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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탄 로드 1(24화)
chapter 8. 얻어 걸린 대박(4)
쾅!
“크악!”
갑작스런 충격에 센티넬에 타고 있던 기사가 비명을 질렀다. 센티넬은 하르실리온과의 충돌로 뒤로 튕겨 나갔다.
하르실리온은 상체를 반시계 방향으로 회전시키며 왼 주먹을 수평으로 휘둘렀다.
갑작스러운 충돌. 게다가 하르실리온의 등이 가리고 있었기에, 센티넬은 하르실리온의 주먹 공격을 제대로 볼 수 없었다.
하르실리온의 손등이 센티넬의 투구를 그대로 강타했다.
카가각!
충돌한 부분에서 불꽃이 튀어 올랐다.
나이트암의 장갑 중에서도 특히 단단한 것이 투구에 쓰인 장갑이다. 투구가 뚫려 기사가 당해 버리면 나이트암의 다른 부분이 멀쩡해도 무용지물이 되어 버린다.
그런 허무한 일을 막기 위해 투구는 다른 곳보다 더욱 튼튼하게 만들어진다.
그렇기에 하르실리온의 주먹 공격에도 부서지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렇기에 충격 자체는 고스란히 안에 있는 기사에게 전해졌다.
이전의 기사처럼 정신을 잃지는 않았다. 하지만 순간적으로 몸이 굳는 것까지는 피할 수 없었다.
이제 검을 찔러 넣기만 하면 상황은 종료된다. 하르실리온의 손에 들린 검이 투구의 틈을 노리고 찔러 들어가려 했다.
하지만 하르실리온은 곧 검의 궤도를 바꾸어야 했다.
밀려 나갔던 단장이 다시 달라붙으며 하르실리온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하르실리온은 검을 반대 방향으로 휘둘러 단장의 검을 막았다.
갑작스럽게 검의 방향을 바꾸었기에 하르실리온의 검에는 제대로 된 힘이 실리지 않았다. 그래도 기체의 성능 차이가 있기에 무난하게 막을 수 있었다.
게다가 공격을 예상이라도 했다는 듯, 하르실리온은 자연스럽게 다음 동작을 행했다.
하르실리온의 오른 다리가 슬쩍 들리더니 단장의 센티넬 옆구리를 그대로 밀어 찼다. 힘에서 밀린 단장의 센티넬은 버티지 못하고 옆으로 밀려 나갔다.
그때 기사는 정신을 차린 상태였다. 하르실리온이 발차기를 하는 순간, 기사의 센티넬이 하르실리온의 등을 향해 자신의 검을 휘둘렀다.
“죽어라!”
루인이 단장의 센티넬을 공격하는 순간에 이루어진 절묘한 공격.
하지만 루인은 그 공격을 피해 냈다.
하르실리온은 단장의 센티넬을 밀어 찼다. 그 때문에 단장의 센티넬은 밀려 났지만, 그 반작용으로 하르실리온 역시 반대 방향으로 몸이 움직였다.
그렇게 움직인 거리는 한 걸음도 되지 않는 고작 1밀 정도였지만, 등을 노리던 검을 피하기에는 충분했다.
밀어 차는 것보다는 끊어 차는 것이 타격이 더 크기 마련이다. 그럼에도 하르실리온이 밀어 찬 것은, 의도한 결과가 아니라 끊어 차기에는 위치가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만약 단장의 센티넬과 하르실리온의 거리가 조금만 더 벌어져 있었다면 하르실리온은 끊어 차기를 시도했을 것이다. 그만큼 단장의 센티넬도 타격을 입었겠지만, 등 뒤에서 가해지는 공격에 하르실리온이 더 큰 타격을 받았을 것이다.
‘위험했다. 이번에는 운이 좋았어.’
루인이 자신이 실수했다는 것을 분명하게 인지했다.
위기와 기회는 함께 찾아온다고 했던가.
기사가 탄 센티넬의 공격은 그냥 빗나간 게 아니라 루인에게 아주 좋은 기회마저 만들어 주었다.
센티넬의 검을 잡은 손은 하르실리온의 왼쪽 겨드랑이 아래에 위치하게 되었다. 그것은 루인이 반격을 하기에 매우 좋은 위치였다.
실수에 대한 반성도 중요하지만 당장은 현 상황을 해결하는 것이 더욱 급선무다. 루인은 그렇게 판단했고 행동했다.
하르실리온의 왼팔이 겨드랑이 아래에 위치한 센티넬의 팔을 감듯이 잡았다. 그러고는 앞으로 뻗어 오는 센티넬의 힘에 자신의 힘을 더해 잡아당겼다.
동시에 오른손에 들려 있는 검을 버리고 가슴 부분의 틈에 손가락을 찔러 넣었다.
왼 다리로는 무게를 지탱하고 오른 다리로는 센티넬의 다리를 감아올리며 몸 전체를 풍차 돌리듯 회전시켰다.
급작스런 중심 이동에 센티넬에 탄 기사는 제대로 된 반항도 하지 못했다.
허공에서 한 바퀴 회전한 기사의 센티넬은 그대로 처박혔다. 그것도 땅이 아니라 단장의 센티넬에게.
포개지듯 나란히 엎어진 두 기의 센티넬.
루인은 바닥에 떨어뜨렸던 검을 다시 든 채 두 기의 센티넬에게 다가갔다.
낙하의 충격으로 기사는 정신을 잃은 상태였다. 반면 기사단장은 그래도 단장이라고 멀쩡히 정신을 차리고 있었다.
나이트암이나 센티넬을 가장 적은 힘으로 상대하는 방법은 투구의 틈으로 기사를 공격하는 것이다. 반면 약점이 분명한 만큼 대비 또한 확실해서 결코 쉽지 않은 일이기도 하다.
하지만 지금처럼 무방비의 상태라면 그것만큼 쉬운 일도 없다.
단장은 지금의 무방비한 상황에서 빠져나가기 위해 노력했다. 그렇지만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다. 위에 놓인 기사의 센티넬이 방해가 되고 있었다.
빠르게 다가선 하르실리온이 아무런 망설임 없이 검을 뻗었다. 목표는 단장이 아니라 기절한 기사였다.
“감히. 멈춰라!”
단장의 고함이 들렸지만 루인은 신경 쓰지 않았다.
검은 정확하게 투구의 틈으로 들어갔다. 푸욱 하는 파육음과 함께 피가 투구 바깥으로 튀어나왔다.
피의 양은 꽤 많아서 뒤쪽에 있던 단장의 센티넬로도 흘러내려 갔다. 그리고 그중 일부는 투구의 틈을 타고 단장의 얼굴까지 도달했다.
피가 얼굴에 묻자 단장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 갔다.
단장이 다급하게 소리쳤다.
“자, 잠깐! 원하는 게 무엇이냐? 나는 슈론토의 기사단장이다. 나의 권력은 알려진 것보다 훨씬 강하다. 네가 원하는 건 뭐든지 들어주겠다.”
하르실리온에서 루인의 음성이 흘러나왔다.
“내가 원하는 걸 뭐든지?”
루인의 반문 때문인지 단장의 얼굴에 혈색이 돌아왔다. 단장은 뻔뻔한 태도로 말하기 시작했다.
“그렇다. 평민인 네가 원하는 건 역시 작위겠지? 돌아가면 네가 작위를 받을 수 있도록 돕겠다. 내가 말하면 아무리 슈론토의 영주라도 들어줄 수밖에 없다!”
“귀족 작위라? 안 그래도 작위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었지.”
“역시 그렇지? 날 믿어라. 내가 네놈의 바람을 이루어 주겠다.”
단장의 말투에 오만함이 깃들기 시작했다. 역시 권력 앞에선 누구나 무릎 꿇을 수밖에 없다고 단장은 생각했다. 바로 자신처럼.
하지만 이어진 루인의 말에 단장은 다시 당황했다.
“착각하고 있군.”
“차, 착각이라니? 설마 나에게 능력이 없다고 생각하는 거냐? 나는 슈론토 영주의 부하가 아니다! 내 뒤에는 사실 글리세일 공작님이 계신다. 공작님의 능력이라면 너에게 충분히 작위를 수여하실 수 있다.”
“아니, 내가 말한 착각은 다른 거야. 바로 평민이라는 말. 나는 평민이 아니라 노예야. 나 스스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지만 너희들의 눈에 나는 노예가 맞아.”
“노예라고?”
잠시 눈을 굴리던 단장이 크게 소리쳤다.
“감히 노예 주제에 귀족을 농락하다니! 하지만 특별히 이 일은 문제 삼지 않고 넘어가 주겠다. 당장 이 위에 방해물을 치워라.”
루인은 단장의 말대로 위에 놓인 기사의 센티넬을 옆으로 밀었다. 그러자 단장은 득의양양한 태도로 소리쳤다.
“멍청한 놈, 치우란다고 진짜 치우다니. 설마 진짜 작위를 줄 거라 생각했단 말이더냐? 이래서 멍청한 노예 놈은 안 되는 거다!”
“웃기고 있군. 난 인간이 아냐. 너희들이 노예로 취급하고, 가축으로 취급하는 이종족이다. 네가 이종족을 어떻게 대하는지는 조금 전에 절실히 보았다. 그런 너를 내가 가만히 놔둘 거라고 생각하나?”
“흥. 지금까지 네가 선전한 건 다른 놈들이 멍청하게 행동했기 때문이다. 내가 마음먹고 상대하면 너 따위는 아무런 문제도 되지 못한다.”
“그런 말은 제대로 일어난 뒤에나 하지?”
단장의 센티넬은 절반쯤 몸을 일으킨 상태였다. 단장이 당황한 목소리로 외쳤다.
“무슨 말이냐?”
루인은 말 대신 행동으로 대답했다. 하르실리온의 거체가 단장의 센티넬을 그대로 깔고 앉았다.
단장이 새된 목소리로 외쳤다.
“비겁하다! 제대로 승부하자! 네놈이 그러고도 기사라 할 수 있느냐?”
“말했잖아? 난 노예라고.”
하르실리온이 주먹을 높이 들었다. 그러고는 그대로 센티넬의 투구에 내리꽂았다.
쾅!
하얗게 질렸던 단장이 자신의 몸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것을 알자 미친 듯이 웃으며 외쳤다.
“하하하하. 멍청한 노예 놈. 나이트암과 센티넬의 투구 부분은 탑승하는 기사를 보호하기 위해 가장 튼튼하게 만들어진다. 그런 기초적인 사실도 모른단 말이냐? 하하하하하.”
루인은 단장의 비웃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주먹질을 계속했다.
쾅!
“하하하하하하.”
쾅!
“하하하하하.”
쾅!
“하하…….”
쾅!
…….
쾅쾅쾅쾅쾅…….
“그, 그만…… 제발 그만…… 크아아아악…….”
계속되는 주먹질에 단장이 비명을 질러 댔다. 그럼에도 하르실리온의 공격은 멈추지 않았다.
어느 순간부터 단장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죽은 것이었다.
하르실리온의 공격은 투구에 막혔다. 하지만 그 충돌로 발생한 충격파는 단장을 공격했다. 한두 번에 그쳤다면 문제가 되진 않았겠지만 그 충격파는 계속해서 발생하고 또한 증폭되었다. 하르실리온의 주먹질은 빨랐고 진동이 사라지기도 전에 계속해서 가해졌기 때문이다.
결국, 단장은 충격파에 의해 온몸의 실핏줄이 터져서 사망해 버렸다.
그래도 하르실리온의 공격은 계속되었다.
하르실리온의 지금 모습은 일견 광기에 차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움직이는 것은 하르실리온이지만 그 움직임의 주체는 루인이다. 루인은 미친 듯이 단장의 센티넬을 공격했다. 머리 부분만이 아니라 센티넬의 전신에 공격이 가해졌다.
단장의 센티넬은 어느새 완전히 대파되어 있었다.
한참이나 계속되던 그 동작이 멈춘 것은 등에 무언가 닿는 느낌이 왔을 때였다. 감각은 하르실리온이 아니라 루인 자신의 몸이 느낀 것이었다.
루인은 뒤돌아보았다. 그곳에는 창백한 안색의 아라사가 서 있었다. 아라사는 담담한 태도로 고개를 저었다.
그제야 루인은 자신이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깨달았다.
루인은 살인에 대한 죄책감으로 마음을 닫아 버린 것이었다.
루인이 처음 죽인 건 발차기로 완전히 박살 내 버린 센티넬의 기사였다. 수라타의 발차기는 단순한 물리적인 타격만을 주는 것이 아니었다. 내경을 불어넣어 몸 안을 망가뜨리는 수법이었다.
강철로 만들어진 센티넬이 박살 났다. 인간의 몸은 그보다 훨씬 약하다. 센티넬이 부서지는 순간 그것에 타고 있던 기사 역시 죽었다.
그 뒤에 아라사를 치료하고 다른 두 명의 기사를 죽일 때까지 루인은 문제없이 행동해 왔다.
하지만 그건 겉으로 보이는 모습이었다. 상황이 다급했기에 루인은 그 상황의 해결에 모든 신경을 쏟았다. 덕분에 다른 생각을 할 여유가 없었다.
단장을 상대할 때는 달랐다. 남은 것은 단장의 센티넬 한 기였고 그 정도라면 루인과 하르실리온의 힘으로 충분히 상대할 수 있었다.
여유가 생겼고 자신을 뒤돌아보게 되었다. 그제야 루인은 자신이 살인이라는 행위를 했다는 것을 인식했다.
그 죄책감은 루인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거대했다. 루인은 몬스터들을 아무렇지 않게 죽였기에 사람을 죽이는 것도 별로 문제가 되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몬스터와 사람은 달랐다.
루인은 받아들여지지 않는 현실을 부정하고 싶었다. 그리고 결국 부정해 버렸다. 그 순간 루인의 마음은 닫혔고, 루인의 몸은 같은 행동을 계속해서 반복할 뿐이었다.
다행히 루인이 닫은 마음의 문은 그리 강하지 않았다. 현실을 부정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지만, 현실을 부정해서는 안 된다는 이성 또한 공존했기 때문이다.
아라사가 루인을 건드리는 순간, 루인은 마음의 문을 열고 바깥으로 나왔다.
그렇게 바깥으로 나오는 순간, 문을 닫고 피하고 있던 죄책감이 한 번에 루인을 짓누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