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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의 계보 1권



제국의 계보 1권(1화)
서장(1)


「……그리고 잉글랜드의 역사는 왕들에게 소리 높이 이렇게 말해 준다.
만약 그대들이 한 세기의 사상의 선두에 서서 나아간다면 그 사상들은
그대들을 따르고 그대들을 떠받쳐 줄 것이다.
만약 사상의 뒤를 따라 나아간다면 그것은 그대들을 끌고 나아갈 것이다.
만약 사상을 거역하고 나아간다면 그것은 그대들을 타도할 것이다!」

―루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Louis Napoleon Bonaparte),
《역사의 편린들, 1688 - 1830
(Fragments Historiques, 1688 et 1830)》

「인간은 자신의 역사를 만들어 가지만, 그들이 바라는 꼭 그대로 역사를 형성해 나가는 것은 아니다.
다시 말해서, 그들 스스로 선택한 환경 아래서가 아니라 과거로부터 곧바로 맞닥뜨리게 되거나 그로부터 조건 지어지고 넘겨받은 환경 하에서 역사를 만들어 나가는 것이다.
모든 죽은 세대의 전통은 악몽과도 같이 살아 있는 세대의 머리를 짓누르고 있다.」

―카를 마르크스(Karl Marx),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
(Der achtzehnte Brumaire des Louis Bonaparte)》

1845

경안(景安) 5년(1845).
초파일을 맞은 성대한 연등제(練燈祭)가 광통방 일대에서 열리고 있었다.
폭죽놀이와 탈춤 따위를 구경하고자 삼삼오오 늘어선 사람들은 밤이 늦은 줄 모르고 넋을 빼놓고 있었다.
불사(佛事)에 관한 제약이 풀린 것도 꽤 오랜 일이나, 황성부중에서 이렇게 공식적으로 석탄(釋誕)을 기념하는 행사가 개최되는 것은 드문 일이었다.
그러나 올해의 연등제는 전쟁 기간 동안 모두 취소되었던 수많은 축제 끝에 찾아온 첫 축제였으며, 정치적 고려에 의해 일부러 정부가 이 행사를 크게 키운 점도 있어 유난히 성대하게 개최되었다.
운종가를 따라 늘어선 연등들을 따라 거리를 가득 메운 사람의 인파는 작년만 해도 보기 힘든 것이었다.
소란스러운 광통방에서 빠져나와 남대문 방향으로 나가면 용산(龍山) 일대는 나지막한 집들이 모여 있는 골목이었다.
이곳은 수 세기 전에 제국군의 본영(本營)이 자리 잡은 이래 일종의 군사 구역을 이루고 있었다. 부대와 인접한 곳에 들어서 있는 주택들은 바로 장교들에게 내어주는 관사였다.
올해의 연등제가 워낙에 큰 행사가 되었다 보니, 이곳 관사 지구에 거주하는 군인들과 그 식솔들도 대부분 성내로 구경을 나가 있었다.
마치 이 모든 행동이 최근의 굴욕적인 인도양에서의 군사적 패배를 잊고자 하는 것 같았다.
아무도 전쟁을 입에 담지 않았고, 시답잖은 이유를 들어서라도 연등제를 구경한다며 성내로 나갔다. 때문에 워낙에 조용한 동네가 더욱 쥐 죽은 듯이 가라앉아 있었다.
높고 낮은 기와지붕의 건물들은 등을 켜지 않은 채 불이 대부분 꺼져 있었고, 골목에는 순찰을 오가는 순검의 달그락거리는 말발굽 소리만이 간간이 지나갈 뿐이었다.
요컨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 같은 조용한 밤이라는 이야기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반대로 그러한 밤에는 유난한 일이 생기기 마련이었다.
차양을 내리고 밖으로 불이 새어 나가지 않도록 차단한 서재에서 한 사내가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세필(細筆)을 놀리고 있었다.
그는 먹을 묻히다가 잠시 붓을 손에서 놓칠 정도로 잔뜩 긴장해 있었다.
그는 지금 자신이 써 내려가는 글이 결국에는 자신의 목숨을 포함한 모든 것을 앗아 가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 이름마저 영원히 지워지게 될 터였다.
그럼에도 그는 계속 글을 써 내려갈 수밖에 없었다.
“아이들만큼은…….”
사내는 간신히 글을 마치고 지장을 찍은 다음에 깊게 숨을 들이켰다. 그는 간절한 목소리로 애원하듯이 목소리를 쥐어짜 냈다.
“걱정하지 마시오. 우리가 책임질 것이오.”
서재의 한쪽 구석, 그늘진 곳에서 어떤 남자의 응답이 흘러나왔다.
그 대답에 사내는 결심한 듯 눈을 질끈 감고서 자세를 바로 한 뒤, 탁상 위에 올라 있는 권총을 쥐어 자신의 관자놀이에 가져다 대었다.
손의 떨림이 어느새 잦아들었다.
“잘 가시오.”
사내는 마지막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에 한 발의 묵직한 총성이 대답을 대신했다.
그늘 속의 남자는 사내의 죽음을 확인하고서는 이내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멀리서부터 연등제가 끝난 뒤 귀가하기 시작하는 관사 주민들의 목소리가 골목 사이로 들려오기 시작하고 있었다.

제국 육군 참모부 소속의 장교, 한서명(韓瑞明) 참령이 자택에서 두부에 총탄을 맞은 주검으로 발견된 것은 다음 날의 일이었다.
그의 서재 탁상 위에는 자신이 브리튼 연합 왕국의 첩자로, 그동안 적지 않은 공작비를 받으며 기밀을 팔아넘겼다는 고백의 내용이 담긴 자필 문서가 놓여 있었다.
그는 군인으로서 보국근황(報國勤皇)의 본분을 다 하지 못한 것에 대한 탄식과 함께, 그 죄에 대하여 목숨으로 대신하고자 한다는 내용을 적어 놓았다.
극심한 심적 동요 속에서 글을 쓴 듯 필적은 정돈되지 못한 채 떨리고 있었으며, 종이 위에 채 마르지 않은 먹은 그의 깊은 고뇌의 흔적을 고스란히 담고 있었다.
때는 인도 지역의 이권을 놓고, 동서의 양강(兩强)인 대한제국과 브리튼 연합 왕국 간의 소위 「인도양 전쟁」이 막바지로 접어들고 있던 바, 전황은 점차 대한제국에게 불리하게 진행되는 와중이었다.
결국 얼마 전 한국 정부는 실익 없는 전쟁을 중단하고 인도에서의 「명예로운 철수」를 대외적으로 공표했다.
말이야 포장하기 나름이지만, 사실상 패전을 시인하는 조치나 다름없었다.
이로 인해 위신이 땅에 떨어진 군부는 전쟁의 실패가 첩자의 기밀 유출에 의한 것임을 발표하여 그 책임을 면피(免避)하려 했다.
한서명 참령이 바로 그 대상으로 지목된 이였다.
언론은 이 반역 행위를 대대적으로 보도하고, 논설을 통해 군의 기강 해이에 대해 개탄해 마지않았다. 그러나 참모부 소속의 일개 장교가 어떻게 중대한 기밀들을 모두 손에 넣어서, 어떤 경로로 적국에 넘겼는지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알려진 바가 없었다.
그러나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누군가는 패전의 책임을 공개적으로 지고 조리돌림을 당할 필요가 있었다.
그 대상이 명확하게 지목되었으니, 이를 파헤치고자 하는 이는 더 이상 없었다. 오히려 언론들은 한서명 참령에 대해 온갖 중상을 더하는 일에 적극적으로 가세했다. 심지어 어떤 언론은 한서명 참령의 모계가 북해 출신의 혈통이라는 점을 들어서, 그 핏줄이 반역의 씨앗이라며 반(反)제국 소요가 되고 있는 북해와 연결 지었다.
패전 후 몇 달간을 세간을 떠들썩하게 하던 이 반역 사건도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잊어져 갔다. 한때 증오와 경멸의 대상으로 오르내렸던 한서명이란 이름도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사라져 갔다.
그 와중에 한 참령에게 두 아이가 있었다는 사실은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열 살의 남자아이와 갓 태어난 여자아이는 마치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호사가들이 그 행방에 대해 의문을 가지기도 했으나, 그들의 행방은 아무도 알 수 없었다.
전쟁도, 아이들도, 반역도, 축제도, 음모도 모두 시간의 흐름 속에서 점차 다 타고 남은 재처럼 부스러져 내려가고 있었다.
바쁘게 돌아가는 세사(世事)는 사람들로 하여금 옛일을 잊게 하는 법이었다. 팽창하는 산업, 영광스러운 제국, 풍요로운 자본, 모든 것들이 사람들로 하여금 지나간 것보다는 다가올 앞을 바라보게 하고 있었다.

1848

2월의 파리에는 전운이 감돌고 있었다.
1828년 7월 혁명으로 프랑스에는 비로소 공화정부가 수립되었으나, 노동 빈민들에게 있어 제2공화국은 제정정부와 다를 바가 하나도 없었다.
선거권은 납세하고 있는 중류 이상의 시민들에게만 제한되어 있었고, 자유방임주의를 내세운 정부는 제정정부에 비해서도 사회적인 안정망을 제공하는 데에 인색했다.
20년간의 이러한 자유주의적 공화정부하에서 인민의 불안감과 증오감은 점차 증대되어 갔으며, 왕정복고를 주장하는 반동주의자(反動主義者)도, 나폴레옹의 제정을 회고하는 보나파르티스트들도, 사회혁명을 제창하는 급진주의자들도 모두 공화정부에 대한 불만을 드러내고 있었다.
특히 28년의 7월 혁명을 성공시키는 데 가장 큰 역할을 했던 도시 노동자들은 변함없이 착취당하고, 버림받고 있는 신세였다.
프랑스 정부의 식민지 개척과 파리 만국 박람회 개최를 위한 비용 조달을 위해 공화정부가 남발한 불태환지폐(不兌換紙幣)로 인한 경제의 마비 상태는 노동 빈민을 한계선까지 몰아붙였고, 식량의 고갈로 인해 노동자 지구에서부터 촉발된 2월의 경제적 시위는, 곧 정치적 시위로 한 단계 더 나아갔다.
무능한데다가 탄압까지 일삼는 정부에 대한 파리 시민의 규탄은, 곧 대중적 결속으로 이어졌다.
“시민 동지들! 정부는 마침내 발포했습니다. 우리를 모두 거리의 주검으로 만들려는 속셈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결코 저들에게 굴복하지 않을 것입니다!”
“싸웁시다, 싸웁시다, 동지들!”
“공화국 만세! 혁명 만세!”
“함께 갑시다! 거리마다 바리케이드를 치고, 저들의 진압을 분쇄합시다! 투쟁의 낫은 우리에게 자유와 평등을 다시 가져다줄 것입니다!”
분노한 대중들은 파리의 골목마다 세워지기 시작한 바리케이드로 집결하고 있었다. 청백적의 삼색기와 혁명을 상징하는 적기(赤旗)가 곳곳에 휘날리고 있었다.
1776년, 1789년, 그리고 1828년에 그리하였듯이, 시민들은 파리 시내 곳곳에서 가구를 던져 쌓고 있었다. 좁다란 파리의 골목마다 바리케이드가 솟아나고 있었다. 혁명이 임박해 오고 있었다.
“안 됩니다. 절대요. 친왕 전하께서는 대체 어디로 가시려는 겁니까?”
풍성한 수염을 기르고 있는 중년의 사내가 소란스럽고 복잡한 파리의 골목을 제멋대로 뛰어다니고 있는 소년에게 외쳤다.
“시끄럽도다! 계속 그런 잔소리를 할 요량이면 차라리 대사관으로 돌아가거라. 그리고 밖에선 친왕이니, 전하니 하는 소리는 입 밖에도 꺼내지 말라 하지 않았느냐!”
소년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전하…… 아니, 도련님. 여기서 누가 한국말을 알아듣는다고 그러십니까? 또 소인이 도련님을 두고 어디로 가겠습니까? 소인 얼굴을 봐서라도 참아 주십시오. 부탁드립니다.”
남자의 눈매가 답답하다는 듯 찡그려졌다.
“야단이네……. 이렇게 분위기가 험악한데…….”
남자는 주위의 무겁고 격앙된 분위기가 두려웠다.
사실 자기 한 몸 지키는 것이 두렵지는 않았다. 혹여 사고라도 당한다 하더라도 그 뿐일 일이다. 그러나 자신이 시종(侍從)하고 있는 소년은 절대라도 불미스런 사고에 연유되어서는 안 되었다.
그러나 이런 급변하는 환경 속에서 제멋대로 굴고 있는 소년을 사고 없이 다시 대사관으로 데리고 돌아가는 것조차도 쉽지 않을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