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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부마경 1권(18화)
七章 무후(武侯)(1)


단현은 늦은 밤 자신의 거처 앞 제법 너른 공터에서 무심한 눈으로 하늘을 담고 있었다.
“시간이 늦었는데 사색이 깊구나.”
적당한 높이를 갖고 있는 목소리는 듣는 사람이 절로 편안함을 느낄 만큼 인자한 목소리였다.
“제갈 사부님.”
단현이 공손히 예를 올렸다.
제갈유가 단현의 거처로 들어서고 있었다.
“날이 찹니다. 안으로 드시지요.”
단현은 마치 제갈유를 기다리고 있기라도 했던 듯 자연스럽게 제갈유를 자신의 거처로 인도했다.
제갈유는 얼굴 가득 웃음을 지은 채 단현을 따라 단현의 거처로 들어섰다.
단현이 제갈유에게 자리를 권하고 차를 올렸다.
제갈유는 그동안 말없이 단현을 바라보기도 하고 단현의 방을 둘러보기도 하였다.
단현이 따라 준 차를 한 모금 음미하며 제갈유의 웃음이 조금 크게 그려졌다.
“그저 무공에만 빠져 사는 줄 알았더니 다도도 제법이구나.”
“과찬이십니다.”
“내가 올 줄 알고 있었느냐?”
“굳이 부정하지는 않겠습니다.”
제갈유의 표정이 조금 어두워졌다.
“나를 원망하느냐?”
“어쩔 수 없는 일이라 생각합니다.”
“네가 정말 그렇게 생각하는지 알 수는 없지만 정말 어쩔 수 없었다.”
제갈유가 제법 크게 한숨을 몰아쉬었다.
“나는 너의 과거를 모른다. 너는 너의 과거를 아느냐?”
뜬금없는 제갈유의 물음이었다.
“저는 제갈 사부님의 말뜻을 이해하지 못하겠습니다.”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아마도 이해하려 하지 않는 것일 게야. 혹시 생사뇌중혈이라고 들어본 적이 있느냐?”
“없습니다.”
“예를 들자면 이런 것이다. 내가 특수한 방법으로 기를 운용하여 나의 피 한 방울을 만든다. 그리고 이 한 방울의 피를 너의 머릿속에다 넣어 둔다.”
“마치 혈교의 사술과 닮아 있군요.”
제갈유의 말을 받아주는 단현의 목소리는 무덤덤했다.
그러나 단현은 속은 반대로 열화와 같이 타오르고 있었다.
제갈유의 이야기는 제갈유가 자신의 몸에 해 놓은 안배를 이야기하는 것임을 눈치챘기 때문이다.
“혈교의 사술이라… 그럴지도 모르겠구나. 일단 시술이 된 뒤에는 상대가 아무리 강하더라도 내 의지에 따라 상대를 어느 정도 제어하는 것이 가능하지.”
제갈유의 말에 단현은 급히 마음을 가라앉혔다.
그러면서 자신의 검의 위치를 확인하고 시야를 넓게 하면 제갈유의 동작 하나하나를 세심하게 눈에 담았다.
이러한 변화는 단현의 내부의 준비였기 때문에 제갈유는 전혀 눈치챌 수 없었다.
단현이 갑자기 마음의 경계에 날을 세운 이유는 제갈유의 생사뇌중혈이 단순히 사람의 생사만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섭혼의 효과까지 내포하고 있음을 눈치챘기 때문이다.
“만약 내가 너에게 생사뇌중혈을 걸었다면 너는 그것을 풀어낼 수 있겠느냐?”
조금은 어두운 듯한 제갈유의 표정이 묘한 느낌을 자아내고 있었다.
“지금의 저라면 힘들 것 같습니다.”
“내 생각과는 다르구나.”
단현과 제갈유의 눈빛이 엉켰다.
“남궁천이나 사무령은 모른다. 물론 당벽도 마찬가지지.”
제갈유의 화법은 상당히 독특했다.
앞뒤를 생략한 듯한 느낌의 대화법.
마치 독백을 하는 듯 자신만의 세계에 빠져 상대방을 전혀 배려하지 않는 듯한 말투.
평소에 단현이 보아 왔던 제갈유와는 전혀 다른 화법이었다.
“너라면 그것을 유추하는 것이 어렵지는 않을 것이다. 세 사람은 모르는데 나만은 알 수 있는 것.”
단현은 갑갑함을 느꼈다.
제갈유는 지금 자신이 단현에 대해 사선이 모르는 것을 알고 있다고 넌지시 알려 주고 있었다.
제갈유의 별호는 의선이다.
의술에서 독보적인 경지에 오른 인물 그가 바로 제갈유이다.
아마도 단현이 살아나는 데에는 제갈유가 결정적인 역할을 담당했을 것이다.
단현이 생사를 넘나들고 있을 때 단현의 가장 가까운 곳에서 생사뇌중혈까지 박아 넣었을 인물.
사선 중에서도 오직 제갈유만이 알 수 있는 것이고 그것이 단현과 관계되어 있다면 그것은 단현의 몸밖에 없었다.
즉, 제갈유는 단현의 상처를 돌보면서 사선이 모르는 무엇인가를 자신만 눈치채고 있었다는 소리였다.
단현은 이러한 사실을 모두 인지했음에도 불구하고 의문이 가득한 목소리를 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지금의 저로서는 생사뇌중혈을 풀어낼 방법이 없습니다. 무엇보다 저는 생사뇌중혈에 대해 어떤 것도 알지 못합니다.”
제갈유가 품속에서 한권의 책을 꺼내어 단현에게 건네주었다.
책장의 겉면에는 전단무후신공(?檀武侯神功)이라고 적혀 있었다.
“제갈세가가 가진 최고의 비급이다.”
단현은 여전히 어떠한 감정의 변화를 겉으로 나타내지 않았다.
제갈유는 아무렇지도 않게 다시 전혀 상관없는 화제로 대화를 전환시키고 있었다.
“천부마경을 보기 위해서는 정도의 내공이 너에게 필요하지.”
“저는 비급을 보는데 왜 정도의 내공이 필요한지 모르겠습니다.”
“천부마경은 결국 마공이다. 남궁천과 같은 절대강자도 결국 중단전이 흔들리며 폐관에 들어갈 수밖에 없었지. 정도의 내공으로 마음을 다잡지 않으면 주화입마의 위험이 어디에서 도사리고 있을지 모른다.”
“한데 왜 제게 제갈세가의 최고의 비전을 가르쳐 주시는 겁니까?”
제갈유가 단현의 물음에 잠시 침묵했다.
“지금까지 제갈세가에서 전단무후신공을 완전히 자기 것으로 만든 사람은 없었다.”
단현은 제갈유의 이야기를 듣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신기제갈에서도 풀어내지 못했다면 저도 풀어내지 못할 겁니다.”
“나도 그것이 사실인지 알지 못하나 생사뇌중혈이 전단무후신공에서 파생되어 나왔다고 하는구나.”
단현은 제갈유의 이야기에 속으로 이를 갈았다.
“너도 이미 느끼고 있겠지만 생사뇌중혈은 미완의 술법이다. 선대에 어떤 고인이 생사뇌중혈을 만들어 내기는 했지만 그것을 해지시키는 것까지 만들어내지는 못했다.”
제갈유는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벌써 몇 번째 보이는지 모르는 한숨이었다.
“나도 근래에 생사뇌중혈의 해법을 찾기 위해 고심하였으나 그것이 쉽지 않구나. 만일 네가 마도로 회귀하지 않고 이처럼 의지력이 강한 아이인 줄 알았다면 생사뇌중혈과 같은 극단적인 방법은 사용하지 않았을 것이다.”
“당치도 않습니다. 그간 정마의 관계를 생각하고 제가 마교의 교주로 있었다는 것을 감안하면 당연히 취해졌어야 할 조치입니다. 그런 작은 일을 마음에 담아 두지 마십시오.”
제갈유의 눈가에 언뜻 눈물이 고였다.
“고맙구나.”
그것을 끝으로 제갈유는 단현의 거처를 떠났다.
단현은 제갈유가 놓아두고 간 전단무후신공을 살펴보았다.
제갈유는 떠나기 전 전단무후신공은 제갈세가의 가보이니 다른 이에게 보여 주지 말고 내용을 습득한 후 비급을 태워 없애라고 했다.
단현은 먼저 비급의 내용이 아니라 비급의 상태를 살피기 시작했다.
비급은 만들어진 지 오래되지 않은 듯했다.
아무래도 제갈유가 태워 없애라고 했으니 필사본이 틀림없을 것이다.
‘그렇다는 것은 내가 신조마경을 뒤틀어 가짜 천마신공을 사칭한 것처럼 이 전단무후신공이라는 것도 그 내용이 사실이라는 보장은 없지.’
단현은 제갈유를 믿지 않았다.
물론 전단무후신공에서 생사뇌중혈의 해법을 찾을 수 있다고도 생각하지 않았다.
방금전에 제갈유와 대화를 하며 그가 얼마나 위험한 인물인지 느꼈다.
제갈유가 단현의 신체에 비밀을 알고 있다면 그것은 천마령혼과 관련되었을 가능성이 농후했다.
더구나 이제는 자신의 왼팔마저 믿을 수 없게 되어 버렸다.
심지어 자아조차도.
과연 생사뇌중혈만이 제갈유가 만약의 경우 단현을 제거하기 위해 만든 최후의 수단일까?
단현은 그동안 자신이 너무 안일하게 대처했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사선은 강호에서 산전수전을 다 겪은 사람들이다.
단현이 그동안 나름대로 자신을 숨겼다고 하나 그것이 어디까지 통용되었는지는 확신할 수 없게 되어 버렸다.
어쩌면 그들도 단현처럼 스스로의 모습을 감추었을 수도 있다.
아니, 감추었음이 틀림없다.
적어도 제갈유가 방금 보여 준 모습은 그동안의 모습과는 전혀 달랐으니까.
그동안 단현이 사선의 내공을 직접 익히지 않은 직접적인 원인은 자신의 천마기와 사선의 내력이 엉킬 경우 자신이 받는 치명적인 피해 때문이었다.
이를 단현은 자신이 천마신교의 출신이자 천마 단휘의 후손이라는 점.
그리고 그러한 자신이 사선 중 어느 하나의 내공을 잇는다면 향후 그 문파가 받게 될지도 모르는 피해 등을 고려해 새로운 내공을 주창했었다.
하지만 이제 단현은 치환과 융합의 술로서 여러 가지 내공을 공존시키는 문제를 풀어내었다.
거기에다 생사뇌중혈로 인해 한정된 자신의 생명은 단현이 겉으로 내세웠던 명분의 의미를 희석화시켰다.
‘우선은 천부마경에 접근하는 게 최우선이다. 그 후에 다음 일은 생각한다.’
단현이 가부좌를 틀고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리고 상청무상신공의 법에 따라 호흡을 시작했다.
단전에 조금씩 기운이 쌓이고 운기를 통해 단현은 이를 완전한 상청무상신공으로 바꾸어 나갔다.

* * *

단현은 상청무상신공을 연공하기 시작한 지 칠 일이 지나자 다시 사선을 찾았다.
제갈유는 실망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곤륜파의 내공을 택하였느냐?”
“이제 제 생명이 얼마 남지 않음을 알게 된 이상 사사로운 명분에 얽매여 있기보다는 하루라도 빨리 사부님들께 도움이 되고 싶습니다.”
세 사람도 그런 단현의 뜻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세 사람은 사전에 단현의 처분에 관해 논의하고 또 논의했다.
생사뇌중혈은 시전자인 제갈유가 일 년마다 단현의 머릿속에 심겨져 있는 자신의 혈에 일종의 신호를 보내줌으로 인해 폭발하지 않고 다시 일 년을 버티게 된다.
그런데 만일 제갈유가 죽게 된다면 이러한 신호를 보내줄 사람이 없어 결국 단현도 일 년 후에 제갈유의 혈이 단현의 머릿속에서 폭발을 일으켜 죽게 되는 것이다.
한데 사실 생사뇌중혈은 제갈유가 다른 사람에게 그러한 힘을 양도함으로 인해 단현의 생명을 연장시키는 방법이 존재했다.
하지만 사선은 이러한 사실을 끝까지 단현에게 숨기기로 그리고 사선의 죽음과 함께 단현을 같이 명부에 이름을 올리도록 결정을 내렸다.
결국 사선은 단현이라는 한 사람보다는 천마의 후손이라는 사실에 그리고 그가 가진 무서운 재능이 훗날 독이 될 수도 있다는 점에 무게를 둔 것이다.
“앞으로 반년 정도 내공 수련에 정진하면 천부마경을 우리와 함께 연구할 수 있을 것이다.”
“부족한 힘이나마 사부님들의 바람에 조그만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날부터 단현의 지리한 내공 증진의 싸움이 시작되었다.
단현은 이미 천마기를 익힌 경험이 있고 지금은 천마기를 봉인해서 사용할 수는 없지만 수시로 단전에서 천마기를 쌓아 봉인된 천마령혼으로 밀어 넣고 있었다.
즉, 내공 수련을 하루도 게을리 한 적은 없다는 소리다. 단지 천마기를 봉인한 까닭에 단전에서 천마기를 생성하여 천마령혼으로 밀어 넣는 것만이 지금 단현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수련이었다.
때문에 단현의 천마기는 봉인된 그날부터 오늘까지 꾸준히 증진되었을 것이다.
다만 이것은 단현의 짐작일 뿐 봉인을 풀지 않았기에 확인할 수는 없었다.
물론 단현은 환단전을 사용할 수 있었기에 여러 가지 내공을 동시에 익힐 수도 있었으나 어차피 다른 내공은 천마기를 따라오지 못했기에 천마기만을 익혀 왔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상청무상신공만을 연공해야 했다. 상청무상신공은 도가의 현묘한 신공이라 그 수련에 고도의 집중력이 필요했다.
그러나 이는 단현에게는 해당 사항이 없었다.
어차피 천마심법의 난해함이 상청무상신공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단현은 상청무상신공의 기운을 단전에 쌓아 가면서 심상으로는 천마신공을 익히고 뇌공절세심의류를 보완해 가는데 사력을 다했다.
그 와중에 유광여룡신공의 심득을 닦아 나가며 전단무후신공도 틈틈이 살펴보았다.
그런데 제갈유가 남긴 전단무후신공의 내용이 심상치 않았다.
아니, 완전히 새로운 것이었다.
천마무학과도 수많은 마공과도 그리고 그동안 단현이 배워 왔던 사선의 무공과도 완연히 다른 궤를 달리고 있었다.
단현을 더욱 황당케 했던 것은 전단무후신공이 그동안 단현이 제갈유에게 배워 왔던 대천성신공과도 연관이 없다는 데 있었다.
‘이 괴이한 무공을 제갈유가 나에게 넘긴 저의는 무엇일까?’
단현은 제갈유가 전단무후신공을 자신에게 넘긴 이유를 알 수 없었다.
한동안 전단무후신공을 연구하던 단현이 이것이 또 다른 절학임을 절감할 수 있었다.
전단무후신공은 어떠한 기운도 사용하지 않았다.
하지만 또한 교모하게도 그러한 힘을 이용하고 있었다.
‘하지만 제갈유가 필사해서 넘긴 비급인 이상 이 비급을 완전히 믿으면 필시 낭패를 보게 될 것이다.’
때문에 단현은 전단무후신공에 관해서는 완전히 다른 시각으로 접근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 비급은 단현의 심력만을 소모시킬 뿐 별다른 진전을 보이지는 않았다.
그렇게 단현은 누구도 장담할 수 없는 자신의 암울한 미래를 이겨내기 위해 사력을 다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