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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의 계보 1권(8화)
제1장 풍운(風雲)(5)
“이랴!”
갑자기 상승하는 감정에 김욱은 말에 박차를 가해 한단성 밖으로 달려 나갔다. 그는 남에게 뿐만 아니라 자신에게도 혹독했다. 가끔 몰아치는 인간적인 감정을 그는 혹독하게 단죄했다.
그에게 있어서 삶이란 목표를 향한 끊임없는 전진일 뿐, 하등 도움이 되지 않는 감정에 의한 시간 소모란 있을 수 없는 것이었다. 그는 부러 작전을 짜기 위한 일에 몰두했다.
적이 있을지 모르니 조심하라는 부관의 만류를 뿌리치고, 적의 동태를 탐측하고 지형지물을 파악해 둘 겸, 남서쪽에 위치한 조 왕성의 터를 향해 갔다. 옛 왕성은 영화를 잊은 듯 쓸쓸하게 광대한 터만을 남겨놓고 있었다. 이곳에서 전국(戰國)의 역사가 씌어져 나갔다.
전쟁이 시작되면서 양나라의 학자들이 순나라의 협조를 얻어 진행하던 발굴은 모두 정지되었다. 그들은 다 스러져 가는 천막과 발굴 도구만을 어지럽게 남겨 놓은 채 남쪽으로 철수했을 터였다.
김욱은 비웃음인지, 회한을 드러내는 것인지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으며 말을 천천히 몰아 조왕부의 옛터를 가로질렀다.
역사는 마치 도도한 대하(大河)의 흐름과도 같아서, 격류가 몰아치다가도 어느새는 잠잠해지고, 여러 물줄기들이 합쳐지고 갈라지며 가늠하기 힘든 거대한 수도(水道)를 그려 나간다.
한때는 영화를 자랑했던 왕성들도 이렇게 무심한 세월의 흐름 가운데 무너져 내려 흔적조차 찾기 힘들게 되었으나, 이곳에서 천하를 노렸던 영웅들의 이름은 모두 사적에 남아 전해지고 있었다.
역사는 새롭게 덧대어 쓰여 나가지만, 그래도 옛 시절 위대한 이름들은 살아남는다. 김욱은 군도를 빼어 들고서 저물어 가는 태양을 겨누었다. 순나라는 저 지는 해와 같이 이제 역사의 뒤안길로 저물어 갈 것이다.
그리고 그 뒤로 새로운 태양이 밝아 오게 될 터였다. 김욱은 그 태양의 주인이 되고 싶었다. 새 시대의 영걸들의 이름의 앞자리에 자신이 오게 될 것을 그는 의심치 않았다. 날카로운 군도의 잘 벼려진 칼날에 석양이 부서지며 흩어져 내려갔다. 전운(戰雲)이 지척으로 다가와 있었다.
***
1860년 10월, 요동군의 진격은 순의 수도 변경의 함락과 함께 종결되었다. 800년 전 송(宋)과 요(遼) 사이에 전연의 맹약이 체결되었던 복양에서 벌어진 최후의 격전에서 요동군은 순군을 완파했다. 순 황실과 조정은 동관을 넘어 황망하게 서안으로 파천했고, 얼마 후 요동군은 저항 없이 변경에 입성했다.
순 사람들과 중국 대륙의 범중화주의자들은 변경의 함락에 큰 충격을 받았다. 옛 요동에 있던 거란과 여진의 군대가 개봉을 수도로 하는 송을 유린하였듯 산해관 밖에서 온 요동의 군대가 화북을 장악하였다. 원의 멸망 이후 500년 만에 화북 전토가 이민족의 말발굽에 짓밟힌 것이었다.
대륙의 남은 두 강호(强豪), 양과 태평국은 요동에 필적하는 국력을 가지고 있었으나 순에 대한 특별한 형제 의식이 있는 것도 아닐뿐더러 그들 간의 전쟁에 온 정신이 팔려 순이 어찌 되든 사실상 방치했다.
이후 요동군 지휘부는 정주에 주둔하며 평화 협상 조건을 논의했다.
먼저 즉각적인 휴전을 제의하는 순 사절단에게 요동국 전권대사는 가혹한 평화 조건을 요구했다. 그중에는 광대한 순에 대한 배타적인 철도부설권 및 산림채벌권, 농작물의 우선적인 수매권 및, 요동국민의 순나라 입경에 대한 자유에 더해, 산해관에서 천진에 이르는 해안지대의 할양과, 추후 협상에 따라서 산동반도를 조차할 것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뿐만 아니라 기존에 북평과 천진에 한정되어 있었던 요동육군의 주둔이 화북 각지의 주요 성시로 확대되었고, 이들 군인을 비롯한 요동 시민에 대한 재판권은 전적으로 요동국에 종속되었다. 순은 이 과정에서 사실상 요동의 요구를 전적으로 수용할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사실상 독립국으로서의 존폐(存廢)가 놓인 강화 조약에서 특별히 배상금의 액수가 심대하게 책정되지는 않았다는 것이었다. 대신에 순나라는 전후복구자금을 강제적으로 요동의 은행 자본으로부터 차관받아야 했고, 여기에는 꽤나 높은 이자가 책정되었다. 당장 순나라의 재정은 지출되지 않을 터지만, 장기적으로 이 차관은 족쇄가 되어 순나라의 행정을 마비시키게 될 것이었다.
관전무관단의 일원인 채정혁은 전쟁의 종결과 함께 임무를 마치고 정주에 머무르고 있었다. 생각과는 다르게, 제3자의 입장에서 보는 전쟁은 의외로 무덤덤했다. 마치 소설 속의 묘사를 보는 듯이, 눈앞에 펼쳐지는 격전이 그저 현실감 없이 펼쳐질 뿐이었다.
이상하리만치 전투를 관전하는 동안 채정혁은 실론 전역을 떠올리지 않았다. 유일하게 그것을 실감했을 때는, 부상당한 병사들이 주둔지에 임시로 설치된 간호동에 실려 오는 모습을 보았을 때뿐이었다. 그 모습만큼은 덤덤히 지켜보지 못하고 채정혁은 눈을 돌렸다.
대체적으로 이번 관전행은 만족스러운 편이었다. 임무가 종료되자 휴가를 받아 낙양의 옛 유적들을 둘러보고 올 수도 있었다. 그러나 역사 속에 빛나는 옛 유적들과 달리 두 달간 행군하며 지켜본 현재의 순 사람들의 삶은 극도로 비참했다.
번영하는 자본주의의 심장인 제국의 도읍, 황성부에서 일생을 보낸 그는 농촌의 가난이란 걸 알지 못했다. 그도 잠시나마 시골에서 살아 본 적이 있었기 때문에 농민의 어려움을 알기는 했지만, 순나라 빈농들의 비참함은 거기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들은 이중으로 착취당하는 처지였다. 그들이 어렵게 농사를 지어 일 년 양식을 생산하면 탐학한 순의 관리들과 요동 곡물 상인들이 싹 쓸어갔다. 그들은 쌀을 헐값에 판돈으로 요동산 콩과 조를 사 겨우겨우 입에 풀칠하는 처지였다. 그나마 흉작이나 천재지변이 발생하면 굶는 것은 부지기수였다. 하물며 요동과의 전쟁은 흉작보다 더한 재앙으로, 하필 농번기에 일어난 전쟁은 농민들로 하여금 한 해 농사를 완전히 망치는 것을 의미했다.
아무리 군기를 엄정히 하고 약탈자에 대한 처벌을 할지라도 침략군의 이동은 농토의 재앙이었다. 물론 요동군은 현지민들과 가급적 원만한 관계를 맺으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실질적인 협조를 제공할 수 있는 상인과 지주들뿐이었다.
요동군의 입장은 모두 정치적, 군사적인 고려를 통해 결정되었다. 애휼(愛恤)의 마음을 가지는 것은 오히려 봉건적인 구습(舊習)으로 인식되고 있었다. 이러한 마당이니, 일반 농민들에게 있어 요동의 새로운 지배는 무능하고 탐학한 지배자에서 유능하고 교활한 지배자로 바뀐 것에 지나지 않았다.
농민들은 전쟁을 불러들인 순의 위정자들과 침략자 요동군을 저주했으나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채정혁이 보건대, 요동군은 분명 탁월한 군대였다. 그들은 잘 조련되어 있을뿐더러, 무기는 최신식이고, 병사는 용감하며, 장교는 유능했다. 그들이 순의 허약한 구식 군대를 격파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부패한 순의 조정은 신식 무기와 군대 체계를 도입하는 데에 매우 인색했고, 전혀 통일성 없는 신형 무기를 구매해서 전략적 고려 없이 배치해 둔 것이 최근의 군비 증강의 전부였었다.
그러나 채정혁은 이것이 과연 진정한 승리인지는 의문이 들었다. 짧지만 가혹했던 전쟁의 기간 동안 죽고, 약탈당하고, 가족과 재산을 잃은 순나라 사람들이 요동에 대해 어찌 생각하겠는가? 아무리 요동군이 강하고 무력으로 지배할 수 있다 한들 피지배자의 가슴속에 영원한 증오를 남겨 놓으면 그것이 과연 승리라고 할 수 있는가? 마치 문명국의 야만에 대한 승리처럼 전쟁은 호도되고 있었지만, 현실은 언론지상의 몇 줄 논평에 있지 않았다.
복구된 철도를 통해 군사우편으로 전달된 요동발 신문들을 보던 채정혁은 온통 승전에 대한 찬사로 도배된 글들에 순식간에 진력이 나고 말았다.
대나무발로 엮은 의자에 몸을 기대고서 채정혁은 신문지를 던져 버리고, 함께 도착한 편지를 꺼내 들었다. 파이프에 담배를 넣고 불을 댕긴 다음, 그는 동생으로부터 온 정성이 담긴 편지를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사랑하는 오라버니.
전장에서 건강하고 무탈하신지요. 부모님의 안부를 먼저 적습니다. 어머니께서는 최근 다리에 힘이 다시 돌아오셨습니다. 다시 건강해지신 모습이 반갑지만, 나이가 예순이 다 되어 가시기에 걱정이 많습니다. 아버지는 여전히 정정하십니다. 혹여 오라버니께서 부친 편지가 도착하지는 않았는지 하루에도 몇 번 물어보십니다. 저 또한 잘 지내고 있습니다. 새 학기가 시작되었고, 학교는 언제나 즐겁습니다. 등굣길에 거리를 내다보면, 단풍이 어찌나 예쁘게 들었는지요. 동무들과 함께 무르익은 단풍잎을 따다가 책갈피 삼아 고이 꽂아 넣어 두었습니다. 언젠가 다시 이 책을 펴 보면, 이 무렵의 기억이 떠오르겠지요. 가을이 점차 깊어져 가는 것이 느껴집니다. 그쪽은 어떠한지요? 화북은 이곳보다 춥다고 들었는데, 항상 건강 유념하시길 바랍니다. 이곳에서도 이미 요동이 순나라에 승전하여 전쟁이 끝나게 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져 옵니다. 부디 건강한 모습으로 조만간 황성에서 다시 뵙기를 손꼽아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정아 올림.
열여섯의 동생은 나이와 겉모습만이 아니라 마음도 어느덧 어른이 되어 가고 있는 듯했다. 순으로 간다는 소식을 전했을 때, 정아는 깜짝 놀랐으나 이내 안정을 되찾고 무운장구와 무사귀환을 축원했다. 마지막에 떠나는 송별의 장에서도 정아는 의젓하게 그를 떠나보냈다. 예전 같으면 울며불며 난리가 났을 텐데 말이다.
‘이제 다 컸구나.’
정혁은 흐뭇하면서도 내심 뭔가 아쉬웠다. 그는 우편을 보낼 수 있는 환경이 될 때면, 빠짐없이 편지를 적어 보내면서 건강하냐, 공부 잘하고 있냐, 안팎으로 별일 없느냐를 매번 물었다. 어련히 잘하고 있을 것이라 생각하면서도 매번 물었다.
이런 것이 부모의 마음인 것일까?
열 살 이후로 친부모의 사랑을 받지 못한 그는 부모의 사랑이란 어떤 것인지 체감하지 못했다. 물론 양부모는 좋은 사람들이었지만, 스스로 마음의 벽이 생기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이 세상에서 오직 동생만이 그의 가족이었다.
정아가 보내는 매주 한 번씩 편지는 요동군의 우편망을 통해 배달되었다. 전선의 이동에 따라 받는 시기는 들쭉날쭉했지만 빠짐없이 전달되었다. 군 검열의 흔적도 없었다. 아무래도 한국군 장교에 대한 특별한 배려인 듯했다.
동생의 편지가 오고 나면 움직이는 부대 안에서도 열심히 답장을 쓰는 채정혁의 모습은 관전무관단 내에서도 중요한 농담거리였다. 그는 10명으로 구성된 무관단 내에서 가장 어린 축에 속했고, 대부분의 장교들은 기혼자였다. 그들은 마누라도 아닌 여동생에게 지극정성인 채정혁을 이해 못하면서도 재미있어 했다.
“채 정위, 뭐하나? 애인한테 편지 써?”
“이 친구도 참, 여태 몰랐나. 마나님이시라네.”
“뭐? 채 정위 결혼했었나?”
“아니, 채 정위는 여동생이 마나님이라네. 아주 지극정성이야. 우리 마누라하곤 한 달이 지나도록 서로 편지가 없는데, 이 친구는 매주 이렇다니까.”
이렇게 농을 걸어오면 채정혁은 계면쩍은 얼굴로 미소 짓고 넘어갈 수밖에 없었다. 한 번은 정아가 새로 찍은 사진을 편지에 동봉해서 보냈다. 그 사진은 동료 장교가 본 즉시 이곳저곳으로 넘나들었다.
“아니, 채 정위! 귀관에게 이런 미인 여동생이 있었다니! ……앞으로 처남이라 불러도 되겠는가?”
“지극정성인 것이 이해가 되는구먼! 이런 어여쁜 누이가 있다면야 나도 그랬을 텐데. 형제라곤 산적 같은 남자 놈만 있으니…….”
“내가 5년만 젊었어도 도전해 보겠건만, 결혼을 일찍 한 것이 한이로다.”
이제 겨우 16살이 된 애를 두고 무슨 이런 농담이냐 항의를 하면,
“무슨 소리, 성춘향이 이몽룡을 만났을 때 방년 열여섯 아니던가! 좋을 때지!”
“무슨! 저 소녀가 춘향인 건 받아들이더라도, 그럼 자네가 이몽룡이라도 된단 말인가? 거울을 보게나.”
이런 이야기가 오고 가며 술 없이도 분위기는 왁자지껄해졌다. 그 이후로 정아의 편지가 올 때마다 편지는 모두의 손때를 타게 되었다. 정혁은 난처하면서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대개 제2차 인도양전쟁의 참전 경력이 있는 동료 장교들도 전쟁에 넌더리를 내고 있었던 것이다. 순수한 여학생의 편지가 전쟁을 지켜봐야 하는 그들의 마음을 치유해 줬던 것이다.
한 번은 미혼자인 이 정위가 진지하게 귀국 후 한 번 소개를 청했을 때, 그는 웃으며 완곡하게 거절 의사를 분명히 했다. 채정혁은 동생을 절대로 군인에게 시집보낼 생각이 없었다. 훌륭하게 교육을 시켜서, 잘 교육받고 여자를 배려할 줄 아는 안정된 청년과 사랑을 하게 된다면, 언제고 결혼을 허락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군인만큼은 안 될 소리였다.
제국에서 군인, 특히 해군에 비해서 육군은 대우가 좋지 않고 진급이 적체되어 있을뿐더러, 언제고 식민지 전쟁터로 끌려갈 위험이 있는 직군이었다. 그런 신분의 남자에게 동생의 인생을 맡기는 것은 안 될 말이었다.
잠시 동생의 앞날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던 채정혁을 현실로 돌아오게 한 것은, 어디선가 들려온 총성이었다.
‘무슨 총성이 갑자기……. 순군의 잔당이 이곳에 나타나긴 힘들 텐데?’
채정혁은 신경이 날카로워지는 것을 느끼며 총소리가 나는 곳을 향해 말을 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