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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부마경 1권(22화)
八章 마경(魔經)(3)
다음날 단현이 다시 사선을 찾았을 때 아니나 다를까 남궁천이 다른 세 명과 함께 단현을 맞이했다.
단현은 무엇보다 변화된 남궁천의 겉모습에 놀랐다.
남궁천이 앉아 있는 자리에는 이전의 노인이었던 남궁천은 온데간데없고 이전과는 확연히 다른 기운을 풍기는 중년인이 앉아 있었던 것이다.
단현은 마음속 생각과는 전혀 다르게 크게 반색을 하며 남궁천에게 예를 올렸다.
“사부님의 깊은 심득을 경하드립니다.”
남궁천이 화답했다.
“고맙구나.”
하지만 단현의 마음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남궁천의 모습은 그가 환골탈태의 경지를 겪었다는 것을 잘 나타내 주고 있었다.
이는 남궁천의 무학이 이전의 무학을 뛰어넘는 새로운 경지에 도달했다는 뜻이다.
탈출을 계획하고 있는 단현의 입장에서 남궁천과 같은 고수의 증가가 절대 반가울 리가 없었다.
더구나 환골탈태를 거쳤다고 하니 남궁천의 무학이 이전과 비교해서 어느 정도까지 발전했는지 환골탈태를 경험하지 못한 단현으로서는 짐작해서 측정하기가 어려웠다.
“과연 현기를 터득했구나.”
남궁천의 눈에 언뜻 놀라움이 스쳐 갔다.
“생사뇌중혈을 무효화시킬 수는 없겠나?”
“가장 가까운 곳에서 보았으니 잘 알지 않나. 어렵다는 것을.”
제갈유의 씁쓸한 표정이 드러났다. 그것이 생사뇌중혈의 술법을 해제하지 못해서인지 아니면 남궁천이 중단전을 손에 넣은 것에 대한 부러움인지 알 수는 없었다.
“천부마경을 보았다고 들었다. 어떨 것 같으냐?”
“아직은 섣부른 대답을 내놓기가 어렵습니다. 하지만 천부마경이 제가 접해 온 그 어떤 무공보다 뛰어난 오의를 간직한 것은 남궁 사부님을 뵈오니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남궁천의 유쾌한 웃음소리가 크게 울려 퍼졌다.
“너도 너무 걱정할 필요는 없다. 비록 생사뇌중혈이 불완전한 술법이라고는 하나 여기 제갈 사부가 일 년에 한 번씩 혈기를 가라앉혀 준다면 아무런 문제가 아니다. 또 제갈 사부의 사후에라도 그 술법의 시전권을 또 다른 이에게 물려주면 되니 너무 마음 쓰지 마라.”
남궁천의 이야기에 제갈유의 쓴웃음이 더욱 짙어졌다.
단현은 그런 제갈유를 눈에 담으며 더욱 마음을 가라앉혔다.
‘그 와중에도 나에게 모든 사실을 털어놓지 않았다는 건가, 제갈유.’
“사무령 당분간 현이가 홀로 천부마경을 마음껏 공부하도록 해 주게.”
남궁천의 뜻밖의 이야기에 사무령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행여나 생길지 모를 천부마경의 유출에 대비하여 우리 네 명이 굳이 열쇠를 따로 챙기지 않았나?”
“이미 현기의 경지에 오른 현이네. 무엇을 걱정하는가. 그것보다 나는 자네들에게 내가 겪은 중단전의 수련 과정을 자세히 알려 주고 싶네.”
남궁천의 이야기는 거침이 없었다.
“틀림없이 자네들의 무공을 증진시키는데 도움이 될 것이야. 하지만 그동안은 현이와 우리가 함께할 수 없으니 현이가 마음 놓고 천부마경을 공부할 수 있도록 해 주자는 것이네.”
남궁천의 이야기에 나머지 세 사람도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진전이 있을지 모르는 천부마경을 붙들고 있는 것보다는 중단전을 깨우친 남궁천의 심득을 배우는 것이 훨씬 낫다는 것은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었으니까.
그렇게 사선이 모처로 떠나가고 혼자가 된 단현은 천부마경이 있는 석실로 들어갔다.
석실에 들어온 단현은 방금 남궁천에게 느낀 위화감에 조금 당황하고 있었다.
확실히 지금 남궁처의 모습에는 이전에 볼 수 없었던 활기가 넘쳐 흘렀다.
그것이 환골탈태로 인해 호기가 일었기 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영향인지 알 수는 없었다.
무엇보다 단현은 어제 어렴풋이 느낀 영들의 동요가 상령의 출현 때문이라고 짐작했는데 지금의 남궁천을 보니 그것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듯했다.
‘일이 하나 풀리는 듯하다가 다시 꼬이고 겨우 매듭을 하나 풀었다 싶으면 또 다른 매듭이 나타나는 꼴이니, 되는 일이 하나도 없구나.’
단현은 천천히 석실을 둘러보았다.
이미 천부마경을 모조리 암기한 단현은 천부마경에는 관심도 보이지 않았다.
‘그나저나 이 정도의 시설을 갖추려면 일이 년의 준비로는 어림도 없을 것 같다. 원래 이곳은 어떤 용도로 사용되는 곳이었을까?’
그런 생각에 단현은 석실 내부를 꼼꼼히 살피기 시작했다.
이는 단현이 가진 독특한 여러 가지 버릇들 중에 하나였다.
아무래도 그 구조를 짐작하기 어려운 천마궁에서 생활하고 그 속에 갖은 기관 장치와 비밀 장소가 산재하기에 단현은 늘 천마궁을 살피는 버릇을 가지게 되었다.
거기에 더해서 지금은 포로나 다름없는 생활을 하고 있으니 틈만 나면 주위를 꼼꼼히 살피는 것은 당연지사였다.
그러다 단현은 바닥과 일체로 이어져 있는 돌 탁자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얼핏 보면 돌함을 돌 탁자에 고정시키고 이를 다시 바닥과 고정시켜 천부마경을 밖으로 들고 나가기 어렵게 하기 위해 나름대로 안배를 해 놓은 듯한 모양새였다.
하지만 단현은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천부마경이 모조품임을 알고 있다면 이렇게까지 비급을 지키는데 심혈을 기울여야 할 이유는 없었다.
더구나 비급의 유출을 걱정했다면 애당초 사선을 모아 천부마경을 공개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천부마경을 가짜로 만들어 비치해 놓은 것만으로도 도난에 대한 대비는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단현의 생각은 더욱 깊어지기 시작했다.
저 가짜 천부마경을 만들어낸 사람이 사선 중에 있다면 진짜 천부마경도 이곳에 있을 것이다.
이 정도로 치밀한 사람이 진짜 천부마경을 당장 감시가 어려운 외부에 놓아 둔다는 것은 성격적으로 힘든 부분이 있었다.
그렇다고 거처에 놓아 두는 것도 위험했다.
자칫하다가는 다른 사선에게 진짜 천부마경의 존재를 들킬 수도 있는 문제가 도사리고 있었다.
단현은 신형을 굽혀 돌 탁자에 귀를 붙이고 겉을 퉁퉁 두드려 보기 시작했다.
그렇게 돌 탁자에 매달리기를 반 시진만에 탁자와 바닥의 이음매 부분에 먼지가 벗겨진 곳을 찾아냈다.
다시 단현의 반 시진을 이곳저곳 만지다 보니 덜컥하는 소리와 함께 돌 탁자의 이음매 부분에 작은 구멍이 생겼다.
가짜로 관심을 유도하고 진짜는 바로 그 아래에 둔다는 어쩌면 너무나 평범하기 짝이 없는 방법.
하지만 또한 그 때문에 다른 사선의 눈길을 피할 수 있었던 곳이기도 했을 터였다.
단현이 안을 들여다보니 작은 목갑이 들어 있었다.
단현이 조심스럽게 목갑을 꺼내어 보니 목갑의 윗부분에 너무나 익숙한 문양이 도안되어 있었다.
쿵쿵!
단현의 심장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이것은 틀림없는 천마 단휘의 표식이었다.
단현이 조심스럽게 목갑의 뚜껑을 여니 그윽한 단향과 함께 흑색의 비급이 담겨져 있었다.
단현이 떨리는 손으로 비급을 꺼내어 살펴보니 흑색의 특이한 재질의 종이에 적색의 글자가 힘차게 그려져 있었다.
단현의 눈빛이 일렁였다.
너무나 익숙한 필체.
바로 천마 단휘의 필체였다.
그것은 천마신공에 남겨진 단휘의 필체와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단현이 조심스럽게 천부마경을 스르륵 넘겼다.
순간 단현은 가슴이 콱 막히는 것 같은 충격을 받았다.
안에 남겨진 내용은 의심할 바 없는 천마무학이었다.
단현은 천부마경의 글자 하나하나를 모두 뇌리에 각인시키고 다시 천부마경을 목갑 안에 넣고 목갑을 제자리에 넣어두었다.
그리고는 자리에 앉아 명상에 잠겼다.
하지만 천마신공과 마찬가지로 천부마경도 단현의 접근을 쉽게 허락하지 않았다.
다만 전체적인 맥락으로 보아 천마신공이 선이고 천부마경이 후에 남겨진 무학으로 보였다.
때문에 천마신공의 오의보다 천부마경의 오의가 더욱 깊은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아직은 단현에게 시기상조의 무학.
‘그런데 어째서 천부마경이 천마신교가 아닌 다른 곳에서 모습을 드러냈을까? 그리고 천마신교는 어째서 천부마경의 존재를 몰랐을까?’
의문이 끊임없이 이어졌지만 단현은 그 어떠한 결론도 내릴 수 없었다.
피어오르는 것은 확신할 수 없는 억측들뿐.
결국 단현이 지금 할 수 있는 것은 지금까지 해 왔던 것처럼 수련밖에 없었다.
지겹도록 반복되는 일이었지만 단현은 이를 악물고 다시 수련에 몰두했다.
그것만이 자신의 생명을 조금이라도 연장시키는 마지막 길임을 알기에.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어느 날 사선이 단현을 불렀다.
단현이 사선을 찾아가자 사선이 여장을 꾸린 채 단현을 맞이했다.
단현이 그 모습을 보고 의아해하며 물었다.
“사부님들 어디 출타하십니까?”
남궁천이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삼청산을 떠날까 한다.”
사선의 이야기에 단현은 조금 당황했다.
느닷없는 이야기였을 뿐만 아니라 그 속에서 자신이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갈피를 잡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단현의 복잡한 심사를 짐작이라도 한 듯 남궁천의 이야기가 이어졌다.
“우리는 그동안 천부마경의 마력에 빠져 모든 일을 도외시하고 천부마경의 오의를 손에 넣기 위해 협의에 벗어난 행동까지 서슴지 않았다.”
남궁천의 시선이 허공을 향했다.
“하지만 되돌아보면 다 부질없는 집착이었다. 모름지기 협이란 강한 힘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힘을 어떻게 사용하는가 하는 것이다. 그러데 우리는 그동안 선후가 바뀐 삶을 살았다.”
“저도 사부님들을 따르겠습니다.”
단현이 말하자 남궁천이 이를 제지했다.
“아니다. 너는 너의 길이 있다. 우리가 너의 죽음에 대해 아는 것은 멸마십혈단의 너의 죽음에 관련되어 있다는 것이 전부이다. 우리는 너의 사채라도 주워 해부해서 천부마경의 단초를 찾기 위해 그들과 부당한 거래를 했지.”
남궁천의 시선과 단현의 시선이 얽혔다.
“결과적으로는 우리가 너의 목숨을 구한 셈이 됐다만 결국 우리 손으로 다시 너의 명줄을 움켜잡았다. 너는 평생을 생사뇌중혈의 속박을 안은 채 살아가야 한다.”
남궁천이 품에서 얇은 책 한 권과 작은 목갑을 단현에게 건네었다.
“생사뇌중혈의 발작을 억제시켜 줄 수 있는 약과 우리의 부탁이다. 다섯 알이니 아마 오 년은 버틸 수 있을 것이다. 훗날 제갈세가를 찾아오면 제갈유가 해독 방법을 찾아내던지 다시 알약을 내어 주던지 할 것이다.”
“사부님.”
단현의 목소리가 가볍게 떨려 나왔다.
남궁천이 이번에는 한쪽에 놓인 궤짝을 가리켰다.
“저기에는 약간의 재물과 쓸 만한 물건들을 추려 놓았다. 아마 강호행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 것이다.”
“어째서 저를 버리시려는 겁니까?”
단현의 물음에 남궁천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제부터 너의 남은 삶은 온전히 너의 몫이어야 한다. 하지만 우리와의 인연은 여기까지다. 너는 이제 너의 삶을 살아야 한다.”
남궁천이 일어서자 나머지 세 사람도 일어섰다.
“현기를 이룬 너이니 쓸모없는 걱정이라 여기지만 이것 하나만 항상 가슴에 새겨두길 바란다. 협의. 그것이 정도와 마도의 결정적인 차이이다.”
“사부님.”
단현의 애처로운 목소리에도 사선은 조금의 동요도 없이 길을 나섰다.
그렇게 어느 날 갑자기 사선은 단현의 곁을 떠났다.
단현은 사선이 떠나간 방향을 바라보며 잠시 멍하니 서 있었다.
그리고는 제법 시간이 흐른 뒤 자신의 거처로 터벅터벅 발걸음을 옮겼다.
단현은 지금 극심한 혼란을 겪고 있었다.
갑자기 바뀌어 버린 상황이 어지러웠다.
자신의 거처로 돌아온 단현은 갑자기 옷을 하나 꺼내어 홱 까뒤집었다.
거기에는 뜻밖에도 빼곡히 글자들이 나열되어 있었다.
단현이 천천히 글자들을 읽어 나갔다.
점점 단현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리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날짜를 계산해 보았다.
‘십 일이 어긋난다. 더구나 기억이 뒤틀려 있다.’
단현은 천마신교의 사람이다.
천마신교는 무공도 대단하지만 사술 또한 그에 못지않았다.
그리고 천마신교의 사술 중에는 상대방의 혼을 제압해서 부리는 방법도 존재했다.
단현은 삼청산에 들어와서 문득 자신이 무언가 어긋나 있다고 느껴질 때가 종종 있었다.
확언할 수 없었지만 무언가가 잘못되어 있는 듯한 위화감.
더구나 제갈유와의 대화에서는 제갈유가 단현의 정신을 쥐고 흔들 수 있다고 은연중에 내비치기까지 했다.
더구나 단현은 아직 실체를 파악하기 힘든 생사뇌중혈까지.
단현은 생사뇌중혈을 알게 되면서 제갈유가 자신의 머리에 손을 썼다면 자신의 머릿속이 잘못되었을 가능성도 존재한다고 생각했다.
때문에 단현은 틈틈이 사선 몰래 일기를 써 왔다.
간단히 자신만이 알아볼 수 있는 기호로 옷의 안쪽에 계속해서 써 왔던 것이다.
한데 옷 속의 날짜와 단현이 지금 알고 있는 날짜가 달랐다.
대략 십 일의 공백이 발생한 것이었다.
더구나 단현을 더욱 놀라게 만든 것은 바로 단현이 일기에 남겨 놓은 내용과 지금 단현의 기억이 군데군데 어긋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것도 계략이란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