바라보며 존경을 표하는 것은 익히 있었던 일이거니와, 중류계급 이상의 가정에서는 황제와 황실 가족들에 대한 사진과 초상화를 수집하고 장식하는 것이 인기였다.
입헌 혁명 이후 존재감이 갈수록 흩어지던 황제와 황실에 대한 관심과 존경은 이때에 이르러 일종의 국민적 경쟁이 되어 있었다. 너도나도 황가의 일거수일투족을 관음증적으로 관찰하고 있었다.
황실 편람(便覽), 그리고 왕공세족의 족보가 포함된 《선원록(璿源錄)》과 《귀족부(貴族簿)》는 비싼 값에도 잘 팔려 나갔다.
황제 일가의 사진이 놓여 있는 엽서는 흔히 보일 정도였고, 일부 애국주의적 신문들은 제 1면에 제호와 함께 황제 부처의 사진을 고정적으로 넣고 매일같이 그 동정을 보도했다. 이러한 상황이니 만큼 전례 없는 국가적 행사에 황제가 얼굴을 비치지 않는 것은 상상하기 힘들었다.
건흥제가 이러한 태도를 취하게 된 것은, 본래 황위 계승과 거리가 먼 셋째 아들로 태어나 다른 황제들과 달리 애초에 자유롭고 제멋대로인 삶을 살기도 했거니와, 13년 전 유럽에서 겪었던 경험 때문이었다.
인민은 언제 활화산처럼 폭발할지 모르는 존재들이었다. 유럽의 여러 나라에서 왕실이 쫓겨나고 공화국이 수립되었다. 하물며 동양에서도 월의 황제는 폐위당하고 제정 자체가 무너져 버렸다.
건흥제가 보기에 지금 한국의 정치는 안정적이라 하나 언제까지 흔들리지 않을지는 모를 일이었다. 비록 실권 없는 황제라고는 하나, 그가 가지고 있는 온갖 특혜와 제실(帝室)의 막대한 재산은 모두 한국이 제국이라는 정체(政體)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물론 건흥제도 진정한 애민(愛民)의 자세를 갖춘 성덕(聖德)의 군주가 되고 싶었다. 그러나 그는 현실적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있었다. 어차피 군림하나 지배하지 않는 군주인 그가 원하는 것이 권력의 획득이나 전제(專制)가 아닌 이상, 단지 그가 원하는 것은 영광스러운 황실의 계보를 만대에 내리는 것이 목표였다. 물론 그러기 위해서는 세태에 따라 전략은 끊임없이 수정되어야 했다.
많은 왕국들이 무너지는 가운데에서, 연합 왕국의 여왕과 왕실은 유난히 범국민적인 사랑을 바고 있었다. 건흥제가 보건대 일반 백성들과 격리되어 구름 위의 존재가 되어 있는 동양의 왕실들은 변화할 필요가 있었다.
한국 황제는 원래 허수아비의 역할을 맡은 지 오래였다. 통치권도 없거니와 전제는 꿈꾸지도 못한다. 애초에 이러한 국가에서 황제의 역할이 국가에 안정감을 부여하고, 신민들의 만족감을 충족시켜 주는 존재라면, 자신이 그러지 못할 이유란 없었다.

건흥제가 일어서자 모자를 벗고 고개를 숙인 사람들 가운데에는, 전 외부협판 구인회와 동석한 구범준도 있었다. 13년 전 프랑스에서 일어난 혁명의 한가운데에 있었던 그는, 귀국 후 황성제국대학(皇城帝國大學) 법학과를 졸업한 뒤, 존경받는 변호사로서 상류계급의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집안이 대대로 관직을 지낸 명문이니, 마땅히 결혼 또한 격에 맞게 하급 작위나마 귀족의 작위를 가진 집안의 여자와 했다. 한때 혁명의 열망이 이글거리던 젊은 선동가는 이제 누가 보기에도 높은 신분의 고결한 신사가 되어 있었다.
그의 아버지는 구범준의 회심을 반기며, 집안의 동량이 다시 제대로 섰다고 좋아했다. 그러나 그것은 일종의 사회적 삶을 지속하기 위한 방편에 불과했다. 구범준이 변호사로서 주로 가난한 노동자들의 무료 변론을 맡는 것을, 그의 가족과 동료들은 그저 상류계급의 인정 넘치는 일종의 자선 행위로만 생각했다.
그러나 실상 그는 황성과 평양 일대에서 점점 수면 위로 오르고 있는 사회주의 조직의 이론가이자 후원자였다. 그는 주로 대학생으로 이루어진 학회에서 그들을 가르치는 역할을 몰래 하고 있었다.
그들 학생 일원에서 직접 프랑스의 혁명에 가담한 바 있었던 구범준의 권위는 상당한 것이었다.
이 권위를 이용하여 구범준은 학생들로 하여금 노동자들에게 계급의식을 불어넣기 위한 야학을 조직하도록 부추겼다.
공식적으로 이러한 결사 행위에 대한 제한이 있는 대한제국에서 이것은 엄연한 불법행위였으나, 구범준은 신중하고 조심스럽게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서부터 차근차근 혁명을 향한 길을 닦고 있었다.
그가 어쩌면 노골적이고 정념의 분출과도 같은 혁명으로의 외길에서 벗어나 겉으로 보이기에 착실한 삶을 살며 차근차근 주변을 조직해 나가기 시작한 이유는, 바로 안정적인 사회에서는 혁명이 단기간에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확신이었다.
프랑스에서의 2월 혁명의 성공과 달리 8월의 노동자 봉기는 비참한 실패로 끝이 나고 말았다. 처음엔 임시정부에 노동자 인사들도 입각하고 노동과 관련된 진보적 법안들이 계속 의결되었다.
그러나 혁명이 안정기에 접어들자 이 조치들에 깜짝 놀란 지배계급의 반격이 이어졌다. 프롤레타리아 주도의 시민군을 임시정부가 안정과 질서를 이유로 강제로 해산하려 하자, 시민군은 다시 한 번 무기를 들었으나, 그 결과 정규군에 의해 잔혹하게 진압되고 말았다.
그때 8월 봉기에도 참여했던 구범준은 구사일생으로 살아났고, 주 프랑스 대사의 자격으로 반란 진압을 축하하는 입장이었던 아버지는 그를 크게 꾸짖고 한국으로 돌려보냈다.
구범준은 혁명이 실패한 것에 대한 슬픔, 위선적인 지배계급에 대한 분노, 살아남은 것에 대한 죄책감 등을 마음 한구석에 쌓아둔 채로 귀국선상에서 한 가지 다짐을 했다.
프랑스의 실패를 귀감으로 삼아 언젠간 한국에서 완전한 혁명을 이루겠다는 다짐이었다. 귀국 직후 그는 황성제국대학 법학과에 들어갔고 무난히 변호사가 되었다. 그는 상류계급인 법조계 동료들과 사교를 하는 것을 마다하지 않았으나 속으로는 그들을 경멸했다.
역사의 진보는 이들을 모두 역사의 흙더미로 몰아내고 말 것이라고, 구범준은 확신하고 있었다.
“허허, 황상 폐하께옵서는 어찌 저리 사람들의 마음을 잘 아시는고! 모든 사람들이 폐하의 입술만 바라보고, 그 옥음에 귀를 기울이고, 고개를 숙여 경의를 표하는구나. 역대에 이러한 군주는 없었을 것이다. 평생을 외교관으로 보낸 내가 봐도 타고난 외교관이시다.”
옆에서 황제의 용태에 감탄해 마지않는 아버지 구인회의 목소리에 구범준은 상념에서 깨어났다.
구범준은 프랑스의 2월 혁명 당시 길거리에서 마주쳤던 한국 소년을 떠올렸다. 나중에, 궁내부(宮內府)에서 펴낸 제실의 사진첩을 보고서 그 소년이 신친왕이라는 것을 구범준은 알게 되었다.
그 당시 비밀리에 프랑스에 신친왕이 방문 중이었다는 것까지 확인하고서 구범준은 잠시 신음을 흘렸었다.
이제 그 소년이 제국의 황제가 되어 저 자리에 서 있었다.
황제가 서 있는 연단의 옆을 비껴가는 햇빛이 교묘하게 황제를 돋보이게 만들고 있었다. 구범준은 썩 편찮은 기분이 들었다.

“이거, 전 외부협판 아니십니까. 정정하시구려.”
만국박람회 개막식의 직후, 거창하게 마련된 연회에서 황제는 술잔을 들고 자유롭게 사람들과 어울려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황제가 선 자리를 중심으로, 한번이라도 말을 나누고자 하는 자들이 둥그렇게 모여들었다. 구범준의 아버지 구인회 역시 그 대열에 끼어서 결국 황제와 마주할 수 있었다.
“폐하, 황공하여 감읍하기 그지없나이다. 만세에 해옥주를 쌓으시고 만수에 강녕하시옵소서!”
백발의 구인회는 늙어서 잘 접히지도 않는 허리를 90도로 굽혀 가며 황제 앞에서 칭송의 말을 뱉어 냈다.
이제 점점 권력의 주변부로 밀려난 이 관료는, 허식(虛飾) 가득한 이러한 행사에서 어떻게든 높고 명예가 있는 인물들과 친분을 돈독히 다지려 하고 있었다.
구범준은 그런 아버지를 안쓰럽다는 듯 뒤에서 멀찍이 쳐다보고 있었다.
아버지와는 다르게 간단히 예를 표하고 한발 물러서 있는 구범준의 존재를 황제는 이내 눈치챘다. 처음에는 그저 구인회의 아들이거니 했는데, 가만히 보니 어디선가 본 얼굴이었다.
건흥제는 사람의 얼굴을 기억하는 일에는 남다른 재능이 있었다. 그것이 그가 가진 주요한 자산 중 하나였다. 그의 정치적인 인기는 단순히 외모와 지위에서만 나오는 것이 아니었다.
“그대를 짐이 어디선가 봤는데……. 분명히 보았는데…….”
황제는 구범준을 불러 세우고서는 뚫어질 듯 쳐다보면서 중얼거렸다. 구범준은 순간 당황했다. 황제는 잠시 구인회를 돌아보며 물었다.
“구 협판. 경이 파리에서 대사직에 있을 때, 짐이 한 번 방문을 했더랬지요?”
“그렇사옵니다. 폐하. 당시 파리가 상당히 소란스럽던 때라 또렷이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때 귀경의 아드님 또한 파리에 있었습니까?”
“아, 그렇사옵니다 폐하. 여기 옆에 선 제 아들이 그때 프랑스에 있었사옵니다.”
“그럼 그렇지!”
황제는 구인회의 말에 손뼉을 쳤다. 그는 이마에 식은땀이 배어나올 정도로 당황한 구범준을 바라보며 유쾌하게 입을 열었다.
“그대를 여기서 다시 보게 될 줄이야. Le gar on que vous avez vu Paris pendant la r volution, c est moi. (그때 그대가 혁명중 파리에서 보았던 그 꼬마 말이지, 바로 날세.)”
“황공하옵니다, 폐하. 신이 무례를 저질렀나이다.”
구범준은 황제의 남다른 기억력에 깜짝 놀라 식은땀을 흘리며 사죄를 청했다.
설마 황제가 자신을 알아볼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었다. 오래전 일이기도 하거니와, 수많은 사람들과 마주치는 황제가 일일이 기억을 할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했던 것이다.
“아주 훌륭한 아드님을 두시었소. 의협심이 넘치는 사람이지. 하하하!”
아들이 황제에게 무슨 잘못을 저질렀나 싶어 당황해 쩔쩔매는 구인회의 어깨를 잡고 황제는 껄껄 웃었다. 그리고는 구범준에게로 시선을 주며 다시 입을 열었다.
“언제 그대를 내 따로 부르겠네. 오랜만에 파리에서의 못다한 회포를 풀었으면 하는군.”
황제의 입에 알 듯 모를 듯한 미소가 살짝 걸렸다. 그리고서는 구씨 부자를 물리고 황제는 그와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 기다리고 있는 다른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었다.
“너 언제 폐하를 뵈었던 것이냐? 무슨 무례를 저지른 게야?”
황제에게 예를 표하고 물러나오는 길에 구인회는 아들에게 다그치듯이 물었다. 아버지의 물음에 구범준은 쓰게 웃으며 별 다른 대답을 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