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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탄 로드 1(20화)
chapter 7. 센티넬(2)


여인의 눈이 놀라 커졌다. 얼굴이 꿈틀거리며 변하는 모습은 괴이하면서도 신기한 일이었다.
여인이 믿을 수 없다는 목소리로 질문했다.
“코·로·나·족?”
“정확하게는 인간과의 혼혈입니다.”
루인은 손가락으로 자신의 귀를 가리켰다.
“얼마 전까지 저는 노예였습니다. 우연한 일로 탈출할 수 있었고 지금처럼 얼굴을 바꾸는 방법도 익힐 수 있었죠.”
“확실히 내가 오해했군. 미안하다. 사과한다. 나의 무례를 용서해 다오.”
“아닙니다. 저 역시 당신에 대한 욕심이 조금은 있었으니까요. 그건 그렇고 일단 움직이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기사들은 숲 가까이 다가와 있었다. 여인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서두르지 않고 대형을 맞추어 접근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속도는 제법 빨라서 조금만 더 지체했다가는 포위당할 상황이었다.
루인은 여인의 손을 잡은 다음 기사들의 반대 방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여인은 잠시 당황한 기색을 보였지만 이내 빠르게 발을 놀렸다.
여인이 달리기 시작하자 루인은 여인의 손을 잡고 있던 것을 놓았다. 두 사람은 나란히 달려갔다.
둘의 속도는 비슷했다. 여인은 그런 사실에 놀랍다는 표정으로 루인을 바라보았다.
“굉장히 빨리 달리는군.”
“저랑 같은 속도로 달리는 분께 그런 말을 들을 줄은 몰랐습니다.”
“나는 훈볼트 족이니까. 마법을 사용할 수 없는 대신 신체 능력만큼은 가장 강하게 태어났으니 빠른 건 당연해. 하지만 너는 코로나 족과 인간의 혼혈인데 어떻게 이렇게 빠른 거지? 내가 느끼는 너의 실력은 그리 강하지 않은데 나의 감이 잘못된 건가?”
루인이 빨리 달릴 수 있는 것은 수라타의 빠르게 움직이는 수법 덕분이다.
“잘못되지 않았습니다. 제 실력은 나이트에 겨우 턱걸이한 수준이죠. 이렇게 빨리 움직일 수 있는 건 저만의 비밀입니다. 얼굴을 바꾸는 것과 마찬가지로.”
루인의 얼굴은 어느새 험악한 얼굴로 바뀌어 있었다. 여인은 루인의 얼굴을 본 다음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감추려 하는데 굳이 끄집어내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한참을 달리자 루인의 숨이 차츰 거칠어졌다. 수라타의 수법으로 여인과 대등하게 달리긴 했지만 어느 정도 무리한 건 사실이었다.
반면 여인은 월등한 신체 능력 덕분에 전혀 지치지 않은 상황이었다.
더 이상은 무리라고 생각한 루인이 여인에게 말을 꺼냈다.
“거리도 충분히 벌렸으니 이제 조금 천천히 움직여도 되지 않을까요?”
여인은 루인의 말에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다. 대신 갑자기 제자리에 멈춰 섰다. 그러고는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루인은 서둘러 정지한 후 여인을 바라보았다.
여인이 다급하게 루인에게 소리쳤다.
“도망쳐라. 어서!”
“무슨 말이죠? 어째서 갑자기.”
“토끼몰이 당했다. 뒤가 아니라 앞에 있었군. 아직 완전히 포위되지는 않은 것 같다. 저들이 노리는 것은 나. 내가 이곳에 있다면 굳이 너를 노리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니 당장 저쪽으로 달려가라.”
여인은 그렇게 소리치며 오른쪽 뒤를 가리켰다.
루인은 아무런 느낌을 받지 못했다. 하지만 여인이 자신보다 강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여인의 말을 믿었다. 그렇지만 여인의 지시대로 도망치지는 않았다. 대신 반문했다.
“함께 도망쳐요. 당신의 실력이라면 포위망 한쪽을 뚫고 도망치는 게 어렵지는 않을 거예요. 그리고 제가 당신보다 약하긴 하지만 원거리 공격은 제법 강합니다. 함께 힘을 모으면 충분히 빠져나갈 수 있을 거예요.”
“포위한 게 인간뿐이라면 가능하겠지. 하지만 지금 우리를 포위하려 하는 건 나이트암이다. 우리 둘이 힘을 합친다고 해도 그 강철 거인 하나를 상대하기도 벅차지.”
여인은 진지한 태도로 루인을 보았다. 마치 유언을 말하는 태도였다.
“내 이름은 아라사 운 카라트훈. 너의 호의와 도움에 감사한다. 만약 다시 만나게 된다면 오늘의 은혜는 꼭 갚겠다.”
루인은 아라사가 마지막을 생각한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자, 잠깐. 무슨 말을 하시는 겁니까?”
아라사가 간절한 태도로 소리쳤다.
“당장 도망쳐. 내 일로 네가 죽는 모습을 보고 싶지는 않다.”
“당신의 일만은 아닙니다. 제가 끼어든 가장 큰 이유는 당신이 아니라 슈론토 기사단 때문이니까요.”
“그래도 안 돼. 난 전사다. 저들을 죽이고 저들에게 죽는다고 해도 아무런 아쉬움이 없다. 하지만 넌 아니지 않나? 전사도 아닌 네가 어떻게 싸우겠다는 건가?”
아라사는 분명 루인의 생명을 걱정해서 말을 하고 있었다. 루인은 그런 아라사의 마음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아라사의 말에서 자신을 무시하는 것 같다는 느낌 또한 받았다.
“불쾌하군요. 어째서 제가 전사가 아니라 말하는 거죠? 당신보다 약하다고 해서 그런 대우를 받을 생각은 없습니다.”
“아니, 넌 전사가 아니다. 실력이 문제가 아냐. 우리 부족에서는 너보다 훨씬 약한 자 중에 전사라는 말을 듣는 이도 많았다.”
“그럼 뭐가 문제라는 겁니까?”
“너에게는 각오가 없다.”
“각오?”
“그래. 사람을 죽일 각오!”
그 순간 루인은 아무런 반박을 할 수 없었다.
‘어째서 망설인 거지? 어째서 바로 반박하지 못한 거지?’
의문을 가지는 순간 루인은 답도 알 수 있었다. 아라사의 말대로 루인은 살인을 주저하고 있었다.
세상을 바꾸겠다고, 그로 인해 피가 흘러도 모두 감수하겠다고 생각했지만 속마음은 여전히 피를 보는 것에 주저하고 있었다.
루인이 아무 말도 없이 가만히 있자 여인이 다급하게 소리쳐라.
“얼른 이곳을 떠나라. 더 이상 머뭇거렸다가는 도망치는 것이 여의치 않다.”
희미하게 들려오던 소리가 점점 커져 왔다.
쿵. 쿵. 쿵. 쿵…….
거대한 질량이 움직이는 소리. 소리가 커짐에 따라 발을 딛고 있는 대지가 조금씩 진동하기 시작했다.
억지로 루인의 등을 떠밀려던 아라사의 얼굴에 당혹스러운 표정이 떠올랐다.
“늦었어. 이미 포위망은 완성되었다.”
서둘러 주위를 둘러보던 아라사는 커다란 나무를 보더니 그쪽으로 루인을 끌고 갔다.
그 거대한 나무는 뿌리 부분이 바깥으로 조금 드러나 있었다. 그리고 그 안쪽으로는 작은 공간도 존재했다.
아라사는 루인의 몸을 그 뿌리 안쪽 공간으로 밀어 넣었다. 그러고는 주위에 존재하는 덩굴들을 당겨 와 구멍을 가렸다.
허술하긴 했지만 당장 할 수 있는 조치는 그것이 다였다.
‘전투를 벌이는 척하며 다른 곳으로 이동하면 이곳은 발견되지 않을 거야.’
아라사는 그렇게 생각하며 당당하게 섰다.
우지직. 콰곽.
아름드리나무들이 쓰러지며 푸른빛의 금속 거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여인은 등에 걸어 놓았던 두 개의 그레이트 액스를 양손에 단단히 잡았다.

나이트암은 나이트의 경지에 올라야 조종할 수 있는 탑승형 골렘 병기를 통칭하는 말이다.
때로는 나이트암을 세분하여 센티넬, 베이스암, 마스터암의 세 가지로 나누기도 한다.
이렇게 나누는 기준은 동력으로 사용되는 에테르기움의 등급이다.
기본적으로 나이트암은 B급 에테르기움을 동력으로 사용한다. 하지만 B급 에테르기움은 매장량도 적고 당연히 가격도 비쌀 수밖에 없다.
전쟁의 승패를 가르는 요소가 금력이 된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나이트암은 그 막강한 위력에도 불구하고 비싼 기체 가격과 부담스러운 에테르기움 가격 때문에 쉽게 사용하기에는 많은 부담이 따른다.
이러한 나이트암―기본형이기에 베이스암이라 부른다―을 다운그레이드한 것이 존재한다. 흔히 센티넬이라고 부르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센티넬과 베이스암의 스펙 차이는 굉장히 크다. 힘과 속도, 장갑의 방어력, 모든 것이 나이트암과는 상대가 안 될 정도로 빈약한 것이 센티넬이다.
하지만 그런 센티넬이라고 해도 인간 상대로는 막대한 위력을 발휘한다. 어차피 밟히면 죽는 건 베이스암이나 센티넬이나 마찬가지다.
전장이라면 베이스암이 존재하기에 센티넬의 유용성은 그리 크지 않다. 하지만 전쟁이 아니라 치안 유지의 목적이나 몬스터 사냥이라면 센티넬로도 충분한 효과를 거둘 수 있다.
루인이 프로운을 사냥했을 때 만났던 나이트암도 사실은 센티넬이었다.
그리고 지금 아라사를 포위한 네 기의 나이트암 역시 센티넬이었다.
베이스암에 비해 약한 거지 인간이 센티넬을 상대할 수는 없다. 인간보다 강한 신체 능력을 가진 훈볼트 족이라고 해도 그건 마찬가지다.
센티넬들 중 왼쪽 가슴에 황금 휘장이 그려진 센티넬에서 남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묵직한 중년 남성의 목소리였다.
“얌전히 항복해라. 네가 아무리 훈볼트 족이라고 해도 나이트암을 이길 순 없다. 영주님은 네가 최대한 상하지 않고 돌아오길 바라신다.”
“상하지 않게 보내 줬으면 좋겠군.”
“건방 떨지 마라, 계집. 영주님이 원하는 건 어차피 훈볼트 족의 피를 이은 아이뿐이다. 정 반항한다면 사지를 잘라 버리고 끌고 가겠다. 비용이 좀 들기는 하겠지만 그동안 네년의 목숨 정도는 충분히 붙여 놓을 수 있다.”
“닥치고 덤벼라. 개!”
“건방진! 감히 훈볼트 족이 인간을 모욕한단 말이냐? 네년을 생각해서 말해 주었는데 헛수고였구나. 팔다리 하나 정도는 날아가야 정신을 차릴 년이다.”
아라사는 중년 남성의 말에 비웃음을 지었다.
거리가 있긴 했지만 아라사는 중년 남성의 얼굴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중년 남성의 눈빛에 떠오른 것은 탐욕.
자신의 얼굴이 인간 남성들에게 아름답게 보인다는 것 정도는 아라사도 알고 있었다. 더불어 자제심 부족한 남자들이 아름다운 여자를 보며 어떤 더러운 생각을 하는지도.
중년 남자는 음욕에 가득 찬 눈빛으로 아라사의 전신을 훑고 있었다. 아라사는 온몸에 벌레가 기어 다니는 듯한 불쾌감을 느꼈다.
그런데 그런 눈빛을 보내는 것은 중년 남성뿐만이 아니었다.
아라사를 포위한 다른 기사들 역시 음흉한 눈빛으로 아라사를 보고 있었다. 그중 한 명의 기사가 끈적거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단장님, 너무 흥분하지 마십시오. 그래도 팔다리 없는 병신보다는 멀쩡한 년이 좋지 않습니까? 어차피 영주님이 즐기다 질리면 저희에게 넘어올 텐데요. 크크큭.”
기사의 말에 중년 남성은 흥분을 가라앉히며 말했다.
“이런, 실수할 뻔했군. 계집, 병신 되기 싫으면 얌전히 잡혀라!”
아라사는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역겹군. 네놈들이랑 같은 공기를 마시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토할 것 같다. 잔말 말고 덤벼라. 죽고 싶지 않다면.”
아라사는 당당하게 소리쳤지만 자신에게 승산이 없다는 것을 모르지는 않았다.
‘흥분하면 시야가 좁아지기 마련. 저들의 신경을 모조리 나에게 모아야 한다. 그럼 그 소년은 더욱 안전해지겠지.’
아라사가 기사들을 도발한 것은 루인의 안전을 위해서였다.
그녀는 기사들의 음흉한 시선에 불쾌감을 느꼈을망정 당황하지는 않았다. 남자들의 이런 눈빛은 이전에도 받아 보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위험한 일을 겪을 뻔하기도 했다. 그 덕분에 도망쳐 나올 수 있었지만.
아라사는 슈론토 기사단에 잡힌 후 슈론토의 지하 감옥에 갇혔었다. 원래라면 슈론토의 영주에게 그날 바로 겁탈당했으리라.
하지만 영주에게 급한 일이 생겨 아라사를 찾아오지 않았다. 대신 영주의 아들이라는 놈이 찾아왔다.
아버지 몰래 자신이 먼저 아라사를 건드릴 목적이었다. 떳떳치 않은 일이었기에 심복 한 명만을 데리고 왔다.
지하 감옥에는 마나를 사용할 수 없게 하는 마법 공학품이 설치되어 있었다.
멍청한 영주 아들은 마나를 사용하지 못하니 안전할 거란 착각을 했다.
훈볼트 족은 마나 홀이 인간보다 커서 강한 힘을 가지기도 했지만 근골 자체도 인간보다 강하다.
돼지 같이 살만 찐 영주 아들과 아부 말고는 아무런 능력 없는 아들의 심복이 아라사의 상대가 될 리 없었다.
아라사는 영주 아들을 인질로 삼아 슈론토 성에서 탈출하고 지금까지 도주한 것이었다.
그런 일을 이미 경험했었기에 기사들의 끈적한 눈빛에도 당황하지 않을 수 있었다. 물론 그 저변에는 전사로서의 굳건한 정신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