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제국의 계보 1권(3화)
서장(3)
열강(Great Power)
대한제국(大韓帝國)의 지난 20년은 연호가 세 번 바뀌었으며, 경제적 발전과 군사적 실패가 뒤엉킨 시기였다.
1840년의 북해 합방 기념식 테러 사건 이후, 북해는 공공연하게 소요 상태에 들어갔다. 이후 오랫동안 북해는 한국 정부의 아킬레스건이었다.
1845년 연합당 내각의 대(對)북해 양보 법안의 입법은, 보수당의 반발로 무산되었다. 1848년 혁명의 여파가 북해에 상륙하여 대규모 시위가 반발한 이후, 마침내 완전한 권리를 보장하는 〈북해권익법(北海權益法)〉이 통과되었고, 이후 북해의 소요 사태는 잠잠해졌다.
대한제국은 제국주의 국가의 첨병으로서 적극적인 남양으로의 진출을 통해 국가적 위신을 강화했지만, 1842∼45년 사이에 인도 대륙에서의 연합 왕국과의 패권 다툼에서 패배한 이후 인도에서의 소위 「명예로운 철수」를 단행할 수밖에 없었다.
1857∼58년 브리튼 연합 왕국의 패권에 대한 무굴 제국의 마지막 저항이 발발하자, 대한제국은 이를 지원하여 전쟁에 개입, 인도로의 복귀를 기도했지만 연합 왕국의 승리와 더불어 실패로 돌아갔다.
더욱이 1857년에 황성 주식 시장의 붕괴에 이은 세계적 불황이 덮쳐 적지 않은 경제적 타격까지 입었다. 여러 가지 악재에도 불구하고 대한제국은 여전히 세계 경제를 주도하는 강국이며, 세계 곳곳에는 태극기가 휘날리고 있다. 말레이반도의 주석과 고무, 실론의 차는 대한제국의 위신을 상징하는 산물이다.
양(梁) 제국은 한국과 더불어 동양에서 가장 발달된 산업과 강남의 비옥한 토지를 기반으로 한 최고의 농업 생산력을 자랑하는 나라이다. 자체적으로 풍부한 산물과 넓은 시장을 보유한 나라답게 제국주의적 팽창과는 거리를 두었으나, 한국과 일본의 성공적인 확대를 본받아 남양으로의 진출을 시작했다.
그러나 1849년의 광동 혁명은 인접국인 양에게까지 태풍이 몰아쳤다.
양의 지배층은 월에서의 상황 변화에 전율을 느꼈다. 월 제국을 무너트리고 수립된 동양 최초의 공화 정부, 태평민국은 양의 개입에 맞서 전 대륙적인 혁명전쟁을 선포했고, 이후 수 년간 양과 태평국은 치열한 전쟁을 거듭했다.
각국의 예상을 깨고 전황은 태평국에게 유리하게 전개되었고, 태평국의 군대는 양의 수도인 임안(臨按)을 위협할 정도였다.
1차전은 태평국의 승리로 끝을 맺었으나, 양은 전쟁 영웅 증국번(曾國藩)을 중심으로 복수를 다짐하였다. 일시적인 패배에도 불구하고, 동양 최대의 인구와 풍부한 산물을 가지고 있는 양은 충분한 잠재력을 보유하고 있다.
대 브리튼―아일랜드 연합 왕국(United Kingdom of Great Britain and Ireland)은 1840년대에 독보적인 강국으로 성장했다. 1836년 왕위를 계승한 글로리아(Gloria) 여왕은 스코틀랜드―아일랜드의 국왕 제임스 8세(James VIII)와 결혼하여 동군연합, 즉 브리튼 연합 왕국을 결성하였다.
연합 왕국의 산업은 1840년대의 대호황과 더불어 날이 갈수록 번창했고, 세계 각지에 영향력을 투영할 수 있는 해외 자본 투자액과 선박 총톤수는 대한제국을 넘어서 세계 최고를 자랑했다.
연합 왕국은 발전된 국력을 기반으로 하여 적극적인 해외 침투와 식민지 개척을 단행, 한국, 스웨덴, 프랑스, 러시아 등 라이벌의 개입을 물리치고 아프리카 대륙의 패권과 인도의 지배를 확고히 다졌다.
한때 인도 대륙을 호령했던 무굴 황제는 이제 연합 왕국의 연금 수령자에 불과했다. 역사상 유례없는 「글로리아 시대」의 번영 속에서, 연합 왕국은 명실공이 세계 최강의 강국이며, 전 세계적 팽창을 향해 뻗어 가는 제국이었다.
프랑스 공화국(R publique fran aise)은 1848∼49년의 혁명이 파리 노동자 봉기(코뮌)의 비극적인 패배로 좌절한 직후, 제3공화국 정부를 출범시켰다.
제3공화국은 이전의 지리멸렬했던 제2공화국과 달리 대통령 중심제로 출발했는데, 세계 최초로 전 국민의 보통선거로 진행된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된 인물은 아이러니하게도 위대한 황제의 조카 루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Louis Napoleon Bonaparte)였다.
루이 나폴레옹은 아래로부터의 위협을 두려워하는 부르주아에게는 질서를, 농민들에게는 안정을, 패배한 노동자들에게는 코뮌 진압자들의 처벌을 약속함으로써 범 계급적인 지지 속에 압도적으로 당선되었다.
이후 루이 나폴레옹은 4년 임기의 막바지인 1852년에 국민투표를 통해 헌법을 개정하여 10년 중임의 대통령으로 임기를 연장하였다. 그는 큰 아버지의 후광을 이용해 ‘프랑스의 영광’을 약속했고, 산업의 발전과 식민 제국의 확대를 적극적으로 추진하였다.
그러나 유럽 대륙 최강의 국력에도 불구하고 식민지 확대는 녹록지 않아, 오랜 라이벌 연합 왕국은 프랑스의 패권 도전을 용납하지 않았다. 또한 튼튼해 보였던 루이 나폴레옹의 정치적 기반 또한 흔들리고 있어, 세계에서 가장 폭발적인 국민이 다시 한 번 바리케이드를 쌓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러시아 제국(Pоссiйская Имперiя)은 1850년대에 이르러 동토의 전제국가에서 세계적인 제국으로 발돋움했다. 국력을 신장시키기 위한 차르 알렉산드르 1세(Александр I), 콘스탄틴 1세(Константин)의 노력이 결실을 맺어, 러시아는 유럽의 새로운 강국으로 등장하였다.
성공적인 군사적 팽창과 달리 내부로부터 곪아 있던 러시아 사회의 발전에 발목을 잡는 농노제 문제는 1848년 혁명의 여파가 러시아에 이르자 알렉산드르 2세의 결단으로 폐지되었다.
알렉산드르 2세는 일련의 ‘대개혁’을 추진하였고, 1850년대의 성공적인 대외 전쟁의 승리로 이를 보답받았다.
1850∼53년의 대북방 전쟁은 러시아의 발트해 진출을 막던 스웨덴―오스트리아의 몰락으로 이어졌고, 이어서 1854년 우크라이나 봉기에서 비롯된 폴란드―리투아니아와의 전쟁은 흑해를 향한 러시아의 오랜 열망을 달성시켰다.
이후 러시아는 1859년∼60년에 요동국과의 국경 분쟁 또한 유리하게 해결함으로써 국경을 레나 강까지 확대, 서로는 폴란드에서 동으로는 한국에 이르기까지 확대되었다. 이른바 러시아의 국가적 사명은 유라시아의 최강 대국으로서 유럽에서는 로마의 유산을, 아시아에서는 칭기즈칸의 유산에 대한 상속권을 주장하는 것이다.
동, 서, 남으로 뻗어 나가는 러시아 제국의 다음 목표는 몽골과 투르케스탄의 무슬림 국가들이다. 그러나 1825년 데카브리스트 반란 이래 제국을 향한 아래로부터의 위협은 이제 소수의 혁명적 자유주의자에서 광범위한 농민, 노동자층으로 전이되고 있다. 러시아 제국은 위로부터의 개혁과 대외팽창을 통해 혁명을 미연에 방지하고자 한다.
지역강국(Regional Power)
요동국(遼東國)은 형식적으로는 여전히 요동국왕이 대한제국 황제의 신하이나, 실질적으로는 독립된 국가이다. 전통적으로 강군을 자랑했던 요동국은 근대적인 군제 개혁을 통해 규모는 비교적 작지만 동양에서 가장 강력한 육군을 보유하게 되었고, 옛 번국 요동국의 강성함은 대한제국의 위정자들의 심기를 크게 불편하게 하고 있다.
상대적으로 1848년 혁명의 무풍지대였던 요동국은 오히려 국왕 전제가 강화되는 현상을 보였다.
제6대 요동국왕 김호의 오랜 노력으로 국왕의 권위는 예전처럼 막강해졌고, 의회정치는 제 기능을 다하지 못하고 있었다.
요동국은 한국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전통적인 세력권으로 여기는 순 제국에서 영향력을 확대해 나갔다. 그러나 광동 혁명의 여파는 순에도 이르렀고, 순 조정은 일시적으로 범중화주의자와 민족주의자들이 득세하기 시작했다.
1859년 요동국이 국왕의 중병과 러시아와의 국경 분쟁에 발목을 묶인 사이, 순 조정은 외세의 철수를 요구하는 민중의 요구에 부응한다는 명분으로 요동 자본을 몰수하기에 이르렀다.
요동국은 러시아와의 실익 없는 국경 분쟁을 마무리하고 순을 향해 무기를 다시 돌렸으며, 그들의 목표는 화북 및 발해만에서의 영구한 패권 확립이나, 동양을 넘어 세계 열강의 반열에 올라서고자 하는 요동의 야심은 출발점에 불과하다.
태평민국(太平民國)은 월 제국을 타도하고 수립한 동양 최초의 공화 정부이다. 애당초 월은 1839년에 공포한 대월제국 헌법이 있었으나, 숭통제는 곧 이를 무시하고 예전의 전제정치로 되돌아갔다.
1849년, 유럽 혁명의 여파가 광동에까지 이르자 황제는 임칙서(林則徐)를 다시 불러들여 총리를 맡기고 헌법을 부활시켰으나, 미봉책에 불과했다. 1850년 임칙서의 죽음 이후 새로 소집된 의회는 강경파가 득세했고, 급진적인 혁명주의자이자 개신교 신자인 홍수전(洪秀全)이 강경파를 주도했다.
1852년 광동 시민의 2차 봉기를 선동하여 정권을 잡은 홍수전은 곧 황제를 폐위하고 옛 주나라의 고사를 인용한 ‘공화’ 정부를 출범, 이름을 태평민국이라 지었다.
공화국 총통이 된 홍수전은 혁명의 전파를 두려워하는 양 제국의 개입에 맞서 혁명전쟁을 선포하였고, 태평군은 마치 60년 전 프랑스혁명군이 그랬던 것처럼 구체제의 군대를 격파하였다.
태평군은 한때 임안을 위협할 정도로 승리를 거듭했고, 양은 부득이하게 평화조약을 강요받았다. 태평군은 또한 사천으로 진격하여 봉건적인 주 왕조를 무너트리고 서천 공화정부를 수립시켰다.
그러나 거듭되는 승리에 도취된 홍수전은 점차 자신의 능력을 과신하게 되었고, 적극적인 대외 팽창을 추구했다. 더욱이 1858년 새로이 득세한 군부와 손을 잡고 친위 쿠데타를 단행, 의회를 무력화하고 옛 동지들을 처형하여 전제적인 독재자로 변모하였다.
홍수전이 자신에 대한 개인숭배를 강화하고 베트남과 사천에 혁명을 전파하는 것에 집중하는 사이, 태평국 내부에서는 불만이 싹트고 있었고 양은 국력을 회복하였다. 2차 전쟁이 임박하였다.
일본 제국(日本帝國) 또한 1848년 혁명의 여파로 탄생하였다. 계속되는 산업의 발전과 달리 일본은 전근대적인 막부 체제를 고수하고 있었다.
1830년대 이래 ‘반(反)막부’ 논의는 일본 조야에서 공공연하게 진행되었다. 1840년, 시대의 전환에 따라 아즈치(安土) 막부는 중앙집권적인 체제를 수립하여 번 체제를 폐지하려고 했으나, 아즈치 막부 못지않게 강력하게 성장한 동쪽의 에도와 서쪽의 조슈를 중심으로 반 아즈치의 분위기가 고조되었다.
광동에서 혁명이 발생한 직후, 여파는 일본에 상륙하였고 교토의 반 막부 봉기를 시작으로 에도를 중심으로 한 반 아즈치 전쟁이 시작되었다.
초기에 막부에게 유리하게 전개된 전쟁은, 독재적인 막부를 타도하고 존황과 더불어 입헌정치를 약속하는 에도에게 일본의 민족주의자들과 자유주의자들이 공명함으로써 전황이 뒤집혀 갔다.
일진일퇴의 공방전 속에서 1853년 아즈치의 마지막 쇼군 오다 노부나리(織田信成)는 천황에게 모든 권력을 돌려준다는 대정봉환(大政奉還)에 동의하고 일선에서 물러났다.
그러나 여전히 구 막부가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는데 불만을 품은 에도와 조슈는 이듬해 천황을 등에 업고 쿠데타를 단행, 막부의 잔존 군대를 제압하고 신정부를 수립했다. 이윽고 수도를 아즈치에서 가까운 교토에서 반 막부의 중심지 에도로 옮긴 후 도쿄(東京)로 개명했으며, 대한제국의 형태를 본받아 급진적인 개혁을 추진하게 되니 이른바 고메이 유신(孝明維新)이다.
새 일본 정부는 태평양에 강력한 함대를 보유하고 있는 지역 강국으로서, 일본에게 가장 중요한 호주의 식민지를 잇는 태평양 종단 루트의 식민지 개척을 열망하고 있었다. 또한 인접국인 진서와 아이누모시르, 더 나아가 유구와의 연합을 통해 「대일본제국」을 건설하겠다는 야망을 품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