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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의 계보 1권(6화)
제1장 풍운(風雲)(3)
15년 전 그날, 패전 분위기를 무마하기 위한 연등제에 놀러 나간 사이, 아버지는 스스로 이해할 수 없는 대죄 고백의 문서를 남기고 자결했다.
15년 전 그날은 모든 것을 바꾸어 놓았다.
늦은 밤이 되어 집으로 돌아와 아버지를 찾아 서재에 들어갔을 때, 그는 순간 세상 전부가 멈춘 듯한 충격을 받았다.
아버지는 책상 위에서 머리가 깨져 피를 흘리며 죽어 있었다. 그는 주저앉아 벌벌 떨며 우는 것 외엔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갓난아이인 여동생의 울음보가 터진 후에야 그는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얼마 후 군인들이 집에 들이닥쳤고, 다시는 옛 추억이 담겨 있는 그 집에 돌아가지 못했다.
채정혁은 군대에서 성공 하고 싶었다. 그래서 그날의 비밀에 접근하고 싶었다. 여동생과 양부모를 부양하는 것이 일차적인 이유였지만, 그것이 다는 아니었다.
아버지를 믿으면서도, 내심 마음속 한켠에는 정말로 아버지가 반역죄를 저지른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도 남아 있었다.
육군 유년학교 시절부터 지금까지 내내 채정혁은 그것을 한순간도 잊은 적이 없었다. 때문에 더욱 국가에 충성하는 모범 군인의 품성을 겉으로 잃지 않고자 했고, 애국심으로 단단히 무장하여 제국군의 일원으로서 진실로 몸을 바쳐 봉사하고자 했다.
하지만 전쟁의 경험은 그를 송두리째 흔들어 놓았다. 이 모든 것에 대한 회의가 아직 젊은 그에게 깊게 자리 잡기 시작했다. 한편으로는 자신의 신분이 밝혀지는 것을 두려워하면서도, 군 경력을 쌓아 출세하기 위해 그는 표정을 관리해야만 했다. 이제는 더 이상 군대도, 전쟁도 가볍게 여길 수가 없었다.
원치도 않고 어울리지도 않는 장소와 직위에서 채정혁은 가짜 인생을 살아가야만 했다. 그러나 이것을 모두 내던지고 살고 싶은 인생을 살아갈 수도 없었다. 이러한 모든 내막을 목격한 자신과 달리, 여동생 채정아(蔡政雅)는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
태어나자마자 어미를 잃고, 얼마 안 되어 아비마저 잃은 불쌍한 아이였다. 정혁은 어린 나이에 닥친 자신의 불행을 저주하면서도 동생의 모습을 보면서 마음을 다독였다.
‘이제 내가 이 아이의 부모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 내가 열심히 살지 않으면 안 된다.’
정아의 성장만이 그의 유일한 기쁨이었다. 어느덧 그 아이는 열여섯의 총명하고 아름다운 소녀로 자라났다. 오빠의 눈으로 바라봐서가 아니라, 정아는 정말로 참하고 좋은 아이였다.
고등여학교(高等女學校)의 우등생인 정아는 학비가 아무리 많이 들어도 「성심여전(聖心女專)」에 보낼 생각이었다. 양부모의 지원과 정체 모르는 이의 후원이 있다 하나, 나중에 결혼 자금까지 생각하면 정위 월급만으로는 아무래도 빠듯했다.
몇 달을 준비했던 행사를 마치고 귀대한 채정혁에게 상부로부터 호출이 내려온 것은 며칠 후의 일이었다.
그는 자신을 찾는 참모부의 고재완(高才腕) 정령을 만나러 용산의 본영으로 향했다.
대한제국 군부(軍部)의 최고 사령부가 자리하고 있는 이곳 용산에 올 때마다, 채정혁은 어릴 적의 기억들이 되살아 나오는 것 같아 괴로웠다. 이곳 지척이 젊은 시절을 보냈던 관사였다.
채정혁은 애써 그쪽 방향으로는 시선을 주지 않으려고 하면서 군마를 몰아 군영으로 들어섰다.
“정위 채정혁, 부르셨다고 들었습니다.”
거수경례를 하는 채정혁에게 단정한 중년의 군인이 웃으며 화답했다.
“음, 그래. 그간 무탈했나?”
“예, 이상 없이 충실히 복무하고 있습니다. 교수님께서도 그간 평안하셨습니까?”
고재완 정령은 채정혁의 사관학교 시절 교수였다. 그는 생도 시절의 채정혁을 높이 평가하고 아꼈다. 그는 최종적으로 생도 평가에 채정혁을 「매우 우수한 자질과 성실함을 겸비하고 있으며, 보국(報國)에의 의지가 있으며, 훌륭한 군인으로서의 품행을 두루 갖추고 있음. 특히 관심 있는 분야에 대해서는 뛰어난 집중을 발휘함. 사격술 또한 우수.」라고 평가했었다.
채정혁 역시 엄격하면서도 공정한 교수를 존경하며 따랐다. 비록 군대라 말투는 딱딱했으나, 그들의 관계는 사제지간에 가까웠다.
“이리 와 가까이 앉게.”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고재완 정령이 채정혁을 자리에 앉기를 권하자, 채정혁은 군모를 탈모하고 허리를 꼿꼿이 세운 자세로 의자에 엉덩이만 살짝 걸쳐 놓듯이 앉았다.
채정혁의 성격에 절대 그러지 않을 것을 알고 있는 고재완 정령은 편히 앉으라 말하려던 것을 그만두었다. 대신에 쓸데없는 말로 괴롭히지 않고 즉시 본론으로 들어가는 배려를 해주었다.
“채 정위도 이미 소식을 들었겠지만, 요동과 순 사이에 전쟁이 발발했네. 아마 요동이 쉽게 승기를 잡겠지만, 정부는 요동의 향후 행보에 우려를 가지고 있고, 우리 군부 또한 차제에 요동군의 현황을 시찰해 보고자 하는 마음이 있네. 그래서 바로 어제 관전무관단(觀戰武官團)을 편성하라는 지시가 내려왔고, 부끄럽지만 내가 그 단장을 맡게 되었네. 이 관전무관단의 인선은 내가 전적으로 맡고 있는데, 자네가 원하기만 한다면 데려갔으면 해서 오늘 이렇게 불렀네. 어떤가?”
갑작스러운 고재완 정령의 권유에 채정혁은 일순 당황했다. 그러나 그는 곧 침착함을 되찾고 승낙했다. 그의 입장에서 사관학교 시절의 은사이자, 한 명의 사표(師表)인 고재완의 요청을 거절하는 것은 생각하기 힘들었다.
더군다나 무리한 요구도 아닐뿐더러, 채정혁 자신도 관전무관으로 가는 것은 기꺼운 일이었다. 다만, 마음 한구석이 무거운 것은, 직접 다시 전장을 보게 되면 혹여나 마음이 동요하지나 않을까 하는 것이었다. 실론 전역에서 얻은 정신적 외상이 아직 완전히 극복되지 않고 있었다.
“물론 교수님께서 불러주신다면 저는 기꺼이 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출발은 언제인지 알 수 있겠습니까?”
“역시 깔끔해서 좋군. 나도 말을 이리저리 돌리면서 질질 끄는 것은 좋아하질 않아서. 군인한테 어울리는 화법도 아니고 말이지. 여하튼 곧 인선이 완료될 것이고, 공식적으로 발표가 있을 걸세. 전쟁이 생각보다 일찍 끝날 수 있는 만큼 요동과 협의를 마치는 즉시 출발하게 될 걸세.”
“알겠습니다. 그럼, 준비해 놓고 있겠습니다. 보국!”
“음, 또 기별하겠네.”
고재완의 방에서 나온 후 채정혁은 씁쓸하게 웃었다.
중국 대륙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비록 지금은 쇠락했다 하나 순이 있는 화북 지역은 역사상 수많은 인물들을 배출한 동양의 보고였다. 비록 전쟁의 형태라고는 하나 그곳에 가 보는 것은 바라던 바였다.
평소 역사에 대한 독서를 즐기는 채정혁에게는 기꺼운 명령이었다. 다만, 마음 한켠에서 전장의 포성이 지워지지 않고 생생하게 울리고 있다는 것이 짐이라면 짐이었다.
더불어 우려스러운 것은 자신이 오래간 부재하게 되면 동생 정아가 걱정이 늘어날 것이라는 점이었다.
3년 전 제2차 인도양 전쟁 당시에, 전선인 실론에 배치되었을 때 동생은 근심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혹여나 사지로 나가는 게 아닌지 해서 울며불며 걱정하던 모습은 평소 감정 표현이 많지 않은 채정혁마저 당황케 할 정도였다.
물론 이번에는 관전단의 신분이니 그다지 위험하지 않을 것이라 설득할 터지만, 그래도 전쟁터에 오라비가 나간다는 것 자체가 그 아이에게는 걱정거리일 터였다.
‘오랜만에 휴가를 얻어 집에 들어가는 데, 바로 전쟁터로 나간다고 하면……. 무어라 이야기를 꺼내야 할지.’
채정혁의 마음속에서는 기쁨과 걱정, 그리고 당혹감과 난처함이 교차하고 있었다.
***
영안부 외항(外航)에는 일주일에 두세 척의 국제 선편이 입항했다. 대개는 일본을 거쳐서 오는 것이었고, 드물게는 태평양을 건너 신대륙에서부터 오는 것이 있기도 했다. 남쪽에서 올라오는 배들은 대부분 동래나 목포, 혹은 인천에서 철도교통으로 흡수되기 때문에 영안까지 올라오는 일이 드물었다.
그 자체가 옛 내지 팔도에 북해가 경제적으로 완연히 종속되었음을 의미하는 표시이기도 했다.
북해의 관문이라는 영안항의 사정이 이러니 만큼, 세관 건물에 자리한 입국 심사대의 관리는 한가한 직업이었다.
월봉이 짜기는 하지만, 업무 강도를 놓고 보자면 대우는 괜찮은 편이었다.
두 달 만에 연공(聯共, 동영연방공화국)으로부터 들어온 선편이 아니었다면, 오늘도 파이프에 담배를 붙이고 느긋하게 석간신문이나 읽고 있을 터였다.
그러나 간만에 심사해야 될 인원들이 생긴 탓에 그는 돋보기를 끼고서 입국자들의 여권과 서류를 검토해야만 했다. 오늘 연공 창주시로부터 출발한 「대륙호」를 통해 입국 신청을 한 30여 명의 인원 중에 그다지 눈에 띄는 인물은 없었다.
관리는 별다른 제재 없이 전원을 허가 도장을 찍어서 심사대를 통과시켜 주었다.
마지막으로 점잖은 외모의 사업가에게 입국을 환영한다는 의미로 웃음을 지으며 살짝 고개를 끄덕여 준 것을 마지막으로, 관리는 그날의 업무를 종료했다.
마지막으로 이 심사대를 통과한 사업가 행색의 중년 신사는 묘한 감흥에 사로잡혀 있었다. 내심 티가 나지 않게 살짝 긴장해 있었지만, 다행히 예상대로 별로 책을 잡히는 일은 없었다.
북해는 실로 오랜만이었다. 이곳은 그의 고향이자, 젊은 날의 청춘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곳이었다. 이제는 옆 이마가 깊숙이 파이고, 머리의 새치가 부쩍 늘어난 중년의 나이가 되었으나, 마음만큼은 이곳 북해에 남겨둔 젊은 날 것 그대로였다.
그는 진심으로 북해의 입국 심사가 완화된 것을 감사했다. 그러나 입맛이 조금 씁쓸한 것도 사실이었다. 입국이 허술해진 것 자체가 대외적으로 북해가 안정을 찾았다는 방증이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이 중년의 신사는 다름 아닌 제국의 역도이자 「북해 분리주의자」로서 악명이 높은, 수배 명단 수위에 올라와 있는 김요섭이었다.
합방 10주년 기념식의 의거 이후 본격적으로 북해 독립운동에 뛰어든 그는, 수사망이 좁혀옴에 따라 간신히 체포를 면하여, 긴박한 탈주 끝에 요동과 순, 그리고 다시 양나라를 경유하여 연공으로의 망명길에 오르는 수밖에 없었다.
그는 망명 기간 동안, 주도했던 테러 활동이 독립운동의 싹을 틔웠다는 의의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대중의 폭넓은 지지를 받지 못했던 한계가 있음을 절감했다. 오랜 숙려 끝에 그는 새로운 활로를 찾고자 모색하고, 다시 독립운동을 재개할 기반을 다지기 위한 자금을 모으고 조직을 구축하기 시작했다.
한편에 그는 독립운동과 사회운동의 이론적인 정합(整合)을 갖추기 위해 공부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1850년대에 이르러 한때 아버지 김효가 사숙했던 카를 마르크스의 여러 저작들이 출판되어 연공으로 흘러들어 왔고, 김요섭은 그의 저작을 중점적으로 자본주의 사회에 대해 탐구해 나갔다.
그는 창주에 머무르는 동안 마르크스의 저작들을 한국어로 번역하고 동시에 《연공 노동계급의 현재》, 《사회주의와 민족 문제》, 《북해해방선언》, 《북해 인민에게 고함》 등의 정치 팸플릿을 저술했다.
그는 현재 북해에 대한제국의 통치가 일견 관용적이고 타협적인 것처럼 보이나 그것은 철저한 기만책이라고 일관되게 주장했다.
북해인 중 제국이 말하는 소위 신민으로서의 「황은」을 받는 것은 제국의 질서에 적극 호응하는 소수 자본가와 지주들뿐으로, 대다수의 북해 인민은 소외된 존재라는 것이었다.
내지의 민족적 차별은 덜해졌을지 몰라도, 자본가―지주들로부터 계급적인 차별은 현재 진행형으로, 갈수록 심화되고 있었다. 여전히 차별받고 학대당하는 인민 대중을 조직하여 내지의 노동자들과 연대하여 혁명을 일으키는 것이 그가 생각하는 혁명 조직의 역할이었다. 오직 대중에 기반한 조직적 혁명운동만이 진정한 승리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 그는 확신하고 있었다.
오랜 망명 생활에 지쳐 가던 1860년의 여름에 이르러, 그는 북해로부터 새로운 소식을 전해 들을 수 있었다.
제국의 탄압과 기만으로 오랫동안 지하에 잠적해 있거나 망명 중인 독립 투사들이 합방 30주년에 이르러 「북해해방전선」의 이름 아래 통일전선을 조직하기로 결의했다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