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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의 계보 1권(4화)
서장(4)
스웨덴 제국(Konungariket Sverige)은 1848년 혁명의 가장 큰 직격타를 맞은 국가였다. 중부 유럽의 전통적인 강국이나, 민족적인 결합이 아닌 왕조 간의 결합에 불과했던 스웨덴―오스트리아 제국은 혁명의 민족주의적 요구에 가장 민감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었다.
1848년 북부 독일, 오스트리아, 보헤미아, 덴마크 일대에서 반 스웨덴 봉기가 잇따라 발생했고, 스웨덴은 이를 무력으로 진압함으로써 해결하고자 했다. 그러나 스웨덴은 주변에 적이 너무나 많았다. 스웨덴의 ‘약소민족 탄압’을 명분으로, 스웨덴 제국의 해체를 희망하는 주변 국가들이 총결집했다.
프랑스, 러시아, 폴란드―리투아니아, 라인 연방, 브란덴부르크―작센 등도 「독일 해방전쟁」에 동참했다.
스웨덴의 해외 식민지를 노리던 브리튼 연합 왕국마저 전쟁에 참전하자, 강군을 자랑하던 스웨덴도 도저히 전쟁을 수행할 수 없게 되었다. 1853년, 스웨덴은 오스트리아―보헤미아의 독립을 인정하고, 발트 공국을 러시아에, 프로이센을 폴란드―리투아니아에, 포메른을 브란덴부르크―작센에, 인도와 카리브해의 해외 식민지를 연합 왕국과 프랑스에 양도함으로서 제국을 사실상 해체했다.
또한 전쟁의 패배는 스웨덴 정치의 민주화를 촉발시켜, 선거권을 대폭 확대하고 완전한 입헌정치에 동의하게 했다. 그러나 실추된 위신에도 불구하고 스웨덴은 여전히 덴마크, 노르웨이 왕국 및 핀란드 대공국을 보유하고 있는 북방의 강국이었다.
북독일 연방(Norddeutscher Bund)은 스웨덴―오스트리아 제국의 유산 위에서 태어났다. 신성 로마 제국이 해체된 이래, 독일 영방국가들은 통일체 없는 국가들로 쪼개져 있었다.
독일 해방전쟁이 전개된 이후, 독일의 통일을 열망하는 민족주의자들이 독일 전역에서 세를 얻었다. 그들이 희망의 대상으로 바라보는 것은 가장 강력한 영방 국가인 브란덴부르크―작센이었다.
브란덴부르크―작센은 포메른을 획득한 데 이어,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러시아를 지원하여 프로이센의 일부를 얻는데 성공했다. 브란덴부르크―작센의 외무장관 비스마르크(Otto Von Bismarck)는 프랑스와 러시아라는 양대 강국의 사이에서 교묘한 외교술을 발휘하여 국익을 확대했다.
그는 1856년 루이 나폴레옹과 알렉산드르 2세를 설득하여 하노버 및 라인 연방을 포함한 북독일 연방으로의 확대를 이끌어 냈다. 북독일 연방은 마인 강 이북의 개신교 지역을 포괄하나, 남부의 가톨릭 왕국들, 즉 바이에른, 뷔르템베르크, 바덴 및 신생 오스트리아―보헤미아는 연방에 가입하지 않았다.
프랑스는 친 프랑스적이면서 반 스웨덴, 반 브리튼적인 국가가 대륙 한복판에 자리 잡는 것을 만족스럽게 지켜보았다.
북독일 연방은 스웨덴을 대신하여 중부 유럽의 새로운 강자로 등장했으나, 아직까지는 프랑스의 후원을 받는 하위 파트너이다.
마자르 공화국(Magyarorsz g)은 중동부 유럽의 강국이다. 1848년 혁명의 여파로 마지막 국왕 페렌츠 3세가 퇴위하고, 코슈트 러요시(Kossuth Lajos)를 수반으로 하는 공화정부가 수립되었다.
코슈트는 일부 지역에서 잔존하고 있는 농노제를 즉각 폐기하고, 폭넓은 참정권을 부여하여 정권의 지지 기반을 넓혔다. 신생 마자르 공화국은 대북방 전쟁과 우크라이나 전쟁에 참전하여 오랜 숙적인 스웨덴―오스트리아와 폴란드―리투아니아의 몰락에 일조하였다.
마자르 공화국의 약점은 국가 내에 수많은 민족들이 공존하고 있는 것인데, 코슈트는 민족 간 연방 공화국의 수립을 통해 이 문제를 해결하려 했으나 부더―페슈트의 마자르 민족주의자들의 반대로 실현시키지 못했다.
마자르는 지중해 및 발칸 반도로의 진출을 통해 옛 앙주 제국 시절의 영광을 되찾고 싶어 한다.
북미 연방(Union of North America)은 아메리카 대륙의 새로운 강국이다. 애당초 북미 동부의 유럽 식민지 개척 지역은 잉글랜드로부터 독립한 뉴잉글랜드 공화국, 프랑스로부터 독립한 카나다 공화국, 네덜란드와 스웨덴으로부터 독립한 니우 네덜란드(Nieuw Nederland)와 뉘아 스베리예(Nya Sverige)가 연합한 북미 연방으로 나뉘어져 있었으나 1843년 뉴잉글랜드와 카나다가 북미 연방에 합류함으로써 일약 강국으로 성장하였다.
다양한 민족의 자유로운 국가를 표방하는 북미 연방은 슬로건에 걸맞게 영어, 프랑스어, 스웨덴어, 네덜란드어, 독일어를 공용어로 지정했으며 수도는 정부 소재지 및 학문의 중심지 보스턴과 의회 소재지 및 상업의 중심지인 니우 암스테르담(Nieuw Amsterdam) 두 곳이다.
특히 1840년대 이후 부유하고 자유로운 국가의 이미지로 유럽의 빈민들이 대거 북미 연방으로 이주함에 따라 증대하는 산업의 인력이 되었다.
1840년대 후반부터 폭발하는 국력을 서쪽으로의 「프런티어」로 확장해 나갔다. 이로쿼이 연방을 무력으로 제압하고 북미 연방에 가입시킨 후, 연합 왕국의 자치 식민지인 버지니아와 단기간의 전쟁을 벌여 병합에 성공했다.
중부의 만주 제국은 광활한 영토를 보유하고 있으나 그에 걸맞는 인구와 산업을 갖추지 못했고, 북미 연방의 다음 목표가 되었다. 북미 연방이 만주 제국에까지 개입하자, 북미 연방과 더불어 대륙회의를 주도하는 양대 강국인 동영 연방공화국은 만주에서의 즉각적인 철수를 요구, 신대륙에도 전운이 감돌고 있다.
서력 1860년,
경신년,
대한국 건흥 3년,
요동국 개국 444년,
대양국 동치 11년,
태평국 태평 9년,
일본국 고메이 7년,
바야흐로 새로운 시대가 수평선 위로 떠오르고 있었다.
제1장 풍운(風雲)(1)
「부르기에 멀리, 우리 해군은 가라앉고
사구(砂丘)와 곶(串) 위로 불길은 삼켜지네
아아, 지난날 우리의 위용은
니네베와 티레에 견주었건만!
열방(列邦)의 판관들은 우리를 돌보소서
잊지 않도록, 끝까지 잊지 않도록!」
―러디어드 키플링(Rudyard Kipling),
〈퇴장 성가(recessional)〉
「……당시에 전염병적으로 곳곳에서 전쟁을 일으켰던 귀족계급들 간의 국제적 경쟁에서는 각 ‘국민적’ 유산 내에서의 상품 부문의 크기가 상대적인 군사적 및 정치적 세력을 결정하는 데에 있어 결정적 중요성을 띠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모든 군주정들은 재화를 모으고 자신의 기치하의 교역을 촉진하고 그 경쟁자들에 대한 투쟁에 사활을 걸었던 것이다.」
―페리 앤더슨(Perry Anderson),
《절대주의 국가의 계보
(Lineages of the Absolutist State)》
1860년, 건흥 3년 인천부.
8월의 뜨거운 햇살이 작렬하는 가운데 각지에서 온 인사들, 곧 정부 대신들과 의회 의원들, 명문 귀족들과 유명한 자본가들 그리고 황성 주재 외국 대사들이 제물포 조선소에 마련된 행사장에 모여들었다.
이날은 북해의 내지 합방 30주년을 기념하는 날로, 대한제국의 신형 장갑함 「백빈연」이 진수되는 날이었다. 이 함선의 명명은 내지와 북해의 단결을 과시하고자 이루어진 것이었다.
백빈연(白濱緣), 혹은 얀 피튀스 요나선 베링(Jan Vitus Jonassen Bering)은 두 세기 전 북해 출신의 위대한 탐험가이자 해군장교로서, 제국 북방 영토의 확정과 지리적 발견에 지대한 업적을 쌓은 이였다.
지난 30년간 소요와 혼란이 이어지고 있는 북해에 대한 대내외적 불안을 불식시키고 제국에 대한 북해의 충성을 과시하고자 하는 목적에 비추어, 그보다 더 적절한 이름은 없었다.
“오늘 같이 무더운 날씨에 이곳 제물포 조선소에 모여 주신 내외귀빈 여러분! 우리는 이 자리에 북해의 내지 합방 3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모였습니다. 북해는 우리 한민족의 위대한 선조들의 얼이 담겨 있는 고토이며, 제국의 영광을 빛내는 북방의 전진기지입니다. 지난 세월 위대한 조국의 탐험가와 상인들이 북방의 험난한 옛 땅을 누비며 고을을 건설하고, 바닷길을 열고, 야만인들을 몰아내며 낙토를 이루어 내었습니다. 그간에 지역적인 이해관계에 따라 비록 소소한 불미스러운 일들이 있기는 하였으나, 제국 신민 모두가 공히 동의하는 대업에 비추어 볼 때 북해가 내지에 편입되어 일가를 이룩한 것은 모두 북해의 신민들이 제국의 일등신민으로서 공평무사한 대우를 받고, 황국의 한 부분으로서 복된 영광을 위하여 맡은 바의 소임을 다해주길 원념하는 마음으로 이루어진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각고의 노력 끝에, 오늘날 북해는 내지의 연장선으로 완전한 일체를 이루는 제국의 영구적인 일원이 되었습니다. 오늘 진수되는 장갑함 백빈연은 북해 신민들의 자발적인 청원과 성금으로 건조된 함으로, 황제 폐하와 우리 정부에 대한 북해도민들의 영원한 충성을 상징하게 될 것입니다!”
보수당 내각의 총리대신 하옥(荷屋) 김좌근(金左根)이 단상에서 의기양양한 목소리로 연설을 했다.
오랫동안 제국 정치를 주름잡았던 최고의 정치 명문 안동김씨의 일원인 그는, 수상을 몇 차례 역임한 보수당의 거물인 김조순(金祖淳)의 아들로서 정계에 입문하여, 경력상 일체 오점을 남기지 않고 승승장구해 온 인물이었다.
그는 총리대신으로서 재임 중에 큰 위기―황성 주식 시장의 붕괴에 따른 불황과 제2차 인도양 전쟁의 사실상 패배―를 가까스로 넘기고 내각을 유지했을 정도로 노련한 인물이었다.
지금껏 별다른 업적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정략적인 판단이 탁월하여 수상의 자리를 유지하고 있었던 그는, 아버지뿐만 아니라 제국의 수많은 정치가들이 골치를 앓았던 소위 「북해 문제」를 해결한 수상으로서 역사에 남고자 하는 야심이 있었다.
이번 합방 30주년을 계기로 하여, 그는 북해 문제의 해결에 전방위적인 국력을 동원하고자 하는 계획도 가지고 있었다. 장갑함 백빈연은 그 상징적인 시작일 따름이었다.
김좌근에 이어서, 북해 출신으로 제국의회의 의원인 노선우(盧宣遇)가 단상에 올랐다.
북해의 거부인 그가 전함 백빈연의 건조에, 그리고 김좌근의 정치 활동에 막대한 후원금을 냈다는 사실은 누구나 알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북해 출신이라는 이유로 그는 소위 북방화합정책의 상징적 인물이 되었고, 북해 문제를 해결코자 하는 정부 정책에 공공연히 이름을 빌려 주고 있었다.
오늘 이 자리에서 연설을 꿰차게 된 것 또한 그러한 맥락에서 별달리 유난한 일도 아니었다.
“존숭하여 마지않는 위대하신 황상 폐하의 크나큰 은덕과 자비로우신 성은에 더불어, 영광스러운 제국 정부의 현명한 시책으로 인하여 북해의 신민들은 지난 30년간 눈에 띄는 생활의 개선과 경탄할 만한 경제적 발전을 이룩할 수 있었습니다. 이제 북해의 신민들은 내지와 동등한 권리를 누리게 되었음은 물론이거니와, 사통팔달하는 철도로 인하여 내지의 일부로서 일체 거리감 없이 목포로부터 영안에 이르기까지 하나의 몸이 되어 오늘의 평안을 이룩하였으니, 이 모든 것이 오늘날을 살아가는 제국의 모든 신민들의 홍복입니다. 황상 폐하께서는 해진주를 쌓으시어 오래 무궁장수하길 기원하오며, 이 시대의 영광스러운 제국이 영원토록 세계의 바다와 대륙 위에 군림하기를 바라며, 북해도민들이 오늘 이렇게 성금을 내어 진수한 장갑함 백빈연이 건함되었습니다. 이제 이 배는 세계의 바다를 누비며 제국의 영광을 선포할 것이며, 그 이름이 포성과 함께 울려 퍼질 때마다, 세상은 북해 신민들의 충성됨을 기억할 것입니다!”
노선우의 낯 뜨거운 공치사가 끝나자, 김좌근 수상은 다시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단상에 올라서 노선우와 북해의 기부자들을 치하했다.
그들이야말로 제국을 떠받치는 충성스러운 북해 신민의 표상으로서 영원히 이름이 기려질 것이었다.
김좌근은 다시 한 번, 국체(國體)를 한데 모아 요즘과 같은 약육강식의 전국(戰國)의 세태를 맞서 나가야 할 것을 강조하면서, 이를 통해 제국의 영원불멸한 영광을 이룩하자며 연설을 마무리 지었다.
연설이 끝나자 예포가 쏘아 올려지고, 사람들의 환호성과 함께 도크에 묶여 있던 전함이 마침내 바다로 뛰어들었다.
술병을 뱃머리에 부딪히는 관례가 진행된 후, 바다로 흘러들어 간 장갑함 백빈연의 위용은 대단한 것이었다.
때는 바야흐로 강철판으로 선체를 둘러싼 장갑함(裝甲艦, Ironclad)의 시대로, 몇 년 전 프랑스가 최초의 장갑함 「라 글루아르(La Gloire)」를 건조한 이래 해상 강국들은 모두가 장갑함을 확보하는 일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글루아르의 건조에 충격을 받은 서양의 해군 최강국, 연합 왕국이 이를 능가하는 「HMS 워리워(Warrior)」를 건조하자 이에 질세라 동양의 해상 강국 대한제국 역시 신형 장갑함의 건조를 착수, 합방 30주년 기념식에 맞춰 진수를 하게 된 것이었다.
넓은 돛대 사이에 증기기관을 세워놓고, 다량의 대포로 무장한 장갑함 백빈연이 그 위용 찬 모습을 드러내자, 기념식장에 모여 있던 사람들은 경탄을 터트리며 환호했다.
“이야, 이거 장관이다!”
이때 앞 열에 있던 해군 대신이 군모를 벗고 만세를 선창했다.
“대황제 폐하 만세! 대한국 만세!”
행사장에 있던 사람들이 일제히 화답했다.
“대황제 폐하 만세! 대한국 만세!”
“천제께서는 우리나라를 영원히 보우하소서!”
이윽고 동서(東西)의 악기를 혼성한 군악대가 장엄한 국가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1841년 공식적으로 선포된 한국의 국가는 「제국애국가(帝國愛國歌)」라는 명칭이 붙여진 것으로, 총 4절 진행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사람들은 악대의 연주에 따라 국가를 선창하며 왼쪽 가슴에 손을 올리고 전함 백빈연의 장엄한 깃대에 게양되는 태극기를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