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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의 계보 1권(7화)
제1장 풍운(風雲)(4)
“때가 되었습니다. 다시 가야 할 길을 가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는 연로한 어머니 안드레아에게 단호하게 다시 북해로 가겠다고 말했다. 연공으로 다시 돌아와 있는 동안 가정도 꾸리고, 처자식도 있었지만, 지금 그에게 있어서 가정은 우선순위가 될 수 없었다. 더군다나 연공에서 사회적으로 성공한 위치에 올라선 형제들이 대학에 다니고 있는 자녀들을 충분히 도와줄 수 있었다.
아내와 떨어져 다시 그 북해의 아수라장으로 뛰어드는 것이 조금 마음에 걸리긴 했지만, 젊은 날 이래 그는 북해의 혁명을 한 번도 잊어본 적이 없었다.
“어쩜 네 아버지와 그리 같은지…….”
어머니는 아들을 말리지 않았다. 남편 김효가 진서의 독립항쟁에 참여할 때도, 그 아들이 성장하여 다시 북해로 건너가겠다고 했을 때도, 그리고 또 20년의 세월이 흘러 아들이 또다시 그 험난한 길에 뛰어들겠다고 할 때도 그녀가 해줄 수 있는 것은 그저 몸조심하라는 충고뿐이었다.
바로 다음 날부터, 그는 신분을 위조하기 위한 서류를 마련하고, 사업가의 행색을 갖추어 독립운동자금으로 유용될 많은 액수의 정금(正金)을 투자자금으로 신고해서 연공주재 한국 영사관에서 확인증까지 받아 두었다.
혹여나 신분이 탄로날까 봐, 그동안 기르지 않았던 수염도 무성하게 기르고 자본가들이 입는 비싼 옷까지 맞추어 두었다. 일부러 북해로 들어가는 선편에서 1등 실을 예약해 둔 것도 그 때문이었다. 여하간 이러한 계획이 도움은 되었는지, 김요섭은 아무런 문제없이 영안에 상륙할 수 있었다.
영안부의 도심지로 들어서자마자, 그는 조바심을 내지 않고 일단 항구가 내려다보이는 가장 좋은 호텔인 「해송관(海松館)」에 여장을 풀었다. 당분간 행동에 조심을 해서 나쁠 것은 없었다.
우선은 연공 출신 투자자로서 잘 위장해 두는 것이 중요했다. 신대륙 출신 벼락부자가 독립투사로 변신할 날이 머지않았다.
1860년, 요동국 개국기원 444년 9월.
20만에 달하는 요동군은 철도를 이용하여 신속하게 요순(遼順) 국경에 집결했다. 이미 빼곡하게 짜인 전시 계획대로 이 병력들은 오차 없이 작전대로 전장에 투입되었다. 개전과 동시에 기존의 국경인 산해관(山海關)을 넘어서서 이미 전쟁 이전부터 주둔 중이던 해군과 육군이 장악하고 있는 천진(天津)과 북평(北平)을 기점으로 전쟁을 확대시켰다.
요동과는 다르게 순나라의 영토가 놓여 있는 화북 지역에는 철도의 연장이 미미했고, 그나마 유이(有二)한 간선철도인 경북선[卞京―北平]과 북위선[北平―威海衛]마저 요동의 군사작전에 이용될 가능성을 우려한 순 정권이 스스로 폭파시켜 버렸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빠른 진격과 점령 작전은 요동군의 오랜 자랑거리인 기병대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북평에서 세 갈래로 요동군은 갈라져서 속전(速戰)을 개시했다.
제1군은 보정, 석가장을 지나 한단 방면으로 진격했고, 제2군은 천진에서 출발하여 병주를 지나 산동의 제남으로 향했다. 마지막으로 별동대인 3군은 산악지대를 행군하여 대동, 삭주를 지나 태원으로 향했다.
목표는 모두 순의 도읍인 변경(卞京) 개봉부(開封府)였다. 전면전을 개시한 만큼, 요동군의 진격은 여느 때에 비해서도 강력하고 신속했다.
1군은 석가장 전투에서 순의 주력군을 가볍게 격파하고 남하를 계속했다. 숫자는 많았지만 훈련이 부족하고 구식 전장식 소총으로 무장한 순의 군대는 후장식 소총으로 무장한 정예 요동군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아니, 애초에 전근대적 봉건국가인 순이 산업국가인 요동을 상대로 전쟁을 치르는 것 자체가 무리였다.
요동국의 침공 시 군사 지원을 약속했던 양은 몇 달 전 발발한 태평국과의 2차 전쟁에 휘말려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하니, 순은 속수무책으로 국토를 요동에 넘겨주고 있었다. 순의 대 요동 강경책은 그야말로 한단지보(邯鄲之步)에 불과했다.
“이제 한단이로군.”
백마 위에 승마해 있는 요동군의 장교―1군의 선봉에 선 제3근위기병연대의 연대장으로, 새파랗게 젊은 장교였다―가 순군이 버리고 떠난 한단에 입성을 하며 짧은 상념에 빠졌다.
한단은 지금은 크지 않은 현에 불과하지만, 옛 조(趙)나라의 수도이자 한(漢)대의 번영하던 고대 도시였다. 또한 한단은 중국을 최초로 통일국가로 이끈 진의 시황제(始皇帝) 영정이 태어난 곳이기도 했다.
시황제의 통일국가는 불과 20년 만에 깨지고 멸망하고 말았으나, 어찌 되었든 그는 최초의 통일군주였고 한당송명(漢唐宋明) 시기의 통일국가로 돌아갈 것을 부르짖는 범중화주의자들의 귀감이었다.
‘그 대단한 업적을 이뤘다는 진시황도 죽음을 두려워하던 한낱 인간에 불과했다. 그는 왕의 서자였고 나 또한 왕의 서자이다. 같은 인간이건데, 내가 그보다 못할 것은 무엇이랴!’
청년 장교는 상념에서 깨어나며 스스로를 돌아다보았다.
그는 요동국왕 김호(金瑚)의 막내아들인 영화군(榮華君) 김욱(金旭)이었다. 사람들은 김욱을 보게 되면 제일 먼저 그의 놀라울 정도로 빼어난 용모에 감탄했다. 균형 잡힌 날씬한 체격 위의 얼굴은 김호가 가장 총애하던 어머니의 미색을 그대로 물려받은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동양인답지 않은 뚜렷한 이목구비는 마치 고대 희랍의 조각상을 보는 듯했다. 흔치 않게 그가 사교계에 나오는 날이 있다면, 뭇 여성의 애타는 시선이 김욱에게 쏠렸다. 그러나 그는 여성에게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언제나 자신에게도 엄격한 그에게 사사로운 취미가 있다면 애마에 몸을 싣고 들판을 달리는 것뿐이었다.
특히 검은색 바탕에 은색 자수를 놓은 요동의 기병군복은 하얀 그의 피부색에 잘 어울렸다. 그렇기에 그가 열아홉이라는 어린 나이에 근위기병연대장으로서 참전한 것을 명받았을 때 사람들은 군복 입은 인형의 모습을 즐기려는 왕가의 허세 정도로만 생각을 했다.
그러나 그것은 오산이었다. 그는 일찌감치 유년 시절부터 군사교육을 받았고, 작년에 있었던 러시아와의 전쟁에서도 중대장으로서 참전한 몸이었다.
요동 왕족이 군에 복무하고 참전하는 것은 국가의 오랜 전통이었으나 군의 전문화가 이루어진 최근에는 형식적인 것에 불과했는데, 이 어린 왕족은 진정 최전선에 뛰어들어 적과 싸웠다.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여러 차례의 실전 경험을 갖고 있는 이답게 전쟁에 곧잘 적응할 정도가 아니라 오히려 탁월한 지도자로서의 자질을 보여주고 있었다.
김욱은 연대장으로 부임하자마자 그의 지휘를 탐탁지 않게 여기는 귀족 출신 장교단을 순식간에 휘어잡았다. 전쟁의 발발과 함께 전장으로의 진격을 계속하면서 그는 병사들과 똑같은 위치에 침식을 같이하고 전장에 뛰어들었다.
연대원들은 아직 어린 김욱의 극기에 가까운 자세와 침착하면서도 격정적인 지휘에 놀라워하면서도 신기해했다.
김욱은 왕이 뒤늦게 본 서자였다. 요동은 1세기 넘게 일부일처제가 자리 잡았으나, 정부의 고관대작이나 귀족, 부유한 자본가들이 축첩을 한다는 것은 공공연한 사실이었다. 하물며 요동의 최고 지배자인 국왕은 말할 것도 없었다.
김호는 즉위 초 약화되어 있는 국왕의 권한을 50년에 가까운 오랜 재위 기간 동안 교묘하게 강화하고 영향력을 키워 나가 요동국 초기의 국왕 전제에 가까운 권력을 행사했다. 감히 그가 원하는 일을 대놓고 반대할 수 있는 신료들은 없었다.
이십여 년 전, 오십 줄에 들어선 김호는 자식들보다 어린 여인 안혜은(安惠恩)을 첩으로 삼았다. 평범한 관료의 딸이지만 미색으로 성경에 소문이 자자한 여인이었다.
적지 않은 명문 귀족들이 그녀를 노렸으나 국왕이 먼저 건드리는 바람에 땅을 치고 아쉬워했다는 후일담이 나돌 정도로, 안혜은은 아름다웠다.
그녀가 첫 딸에 이어 아들을 생산하자, 김호는 크게 기뻐하며 그녀를 더욱 총애했다. 때마침 김욱이 태어난 시기는 장남이자 세자인 김건(金虔)이 급작스럽게 별세한 직후였다.
이제 남은 아들은 무기력한 차남 김손(金푡)뿐인데, 그조차도 자식이 없었다. 그만큼 왕가의 남계가 귀한 상황에서 늦은 나이에 아들을 보았으니 왕의 기쁨은 말할 것이 없었다.
허나 왕의 총애를 아무리 받는다 한들, 안혜은과 그녀의 아이들은 공인받지 못한 그림자와 같은 처지였다. 요동국법은 엄격하게 일부일처제만을 허용하고 있었고, 이것은 왕가라 해도 예외가 아니었다. 성광사의 일가(一家)가 양자 입적 같은 편법을 통해 왕실 종친의 말석(末席)밖에 차지하지 못했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국가적인 제도와 관련된 것이라, 왕으로서도 이를 딱히 돌봐줄 형편이 못되었다. 그는 바쁜 국사 중에 가끔씩 밤마다 찾아와 시간을 보내는 것이 전부였고, 대놓고 말은 하지 않아도 나이 든 중전과 세자가 그들 모자에 대해서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것은 성경부중의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김욱과 그의 누이는 재정적으로는 넉넉하지만 왕가의 일원이 아닌 평민으로서 자라났다.
이러한 환경에 변화가 찾아온 것은 김욱의 나이 열한 살 때의 일이었다. 왕은 왕가의 남계가 귀한 상황에서 후계자 생산을 위해 국왕에 한하여 의회의 동의하에 첩의 자녀를 국왕의 공식적인 자제로 인정하는 것이 가능하도록 왕실법을 개정했다. 하나뿐이지만 병약한 세자가 계속 나이가 들어가는 상황에서 국왕의 강력한 요구는 받아들여졌고, 김욱의 어머니는 빈호(嬪號)를 받지 못하였으나, 그 아이들은 군호(君號)와 옹주(翁主)의 직첩을 받을 수 있었다. 영화군(榮華君)의 군호와 함께 종3위 백작(伯爵)의 작위를 받았으나, 김욱은 아는 이라고는 아무도 없는 궁성(宮城)에서의 외로운 생활을 시작해야 했다.
따뜻한 어머니와 함께했던 유년 시절도 끝났을뿐더러, 살벌한 궁중 생활마저도 종래에는 오래가지 못했다. 못내 눈엣가시였던 김욱을 중전과 세자는 노골적으로 사갈시했고, 이에 더불어 김욱의 존재가 세자의 자리를 위협한다고 여기는 신료들의 불편한 시선이 김욱을 압박해 왔다.
결국 이를 의식한 부왕이 김욱을 유년군사학교에 보내는 것으로 사람들의 시선 밖에서 치우는 수밖에 없었다. 물론 여기에는 김욱에 대한 배려도 있었다. 복잡한 궁내 정치의 희생자가 되는 것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 말이다.
어린 김욱은 이후 유년군사학교에서 혹독한 교육을 받으며 웃음을 잃어 갔다. 규모는 크지 않지만 동양 최고의 강군을 자랑하는 요동군은 체계적이면서도 가혹한 훈련으로 유명했다. 주로 군사 명문가의 자제들로 선발된 유년군사학교도 이와 다르지 않아서, 나이와 신분의 고하에 상관없이 고된 훈육을 받아야 했다.
김욱은 우수한 성적으로 거의 모든 과목에 수석을 도맡아 했으나, 동무는 없는 고독한 삶이었다. 그 자신이 어울리는 것 자체를 좋아하지 않았을뿐더러 대개가 명문가의 자제인 동급생들은 모호한 신분의 그를 어려워했다.
왕자라고 아부하는 자 아니면 겉으로는 정중하게 대해도 내심 벼락출세한 첩의 자식이라고 시기하고 혐오하는 자들뿐이었다. 어느 쪽이든 김욱은 유년학교의 동기들을 경멸했다.
냉정하고 차갑게 굳어 가는 얼굴 안쪽에서는 김욱은 어머니에 대한 갈증만이 깊어져 가고 있었다. 김욱의 심리 깊은 곳 속에서 어머니는 이상적인 여인으로서 영원히 남았다.
유년군사학교의 기숙사에 머무르다 한 달에 한 번 휴가를 받고 나가면 그날만큼 기쁜 날이 없었다. 그 감옥 같은 기숙사로 돌아가면 어머니와 누이의 따뜻한 정을 기억하며 잠자리에 들었다.
언제였던가, 아주 어렸을 때의 일이었다. 어머니는 자신의 이름 뜻을 묻는 김욱을 가슴에 품으며 대답했다.
“내가 너를 낳을 때 태몽으로 태양이 떠오르는 모습을 보았단다. 크면서도 활활 타오르는 태양이었지. 그 떠오르는 태양처럼 세상을 비추는 사람이 되라고 욱이라고 지은 것이란다.”
김욱의 가슴속에는 숨겨진 첩으로서 그림자 속에 살아야 했던 어머니에 대한 애틋한 사랑과 무심한 권력자인 아버지에 대한 애증이 교차하는 가운데, 삐뚤어지고 잘못된 세상을 자신의 발아래 놓고 바로잡고 싶다는 야망이 점차 커져 가고 있었다.
유년학교에서는 어린 나이부터 생도들에게 역사와 군사 전략에 대해 가르쳤고, 역사상의 유명한 정복자와 명장들의 삶과 전략에 대한 가르침을 받고 자란 김욱에게 역사속의 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인물이 되는 것만이 마치 덤처럼 주어진 자신의 삶을 뛰어넘는 것이라 생각이 들었다.
그리된다면, 정말 그렇게 된다면, 세상의 사람들은 그를 첩의 아들, 허울뿐인 왕자가 아니라 위대한 정복자로서 기억할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