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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의 계보 1권(10화)
제2장 세련(細漣)(2)
개국 445년 2월 10일, 예정된 대로 이 대순(對順) 전승 및 어극 50주년 기념식은 성황리에 개최되었다.
검열제도가 상존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을 감안하고 보아도 요동 언론들의 이를 축하하는 논설들은 외국인들이 보면 도가 지나치다고 여겨질 정도로 왕실과 국가를 치켜세우기에 바쁜 것들이었다.
더러는 이 기세를 몰아서 순나라를 아주 병탄하고 몽골도 산하에 놓고, 서로는 러시아를 징벌하고 남으로는 한국을 압박해야 한다고 대놓고 주장하는 신문도 있었다. 이 국가적 승운(勝運)에 국민들도 들떠 있기는 매한가지였다.
비록 최저생계로 하루하루를 이어 가는 빈민 노동자라 할지라도, 그들의 옅어진 자존감이 위대한 국가의 구성원이라는 자족감으로 보상될 수 있다는 사실을 위정자들은 이미 잘 파악하고 있었다.
국가와 민족의 수식어는 순진한 농촌 청년을 징집해 갈 좋은 구실이 되고, 전쟁 상황에서 물자를 징발하고 국가적 동원을 정당화시키며, 내부적 모순을 덮어 줄 강력한 수단이 되는 것이었다.
비판을 꺼내 놓기에는 요동이 이룩한 국가적 성취가 대단하기는 했다. 그들의 조상들은 아무것도 없는 요동 벌판 위에다가 훌륭한 나라를 세웠다. 한국의 일개 도독부에서 이제는 어엿하게 열강을 넘볼 수 있는 중견국가로 성장한데다가, 산업이나 군사제도에 있어서는 세계적으로 가장 선진적인 국가에 속했다.
철도는 사방으로 뻗어 가고, 물가는 안정되어 있으며, 새로운 부자들이 매일같이 탄생하고 있었다. 더군다나 중원을 호령하며 순나라를 완전히 격파하고 국민의 생활권을 넓혀 가는 왕실과 정부는 국민의 숭앙의 대상이 되기에 충분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반대 의견은 무용지물이었다. 심지어 평소에는 정부에 비판적인 어조로 떠들던 사람들조차 이 시점에서는 그저 요동국의 군대와 국왕을 찬양하는 목소리를 내놓고 있었다.
“……우리 요동의 충용무쌍한 영웅들은 험한 전선에서 산발하는 적의 음험한 야습에도 굴하지 않고, 백전불굴의 자세로 싸워 모든 전장에서 적을 노도와 같이 격파하였다. 과인은 전쟁에서 승리한 것도 물론 기쁘거니와, 나라를 위해 목숨을 초개같이 여길 수 있는 이러한 장병들이 든든히 국방의 숭고한 의무를 다해주고 있다는 사실이 감격스럽다. 과인이 왕위에 올라 어언 50년이 흘러, 비록 그간 하늘에 부끄러운 재목으로서 왕위에 앉아 있었으나, 제 대신과 새롭게 귀족제도의 정비를 통하여 서작된 훌륭한 인재들, 그리고 모든 신민이 이 불민한 국왕을 사심 없이 도와주었다. 그리하여 나라의 기틀이 완연히 다져지고, 선대 열왕(列王)의 존전에 부끄럽지 않은 국정을 이어올 수 있었다. 그 결과 이제 여러 이리와 같은 열방들 사이에서 요동은 자력으로 나라를 지키고, 지역의 평화를 도모하며, 구시대의 악습과 학정으로 자기 백성을 학대하고 자기 배만을 채우는 순 나라의 탐학한 무리들을 징치할 수 있었다. ……이 모든 영광이 나의 왕국의 모든 신민들에게 영원히 이어지기를 바라며, 이 나라가 만대가 지나도록 우뚝 서서 오늘 같이 빛나기를 바라 마지않노라.”
이제는 늙은 몸이 되었으나, 여전히 기골이 장대하여 기백이 넘치는 국왕 김호는, 직접 훈장을 잔뜩 단 요동군복을 입고 연단에 서서 승전을 치하하고, 에둘러 자기 업적을 치켜세웠다.
요동의 국운이 승천하고 있는 것은 얼핏 보아도 명백한 사실이었다. 사실상 국왕 전제(專制)에 가까운 정치체제를 운용하고 있는 요동의 상황에서 이렇게 인기가 좋고 정치적으로 단호한 국왕의 존재는 반대자들의 입지를 매우 위축시키는 것이었다. 오늘의 기념식만 보아도 그것은 분명해 보였다.
“국왕 전하, 천세, 천세, 천천세!”
“천세, 천세, 천천세!”
“요동국이여 영원하라!”
“자주독립, 근왕진취!”
국왕에게 바치는 천세(千歲)의 목소리와 함께, 구호들이 이내 광장을 뒤덮었다. 얼핏 보아도 십 수만은 되어 보이는 인파가 내성을 가득히 메우고 보이지도 않는 국왕을 향해 소리를 치며 환호했다.
“……아바마마는, 날이 갈수록 어째 건강해지시는 것 같아.”
서른여덟의 나이임에도 기운이 다 쇠한 듯, 허리를 잔뜩 숙여 몸을 웅크리고 연단의 뒤 귀빈석에 앉아 있는 세자 김손을 주목하는 사람은 없었다. 모두 여전히 건강한 국왕의 존엄한 옥안(玉顔)을 친견하는 것에 압도되고 있었다.
재작년 왕이 중병을 앓을 때만 해도 세자는 자신의 시대가 오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병을 떨치고 일어선 왕은 건강을 되찾고 더욱 활발해졌다. 이제 국왕이 육체적 수명이 다 하는 나이에 가까워져 오고 있다는 것을 사람들은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만큼 그의 치세는 길었고, 성공적이었다. 그만큼 세자에 대한 좌중의 관심이 옅은 것도 당연했다.
정치적 변동에 민감한 관료들과 귀족 집단은 세자와 궁중정치에 대해 늘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지만, 이러한 국가적 제전 앞에서 세자의 존재를 살펴 줄 경황이 있는 사람은 없었다.
이 쇠약한 세자는 마치 방치된 듯이 연단 뒤에서 자리만 차지하고 있을 뿐이었다. 심지어 그의 정치적 경로를 설계해 주던 모후가 급작스러운 풍을 맞아서 뒷방에 누운 뒤로는 더욱 그랬다.
세자빈 오씨는 외모가 아름다웠지만 어떻게 보아도 현명하다고는 할 수 없었고, 허영심만 가득 찬 여자였다. 그녀는 항상 연회를 주최하고 귀부인들을 모아다가 수다 떠는 일로 시간을 탕진하는 사람이었다.
더욱 중요한 것은, 20년에 가까운 결혼 생활에도 세손(世孫)을 생산해 내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럼에도 세자빈이 궁중에서 큰 압박 없이 잘 버티고 있는 것은 세자가 씨를 만들어 낼 능력이 없다는 소문이 궁중 내에 파다했기 때문이었다.
기력 없이 항상 하루의 절반 이상을 자기 침상에 누워 보내는 그였다. 20년간 혹여나 싶어 첩실을 붙여주려는 노력도 해 보았으나, 심지어는 발기조차 되지 않는다는 소문만이 더욱 기승을 부렸을 뿐이었다. 왕세자의 침실 사정에 대해서는 사실 어지간한 요동 국민들이 한 번쯤은 들어 봤을 정도였다.
“젠장. 이번 전쟁에서 무슨 역할이라도 했어야 하는데…….”
영화군 김욱이 근위기병연대장으로 분열행진(分裂行進)의 선두에 기수로서 만인의 주목을 받는 광경을 보면서 세자 김손은 투덜거렸다. 항상 눈엣가시로만 여겼지, 실질적인 왕위 계승의 위협이라고는 여겨 본 적이 없는 한참 어린 동생이었다. 부왕이 감싸고 도는 느낌이 들어서 분노하긴 했지만, 애송이가 무언가를 해낼 수 있을 것이라고는 추호도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었다.
꼴 보기 싫은 놈이 유년군사학교로 꺼져서 내심 통쾌하다고 생각했는데, 전쟁에 참전해서는 여러 지역에서 성공적으로 작전을 수행하고,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던 것이다. 미리 신경을 썼더라면 외가와 모후의 측근들을 움직여서 놈의 전승이 보도되는 것을 어느 정도 막을 수 있었을 테지만, 그러지 못하는 탓에 김욱의 전장에서의 성취가 하루가 멀다 하고 신문 지상을 채우는 것을 뒤늦게 지켜봐야만 했다.
그 바람에 국가적 전쟁영웅이 되서 돌아온 김욱을 왕세자는 그저 짜증과 질투를 섞어 바라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세자 김손의 이러한 신경질적인 성미는 갑작스레 그의 형이자 원래의 세자였던 김건이 비명에 죽고 세자의 자리를 물려받게 되면서부터 줄곧 이어져 온 것이었다.
영민하고 촉망받았던 김건이 안타깝게 티푸스에 걸려 사망한 것을 요동 조야가 한결같이 안타까워했었다. 그만큼 갑자기 세자의 자리에 오른 김손은 사사건건 죽은 형과 비교될 수밖에 없었다. 이미 땅 밑에서 진토가 되어 흔적도 남지 않았을 형이었으나, 그림자는 김손의 발치에서 떠나갈 줄 모르고 맴돌고 있었다.
그 뒤로 김손은 열등감에 사로잡힌 채 형을 능가하고자 애를 무던히도 썼다. 그러나 그가 본래 지니고 태어난 사람의 품이란 것이 그다지 대단한 것이 아니었다. 더군다나 부왕의 치세가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이 무능한 세자에 대한 세상의 관심은 점차 사라져 갔다.
이제는 그가 아무리 덜떨어진 행동을 보여도 사람들이 관심조차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그럴수록 김손은 더욱 안달이 났다. 무언가 자신의 존재를 세상을 향해 증명해 보여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시달리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의 뜻대로 되는 것은 많지 않았다.
세자의 불만과는 상관없이 기념식은 밤까지 환호 속에서 지속되었다. 축포가 울리고 국왕이 하사한 식품이 성경부민들에게 제공되었다. 그 가운데 영화군 김욱은 전쟁영웅으로서 일거의 이름이 요동 전역에 울려 퍼지게 되었다.
더군다나 처음으로 공개석상에 모습을 드러낸 그의 왕재(王才)가 깃든 뛰어난 용모는 사람들이 넋을 잃게 하기에 충분했다. 전쟁영웅인 왕자가 그 귀태(貴態)마저 영광스러우니, 사람들의 입이 마르도록 칭송의 소리가 퍼져 나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편하게 지내다 가세요. 필요하신 것이 있으시면 언제든 말씀하시구요.”
성경부 동구(東區) 광성가(廣成街)에 있는 30칸짜리 저택의 주인은 영화군 김욱의 모친인 안씨였다.
그녀는 법제상 구제도하의 빈첩(嬪妾) 자리를 받지는 못했으나, 군과 옹주의 생모 신분으로 국가로부터 적지 않은 연금을 후사받고 있었다. 더군다나 국왕의 부탁에 의해 성광사 사주가 생활에 불편함이나 모자람이 없도록 돈을 내어 주고 있는 상황이었다. 때문에 이 양옥(洋屋) 및 온돌이 매 층마다 깔린 3층 내실까지 가지고 있는 비싼 저택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물론 그녀 또한 말직이나마 귀족가 출신이라 친정으로부터 나오는 도움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아무리 생활이 풍족하다고 한들, 왕의 첩이라는 이유 때문에 숨어 살아야 하는 그녀의 처지는 적적하기 짝이 없는 노릇이었다.
이런 상황에 귀국하는 길에 올랐다가 요동의 승전기념식에 참석을 했던 한국의 관전무관단이 그녀의 집에 예방하게 된 것은 적적한 일상에 꽤나 파격적인 일이었다. 본래 공식행사에만 참석하고, 금일 오전에 국왕이 주최한 조찬(朝餐)을 마지막으로 며칠간 성경부를 유람한 뒤 황성행 열차에 오르려 했던 일행이었으나, 우연찮게 정주 인근에서 겪은 영화군 김욱과 관전무관 채정혁 간의 만남 덕분에 예기치 않은 방문이 성사되었던 것이다.
김욱의 성격상 외부인을 모친의 집에 들일 사람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의 손윗누이인 명신옹주(明信翁主) 김미경이 이 방문을 주도했다. 동생이 전장에서 귀국한 뒤, 말수 적은 그에게 종전 당시의 인상 깊은 일을 캐묻다가, 우연찮게 정주에서 만난 채정혁에 관해 듣게 된 것이었다.
명신옹주는 이야기를 꺼내 봐야 동생이 반대할 것을 확신하고서는, 몰래 어머니에게만 귀띔을 해놓고서 성경에 아직 머물고 있던 관전무관단의 숙소에 시동을 보내 예방을 청했던 것이었다.
“아니, 채 정위는 도대체 언제 영화군과 인연을 맺은 건가?”
관전무관단장인 고재완 정령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채정혁을 바라보았다. 다른 장교들도 마찬가지였다. 아무리 우연한 일이라고는 하나, 순나라에서 받은 휴가 도중에 요동군의 빛나는 별로 이제 명성이 자자하게 된 영화군과 인연을 맺어 초대까지 받게 되었다는 것이 놀랍기 짝이 없는 것이었다. 채정혁은 괜히 머쓱한 듯 뒷머리를 긁으며 얼버무렸다.
“그, 어쩌다 보니 정주로 귀환하는 길에 길동무를 하게 되어서 말입니다.”
괜히 시시콜콜 그때 겪은 이야기를 늘어놓고 싶지 않은 채정혁이었다. 유명인과의 별거 아닌 인연을 빌어서 괜히 으스대는 듯한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어찌 되었든, 내막을 알 길 없는 채정혁 또한 영화군 김욱이 직접 초대한 줄 알고 당황스러움을 느꼈다.
오래 겪어 보지는 못했지만, 짧게나마 옆에서 지켜본 김욱은 절대 남과 교분을 쌓거나 할 사람이 아니었다. 오로지 자기 스스로의 힘으로 나아가는 사람의 패도(覇道)가 그에게서는 짙게 풍겨져 나왔던 것이었다.
어찌 되었든, 기왕에 받은 초대를 거절하기도 그러하니 관전무관단은 기꺼운 마음으로 김욱의 모친 안혜은의 자택으로 찾아갔던 것이다.
“본래 손님은 사절이나, 기왕에 온 것이니 좋은 저녁들 돼시오. 채 정위는 다시 보게 되어 반갑소.”
모처럼 모친의 집에서 편하게 휴식을 취하려 왔다가, 느닷없는 손님들이 들이닥치자 김욱은 불편한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그는 누이와 모친이 자신과 채정혁을 핑계 삼아 손님을 불러들인 것을 따로 묻지 않고도 눈치챘다. 채정혁은 언젠가 다시 한 번 보게 된다면 나쁘지 않겠다는 정도로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편하게 쉬어야 할 공간인 집이 북적거리는 것은 도무지 내키지 않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어쨌든 손님들은 한국을 대표하여 온 관전무관단이고, 어머니와 누이의 체면 또한 있으니 김욱은 늘 입에 배어 있는 남의 기분을 고려하지 않는 쓴말을 내뱉지는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