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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부마경 1권(21화)
八章 마경(魔經)(2)
단현은 사무령과 대화를 하면서도 천천히 천부마경을 정독하는 모습을 보였다.
사선은 그런 단현을 방해하지 않으려는 듯 침묵하며 단현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겉으로 보이는 단현의 모습일 뿐 단현의 머리는 이미 다른 생각으로 가득했다.
이미 단현은 천부마경의 모든 내용을 머릿속에 기억했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고 있었다.
‘내용을 살펴보니 이 비급이 전혀 근본이 없지는 않다는 것인데. 문제는 이 천부마경은 단지 진품을 토대로 만들어진 모조품이라는 것인가. 골치 아프게 됐군.’
단현이 가장 먼저 천부마경의 상태를 살핀 것은 천부마경이 진품인지 가짜인지 그도 아니면 필사본인가를 가리기 위한 작업이었다.
사선은 천부마경의 내용에 정신이 팔려 이를 간과한 듯했지만 단현의 판단으로는 눈앞에 놓인 천부마경은 정교한 필사본이었다.
비록 단현이 지금 보고 있는 천부마경이 겉으로는 굉장히 낡아 보이기는 했지만 그것을 약품을 통해 그렇게 보이도록 만든 것뿐이었다.
단현은 무공 이외에도 잡다한 지식들을 많이 습득했고 그중에서도 모조는 단현이 관심을 크게 갖고 있던 분야였기에 이를 한눈에 간파할 수 있었다.
그리고 다음으로 단현이 찾아낸 문제점은 천마신공은 한자로 쓰이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천마가 생존했던 시대에는 지금과 사용되는 문자가 달랐다.
그런데 눈앞에 놓인 천부마경은 친절하게 한자로 쓰여 있었다.
그렇다면 적어도 이 비급은 천마가 직접 쓴 비급은 아니라는 이야기가 된다.
하지만 안에 담긴 내용은 천마신공의 오의와 흡사한 부분이 많았다.
그렇기에 단현이 지금 읽고 있는 천부마경에 대해 내린 최종 결론은 누군가가 진본인 천부마경을 보고 이를 번안하고 해석하여 필사한 후 이에 약품을 처리하여 만든 정교한 모조품이라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본래 천부마경이 가진 오의가 필사본을 만든 사람에 의해 왜곡되거나 누락될 수도 있었다.
그렇다면 이 모조 천부마경만으로는 절대 완형된 천부마경의 무공을 손에 넣을 수는 없다는 소리였다.
사선이 그토록 오랜 시간 천부마경의 해독에 매달리면서도 쉽게 완형을 그리지 못한 데는 이러한 영향도 어느 정도 작용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는 천부마경이라는 비급이 실존한다는 소리도 된다.
원형인 천부마경이 존재하기에 거기서 파생되어 나올 수 있는 모조품도 가능한 것이니까.
아직 진실은 알 수 없었지만 여러모로 단현에게는 이 비급이 골치 아픈 것은 사실이었다.
더구나 모조 천부마경이라도 그 안에 담긴 오의는 대단했다.
군데군데 천마신공과 상충되어 보이는 부분도 있었지만 단현으로서는 꺼림칙한 것은 틀림없었다.
“제가 알고 있던 그 어떤 마공과도 궤를 달리하는 비급입니다. 하지만 이 속에 담긴 오의는 범상치 않음이 틀림없습니다. 저로서도 당장은 결실을 보기가 어려울 것 같습니다.”
단현이 오랜 침묵을 깨고 입을 열었다.
무엇을 기대하고 있었던지 사선은 단현의 대답에 기대감이 무너지는 듯한 느낌을 받기도 하였고 또 다른 마음 한편으로는 안도감을 동시에 느꼈기도 하였다.
기대감은 단현이 천부마경을 해독할지도 모른다는 감정이었고 안도감은 그들이 하지 못했던 것을 단현이 쉽게 이루어낸다면 자신들의 세월과 재능이 안타까웠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그때 다시 단현의 이야기가 이어졌다.
“그런데 제가 보기에는 유광여룡신공의 축기시 사용하는 운문과 협백의 순서가 천부마경이 본래 뜻하는 의미와 뒤바뀌지 않았나 하고 생각합니다.”
단현의 이어지는 이야기에 사무령은 호기심을 제갈유와 당백은 낭패한 표정을 지었다.
유광여롱신공은 사무령이 직접 창안한 무공이다.
하지만 미완의 무공이라 공개하지 않다가 새로운 내공 때문에 고민하는 단현에게만 사무령이 알려 준 무공이었다.
하지만 단현이 연공하면서 은은한 마공의 기운이 느껴져 그 후로 사장시키기로 했던 무공이었다.
때문에 제갈유와 당벽은 유광여롱신공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한다.
그런데 단현이 하필이면 유광여룡신공을 예로 들어 설명을 하니 두 사람은 이것을 전혀 이해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천부마경에서 말하는 천문을 인간의 신체에 구현하기 위해서는 무를 통해 운을 생성하고 그 운을 투과시켜 명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고 하는 말 같습니다. 그런데 유광여룡신공에서 이를 올바로 구현하자면 운문에서 협백이 아니라 태연으로 이어지는 것이 자연스럽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단현의 이야기에 사무령은 손바닥이 짝 하는 소리가 나도록 맞부딪쳤다.
지금까지 미처 왜 그 부분을 눈치채지 못했는가 하는 표정이었다.
그러나 제갈유와 당벽은 단현의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전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과연 이 부분은 그렇게 이해할 수도 있겠구나. 놀랍구나. 한눈에 이 점을 간파해 내다니.”
이미 유광여룡신공을 충분히 파악한 단현은 이를 천부마경의 구절만을 인용해 교모하게 뒤섞어 버렸다.
얼핏 들으면 단현의 이야기가 맞는 듯했지만 이는 정도의 무리에는 맞아 들어갈 수는 있어도 천마무학과는 배제되는 부분이었다.
오히려 천부마경의 오의에서는 멀어지는 길이었다.
이로서 사무령의 혼란은 가중될 것이고 제갈유와 당벽은 조급증을 느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제 서서히 단현의 반격이 시작될 것이다.
또한 이것은 단현의 심득이 어느 사이에 사선을 넘어선 것을 의미하기도 했다.
단현이 의도적으로 만들어낸 상황은 사선의 마음을 평정심을 흔들었고 이는 분열이 비집고 들어갈 틈을 아주 천천히 조금씩 뚫어 줄 것이다.
틀림없이 눈에 뻔히 보이는 분열의 조짐이었지만 이미 마음이 약간 흔들린 사선은 이러한 점을 간과하고 말았다.
‘우선은 서로 간에 반목의 씨앗을 뿌리는 것을 시작으로 하자. 그것이 통할지 안 통할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천천히 한 걸음부터 시작하는 거다.’
“오늘은 제 눈에 보이는 것이 겨우 이 정도군요.”
단현이 굳이 한숨을 몰아쉬며 힘든 척 이야기하자 사무령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다. 역시 너의 재능이 비범치 않구나. 단번에 이러한 차이점을 찾아내다니 너와 함께라면 천부마경의 해석이 불가능한 일만은 아닐지도 모르겠구나.”
단현은 사무령의 칭찬에 공손이 허리를 숙였다.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다니 다행입니다. 오늘밤은 천천히 천부마경의 의미를 되새겨 보고 조금씩 함께 노력한다면 결실이 보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단현의 말에 사무령은 호방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네 사람은 석실을 나와 각자의 생각에 깊이 잠긴 채 거처로 헤어졌다.
* * *
거처로 돌아온 단현은 뇌리에서 석실에서 본 천부마경을 떠올렸다.
이제 굳이 다시 천부마경을 볼 필요도 없었다.
이미 단현의 머릿속에는 그와 똑같은 천부마경이 새겨져 있었기에.
단현은 천부마경의 내용을 몇 번이고 상기하며 천부마경의 기틀이 천마신공에 있음을 확신했다.
하지만 이것은 단현이 천마신공을 알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반면 천부마경은 천마신공과도 상이한 내용을 가득 담고 있었다.
단현의 심득은 다시 장벽에 가로막히고 말았다.
‘천부마경이 천마 단휘 태상조사님이 남기신 무공이든 아니든 천마신공과 유사한 것은 틀림없다. 그러면서도 상이한 내용이 가득하니 그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난감하구나.’
단현은 일단 천부마경에 대해서는 깊게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무엇보다 천부마경이 모조된 필사본이라면 거기서 제대로 된 심득을 얻는 것은 어려울 터였다.
그 시간에 아직 완성되지 못한 천마신공의 오의를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것이 이득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이제는 서서히 탈출을 준비해도 괜찮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선을 제압하는 것은 힘들지 몰라도 삼청산을 벗어나는 것은 가능할 것 같았다.
생사뇌중혈이 마음에 걸렸지만 이러한 대법은 차라리 혈교의 조력을 구하는 것이 나을 것 같았다.
제갈유의 말도 있었지만 이러한 술법을 제갈세가가 연구하는 것은 아무래도 한계가 있었다.
하지만 혈교라면 그런 세간의 시선에는 상관없이 갖가지 대법을 오랜 시간 다듬어 왔기에 해결책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몰랐다.
이제 남은 문제는 남궁천의 성과였다.
중단전은 외부의 기운과 내부의 기운을 교차시키는 일종의 통로와 같은 곳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중단전을 활용하게 되면 민간에서 말하는 영이란 존재와도 교감이 가능해진다.
이때 중요한 점이 상단전의 사용이다.
상단전을 통해 자신의 정신세계를 확실하게 제어할 수 없으면 이러한 영들의 유혹 속에서 자아를 상실하게 될 위험성이 높아진다.
상단전의 힘은 하단전의 축기의 힘과는 그 본연의 성질이 완연히 달랐다.
단현은 가장 먼저 상단전의 사용법을 배웠고 다음으로 하단전의 축기를 배웠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중단전을 조화시키면 인체의 기본이 되는 세 가지 단전을 유기적으로 사용할 수 있게 된다.
이것이 단현이 알고 있는 무공의 기본이었다.
그러나 정도의 무학은 하단전의 수련을 가장 먼저 시작했다.
처음에는 단현도 이 점을 이상하게 생각했었다.
그러나 정도의 무학을 배우면서 단현은 정도의 무학이 놀라울 정도로 인체 본연의 힘의 단련에 중점을 두고 있는 것을 깨달았다.
사실 하급의 마공 같은 경우에는 중단전 하단전 상단전 가리지 않고 자극을 통한 힘의 극대화를 우선시한다.
반면 정도의 무공은 지독할 정도로 하단전의 축기를 고집하고 있기 때문에 안전성면에서 훨씬 뛰어났다.
그것이 겉으로 나타나는 현상 중의 하나가 정도의 무공은 진전은 느리나 훗날 대성한다는 통설이고 마공의 경우에는 주화입마의 위험성이 높고 단기간에 강해질 수 있다는 편견 같은 것이었다.
단현은 잠시 거처를 나와 어두컴컴한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런데 갑자기 주위의 영들이 혼란스럽게 뒤엉키는 느낌이 들었다.
사실 단현은 어려서부터 상중하 단전을 고루 수련해 왔기에 특히나 감각적인 부분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하지만 단현은 지금 선천의 힘을 금제한 상태였다.
때문에 지금 단현의 감각은 형편없었다.
물론 그렇다고는 해도 일반인이라면 감히 넘볼 수 없는 경지였다.
때문에 단현이 현재 느낄 수 있는 부분은 영들이 평소와 다르게 소란스럽다는 정도였다.
단현의 검미에 주름이 잡혔다.
단현의 경험으로 영들이 요동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술사들이 법술을 펼칠 때 단현과 같이 영도 지워 버릴 수 있는 존재가 힘을 개방할 때 그리고 상령이 나타났을 때 정도였다.
하지만 이곳에는 술사가 없다.
물론 사무령이 도술에 관심이 있었다면 모르겠지만 그는 뼛속부터 무인이다.
단현은 지금 힘을 봉인했기에 영에 아무런 영향력을 미칠 수 없었다.
그렇다면 단현이 추측할 수 있는 경우는 하나밖에 남지 않았다.
‘남궁천 결국 중단전부터 깨운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고 상령에게 잡아먹힌 것인가?’
상령은 보통의 경우 인간을 멀리한다.
이유는 그들이 인간보다 우위에 있다고 자부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종종 인간의 벽을 넘어서는 인물들에게 다가오기도 한다.
상령은 말 그대로 영중에서도 깨달음을 얻어 강한 존재감을 지니게 된 영들이다.
때문에 상령은 도사나 승려들도 상대하기 버거운 존재들이 많았다.
남궁천이라면 상령들이 탐낼 만한 육체였다.
문제는 단현도 상령에 관해서는 지식이 부족하다는 점에 있었다.
상령은 애당초 특별한 인간이 아니면 접근하지도 않았고 그 숫자도 매우 적었다.
천마궁에 있던 수많은 책들 중에서도 어렴풋이 상령에 대한 언급만 있었지 상령에 관해 구체적인 자료들은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결국 남궁천이 변수가 되는 것인가. 이제 나도 내 목숨을 건 도박을 시작할 때가 가까워 오는 것 같아.’
단현은 다시 발걸음을 돌려 거처로 들어갔다.
밤에 상령과 마주쳐서 좋을 건 없었다.
영이란 것은 자고로 밤에 힘이 더 강해지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