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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의 계보 1권(2화)
서장(2)


“뭣이, 친왕 전하께서 어디에도 안 계신다고?”
주 프랑스 대한국 전권 대사 구인회(具認回)는 갑작스러운 소식에 크게 당황했다. 보아하니 어디론가 또 사라진 모양이었다.
어린 황자가 호기심 많고 제멋대로인 것은 익히 알고 있었으나, 이렇게 철이 없을 줄은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 그것도 파리 시내에 온통 흉악한 무리들이 득실거리는 상황에서 이렇게 일을 키울 줄이라고는.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일이란 말인가! 어서 전하를 찾아 뫼셔라!”
가뜩이나 혁명파들과 놀아나는 아들놈 때문에 정신이 산란한 상황이었다. 대사로 부임하면서 함께 데려온 아들 범준으로 하여금 리세[高等學校]를 마치게 한 후 파리 대학에 집어넣었는데, 하필 거기서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급진파 학생들과 놀아난 것이었다.
구인회는 머리가 갑작스럽게 지끈거려 오는 느낌이었다.
반쯤 벗겨진 앞머리가 벌겋게 달아오르는 것이 옆에서도 보일 정도였다.
그는 화를 삭이려고 선반에 올려둔 독한 증류주를 한 잔 부어 마시고서는,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생각이 복잡했다.
‘그 녀석을 프랑스에 데려오는 것이 아니었는데, 괜히 데려와서 빨간 물이나 들게 했으니……. 황자는 또 어디서 찾는다……. 망할, 진짜로 혁명이라니!’
아버지가 아들과 황자에 대해서 고민하고 있는 바로 그 시간, 올해 스무 살의 청년 구범준(具凡俊)은 카르티에 라탱[라틴지구, 大學街]의 한 골목에서 바리케이드를 쌓는데 합류하고 있었다.
그는 파리의 시민연대를 상징하는 삼색장(三色章)을 가슴에 달고서, 부지런히 바리케이드를 만들기 위한 부서진 가구들을 나르고 있었다.
그는 가슴속 깊이서 들뜨는 마음을 가라앉게 할 수가 없었다. 파리 대학에서 교유하고 있던 동지들이 늘 입에 달고 있었던 혁명적 국면이 자신이 프랑스에 체재하는 동안에 도래할 것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다.
말로만 들었던 프랑스의 혁명을 직접 경험하는 순간이 온 것이 그는 믿기지 않았다.
그는 이미 승리를 확신하고 있었다. 이미 거리로 흘러나온 시민들의 숫자는 만만치 않았다. 파리 시가지는 이미 혁명의 여파로 완전히 마비되어 있었고, 정부군은 갈수록 진압을 힘들어하고 있는 것이 피부로 느껴졌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어디선가 뜯어 온 이발용 의자를 시야가 가릴 정도로 높이 쳐들고 바리케이드로 가져가고 있던 구범준은 누군가와 부딪혀서 주저앉고 말았다. 의자는 그만 땅바닥에 처박혀서 산산이 부서지고 말았다. 그에게 부딪힌 상대는 키가 그의 가슴팍쯤 올라오는 소년이었다.
“Soyez prudent! Ce n est pas un endroit pour un gar on.(조심해! 여긴 애가 있을 만한 곳이 아니야.)”
짜증을 내려다가, 얼굴에 억지웃음을 지으며 프랑스어로 외치고 급하게 떠나는 구범준을 향해, 소년은 마찬가지로 프랑스어로 대꾸했다.
“Un gar on? Je pense que vous semble jeune, aussi.(애? 내가 보기에 당신도 나이가 들어보이지는 않소만?)”
소년의 당돌한 대꾸에 그제야 구범준은 고개를 돌려 보았다. 곰곰이 보니 프랑스인이 아니라 황인종이었다. 복장을 보아서는 평범한 집의 아이는 아닌 듯 보였다.
구범준은 의아함이 들었다. 소년은 거만하기는 하지만, 분명히 총명한 눈빛으로 그를 또렷하게 올려다보고 있었다. 구범준이 무어라 소년에게 입을 열려는 찰나, 골목 저쪽에서 숨을 헐떡이면서 중년의 사내가 뛰어오고 있었다.
“아이고, 전…… 아니, 도련님! 왜 자꾸 이렇게 위험한 곳만 찾아다니십니까?”
소년을 향한 사내의 외침은 분명히 한국어였다. 평상시 같으면 오랜만에 듣는 한국어가 반가울 터인데, 구범준은 지금 그런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약간의 경계심을 가진 채로 그는 소년에게 다그치듯이 물었다.
“한국 사람이냐?”
“그렇소만. 당신도 한국 사람인가 보구려.”
반말에도 지지 않고, 거만한 품새를 보이며 거들먹거리는 소년의 말투에까지 구범준은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신기한 듯 자신을 쳐다보는 소년은 보아하니 귀한 댁 자제인 듯싶고, 뒤따른 자는 가정교사나 시종인 듯싶었다. 하기야, 요 근래 가정교사를 대동하고 유럽으로 여행 가는 것이 소수의 황성부 유한계층 자제들의 유행이라고는 하지만, 그것을 감안해도 이 아이는 너무 어렸다.
‘도대체 아비가 어떻게 되먹은 작자이길래.’
구범준은 자신을 파리로 데려온 것도 아버지라는 사실을 잊고 속으로 투덜거렸다.
“보아하니 곱게 자란 도령 같은데, 이만 돌아가. 여기는 애들이 장난 삼아 놀고 있을 장소가 아니야.”
구범준의 말에 소년은 발끈 화를 냈다.
“허, 이거 무례한 자로구만. 아까부터 나를 자꾸 훈계하려 하는데, 그대는 도대체 나보다 몇 년이나 더 살았다고 어른 행세인가? 딱 보아도 학생 같은데, 아닌가?”
소년과 더 이상 대화하는 것을 포기한 구범준이 사내를 향해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이보시오, 이 어린 친구가 말을 못 알아들으니 선생이 그만 데리고 가시오. 여긴 곧 전쟁터가 될 거요. 길 자체가 폐쇄될 거라고!”
“저 사람 말이 맞습니다. 큰일 나기 전에 어서 돌아가시지요, 어서!”
사내의 거듭된 재촉에, 소년은 아쉬운 눈으로 몸을 돌렸다. 자신의 안위를 염려하는 사람이 한둘이 아님을 새삼 깨달은 듯했다.
“……무사하길 바라지. 그럼 이만!”
범준은 앞으로 벌어질 혁명의 소란 속에서 이 만남을 곧 잊어버렸지만, 훗날 이 기묘한 소년과의 짧은 만남은 다시 다른 인연으로 이어지게 될 터였다.
이 당돌한 소년은 바로, 대한제국의 16대 황제인 경안제의 셋째 아들 신친왕(信親王) 이표(李飄)로, 나이 열일곱에 불과했다. 비록 나이는 어렸으나, 이표는 유럽 땅을 밟아본 최초의 한국 황자였다.
프랑스 공화국 정부는 1847년의 파리 만국 박람회에 한국 황실 인사를 포함한 사절단을 초청했는데, 이 호기심 많은 셋째 황자가 부득불 황제에게 자신을 사절단에 포함시켜 달라고 우겼다.
황제는 먼 뱃길이 어린 황자에게 위험하다며 여러 차례 거절하다가, 황자의 계속된 요구에 지쳐 사절단 대표로 임명하였다.
시종들이 한시도 빠짐없이 황자를 지근거리에서 보필한다는 조건하에서였다.
박람회 참관을 마치고 귀국길에 오를 예정인 지금, 지금껏 큰 탈 없이 진행된 황자의 모험이 갑작스러운 돌발 상황을 맞아 급진전을 하게 된 것이었다.
다양하게 구성된 유럽 사절단의 일원에는 황실의 일원인 예산백 이하응(李昰應)과 제도대학의 정치학 교수 박규수(朴珪壽)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들은 대사관 안에서 창문 밖으로 진행되는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제국 최고의 정치학자인 환재 선생께서 보시기엔 이 상황이 어떻습니까?”
이하응이 웃는 얼굴로 박규수에게 말을 걸었다.
묘하게 그의 웃음은 어딘가 빈정거리는 듯한 느낌마저 들었다.
올해 나이 스물아홉의 이하응은 개성공가의 방계에 불과했으나, 그의 아버지 이구가 예산 백작의 양자로 들어가면서 귀족의 반열에 오르게 되었다.
본래 네 아들 중 막내에 불과했던 그가 작위를 세습할 가능은 없었으나, 위의 두 형이 아버지보다 먼저 세상을 뜨고 셋째 형이 이미 다른 가문의 양자로 들어간 상황으로 인해 그가 백작 위를 계승하게 되었다. 그는 곧 서른이 되면 추밀원 의원으로 서임될 명문의 일원이었다.
그러나 작위에 걸맞지 않은 엉성한 행동과 함께, 황성에서는 풍류를 즐기는 한량으로 더 유명했다.
그는 다양한 그림을 곧잘 그렸고, 술자리라면 마다하지 않았다. 기생집을 드나들기 일쑤인데다가, 사모관대를 잘 차려입고 사랑방에서 시국을 논하기 보다는, 옷을 다 풀어헤치고 옆에 계집을 끼고서 술친구들을 웃기는 데 더 탁월한 재주를 가지고 있었다.
다른 귀족이나 관료들이 손을 내저으면서 가까이 하기에는 품격이 떨어진다고 저어하는 이가 바로 이하응이었다.
“……놀랍다마다요. 프랑스인들이 이미 두 번의 혁명을 일으킨 바가 있다고 하나, 제 눈으로 직접 보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환재(桓齋) 박규수는 금년 마흔두 살로, 제도대학(帝都大學)의 명망 높은 정치학 교수였다.
정치학 교수좌(敎授座)가 제도대학에 만들어진 것이 바로 십 년 전으로, 그 자리에 최초로 앉은 사람이 바로 박규수였다. 홍문 연간에 이름난 대학자였던 연암 박지원의 손자로, 그의 학맥을 계승한 박규수는 기존의 국세학(國勢學)이나 국정학(國政學)을 근대적 정치학으로 변모시켜 학문적 기틀을 잡은 사람으로 이미 널리 평가를 받고 있었다.
“내가 보기에 이것은 프랑스 정부가 무능한 탓입니다. 정부가 만약 적절한 조치를 취했던들, 이런 사태까지는 벌어지지 않았겠지요. 거기에 이 나라에 만연해 있는 전복적이고 급진적인 국민성이 부어진 기름에 불을 지르고야 만 것입니다. 한국이 이렇지 않기는 천우신조인 노릇입니다. 천제께서 황상을 보우하사, 다행히도 우리 정부는 유능하고 신민들은 점잖으니!”
박규수가 별다른 응대를 하지 않자, 이하응은 한껏 더 빈정거리는 농담조로 말했다. 그러나 이는 그의 본심이었다. 그의 관점에서 정부의 일을 수행하는 사람이라면, 첫째로 인민이 이토록 분노할 만한 상황을 만들지 말아야 하며, 둘째, 부득이 이런 상황에 직면할 경우에는 초기에 가차 없이 무기를 빼어 들어 사태를 진정시켜야 했다.
상황이 이렇게까지 되고야 만 것은 오로지 정부의 무능과 비겁의 소치였다.
그는 한국에서는 정치적 언동을 밖으로 내무는 사람이 아니었으나, 내심으로는 내각과 국정을 마비시키고 있는 보수·연합 양당의 지리멸렬함에 깊은 경멸감을 품고 있었다.
“이번 일이 쉽게 끝나지는 않을 거란 생각이 듭니다. 지난 두 번의 혁명 때에도 전 유럽이 난리가 났지요. 지금은 그때보다 소식이 전해지는 속도가 빠르고 범위도 넓습니다. 앞으로 어찌 될는지…….”
박규수는 이번에도 이하응의 말에 응대하지 않고 조용히 창문 밖을 바라보며 말했다.
대사관 주변은 비교적 조용했지만, 멀리서 피어오르고 있는 검은 연기와 간간이 들리는 포성은 누구라도 알아챌 만큼 명백했다.

1848년 혁명은 최초의 「세계 혁명」이었다. 갈리아의 수탉이 다시 한 번 홰를 치며 새벽을 알리자, 혁명의 불꽃은 전 유럽으로 퍼져 나갔다.
3월 한 달 동안 혁명은 라인 연방, 바이에른, 스웨덴―오스트리아, 마자르, 피에몬테―사르데냐, 베네치아, 양 시칠리아로 퍼져 나갔고 4월에는 아라곤, 카스티야, 폴란드―리투아니아와 곧이어 혁명의 무풍지대로 여겨졌던 러시아로까지 불이 붙게 되었다. 더 놀라운 것은 혁명의 여파가 지구 반대편으로까지 이어졌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교통과 통신의 혁신적인 발전의 또 다른 면모였다.
혁명의 기운은 그동안 유럽적 혁명과 무관해 보였던 ‘동양’의 여러 국가들에게까지 상륙, 제일 먼저 헌법을 무시하고 전제정치로 일관한 월의 광동에서 폭발적으로 봉기가 발생한 뒤 소요 사태가 잇따라 양, 주, 순으로 전파되었다.
전근대적인 막부 지배가 유지되던 일본 역시 반 아즈치 봉기가 발생했고, 가장 안정적으로 보였던 한국에서도 한동안 잠잠했던 북해를 중심으로 소요 사태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화산이 분출된 이후, 각국의 군주들과 지배계급은 아래로부터의 위협에 대한 불안과 공포에 떨게 되었다.

전사(前史)

「1860년, 제국의 시대」

1840년대는 바야흐로 자본주의가 급격하게 팽창된 시기였다. 1840년대와 50년대의 대호황은 자본주의가 영원한 번영을 누리게 할 것처럼 보였다. 유라시아의 동쪽 끝과 서쪽 끝에서 시작된 산업 혁명과 자본주의의 영향은 전 세계적으로 확대되었다.
적도 이남의 아프리카와 남아시아 곳곳에 자본주의의 영향이 들어오지 않는 곳이 없었다. 한국과 연합 왕국의 면직물이 상인에 의해 판매되고, 원자재가 식민 모국으로 들어간다. 경제적인 측면에서 세계는 점차 하나의 시장으로 통합되어 가기 시작했다.
1848년의 혁명은 짧은 시기 동안 폭발적으로 전개되었으나 최종적으로는 중간계급의 승리로 돌아갔다. 초기 혁명을 주도했던 노동계급은 약간의 양보 조치만으로 배제되고, 중간계급이 그 과실을 획득했다. 과거의 지주 엘리트들을 대신하여 그들이 전면적으로 정치적 권력을 쟁취해 나갔다.
「자유주의」는 세계적 추세로, 이 시기는 바야흐로 부르주아지의 전성기였다. 그러나 그들의 밑에서 새로이 형성되어 가고 있는 노동계급이 언제 활화산처럼 폭발할지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1848년의 선례가 그들의 뇌리 속에 영원히 남아 있었다.
자본주의적 팽창은 필연적으로 제국들에 의한 식민지 지배로 이어졌다. 더 많은 시장을 확보하기 위한 산업 국가들의 열망은 제국 간의 위신 경쟁으로 이어졌고, 예전의 상업적 제국주의와 달리 1850년대 후반에 본격적으로 태동하기 시작한 신제국주의는 포함(砲艦) 외교를 통한 군사력의 진출, 영토의 직접적 병합과 지배를 추구했다.
세계의 「비 문명」 지역이 속속들이 「문명국」의 지배 안으로 떨어져, 세계 질서는 주요 열강과 지역 강국들에 의해 재편되어 가고 있었다. 이제 세계 패권을 향한 주요 강국들 간의 충돌은 불가피한 것처럼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