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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탄 로드 1(22화)
chapter 8. 얻어 걸린 대박(2)
심퍼사이즈하는 순간 애교 넘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루인!”
푸른 드레스와 모자, 전체적으로 귀여운 옷차림을 한 하르가 루인에게 안겨 왔다.
하르는 자신이 원하는 모습을 취할 수 있고, 당연히 옷차림도 바꿀 수 있었다.
하르는 루인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고는 칭얼대듯 말했다.
“치잇. 자주 좀 불러내면 안 돼? 심심하단 말이야. 4일 만에 불러내다니. 나쁜 루인! 이럴 거면 나 아공간에 안 있고 루인이랑 같이 돌아다닐 거야.”
루인은 식은땀을 흘리며 대답했다.
“미, 미안. 앞으로 자주 부를게.”
비장한 각오로 심퍼사이즈했는데 어쩐지 그 비장함이 희석되는 느낌이었다. 루인은 애써 마음을 다잡고는 진지한 목소리로 하르에게 말했다.
“하르, 일단 저 녀석들을 처리해야 해. 이야기는 그 뒤에 하자.”
“전투구나! 다 죽었어. 오호호호호.”
루인은 하르를 떨어뜨린 후 재빨리 전황을 살폈다. 아라사가 잡혀 있는 상태이기에 함부로 움직이는 건 위험했다. 상대가 대처할 여유를 주지 말고 순식간에 처리해야 했다.
‘운이 좋구나. 갑자기 하르실리온이 나타나서 다들 놀랐나 보네.’
의도하지 않았지만, 하르실리온의 등장으로 기사들은 굳어 있었다. 루인은 그 시간을 이용하기로 마음먹었다.
단장은 그래도 단장의 자리에 오를 자격은 있는지 금세 정신을 차렸다. 그러고는 다른 기사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당장 저놈을 처리해.”
단장의 명령이 떨어지고 나서야 다른 기사들도 경악에서 벗어났다. 그러고는 가장 가까이에 있던 센티넬 한 기가 하르실리온을 공격하기 위해 다가갔다. 아라사에 의해 다리에 손상을 입은 센티넬이었다.
하르실리온의 양손에는 쌍검이 들려 있었다. 베이디안 대륙에 쌍검을 쓰는 자는 거의 없기에 그만큼 낯설었다.
기사는 방심하지 않고 하르실리온의 쌍검을 경계했다.
루인이 익힌 수라타는 전신을 사용할 수 있고, 손에 든 어떤 무기로도 펼칠 수 있는 무예였다. 당연히 쌍검을 들고 쌍검술을 펼칠 수도 있었다.
하르실리온의 쌍검이 교차되며 센티넬을 향해 뻗어 나갔다.
센티넬에 타고 있던 기사는 하르실리온의 공격을 보는 순간 긴장이 탁 풀리는 기분을 느꼈다. 너무 엉성했다.
나이트암을 조종한다는 건 그 실력이 나이트의 경지에 올랐다는 걸 의미했다. 그런데 그런 자의 검술 실력이라고 여기기에는 하르실리온의 공격이 너무 조잡했다.
기사는 긴장이 풀렸지만 애써 마음을 다잡았다. 일부러 약한 모습을 보여 주어 방심을 유도하는 것일 수도 있었다.
기사는 최대한 집중하며 하르실리온의 쌍검을 막았다. 교차되며 들어오고 있기에 교차점을 검으로 막는 순간, 하르실리온의 양쪽 공격은 그대로 막힌다.
기사는 함정을 경계하며 교차점을 막았다. 하르실리온의 공격은 그대로 막혔다.
기사의 얼굴에 비웃음이 떠올랐다.
루인의 쌍검술이 엉성한 건 어쩌면 당연하다. 수라타가 모든 무기를 다룰 수 있다고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가능성이다.
루인은 지금까지 한 번도 쌍검술을 사용하지 않았다. 주로 화살을 쏘거나 단검을 던지고 접근한 적은 맨손 박투로 해결했다.
아무리 수라타를 익혔다 해도 한 번도 해 보지 않은 쌍검술을 능숙하게 해내는 건 불가능하다.
차라리 검을 버리고 상대했다면 결과가 좋았으리라.
루인이 이러한 사실을 몰랐던 게 아니다. 일부러 의도한 결과였다. 센티넬이 하르실리온의 쌍검을 막아 냄으로 인해, 센티넬과 하르실리온은 가장 이상적인 거리가 되었다.
발차기를 하기에.
뒤로 빠져 있던 하르실리온의 오른발이 그 이상적인 간격 속을 아무런 방해 없이 뻗어 나갔다.
그리고, 충돌했다.
쾅!
쇠와 쇠의 격돌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거대한 폭음이 울렸다.
소리뿐만이 아니라 눈으로 보이는 결과 또한 경악스러울 지경이었다.
하르실리온의 발차기는 센티넬의 몸체에 정확하게 명중했다. 맞은 부위는 움푹 들어갔다. 센티넬의 몸체가 허리를 중심으로 직각으로 꺾였다.
앞부분은 그래도 나았다.
등 쪽의 장갑은 완전히 터져 나가 버렸다. 그 찢겨진 공간으로 조각난 쇳덩이들이 튀어나와 허공에 비산했다.
잠시 떠올랐던 센티넬은 그대로 바닥에 떨어졌다. 상체와 하체가 얇은 철판과 몇 가닥의 프레임으로 겨우 붙어 있었다.
움직임은 없었다.
단 한 번의 공격에 센티넬이 박살 난 것이었다.
하르실리온은 분명 우수한 타이탄이지만 지금처럼 엄청난 능력을 가지고 있지는 못했다. 심퍼사이저인 루인의 경지가 마스터 이상으로 올라가면 또 모르겠지만, 나이트에 턱걸이하고 있는 지금의 수준으로는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그럼에도 루인은 경이적인 결과를 만들어 냈다.
윌포스.
막강한 파괴력은 바로 윌포스였다.
루인은 공격에 윌포스를 담을 수 있다. 몸에 담을 수도 있고 손에 든 무기에도 담을 수 있다.
그렇다면, 직접 타고 있는 하르실리온에도 윌포스를 담을 수 있지 않을까?
루인은 4일 전 자신의 생각을 실험해 보았고 하르실리온에도 윌포스를 담을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자신의 본래 몸이 아니기에 그냥 윌포스를 사용하는 것보다 힘도 들고, 그만큼 담을 수 있는 의지도 줄어들었다.
그럼에도 사람의 몸과 하르실리온이라는 차이가 있기에 나타난 결과는 엄청났다. 사용한 루인 스스로가 두려움을 느낄 정도였다.
루인이 이 정도였으니 다른 사람들이 놀라는 건 당연하다.
남은 기사들은 물론 단장마저 놀라서 박살 난 채 쓰러진 센티넬을 바라보았다. 그렇게 그들이 놀라 있는 동안 루인이 움직였다.
루인이 굳이 이런 화려한 장면을 연출한 것은 기사들의 틈을 만들기 위해서였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루인은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단장이 탄 센티넬까지 다가설 수 있었다.
하르실리온이 바로 앞에 다가서서야 단장은 정신을 차렸다. 하지만 그때는 너무 늦은 상황이었다.
하르실리온의 왼팔이 아래에서 위로 빠르게 휘둘러졌다.
콰콰곽. 텅!
약간의 저항이 있었지만 하르실리온의 검은 단장이 탄 센티넬의 왼팔에 그대로 박혔다. 그 덕분에 구동 부분이 박살 나며 자연스레 센티넬의 손도 펴졌다. 손이 펴지며 그 손이 잡고 있던 아라사의 몸도 자연스레 해방되었다.
루인은 떨어지는 아라사의 몸을 오른손으로 받아 내었다.
루인은 빠르게 기사와의 거리를 벌리며 하르에게 말했다.
“하르. 이 사람 전투 끝날 때까지만 이곳에 들여놓고 싶은데 안 될…… 허억! 왜? 왜 그렇게 살기를 띠는 거야?”
하르가 눈꼬리를 올린 채 매서운 말투로 루인을 추궁했다.
“그러니까, 저 여자를 살리려고 나를 부른 거야? 날 보고 싶어서 부른 게 아니고 저 여자 때문에 불러낸 거였어? 난 그것도 모르고. 흐흑!”
하르는 바닥에 주저앉더니 비극의 여배우처럼 흐느끼기 시작했다.
“하르, 앞으로 자주 부를 테니까 그만 화 풀어. 그리고 이 사람이 다친 거, 나 때문에 다친 거야. 나 숨겨 주려고 무리하다가 다친 거야. 그러니까 이번에는 내가 도와줘야 해.”
엄밀히 말하면 루인의 말이 맞는 것은 아니다. 애초에 루인이 도와주지 않았다면, 아라사는 쫓아오는 자들에게만 신경 쓰다가 매복해 있던 센티넬에게 그대로 당했을 것이다.
하지만 완전히 틀린 것도 아니다. 아라사가 루인을 신경 쓰지 않고 도망에 집중했다면, 낮기는 하지만 도망칠 확률도 분명히 존재했다.
언제 울었냐는 듯, 하르가 눈을 가늘게 뜬 채 루인을 보며 말했다.
“확실한 거지? 저 여자랑 아무 사이 아닌 거지? 도움 받았으니까 도와주는 거지?”
“물론.”
루인은 하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제야 하르의 올라갔던 눈꼬리가 내려왔다.
“알았어. 이번 한 번만이다. 다음부터는 다른 년 절대 안 받아들일 거야. 여긴 나와 루인만의 공간이니까.”
“정말 고마워, 하르.”
루인은 하르의 밝은 얼굴을 보며 결심했다.
‘앞으로 웬만하면 하르는 불러내지 말아야지. 너무 피곤해.’
하르실리온의 가슴 앞으로 아라사를 가져다 대자, 그 접하는 부분이 물결치듯 일렁거렸다. 그러고는 루인이 심퍼사이즈할 때와 마찬가지로 아라사의 몸이 루인과 하르가 있는 곳으로 들어왔다.
루인은 하르를 향해 말했다.
“하르, 잠시만 직접 움직이지 않을래? 일단 상처를 치료해야 할 것 같아.”
“움직이는 건 상관없지만 그렇게 되면 파손이 제법 심할 거야. 나 혼자 움직일 경우 발휘할 수 있는 힘은 제한되어 있으니까. 저런 놈들에게 지지는 않겠지만 또 한동안 수리에 집중해야 해.”
“일단 도망쳐. 아마 저들은 너를 따라올 거야. 그리 오래 걸리지 않을 테니까.”
“알았어. 루인이 원한다면 그렇게 할게. 하지만 오래는 안 돼.”
“그래.”
루인과 하르실리온의 유니온이 해제되었다. 하르실리온은 본인의 의지에 따라 움직이기 시작했다.
하르실리온은 도망치기 시작했고 그 뒤를 세 기의 센티넬이 쫓기 시작했다.
하르실리온의 앞쪽에 병사들이 서 있었다. 포위망을 만들기 위해 동원된 병사들이었다. 갑작스런 거인들의 질주에 병사들이 비명을 지르며 길을 만들려 했다.
하지만 달리기 자체가 빨랐기에 완전히 길을 만들지는 못했다. 중간중간 사람들이 남아 있었다.
하르실리온은 그 사람들을 피해 가며 달렸다. 그러느라 속도가 조금 느려졌다.
뒤따르는 센티넬들은 하르실리온과는 반대로 행동했다. 그들은 아래에 있는 병사들의 존재에 신경 쓰지 않았다.
수십 명의 병사들이 자기편 센티넬의 발에 밟혀 터져 죽었다. 그 덕분에(?) 센티넬들의 속도는 느려지지 않았다.
크랄은 뒤늦게 포위망에 합류했다. 한 마리 남은 말을 타고 달려온 것이었다. 하지만 합류하는 순간 말에서 몸을 날릴 수밖에 없었다. 거대한 쇳덩어리가 크랄을 향해 하늘에서 떨어져 내렸기 때문이다. 센티넬의 발이었다.
크랄은 가까스로 센티넬의 발을 피할 수는 있었다. 대신 급하게 피하느라 땅을 굴러야 했다. 게다가 워낙 서두르느라 얼굴부터 땅에 떨어졌다.
고개를 든 크랄은 손으로 얼굴에 묻은 흙을 털어 냈다. 따끔거리는 것이 얼굴에 상처가 생긴 것 같았다.
강철 거인들의 모습이 점점 멀어져 가는 것이 보였다. 타고 왔던 말은 밟혀 죽었고, 다른 말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당장 쫓아갈 방법은 없었다.
크랄은 스스로 고귀하다고 생각하는 자였다. 그런 자신이 이런 꼴을 당하다니. 게다가 그에 대한 대가도 치르기 전에 내빼 버리다니. 절대 용서할 수 없었다.
크랄이 짐승처럼 발악했다.
“으아아아아! 모두 죽여 버린다!”
하르실리온이 달리는 동안 루인은 아라사의 몸을 살폈다. 센티넬과 격돌한 것 때문에 몸 전체가 상해 있었다. 하지만 가장 큰 문제는 역시 옆구리에 박힌 도끼 파편이었다.
빼내야 하는 건 확실한데 그렇게 하면 과다 출혈로 사망할 것 같았다. 무엇보다 이곳에는 변변한 의료 도구는커녕 지혈제 하나 없는 상황이었다.
루인이 도끼 파편을 보며 고민하는데, 아라사의 힘없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루인, 여기가 어디고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묻지 않을게. 역시 비밀이겠지? 그건 그렇고 너의 눈빛을 보니 나를 치료할 방법이 있는 것 같네.”
“있기는 하지만 그건 확신할 수 없어요. 아직 한 번도 해 보지 않은 방법이에요.”
아라사는 빙긋 웃으며 말했다.
“루인, 망설이지 말고 행해라. 그러다 죽는다고 해도 널 원망하진 않는다. 나는 전사다. 맨몸으로 센티넬과 싸웠고 다리에 손상을 입히기까지 했다. 이만하면 만족스럽지 않은가? 만약 상처가 치료되고 다시 도끼를 휘두를 수 있다면 그 또한 만족스러운 일이다.”
말을 하는 것이 힘든지 아라사는 잠시 숨을 몰아쉰 후 이야기를 계속했다.
“만약 너의 망설임 때문에 내 몸이 상하게 된다면, 그러면 치료가 된다고 해도 너를 원망 할 테다. 그러니 루인, 네가 생각하는 치료법을 행해라.”
“아라사. 하지만…….”
“난 너를 믿는다.”
“당신은 사람 보는 눈이 없군요. 무얼 보고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는 저를 믿는다는 겁니까?”
“너의 눈빛.”
루인은 순간 아무런 말도 없이 아라사를 보았다. 그러다 갑자기 실소하며 말했다.
“하하. 아직 밤에 저를 보지 못해서 그럴 겁니다. 치료해 드리죠. 꼭 낫게 해 드리죠. 고작 센티넬이 아니라 베이스암이나 마스터암을 박살 낸 뒤에 제 눈에 대한 감상을 듣고 싶군요.”
“고맙…… 하악.”
루인은 아라사의 몸에 박힌 파편을 한 번에 뽑아냈다. 그러고는 상처가 벌어지지 않도록 양손으로 상처를 감쌌다. 그럼에도 피가 철철 흘러나왔다.
‘해야 한다. 할 수 있다.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루인은 마음속으로 되뇌며 의지를 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