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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탄 로드 1(19화)
chapter 7. 센티넬(1)


윌포스.
루인은 자신의 의지를 화살에 담았다. 그러고는 시위를 놓았다.
퉁.
활대의 탄력은 그대로 화살을 쏘아 보냈다.
쐐액.
루인의 손을 떠난 화살은 크랄이 있는 곳을 향해 빠르게 날아갔다.
성질을 잔뜩 내며 달리던 크랄은 뒤늦게 화살을 발견했다. 이미 화살과의 거리는 지척이었다. 자신을 향한 공격이라면 그래도 막을 수 있겠지만, 그렇지 않았기에 막기에도 여의치 않았다.
화살은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원래 목표했던 곳에 도달했다.
푹.
화살은 정확하게 말의 이마에 박혔다.
말은 그대로 고꾸라졌다. 한창 질주하던 중이었기에 그 여파는 결코 적지 않았다.
크랄의 실력은 분명 좋았지만 그건 어린 시절부터 고급 교육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가 지금까지 상대한 것은 자신보다 약한 자들이 대부분이었고 그 때문에 위험한 일을 겪은 적도 없었다.
그래서 갑작스런 상황에 제대로 대처하지도 못했다.
나이트의 신체 능력이라면 말이 넘어지는 순간 점프하며 바닥에 안정적으로 착지하는 것도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크랄은 그런 생각을 전혀 하지 못했다.
‘어어’ 하고 그저 놀라 당황했을 뿐이다.
그 결과 허공을 날아 바닥에 그대로 떨어졌다. 그러고는 데굴데굴 몇 바퀴나 구른 뒤에야 멈출 수 있었다.
흙투성이가 된 크랄이 신경질적으로 소리쳤다.
“어떤 새끼야! 당장 그 새끼 잡아!”
하지만 그렇게 소리치는 순간 또 다른 화살 한 대가 날아왔고 화살은 정확하게 말의 머리에 명중했다.

루인은 쫓기는 자가 인간이 아닌 훈볼트 족이라는 것과, 쫓는 자가 크랄이라는 것 때문에 화살을 날렸다.
루인의 목적은 크랄을 방해하는 것. 그러자면 사람을 노리는 것보다는 말을 노리는 것이 훨씬 편하고 확실하다.
사람의 속도로 훈볼트 족을 따라잡는 게 불가능한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니까.
루인이 말을 노린 것에는 아직 살인 경험이 없다는 것 역시 한몫을 했다.
루인은 손에 피 한 방울 묻히지 않고 살 거라는 순진한 생각을 가진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거부감을 가진 것 역시 사실이었다.
윌포스는 집중하는 시간에 따라 그 위력이 달라진다. 그렇기에 빨리 쏘기 위해서는 그만큼 위력을 포기할 수밖에 없다.
두 번째 공격부터 말을 노리는 것은 현명한 판단이라 할 수 있다. 화살을 방어할 수 있는 사람보다 그럴 수 없는 말을 죽이는 것이 적은 힘이 드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처음에는 강한 공격을 할 수도 있었다. 비록 크랄이 검으로 화살을 쳐 내려 한다고 해도 그 정도는 화살이 날아가는 궤도를 바꿔 주는 것으로 해결할 수 있다.
위력은 오우거를 잡은 것으로 충분히 증명된 상태다. 아무리 나이트 중급이라도 오우거보다 강하진 못하다.
그럼에도 굳이 말을 노린 건 살인에 대한 본능적인 거부감이 있었기 때문이다.
루인은 연달아 시위를 당겼다. 게다가 처음처럼 직선으로 날린 게 아니라 궤도를 마구 바꿔 가며 화살을 쏘았다.
루인은 현재 숲 속에 있는 상태라 아직 저들은 루인을 발견하지 못한 상태였다. 그 상황에서 화살이 이곳저곳에서 날아들자 기사들은 루인의 위치를 특정할 수 없었다.
화살은 집요하게 말들만 노렸고 결국 한 마리를 제외한 모든 말들이 사망했다.
루인은 마지막 말을 향해 화살을 날렸다.
거리가 아직 제법 떨어져 있는데다 복장이 같았기에 루인은 기병과 기사를 구분할 수 없었다. 그렇기에 마지막 말을 타고 있는 자가 기사란 것은 알 수 없었다.
루인은 다른 화살들과 마찬가지로 약간의 윌포스를 담아 날렸다. 그 화살은 정확하게 말의 정수리를 노리고 날아갔다.
그런데 기사가 검으로 루인의 화살을 쳐 내려 했다. 28마리의 말이 똑같은 방법으로 당했는데 아무런 방비도 하지 못하면 그건 기사 자격을 의심해 봐야 한다.
그 기사는 크랄처럼 온실 기사가 아니었고, 루인의 화살 궤도에 정확하게 검을 들이밀었다.
‘제법이군. 하지만.’
루인의 화살이 무서운 것은 그 위력도 있지만 궤도를 루인 자신의 의지로 변화시킬 수 있다는 점이다.
검과 충돌하기 직전. 화살은 슬쩍 궤도를 틀어 검을 지나쳤다. 화살은 원래의 목적대로 말의 정수리에 명중하는 듯했다.
하지만 화살이 꽂히기 직전 검이 화살을 쳐 냈다. 기사의 실력이 제법 좋은지 그 짧은 순간 검을 움직여 화살을 막은 것이었다.
만약 루인이 조금 더 신경 써서 윌포스를 담았다면 기사도 막지 못했겠지만, 루인은 말만 죽인다는 생각으로 약하게 윌포스를 담았고 결국 기사가 막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 이후 더 이상의 화살은 날아오지 않았다.
크랄은 얼굴에 화색을 띠며 말을 탄 기사에게 명령했다.
“활을 날린 놈을 잡아 와라!”
하지만 기사는 크랄의 명령에 따르지 않았다.
“훈볼트 년이 저 숲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제 실력으로는 홀로 그년을 상대할 수 없습니다. 활을 날린 놈의 위치를 알 수 없기도 하고요.”
“쳇. 어쩔 수 없지. 함께 움직인다. 가자!”
크랄과 기사들은 기병들과 함께 숲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루인은 화살 29대로 29명을 물 먹였다. 한 달 전에 당한 일을 어느 정도 갚아 준 셈이다. 그럼에도 루인은 속 시원해할 수 없었다. 이유는 목에 닿아 있는 그레이트 액스의 날 때문이었다.
루인은 의아하다는 태도로 질문했다.
“어째서 절 위협하시는 거죠? 제가 당신에게 해가 될 일이라도 했습니까?”
여인은 의심 가득한 눈빛을 한 채 말했다.
“나를 도와준 목적이 무엇이지?”
“허? 어처구니없군요. 고마움을 바라고 도와 드린 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처럼 추궁당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았습니다. 제가 괜한 간섭을 한 것이었다면…….”
루인은 잠시 말을 멈춘 후 불쾌함을 가득 담아 말했다.
“……진심으로! 사과드리죠. 그럼 이만 가 보겠습니다. 다시 마주치는 일은 없었으면 합니다.”
루인의 태도에 여인은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자, 잠깐. 나의 태도가 무례했다는 건 인정한다. 지금 나의 행동이 얼마나 파렴치한 것인지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나는 그대들, 인간을 믿을 수 없다. 너도 알 것이다. 너희 인간들이 우리 이종족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처음에는 친절한 모습으로 다가왔다. 하지만 내가 잠든 틈을 타 나를 핍박하려 했다. 그중에는 지금처럼 나를 도와주는 척하며 나를 노리는 자도 있었다. 너의 도움에 감사한다. 그리고 나의 이런 태도는 정말 미안하다. 이건 분명 나의 진심이다. 그럼에도 나는 너를 믿을 수 없다.”
인간들을 경계해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는데, 그 인간의 모습 때문에 믿을 수 없다니.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냥 어쩔 수 없는 일이라 생각하고 헤어져도 크게 문제는 없다. 하지만 여인이 훈볼트 족이라는 점 때문에 욕심이 생겼다.
훈볼트 족은 최강의 전사 종족. 또한 동시에 최고의 기사 종족이라고도 불린다.
먼 옛날, 나이트암이 등장하지 않고 기사들이 말을 타고 싸우던 시절. 그때의 기사들은 자신의 주군을 위해 목숨마저 바쳤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그 이야기의 진위 여부는 알 수 없지만, 그 이야기 속의 기사 같은 자들이 현재에도 존재하고 있었으니 그게 바로 훈볼트 족이었다.
훈볼트 족이 충성을 맹세할 경우, 그들은 죽는 순간까지 주군을 위해 충성을 바쳤다.
그렇기에 기사들이 여인을 쫓았을 것이다. 훈볼트 족의 충성을 받아 내기 위해. 물론 여인에게 충성을 받는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다.
훈볼트 족은 우직하지만 멍청하지는 않았다. 자신을 핍박하고 강제로 사로잡은 자에게 절대 충성을 바치지 않았다.
하지만 그 훈볼트 족의 피를 이은 아이라면?
귀족들이 가장 원하는 것은 훈볼트 족끼리 관계해 낳은 아이를 얻는 것. 하지만 현실적으로 이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훈볼트 족은 최강의 전사 종족으로 힘과 속도가 월등히 빠른 반면 마법을 사용할 수 없다. 그렇지만 이건 단점이 아니다. 마법을 사용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마법에 걸리지도 않기에.
훈볼트 족을 강제로 세뇌시켜 관계를 가지게 만드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래서 대부분은 훈볼트 족과 인간 사이의 혼혈을 만들어 낸다.
두꺼운 강철 구속구로 훈볼트 족의 몸을 구속시켜 놓은 후 강간하는 방법을 사용한다.
그렇게 태어난 아기는 어렸을 때부터 충성을 바치도록 교육 받는다. 귀족들은 그런 식으로 자신의 명령을 절대적으로 듣는 훈볼트 족 혼혈을 만들어 낸다.
실제로 여인도 그런 이유로 잡혔다. 게다가 아름답기까지 했다. 영주는 여인을 범하여 자신의 아이를 만들 생각이었다.
만약 탈출하지 못했다면 그렇게 아이 낳는 기계가 되어 여인은 삶을 마감했을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노예 중 가장 비싼 가격으로 팔리는 것이 훈볼트 족 노예다. 그만큼 그들의 충성은 막강하다.
루인 역시 그런 훈볼트 족의 충성에 대한 욕심이 없다면 거짓이다. 아주 약간이지만 그런 마음이 있었고, 여인을 돕기로 결정한 것에는 그런 마음도 한몫했다.
사실상 루인의 전투력은 그리 강하지 못하다. 수라타를 익혔고 윌포스를 가지고 있지만 그게 끝이다.
386개의 마나 홀에서 게걸스럽게 마나를 먹어 치우기에, 루인은 프라임 홀에 마나를 쌓을 수 없다. 그러다 보니 신체 능력도 처음 나이트의 경지에 올랐을 때에서 전혀 발전하지 못했다.
실전을 겪으며 전투 능력 자체는 올라갔지만, 기본 신체 능력이 정체되어 있으니 그 한계도 분명히 존재한다.
루인이 하려는 일은 이 세상의 상위 계층들이 매우 싫어할 일이다. 루인의 목숨을 노리는 자가 매우 많을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자신을 지켜 주는 훈볼트 족이 있다면 엄청난 도움이 된다.
‘어떻게 할까? 본모습을 보여 주고 호감을 얻을까? 인간이 아니라는 동질감도 생길 테고, 나를 의심했으니 미안한 마음도 있을 것이다. 그건 결국 마음의 빚. 충성을 받아 내는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나의 정체를 들키는 것은 피해야 할 일이다. 그러니 잘 안 될 경우 이 여인의 목숨을 빼앗아야 할 테지만, 그래도 얻을 수 있는 이익을 생각하면 그 정도는 충분히 감수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루인에게는 윌포스가 있다. 그건 분명 제약이 많은 힘이지만 공격력 하나만큼은 막강하다. 기습이라면 충분히 승산이 있다. 게다가 루인이 여인에게 이길 수 있는 다른 이유가 있기도 했다.
루인은 머릿속으로 계산하며 여인을 바라보았다.
푸른색과 황금색의 오드아이가 루인을 직시하고 있었다. 루인은 그 눈동자를 보며 생각했다.
‘맑다.’
여인의 눈동자는 맑았다. 그리고 순수했다.
루인은 여인의 눈을 보며 참담한 기분을 느꼈다. 너무나 부끄러웠다. 자신과는 너무도 달랐기에.
여인이 루인을 경계하는 건 당연했다. 루인이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는 이유도 있겠지만 더 큰 이유는 따로 있었다.
루인이 목적을 숨기고 있다는 것을 여인이 눈치챈 것이었다. 훈볼트 족을 사냥하는 인간들과 똑같은 눈빛을 하고 있는데 어찌 의심을 하지 않겠는가?
‘나 역시 혐오하던 인간들과 마찬가지였군.’
루인은 머릿속에서 진행되던 계산을 모조리 날려 버렸다. 그러고는 공손한 태도로 여인에게 말했다.
“죄송합니다. 그리고 감사합니다. 당신 덕분에 제가 무슨 잘못을 하고 있는지 깨달았습니다.”
루인의 바뀐 마음을 알아챈 건지 여인은 의아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루인은 계속해서 말했다.
“저 역시 당신에게 충성을 받고 싶다는 헛된 욕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여인은 놀란 어투로 말했다.
“너의 사과, 진심이군. 어떻게 그렇게 갑자기 마음을 바꾼 거지? 세상을 자신의 틀에 맞추는 인간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야.”
“당신 덕분에 제 잘못을 깨달을 수 있었으니까요. 그리고 당신을 욕심내기는 했지만 그렇게 강하게 열망한 것이 아니기도 했고요. 제가 당신을 도운 이유는 당신을 쫓는 자들과 안 좋은 인연이 있어서였습니다. 그리고 당신이 나와 마찬가지로 인간이 아니라는 동질감도 있었고요.”
“무슨 말이지? 인간이 아니라니? 날 또 속이려는 것이냐? 너의 얼굴에서는 마법의 흔적이 느껴지지 않는다.”
루인은 역용술로 얼굴을 바꾸고 있다. 하지만 마법 중에도 얼굴을 바꿀 수 있는 마법이 존재한다.
일루전 페이스(Illusion Face).
일루전 페이스는 트랜스뮤테이션(Transmutation) 계열의 마법이 아니라 팬터즘(Phantasm) 계열의 마법이다.
변이가 아닌 환상.
얼굴 자체가 변하는 것이 아니기에 역용술처럼 원래의 얼굴에 영향을 받지 않는다. 환상이기에 원하는 얼굴을 만들 수 있고 눈동자 색과 머리카락 색을 변화시킬 수도 있다.
하지만 단점이 없는 건 아니다.
일루전 페이스는 환상을 얼굴에 덮어씌우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결국 환상일 뿐. 현실과의 괴리감이 생기게 된다.
일반인은 그 차이를 잘 느낄 수 없다. 하지만 나이트 중급 정도라면 어렴풋이 느낄 수 있고, 상급의 경지에 오른 자라면 그 차이를 확실히 느낄 수 있다.
여인은 나이트 상급의 경지에 오른 실력자였고 일루전 페이스의 마법은 알아볼 수 있었다. 얼마 전에 직접 겪기도 했다.
이전에 여인을 잡으려 했던 자가 일루전 페이스로 얼굴만 바꾼 채 웃으며 여인에게 접근한 것이었다.
루인이 얼굴을 바꾸고 있는 것은 일루전 페이스가 아니라 역용술이다. 역용술은 얼굴 피부 속의 미세한 마나를 조절한 것이기에 일루전 페이스처럼 괴리감이 생기지 않는다.
물론 완전히 자연스러운 것은 아니기에 마스터 정도 되면 알아챌지도 모른다. 하지만 현재 여인의 실력으로는 루인의 모습에서 어색함을 찾을 수 없었다.
그렇기에 여인은 루인의 말을 믿을 수 없었다.
“마법이 아니라 역용술이라 합니다.”
루인은 말을 하며 얼굴에 걸린 역용술을 풀어 버렸다. 그러자 근육이 꿈틀거리며 루인의 얼굴이 본래의 아름다운 모습으로 돌아갔다.